뮤지엄한미 삼청, 개관 기념전 ‘한국사진사 인사이드 아웃 1929~1982’
1929년 첫 개인 사진전~예술매체 인정받은 1982년 미술관 전시까지 다뤄
사진·자료 총 300여점 대거 나와···1880년대 ‘역사적 사진’들도 선뵈
“한국사진사 정립위해 ‘한미사진미술관’의 지난 20년 역량 총동원”

한국사진사 정립을 위한 뮤지엄한미 삼청(옛 한미사진미술관)의 개관 기념 기획전 한국사진사 인사이드 아웃 1929~1982가 열리고 있다. 사진은 개인 사진전을 연 최초의 사진가 정해창의 작품들(1920~1930년대,Gelatinsilverprint). 뮤지엄한미 소장, ⓒ정형식. 뮤지엄한미 제공

사진은 등장 200년이 된 현재 독자적 예술매체로, 현대미술의 한 장르로 자리 잡았다. “기계조작의 결과물”로 치부하던 예술계의 무시, 비아냥을 극복한 것이다. ‘바늘구멍 사진기’인 ‘카메라 옵스큐라’를 거쳐 1820~30년대 니엡스, 다게르 등 선구자들이 사진 역사를 열어젖힌 이후 세계 사진가들이 치열하게 작업하고 사진 미학을 구축한 덕분이다.

조선인이 사진을 접한 것은 기록상 1860년대다. 1880년대에는 서화가이던 김용원·지운영·황철 등이 사진관을 세웠다. 1900년대 초반에는 김규진의 천연당사진관 등이 신문광고를 할 정도에 이르렀다.

최초의 개인 사진전이 1929년 3월 이 땅에서 개최됐다. 정해창(1907~1968)이 서울 광화문빌딩 2층에서 연 ‘예술사진 개인전람회’다. 사진가·평론가인 최봉림(뮤지엄한미 부관장)은 “정해창은 사진을 예술매체로, 자신의 미학적 역량을 개인전이라는 근현대미술의 사회적 형식으로 선보인 한국 최초의 사진가”라며 “한국 사진사에서 본격적인 예술은 이 전시와 더불어 비로소 시작한다”고 밝혔다. 이전에도 전시 등은 있었지만 정해창과 달리 작품 프린트가 남아 있지 않고 작가 이력도 온전하지 않다는 것이다.

한국 사진은 50여년 후인 1982년 변곡점을 맞는다. 당시 덕수궁 석조전의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원로작가 초대전으로 사진가 임응식(1912~2001)의 ‘임응식 회고전’이 열린 것이다. 최 부관장은 “사진이 독자적인 예술매체로, 순수미술의 한 장르로 인정받은 사건”이라고 의미를 부여한다. 이 전시와 함께 사진이 미술관의 전시·소장의 대상이 된 것이다.

한국 사진은 1982년 6월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임응식 회고전이 열리면서 마침내 현대미술의 한 장르로 인정받고 미술관 전시와 소장의 대상이 됐다. 사진은 당시 전시 팸플릿. 뮤지엄한미 제공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지금 한국 사진가들은 국내외의 주목 속에 여느 때보다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이 시점에서 사진계가 이룩한 갖가지 성취의 뿌리, 역사적 토대와 흐름을 살피고 짚어보는 일은 중요하다. 사진사 정립을 위한 치열한 연구·노력은 곧은 성장을 담보하는 대나무의 마디처럼 한국 사진의 튼실한 발전 토대를 만드는 일이다.

그래서 ‘뮤지엄한미 삼청’(서울 삼청동)에서 열리는 기획전 ‘한국사진사 인사이드 아웃, 1929~1982’는 주목할 만하다. 1929년 정해창 개인전부터 1982년 임응식 회고전까지 50여년 동안 한국 사진이 어떤 조건·환경 속에서 발전했는지 새롭게 고찰해 의미가 크다. 사진 200여점, 자료 100여점 등으로 구성된 대규모 기획전으로, 쉽게 마련하기 힘든 보기 드문 사진전이다.

사실 한국사진사를 다루는 대규모 기획전은 여러 이유로 쉽지 않다. 사진사가 명확히 정립되지 않은 데다 격동의 역사 속에서 소장·관리·자료의 부실, 빈티지 프린트의 한계는 물론 아직도 소유권·저작권을 둘러싼 복잡한 문제가 여전해서다. 그런 점에서 미술관 소장품에 개인·기관 소장품들까지 모은 전시는 그 의미를 더한다.

이번 전시는 한미약품을 모기업으로 한 가현문화재단 한미사진미술관이 개관 20주년을 맞아 서울 삼청동에 미술관을 신축하고 ‘뮤지엄한미 삼청’으로 재탄생한 개관 기념전이다. 국내 최초이자 한국 대표의 사진 전문 미술관인 뮤지엄한미 삼청(관장 송영숙·사진가)의 내공, 자부심이 담겼다고 할 수 있다.

전시는 정해창의 작품으로 시작해 먼저 1920~1930년대 사진들을 살펴본다. 회화주의 사진(살롱사진)이 중심이었지만 ‘신흥사진’으로 불린 모더니즘 사진에 대한 사진가들의 관심도 엿볼 수있다. 1930~1940년대는 공모전의 시대라 할 만하다. 사진가들에게 공모전 입상은 사회적 인정, 예술적 승인을 받는 일이었다. 이형록·임응식·김정래·최계복·정도선·구왕삼·정인성 등 당시 각종 공모전 수상작들을 만난다.

사진 위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임응식의 포토그램 습작1 부양(1933, ⓒ임응식사진아카이브), 이형록의 전원(1934, ⓒ이명민), 임석제의 반출(1948, ⓒ청암아카이브). 뮤지엄한미 소장

해방과 남북 분단, 한국전쟁은 여느 분야처럼 사진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극단적 이념 대결과 전쟁 전후의 혼란 속에서 사진계는 기존 회화주의를 비판하며 현실의 객관적 기록성을 강조하는 리얼리즘이 대세를 이룬다. 르포르타주(르포)도 부상했다. 사회의 부조리, 전쟁, 노동현장, 농업에서 산업사회로의 전환 조짐 등 있는 그대로의 현실·현장을 담아내는 것이다. ‘여수·순천사건’(여순사건)을 다룬 이경모, 전쟁터나 전쟁에 따른 고단한 삶을 기록한 임응식·이명동·구왕삼·임석제·임인식 등의 작품은 당시 사진계를 잘 보여준다.

구왕삼의 작품(1950년대, 동강사진박물관 소장, ⓒ구경훈, 위 사진)과 임인식의 6.25전쟁-군번없는 학도병(1950, 청암아카이브 소장, ⓒ청암아카이브). 뮤지엄한미 제공
이해선의 명암 (1950년대, 개인소장, ⓒ이길주, 위 사진)과 이해문의 제일보(1957, 개인소장, ⓒ이성주). 뮤지엄한미 제공

1950~1960년대 해외 공모전들도 사진사에 영향을 준 제도적 조건의 하나다. 사진가들은 일본은 물론 미국·프랑스·영국 등의 해외 공모전에 적극 참여했다. 국내 공모전 심사의 불신, 문화 선진국에 대한 선망 등에 따른 것이다. 전시장에는 국내 사진가의 최초 해외 공모전 입상(1952년 제1회 도쿄국제사진살롱)으로 알려진 임응식의 ‘병아리’를 비롯해 김한용·박영달·이해문·한영수·배상하·최민식 등의 작품과 관련 출판물 자료가 선보이고 있다.

전시는 이어 ‘인간가족’전(1957년)과 긍정·부정적 평가가 공존하는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 등의 영향을 살핀다. 신한국·김종헌·김테레사·한정식·홍순태·정진필·배동준·육명심·차용부 등의 작품을 만날 수있다. 여기에 리얼리즘의 가치를 인정하면서도 자신들의 작업방식을 고민·시도한 ‘싸롱아루스’와 ‘현대사진연구회’의 이상규·김형오·황규태 등의 작품들도 선보인다. ‘인간가족’은 뉴욕 현대미술관의 에드워드 스타이컨이 기획한 세계 순회전의 하나로 한국을 찾아 42만명의 관람객을 모은 것으로 유명하다.

 

황규태의 빅 브라더(1968, 몽타주, 작가소장, ⓒ황규태, 왼쪽 사진)와 김종헌의 격정(1965, 개인소장, ⓒ김선미). 뮤지엄한미 제공
강운구의 전라북도 장수군 장수면 수분리(1973, 뮤지엄한미소장, ⓒ강운구, 왼쪽 사진)와 홍순태의 갈치 (1971, 개인소장, ⓒ홍성희). 뮤지엄한미 제공
육명심의 사별(1974, 작가소장 ⓒ육명심, 왼쪽 사진)과 차용부의 빙점에서 만난 아이들(연작)(1978, 작가소장, ⓒ차용부). 뮤지엄한미 제공


1960~1970년대가 되면 사진가들은 공모전을 넘어 개인전, 출판 작업에 활발하게 나선다. 주명덕의 ‘홀트씨 고아원’, 차용부의 ‘빙점에서 만난 아이들’ 등을 비롯해 서순삼·이해선·전몽각·강운구 등의 작품이 관람객을 맞는다. 전통문화에 대한 민족주의적 인식을 잘 보여주는 고건축물·유적·명소를 촬영한 작품들이 쏟아진 것도 이 시기다.

전시장 한쪽에는 기획전과 별개로 역사적 사진들이 나와 있어 관심을 가질 만하다. 수장고와 접해 마련된 전시공간에서는 황철의 1880년대 사진, 고종·흥선대원군 초상사진, 최초의 여성사진가로 알려진 이홍경의 작품 등이 선보이고 있다.

관람객은 이번 기획전을 통해 한국 사진에 대한 이해를 높이는 것은 물론 1920년대 이후 근현대의 다양한 장면들을 생생하게 접할 수있다. 사진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송영숙 관장은 “한국 사진사 정립을 위한 소중한 기회라는 책임감으로 이번 전시에 지난 20년의 역량을 총동원했다”며 “전시 성과를 사진계, 문화계가 공유하기를 기대한다”고 밝혔다. 전시와 연계한 세미나도 마련돼 2월 11일에는 ‘미술관·박물관의 사진 컬렉션과 사진의 진본성’을 주제로 제2차 세미나가 열린다.

뮤지엄한미 삼청은 소장품(2만여점) 보존을 위해 국내 처음으로 세계 최고 수준의 저온·냉장 수장고도 갖췄다. 또 복합문화공간으로 사진은 물론 설치와 영상·사운드 전시도 수용가능하며, 관람객 편의시설도 마련했다. ‘비움의 구축’이란 건축철학으로 유명한 원로건축가 민현식 대표(기오헌 건축사사무소)가 설계한 미술관은 개관과 더불어 건축적으로도 큰 관심을 모으고 있다. 전시는 4월16일까지.

한국 최초이자 대표 사진전문 미술관인 한미사진미술관이 뮤지엄한미 삼청으로 거듭났다. 사진 왼쪽은 신축 개관한 뮤지엄한미 삼청전경(ⓒ김재경)이다. 오른쪽은 개관기념 기획전이 열리고 있는 전시장 일부 모습. 도재기기자
개관기념 기획전이 열리고 있는 뮤지엄한미 삼청의 전시장 일부 모습. 도재기기자

경향신문 / 도재기 기자 jaekee@kyunghyang.com

옛 삶의 원형을 간직한 이를 정직하게 담아 낸 육명심의 '백민'




사진가 육명심(陸明心)선생의 사진집 『백민』이 열화당에서 재출간됐다.

2011년 발행된『백민』사진집에서 사진이 일부 추가 되거나 교체되어, 새로운 판형의 디자인으로 나온 것이다.

윤세영씨의 글 "이 땅의 사람들, 백민으로의 귀환"을 영문으로도 수록했다.


사진가 육명심은 ‘예술가의 초상’ 연작을 마무리할 즈음인 1970년대말 ‘백민(白民)’ 연작을 시작했다.

예술가들과 밀착해 작업하며 그들 역시 특별한 사람이 아닌 평범한 ‘인간’으로 보였고,

자연스레 이 땅의 사람들 중 가장 소박하고 진솔한 민초들을 제대로 기록해야겠다 다짐한 것이다.

이는 훗날 ‘백민’과 함께 삼부작으로 불리는 ‘장승’ ‘검은 모살뜸’ 연작으로 이어진다.


모두 낮은 곳에서 한국인의 정서를 지탱하는 기층민들의 얼굴이 담겨 있지만,

‘백민’은 삼베나 모시옷 차림의 촌로, 박수와 무당ㆍ사찰에 기거하는 스님ㆍ아기를 업은 아낙네ㆍ

무뚝뚝하게 앉은 노부부 등  우리 옛 삶의 원형을 간직하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정직하게 보여준다.

무엇보다 1980년대의 한국은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로 변화하는 시기였기 때문에

‘백민’ 시리즈는 수백 년간 이어온 전통적인 농경사회 마지막 모습의 증거가 되는 소중한 기록이다.

사진가 육명심선생의 사진 속 인물 특징은 정면성이다.

카메라에 무심한 듯 하면서도 시선을 거두지 않고 있는 할머니와의 눈 맞춤은

그 후 사진가가 카메라 앞에 선 인물과 정면으로 마주하면서 ‘라포(rapport)’를 형성하는 작업으로 전개된다.

여기에서 정면성은 단순한 눈 맞춤(eye contact)에 그치지 않는 내면과의 소통을 의미하고,

그 사진을 바라보는 관람객 또는 독자와의 눈 맞춤으로 확장된다.

다른 하나는, 인물을 존재케 하는 현실공간에 중점을 두고 시간과 함께 주위 환경과 동화된 인물을 보여준다.

자신의 집 대청마루에 앉아 있는 것처럼 편안한 할머니와 고목의 조화는 마치 일체를 이룬 듯 자연스럽다.

또한 ‘백민’ 연작에서 자주 나타나는 영적이고 신비로운, 무속적이고 토착종교적인 분위기가 이 사진에도 감지된다.

그리고, 이번 책에 새로 추가된 사진들에는 정면성에서 벗어난 사진들이 꽤 많다.

정면성이 깨진 사진을 의도적으로 함께 섞어 놓아, 시선이 어긋난 인물들과도 다층적 교감을 시도한다.

'백민'을 재출간하는 육명심 선생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농경사회의 마지막 세대다.

지난날 원시인들이 바위에 암각화를 남기는 심정으로 우리 시대 사람들을 사진으로 담았다”

육명심 사진집 I 백민 I 열화당 I 2019년 10월 20일 I 180쪽 I 정가 90,000원






지난 18일 군위장에서 포항의 사진인들을 여럿 만났다.
지난 십월 "사진의 섬 송도" 호텔 아트페어 때 만난 분들이다.
‘경북 삶 사진연구회’의 정남호회장과 진영대, 박성두씨 일행이었다.
처음엔 잘 기억나지 않았으나 이야기를 해보니, 그 때 뵌 적이 있었다.





다들 카메라를 두 대식 메고 있기에, 평소의 궁금증도 물어 보았다.
“요즘은 디지털시대라 흑백과 컬러를 같이 쓸 수 있는데,
굳이 힘들게 두 대씩이나 메고 다니는 이유가 뭡니꺼?”했더니,
렌즈 갈아 끼우기 귀찮아 그런다는 것이다.






카메라 많이 메고 다니던 분이라면, 지금은 전설이 되어버린 홍순태선생이 계셨다.
필름 종류별로 대 여섯 대를 주렁주렁 훈장처럼 메 달고 다니시던 모습이 아직도 머리에 선하다.
옆 카메라와 부딪힐까 걱정도 되었는데, 좌우지간 사진도 많이 찍었고, 전시도 많이 하셨다.
역사가 된 좋은 사진도 있지만, 나머지 사진들은 다 어쨌는지 모르겠다.






선생께서는 세계각지를 열심히 돌아다녔으나, 그만 고산병에 걸려 고생하다 운명하신 것이다.
후반기에는 동영상 카메라까지 갖고 다니셨는데, 카메라 무게에 골병들지 않았을까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와는 반대로 육명심, 한정식선생은 한 대의 카메라로 없는 듯 작업했다.





한국 사진계를 좌지우지했던 삼 교수 중에 먼저 떠난 분도 홍교수였고,
사진 평가도 두 선생보다 덜 되었지만, 후세에는 어떻게 평가될지 모르겠다.
결국은 붓에 불과한 카메라보다 생각이 먼저라는 것이다.






나도 예전에는 일거리용 카메라와 흑백 필름 카메라를
두 대씩 갖고 다닌 적도 있었지만, 여간 불편하지 않았다.
요즘이야 콤펙트 카메라 하나만 주머니에 쏙 넣고 다니니, 너무 자유롭다.
상업용만 아니라면, 사진의 질도 전지 프린트를 해도 전혀 하자가 없다.
상대에게 위화감 주는 기관총보다 손바닥에 쏙 들어가는 권총이 좋다는 생각이다.






장에서 사진인을 만났더니, 장터 이야기가 아니라 카메라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군위장과 영덕장으로 이틀 동안 싸 돌아다녔는데,
요즘 다니는 정영신씨의 장터순례는 사진 찍는 일보다 이야기 듣는데, 더 많은 시간을 보낸다.

날씨가 쌀쌀해지니, 군데 군데 모닥불도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 지역 문화유적지도 꼼꼼히 돌아보는데, 군위하면 석굴에 안치된 ‘마애삼존불’과
‘삼국유사’를 저술한 일연스님이 계셨던 ‘인각사’가 아니던가?
그리고 영덕에는 창수면에 있는 ‘장육사’가 인상 깊었다.
눈여겨 볼 곳은 대웅전과 그 안에 안치된 건칠보살좌상과 영산회상도였다.






그런데, 영덕까지 가서 영덕대게를 맛보지 못하다니...
“에라이~불쌍한 것들”

사진, 글 / 조문호

















사진 이미지 홍수 속에 사는 요즘, 사진에 대하여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한다.
예술사진이란 이름을 달고 별의 별 사진들이 전시장을 메우지만,
작가의 의도만 전달되면 다 통용되는 세상이다.

어떤 이들은 무차별 남의 사진을 웹에서 퍼 날라 쓰기도 하고,
어떤 사진가는 포토샵으로 이미지를 변형시키기를 밥먹듯이 한다.
사진의 사실성보다 사진가의 표현이 더 중요한 시대에 산다.






요즘 육명심 선생의 ‘이산가족’ 사진집출판에 대하여 사진계에서 말들이 많다.
육명심 선생이야 말로 우리나라의 대표적 사진가로 존경해 온 사진가가 아니던가.
‘백민’, ‘장승’ 같은 일련의 사진들은 우리민족의 정체성을 보여 준 훌륭한 작업이었다.
그러한 분이 왈가불가 사진인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자체가 불편하기 그지없다.




 


문제는 사진집에 실린 사진이 본인이 찍은 사진은 일부이고,

다수의 사진이 티브이 화면에 방영된 장면을 촬영했다는데 있다.
문제의 그 사진집을 보지는 못했지만, 곽윤섭기자 글에 의하면 노욕이란 생각부터 들었다.
이 일은 육명심선생께서도 충분히 논란을 예상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논쟁에 대한 관심은 효과적인 책 판매로 이어질 것이고, 다시 한 번 세상에 드러낼 수 있는 기회였을 것이다.
무엇보다 원로사진가로서 기존 사진 관념을 파괴하는 젊은 사진가들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점도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문제 삼는 사진가들도 무차별한 지탄을 자제하고, 선생의 의도도 한 번 새겨 볼 필요가 있겠다. 

아무쪼록 선생의 이름에 누가 되지 않는 사진집으로 남았으면 좋겠다.






난, 작품사진을 찍는 작가가 아니고, 세상을 기록하는 사진가다.
좋은 사진이란 사진 자체가 갖고 있는 내용이지, 카메라 앵글이나 기술적인 문제는 둘째로 친다.
그래서 찍은 사진을 사진 일기처럼 모조리 블로그에 올려 왔다.
어떤 이들은 좋은 사진만 올리라는 충고도 하지만, 좋은 사진을 도대체 누가 구분 한단 말인가?
그 것은 보는 사람의 몫일 뿐이고, 난 그냥 기록으로 남길 뿐이다.






특히 내가 좋아하는 사진은  우리가 태어나기 이전의 기록사진이다.
대부분 해방 직후나 한국전쟁 때 찍은 사진으로, 외국선교사나 외국 기자들에 의해 찍힌 사진들이다.
찍은 이의 이름도 남아있지 않은 귀한 사진을 만나면 가슴이 벌렁거린다.
역사로 남은 글보다 한 장의 사진이 주는 감이 훨씬 강하기 때문이다.






지난 달, 우연히 문경의 ‘옛길 박물관’을 구경 간 적 있었다.
가장 눈길을 끈 것은 벽에 붙어 있는 오래된 장터사진 몇 장 이었다.
여지 것 오래된 장터사진이라고는 30여 년 전에 찍은 정영신씨의 사진이 고작이었지만,
가끔 인터넷에 떠도는 일세기에 가까운 오래된 장터사진을 만나면 반갑기 그지없다,


그런데, ‘옛길 박물관‘에 전시된 사진들은 모두 처음 보는 사진이었다.
소등에다 장작을 가득 쌓은 사진이나 소달구지 행렬에서, 그 시절 생활상을 엿볼 수 있었다.
사진 상태는 좋지 않았지만, 그런 건 둘째 문제였다.
이 보다 더 소중한 장터역사가 어디 있겠는가?






위의 사진은 '옛길 박물관'에 전시된 사진이고, 마지막 사진은 1978년 동아일보사에서 발행한

‘사진으로 보는 한국백년’에 실린 사진으로, 1925년 무렵의 마포나루 풍경이다.

인천으로부터 각종 해산물을 실은 배들이 오던 한강의 옛 모습이 정겹기 그지없다.

사진은 세월에 숙성되어야 제 맛이 난다.


글 / 조문호





















‘동강국제사진제’가 탄생한지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17회를 맞았다.


강원도 정선에 집이 있는 덕에 사진제가 열리는 여름이면 오며 가며 빠지지 않고 관람하는 호사를 누려왔다.

개막식은 못 들린 때가 더 많았으나, 공교롭게도 참석했던 두 차례나 비가 왔다는 사실도 특이하다.



    

 

동강사진제는 영월 사진박물관 건립을 추진한 다큐멘터리 사진가 윤주영씨의 공로가 크다.

강원도지사였던 김진선씨의 도움으로 어렵사리 성사되었는데, 음엔 다큐멘터리사진축제로 시작되었으나,

김승곤씨에서 김영수, 이재구씨로 운영위원장이 바뀌면서 그 구분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올해 동강국제사진제의 핵심은 인간성 회복이 아닌가 생각된다.

동강사진상을 수상한 황규태선생의 묵시록 그 이후전은 인간성을 상실한 현실에 대한 문명비판적 작품이었다.

오늘을 돌아보며, 사람답게 사는 방법에 고민하게 했다.

사랑의 시대라는 국제 주제전은 사랑이 더 이상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는 내용도 담고 있었다.



동강사진상 수상자전, 황규태, Usherette


 

현대사진의 경향을 보여주는 국제 주제전은 10개국 13명의 사진가가 참여했다,

특유의 시적 표현력을 보인 미국 사진가 알렉 소스의 초기작인 사랑을 찾아서와 리처드 레날디의 낯선이와의 접촉’,

이탈리아 파올로 벤츄라의 여행가방 속의 남자 2’야나 로마노바의 '기다림'등이 돋보였다.



국제주제전, 야나 로마노바, 기다림


 

또한, 전 세계 사진작가들을 대상으로 공모한 국제 공모전 '올해의 작가'는 캐나다의 천 화 캐서린 동이 선정되었다.

돌아가신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생전에 어머니와 친하게 지냈던 인물을 찾아다니며 자신의 모습과 함께 기록했다.



국제공모전- 올해의 작가상, 천 화 캐서린 동, 어머니

    

 

그리고 동강국제사진제의 또 하나 볼거리는 영월군의 주요 거리를 갤러리로 변신시키는 '거리 설치전'이다.

이는 공공미술 개념의 전시로 거리의 벽이나 계단에 설치되는데,

올해는 꿈과 희망의 영월이라는 주제로 단종과 정순왕후를 주인공으로 하고 있었다.



거리설치전, 송석우, 장릉 정자각

    


이번에 어렵사리 개막식에 참석한 것도 황규태 선생의 수상을 축하하기 위해서인데,

수상전을 돌아보며 선생의 저력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운 선생께서 국내에서 사진 상 한 번 받은 적이 없다는 점이 믿기지 않았다.

국내외적으로 알려진 유명세나 작품 가격 형성도 만만찮다.

우리나라 사진사에 끼친 영향도 무시하지 못하지만, 꾸준히 문제작을 보여주지 않았던가?

불공정하고 편파적인 사진상의 실체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다.



전시장의 황규태선생

 


먼저 우리나라 사진상의 선례부터 한 번 돌아보자.

숱한 잡음을 일으키다 없어져버린 '최민식사진상'은 포토포트폴리오 심사로 결정했으니, 더 이상 거론할 필요조차 없다.

지금은 없어져 유명무실한 상이되었지만, 그 당시 유명세 위주로 준 대표적인 상이 현대칼라에서 시상한 현대문화사진상

뒤 따라 ‘사진예술에서 시상한 이명동사진상을 꼽을 수 있겠다.

지금은 대한사협의 '이해선사진상', ‘대한항공조양호가 주는 '일우사진상', 다큐멘터리 사진가들의 모임에서 주는

온빛사진상등 여러 사진상이 있으나, 당시로서는 현대문화사진상’과 그뒤에 생긴 이명동사진상’이 주요 사진상이었.

문제는 현대문화사진상이나 이명동사진상의 역대 수상자를 보면 마치 순번을 정해 놓은 듯 비슷 비슷하게 받았다는 사실이다.

중견작가는 끼일 수도 없을 정도로 누군가 조종하는 막강한 힘이 느껴지는 그런 사진상이었다.


    

 



그러나 ‘동강사진상은 좀 달랐다. 처음부터 원로보다 중견작가 위주로 주었는데,

눈여겨 볼 것은 공교롭게도 육명심선생 직계제자인 최광호씨와 이갑철씨가 1-2회 수상자로 결정되었다는 점이다.

그 많은 작가 중에 두 사람이 먼저 발탁된 것이 우연치고는 좀 그랬다.

사진이 좋아 그렇겠지!”라고 판단하기엔 미심쩍은 부분도 있었다.



 


그리고 3-4회는 갑자기 원로인 김기찬씨와 최민식씨로 수상 세대가 바뀐 것이다.

두 분 다 충분히 받고도 남을 분이지만, 갑자기 원로 위주의 수상으로 돌아가는 것은 아닌지 우려했으나, 그렇지는 않았다.

5회부터 성남훈, 김아타, 강홍구, 이상일, 강용석, 오형근, 노순택, 이정진, 구본창, 정주하, 김옥선, 정동석씨가 차례로 받아

몇몇 사람이 좌지우지한 예전의 사진상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보기로는 함량미달의 작가도 더러있었지만, 딱 부러지게 자격 규정해둔 것도 없으니 시비 걸 수 없었다.

누가 심사를 해도 가까운 분을 주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이겠으나, 수상에 대한 뚜렷한 명분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더 아쉬운 것은 힘을 실어주어야 할 신진작가가 없었다는 점이었다.

지금은 신진작가도 아니지만, 그나마 노순택씨 정도로 위안할 수 있겠다.



 


그런데, 갑자기 원로사진가 황규태 선생께서 받게되어 좀 의아 했는데,

행여 뒷방에 계신 원로사진가들이 욕심 내지 않을까 염려되어서다.

물론, 황규태 선생처럼 눈부신 성과를 보이는 현역이라면 쌍수로 환영하겠지만,

이제 관록으로 주는 상으로 돌아가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상이란 그때 그때의 문제 작가에게 주어져 창작활동을 돕는 상이 되어야 하는 것은 두 말할 필요가 없다.



 


개막식에는 만나기 껄끄로운 사진가들이 많아 맨 뒷자리 구석에 혼자 앉았는데, 갑자기 육명심선생께서 옆자리로 오신 것이다.

모처럼 만나 뵈어 반갑기는 했으나, 최민식사진상의 문제점을 까발린 죄로 뵐 면목이 없어 만나뵙기 꺼렸던 것도 사실이다.

그 사건에 직계제자인 최광호씨가 수상자로 개입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런 저런 말씀을 듣고 있는 중에 그만 시상식이 끝나버린 것이다.

다들 개막식 테이프 커팅을 위에 앞으로 나가고 있어 황급히 일어나야 했다.

황규태선생 수상 모습을 촬영하기 위해 기다렸으나, 그만 놓쳐버린 것이다.



 


그런데, 개막식이 끝나고 커피숍에서 만난 황규태선생께서 상금을 주최 측에 기증하셨다는 뜻밖의 말씀을 하셨다.

물론 사진계 발전을 위해 내 놓은 선생의 뜻은 높이 사겠으나,

오래 전 김아타씨가 상금을 내 놓아 젊은 사진가들에게 욕먹은 일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어렵게 작업하는 후배 사진가들에게 부담 주는 그런 선례를 남겨서는 안 된다는 것이 당시 여론이었다.

차라리 가난한 후배들을 위해 다큐멘터리사진가들이 운영하는 온빛 사진상’ 같은 곳에 기증해,

다큐멘터리 사진가들에게 조금이나마 혜택을 주는 것이 훨씬 빛날 텐데 말이다.

문제는 주최 측인 영월군에서 은근히 바라게 되면, 심사위원도 가난한 작가보다 돈 많은 작가를 선호할 수 있다는 점이다.

    


 



한 예로 몇 년 전의 일이다.

잘 알고 지내는 '동강국제사진제'의 운영위원 한 분으로 부터 상을 받게 되면 상금을 주최 측에 기증하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어이없는 제안이었다. 가난한 나로서는 명예 따위야 아무 소용없는데, 상금이 없다면 구린내 나는 상을 받을 하등의 이유가 없는 것이다.

결국 받지 못해 없던 일이 되고 말았지만, 그 소리를 들으며 운영위원들이 주최 측의 사주를 받거나 눈치를 본다는 것을 짐작한 것이다.


    

 


그리고 '동강국제사진제'의 운영해 대해 한 번 짚어보자.

수상자전이나 주제전 등의 본 전시는 발전해 가고 있으나, 강원도사진가전은 이제 고려해 볼 전시다.

국제전에 걸맞지 않는 구태한 전시를 한 번도 빼먹지 않고 반복한다는 것이 납득되지 않았다.

과연 강원도에 내놓을 만한 작가가 몇이나 되겠는가?

무슨 뚜렷한 주제도 없이 마치 아마추어 동아리 전 같은 전시로 국제전에 티를 남긴다면 하지 않는 것만 못하다.

차라리 전국의 신진 작가들이 참여할 수 있는 새로운 기획전을 마련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강원도에 적을 두고 있으면서 이런 이야기를 하게 되면 결국 나만 욕먹지만어쩔 수 없다.

사진판이 잘 못 돌아가도 다들 입 다물고 눈치만 보고 있으니 말이다.

제발 젊은 후배 사진가들에게 더러운 것은 물려주지 말아야 할 것 아닌가?




    


지인의 말처럼, 철부지고 바보.

철부지는 겁이 없고, 바보는 곁눈질 않는다.

 

사진, / 조문호









동강사진상 수상자전, 황규태,  '묵시록 그 이후' 전시장


제17회 동강국제시진제 도록 표지








 

 


전시장에서 웃고 있는 차장섭교수 -신창섭 사진-



지난 18, 아내 정영신의 장터사진전전시 일정 잡으려 인사동에 나갔다.

그동안 춘천전시를 비롯한 일들이 많아, 오랜만의 외출이었다.

우선 인사동 초입의 가나아트스페이스부터 들렸다.

지난 주 한정식선생으로부터 차장섭씨 전시에 오라는 연락은 받았으나,

춘천 전시 오프닝과 겹쳐 참석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전시장에 들어가니 뜻밖에도 육명심선생이 계셨다.

뵌 지가 오래되어 너무 반가웠는데, 안색이 더 좋아지신 것 같았다.

특유의 잔잔한 웃음을 흘리시며,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렸던 초대전을

말씀 하셨다. 6개월 간 이어진 대장정의 전시를 성공리에 마무리했다는 것이다.

틈틈이 대중교통을 이용해 다니시느라 힘드셨지만, 큰 보람을 느끼신 것 같았다.

 

이야기 도중 전시된 사진은 누가 프린트 했습니꺼?라고 여쭈었더니,

대전에 있는 제자 조인상씨가 했다는 것이다. 그 제자도 일가견이 있는 프로인데,

한 번 맡기면 일체 간섭 않는다는 것이다. 사진 선정에서부터 모든 것을 맡겼다는 것이다.

하기야! 그 많은 작품을 같이 하지 않을 밖에야, 감 놓아라 콩 놓아라 하면 될 일도 안 될 것이다.

그만큼 제자를 믿으니 가능했는데, 좀 더 눌렀으면 하는 아쉬움은 비록 나만의 생각은 아니었다.

 

차장섭씨 사진을 제대로 보지도 못했는데, 이런 저런 이야기 나누다보니 금방 시간이 흘렀다.

약속 시간이 지나 일어서려는데, 차장섭씨가 한옥의 벽”(열화당) 사진집을 한 권 주었다.

슬쩍 나오려다 들킨 것 같은 민망함을 느꼈으나, 지갑이 비어 고맙기 그지없었다.

 

그런데, 밤늦게 돌아와 사진집을 꼼꼼히 살펴보다 깜짝 놀란 것이다.

우리 한옥의 아름다움은 익히 보아왔지만, 벽의 공간구성이나 선들이 너무 멋졌다.

10여년 동안 전국 고택400여 곳을 돌아다니며 찾아 낸 대단한 작업이었다.


자유분방한 벽면의 면 분활에서 한옥의 또 다른 아름다움을 찾은 것이다.

서까래나 대들보, 문틀과 문지방들이 곧고 똑 같은 것이 하나도 없었는데,

비대칭의 균형이 주는 긴장감과 그 조화가 일품이었다.

 

83일부터 23일까지 서촌의 건축갤러리 온그라운드에서 재 전시된다니,

다시 한 번 작품들을 살펴 볼 작정이다.

 

사진 : 정영신, 조문호 / 글 : 조문호











































내가 우리나라 사진가에서 최고로 치는 분이 육명심선생이다.

육명심 하면 떠오르는 건, ‘백민’과 ‘장승’시리즈다.
우리민족의 정체성이 담긴 사진들이기 때문이다.
그 뒤 '문인의 초상', ‘검은 모살뜸’, ‘티벳’등을 찍은 작품도 있으나,
처음의, 그 강한 느낌을 앞지를 수 없었다.

그런데 의외의 사진으로, 또 한 번 놀라게 한 것이다.
1966년와 70년 사이에 찍었던 “인상(印象)사진”이 바로 그 것이다.
‘영상사진’이란 이름으로 펴낸, 일련의 사진에서 또 다른 선구자적 기질을 보인 것이다.
당시는 리얼리즘사진과 살롱사진이 양분되어 있을 때라, 다들 거기에 메 달려 있을 때다.
선생은 그걸 극복하기 위해 세계사진사에 파고들어 대상을 다르게 보는 방법을 연구한 것이다.
동양적 세계관에 비롯한 조형적 사진미학을 찾은 것이다.

사실, 선생의 부친께서 스님이셨지만, 내가 볼 땐 선생도 중 팔자를 타고 났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선생의 몸에 베인 불교사상이 노장사상으로 이어졌을 게다.
그 사상의 중심이 바로 비움(空) 아니던가? 바로 ‘마음의 여백’에 기초해 작업한 것이다.
빈 공간과 배경 여백의 공간에 대한 관조적 태도는 동양적 감수성이 물씬 묻어나게 했다.
사진에 여러가지 표현형식이 있지만, 선생의 카메라아이는 독보적이었다.

선생께서 오는 11일부터 6개월에 걸쳐, 과천 ‘국립현대미술관’ 초대전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200여점이 전시된다고 했으나, 아직 어떤 사진들이 걸릴지는 잘 모르겠다.
아마 선생의 전 사진세계가 골고루 조명될 것으로 생각된다.
개막식에 찾아뵙고 축하드리려 했으나, 아쉽게도 그 날은 중요한 약속이 겹쳤다.
‘작가와의 대화’가 있을 때나 찾아뵙고, 선생의 사진세계에 푹 빠지련다.


글 / 조문호

사진들은 육명심 ‘영상사진’ 작품집에서 옮겼다.

















사진가 전민조씨의 ‘사진이 모든 것을 말해주었다’ ‘대한민국역사박물관’ 기증전 개막식이

지난9일 오후3시, 서울 ‘대한민국역사박물관’강의실에서 성황리에 열렸다.

전민조씨 내외를 비롯하여 김왕식 관장, 원로사진가 정범태, 강운구, 육명심, 한정식, 이규상, 이영준, 이용석, 엄상빈, 구자호,

이기명, 이순심, 정영신, 최경자, 김녕만, 김생수, 양시영, 고명진, 마동욱씨 등 많은 사진가들이 함께해 전시를 축하했다.

1960년대 이후의 한국 사회와 정치, 문화 등 다양한 방면을 기록해 온 전민조씨의 작품 그 자체가 우리나라 역사였다.

엽서에 나온 섬 소년의 순박한 표정은 그렇게 편안하고 아름다울 수가 없었다.

사진평론가 이영준씨는 "유머가 없던 시대의 유머사진을 찍은 사람"이라며 70년대에서 80년대를 관통하는

그의 사진은 시대 하나를 따로 만들었다고 할 수 있을 정도"라고 평가했다
역사박물관 기증전에는 그의 작품 40여점이 전시되고, 기념사진집에는 100여점이 수록되었다.

안타까운 것은 다큐멘터리사진가들이  기증전에 우려의 시선을 보내고 있다는 점이다.
사진과 필름, 카메라 등 300여점을 국가에 기증한 작가의 뜻이야 높이 사야하지만,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한 가닥 희망을 품고 일하는 후배들에게 좌절을 안겨줄 수 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사진수집은  가난한 다큐사진가들이 국가에서 보상 받을 수 있는 마지막 바늘구멍 같은 곳인데,

기증하는 사례들에 의해 그 구멍이 막힐까 걱정하고 있는 것이다.

이 전시는 대한민국역사박물관1층에서 12월26일까지 열린다.

사진,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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