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수동에 계신 원로사진가 이명동 선생 댁을 찾아 갔다.

사모님 점심 챙겨드리고 나오셨다는 선생님의 체력은 여전 하셨다.

이제 일흔도 안 돼 빌빌거리는 나보다 훨씬 건강해 보였다.

“120세가 아니라 더 높게 잡아야 되겠네요랬더니 씰데 없는 소리라신다.

입에 발린이야기가 아니라, 이제 아흔다섯이니 선생님 건강 상태로는 충분히 가능할 것 같다.

또 기억력은 얼마나 좋은지 몇 십 년 전의 이야기지만, 구체적인 상황묘사까지 생생하다.

 

주문한 설렁탕이 나왔으나 수저만 담그신 채, 연신 말씀을 하신다.

이 날은 평소에 듣지 못했던 사진계 뒷이야기라 귀가 쫑긋했다.

글로 옮기기 곤란한 웃고 넘길 이야기라 그런지 더 흥미진진했다.

선생님께서 긴 세월 모셨던 분의 이야기니 틀린 말도 아닐 것이다.

 

그 다음에는 동아일보에 계실 때 있었던 신문사이야기로 옮겨갔다.

사진기자들이 찍어 온 필름을 관리해 조사국으로 넘겼는데, 한꺼번에 폐기처분해 버렸다는 것이다.

요즘처럼 디지털이미지도 아니고 매일 매일 찍어오는 필름 관리가 힘들었는지 모르나

그건 말도 되지 않는 이야기였다. 우리나라 역사를 소각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래서 선생님께서 찍었던 4,19당시의 특종사진들을 비롯한 모든 사료들이 사라진 것이다.

사용 하려면 당시 신문을 복사해 써야 한다는 것이다.

 

이건 비록 동아일보사만의 문제는 아니라고 본다.

사진 가치에 대한 인식들이 부족한 시기기도 하지만, 보관 관리에 대한 시스템이 제대로 구축되지 않았던 때다.

차라리 회사에서 감당하지 못한다면 기자들에게 돌려주어 관리하게 해야 했다.

그래서 한국현대사를 증언할 중요한 사진자료들이 한꺼번에 사라진 것이다.

일부 사진가들이 찍은 사진이나, 사진기자 수첩에 끼어 흘러 다니던 필름들에 의해

그나마 우리의 현대사가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부끄러운 일들이 어디 그 뿐이겠는가?

차라리 그 땐 몰라서 그랬다고 하지만, 지금은 알면서도 뒤집으려 한다.

역사교과서 국정화말이다.



사진,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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