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로사진가 이명동선생을 모시는 자리가 인사동 '양반집'에서 있었다.

이명동선생을 비롯하여 육명심, 한정식, 이완교, 구자호, 유병용, 이기명씨 등

십 여 명이 만나 점심식사를 함께하는 시간을 가졌다.

 

자리가 파한 후, 얼큰하게 취하여 육명심선생을 미행했다.

선생께서 인사동 나오시면, 늘 백상사우나에 들려 따라붙은 것이다.

인사동을 찍으며 인사동사람들이 더나드는 목욕탕도 예외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염탐꾼처럼 목욕탕에 잠입해서 옷을 벗고 카메라만 타올에 감아 나갔다.

지나치던 목욕탕 때밀이가 소리친다.

“어~ 빨래 가지고 들어가면 안 됩니다.”

“빨래가 아이고 내 연장이요”했더니 아리숭한 눈길로 쳐다본다.

 

탕 안에 진입해 마치 암살할 요인 찾듯 사방을 훑다 한 쪽 구석에서 샤워하는

육선생을 발견하고는 무조건 카메라를 들이댔다.

아! 그런데 갑작스런 기온차이로 렌즈에 김이서려 조준이 되지 않는 것이다.

눈이 동그라진 육선생께서는 얼른 눈치 채고 탕에 몸을 담가버렸다.

눈 닦고 렌즈 닦아 박긴 박았으나 때를 놓쳐버려 빙그레 웃으시는 사진만 박았다.

 

그런데, 그 때부터 목욕탕에 난리가 난 것이다.

손님들은 남의 집 불구경하듯, 쳐다만 보고 있는데,

주인이 난리를 피우며 종로경찰서에 신고 해 버린 것이다.

 

출동한 경찰관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였으나 주인은 막무가내다.

다른 손님을 찍지 않았다며 확인시켜주었으나 도통 믿질 않는 것이다.

상황을 파악한 경찰관이 ‘일단 경찰서가자’며 위기에서 벗어나게 해 주었지만,

사진도 제대로 찍지 못하고 텃밭만 망쳐버린 꼴이 되었다.

 

차후로 오가며 사진을 찍어 얄 텐데, 주인한테 찍혔으니 앞일이 난감했다.

필요하면 주인 양해아래 확실하게 준비 해야하는데, 깽판을 친 것이다.

 

이제 어쩔까? 그놈의 술이 원수다.

몸 팔아서라도 주인에게 와이로(뇌물) 좀 쓸까보다.

때밀이라도 시켜주면 확실하게 밀어 주고, 찍을 수 있을 텐데 말이다.

그래도 포기할 수 없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 날 구멍이 있다 하지 않던가?

 

사진은 눈 앞만 보지 말고, 뒤도 돌아봐야 된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달았다.

 

 

사진,글 / 조문호

 

 

 

수요일만 되면 별 볼일 없어도 인사동에 나가고 싶어진다.

전시장들은 새로운 작품들로 교체되고, 거리에선 반가운 인사동 사람들을 쉬 만날 수 있어

모처럼 인사동 기운이 충천하기 때문이다.

지난 27일엔 사진가 변홍섭씨와의 오찬약속을 수요일로 잡아두어, 일찍부터 작정하고 나올 수 있었다.
변홍섭씨는 정선같이 한적한 곳에서 여생을 보내고 싶다며 자문을 구해왔으나

내가 사는 곳은 이미 관광지화 되어 추천할 수가 없었다.

‘툇마루’에 식사하러 가서는 음유시인 송상욱선생을 만났고,

‘귀천’에 차 마시러 가서는 민속학자 심우성선생을 만났는데, '귀천'엔 빈 자리가 없었다

인사동거리에서는 사진가 이갑철, 육명심씨, 시인 강 민, 이행자, 서정춘씨, 소설가 구중관씨,

서양화가 안창홍, 이종송씨, 미술평론가 윤범모씨, 사진평론가 최건수씨, 무이도 예술촌장 정중근씨,

예당국악원 조수빈원장 등 많은 분들을 만났다.

평소 인사동거리에서 아는 사람을 만나기란 고작 한 두 사람에 불과한데,

짧은 시간에 이렇게 많은 분들을 만난다는 것은 그의 대박수준이다.

그러나 대개 술을 마시고 집에 가는 길이거나, 금주령이 내려 진 분들이 많아 술 한 잔 하자는사람이 없었다.

무더운 날씨의 낮 술에 취하면 힘들 것 같아 점심식사 때부터 사양했지만,
막상 그냥 지나치려니 맹숭하고 허전했다.
그래도 반가운 사람들을 많이 만났으니 여한은 없었다.

사진,글 / 조문호

 

 

 

 

 

 

 

 

 

 

 

 

 

 

 

 

 

 

 

 

 

 

 

 

 

 

 

 

 

 

 

 

 

 

 

 


‘사진예술’ 발행인 이, 취임식이 있었던 지난 2일, 많은 사진가들을 만났다.
행사장인 코리아나호텔에서 한정식, 육명심, 전민조, 최경자선생과 같이 나왔으나
이내 뿔뿔이 헤어졌다.

육명심선생만 인사동까지 함께 하셨는데, "가까운 곳에서 차 한 잔 하자"며
박대조씨의 'Where do we go now'전이 열리는 ‘나우갤러리’로 올라 가셨다.

그 곳에는 행사장에서 만났던 이순심관장을 비롯하여 사진가 박하선, 박종우,
김현숙, 정면주 교수 등이 먼저 와 환담을 나누고 있었고, 나중에는 곽명우씨도 왔다.

때 만난, 육명심선생의 강의가 발동되었다.
내조를 잘 해주시는 사모님 이야기에서부터 근대사진사까지 거침없었다.
일전에 들었던 말씀이거나 아는 내용도 있었지만, 사진가들에게 귀감이 될 만한 강의였다.

‘다큐멘터리사진은 무엇보다 설득력이 필요하다며 말씀을 끝내셨다.
사진가보다 사진교육자로서의 자부심이 느껴졌다.

사진,글 / 조문호

 

 

 

 

 

 

 

 

 



[김석종의 만인보]

 

인사동 전각 전문갤러리 앞에 앉은 육명심선생 / 조문호사진



망망한 티베트 고원지대를 서성대는 노년의 한 사진가를 떠올린다. 그는 아득한 세월 저편의 기억을 더듬는다. 아버지는 스님이었다. 어려서 짧은 명줄 길우려고 절로 보냈다. 스무살만 넘기자고 했는데 영 돌아올 생각을 안 했다. 이제는 집안에 대가 끊길 판이었다. 어렵게 설득해서 장가를 들였단다. 하지만 두 달도 안돼 집을 나가버렸다(말하자면 어머니는 씨받이였던 셈이다). 요 밑에 쪽지 하나 남겼더란다. 밝을 명(明)자 마음 심(心)자. 명심이 일곱살 때 어머니가 그랬다. “네 아비가 그예 서방정토로 가셨구나.” 아들은 황혼녘이면 아버지가 가셨다는 서쪽 하늘을 하염없이 바라보곤 했다.


그가 인생의 황혼녘인 일흔살이 되어 서쪽나라 티베트를 찾아간 거였다. 사진작가 육명심(84)이다. 불교의 우주관에서 서방정토의 중심인 ‘수미산’으로 불리는 성산(聖山) 카일라스가 있는 곳. 티베트의 깊은 영성이 단박에 그를 사로잡았다. 고산병에 쩔쩔매면서도 히말라야 언저리에 있는 티베트 고원과 ‘오래된 미래’의 인도땅 라다크, 부탄을 10여년 떠돌았다. (세 곳 모두 티베트불교 문화권이다). 그가 이번에 티베트 순례의 여정을 담아 펴낸 사진집 <하늘과 땅이 만나는 곳>(글씨미디어)을 보니 ‘거장’이라는 말이 허투루 나온 게 아니다.

하늘과 맞닿은 티베트 산악과 광야, 궁핍에 주눅들지 않는 사람들의 삶, 순례자들의 경건한 영혼, 길가의 돌무더기와 강아지 한 마리, 그리고 피어나는 흙냄새와 룽타(티베트 서낭당 깃발)를 흔들고 지나가는 바람소리까지 딱 붙잡아낸 경지다. 마치 점묘화같이 아련한 흑백 사진 속으로 현세에서 내세로 이어지는 어떤 영원의 길이 나있는 느낌이다. 흔히 보는 화려한 오색 빛깔 민속이나 산악풍경을 담은 티베트 사진과는 격이 다르다. 그렇지만 그는 1년 전 티베트 전 지역을 동서로 횡단한 뒤로 길었던 영혼의 여행을 접었다. 이 순정한 땅마저 속절없이 망가뜨리는 개발의 광풍을 더 이상 볼 수 없어서다.

그건 이 땅에서도 익히 봐온 모습이다. 1960년대 이래 ‘인상’ ‘백민’ ‘장승’ ‘검은 모살뜸’으로 사라져가는 기층과 토속의 삶과 문화를 담아내 한국 사진역사에 뚜렷하게 획을 그었다. “민중이 깎은 장승이 바로 백민(기층민), 우리 토박이들의 얼굴이더라고. 무를 장에다 박아 놓으면 장아찌가 되듯이 천지조화와 풍토가 곰삭아 우러난 게 장승의 매력이지. 너무 쉽게 내다버린 우리 얼굴이고 정신성이랄까.”


 

육명심이라면 단연 ‘예술가의 초상’을 꼽기도 한다. 10여년 동안 찍은 당대 최고 예술가 70명의 꾸밈없이 솔직한 모습의 사진은 그 자체가 보석이다. 대표적인 게 미당 서정주인데, 바지저고리 차림으로 양손을 소매에 끼고 ‘햇빛 속의 갈맷빛 등성이’에 쪼그려 앉아 있는 모습에서 ‘팔할은 바람이 키운’ 미당 삶의 내면과 시세계의 아우라가 뿜어져 나오는 거다. 어찌보면 뒷간에서 쭈그리고 앉아 볼일 보는 것 같은 모습의 이 사진을 미당도 아주 좋아했다고 한다. 그가 “사람의 비린내가 전혀 나지 않았다”고 평하는 대로 그야말로 깐깐하고 대쪽 같은 인상의 박두진 시인, 앞섶을 풀어헤치고 파안대소하는 고은 시인, 반나체로 미치광이처럼 그림을 그리고 있는 걸레 스님 중광, 동백림 간첩단사건의 고문 기억이 각인된 듯한 천상병 시인 등의 사진은 당대의 명장면으로 지금껏 회자된다. “그들의 거실을 지나 안방 깊숙이 들어간 사진이다. 당대의 소중한 정신을 사진으로 남길 수 있어서 천만다행이다.”

그가 중·고등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다가 순전히 독학의 늦깎이로 사진을 하게 된 걸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는 성장기 내내 스님이 되고 싶었다고 한다. 아들까지 절에 뺏길 수 없다는 어머니의 간곡한 만류로 뜻을 꺾었다. 끝까지 독신을 고집하다가 서른세살이 돼서야 결혼을 했다. 그런데 아내가 혼수품으로 카메라를 가져왔다는 거다. 신혼여행지에서 처음으로 카메라 조작법을 배워가며 사진을 찍었다. 사진을 찍은 지 반년 만에 첫 전국 촬영대회에 나갔다. 처음에는 남들이 찍는 것만 지켜봤다. “잘 관찰해서 남들과 똑같이 안 찍으려고.” 그게 바로 지금도 여전히 유효한 ‘육명심의 카드’다. “예술이란 도매금에 넘어가지 않는 것, 통념의 쳇바퀴에서 최대한 멀리 빠져나오는 것이다.”

1990년대 초반이었을 거다. 육명심과 그의 후배 사진가 황헌만의 경북 문경 장승 촬영길에 동행했다. 그랬는데 대사진가 육명심이 ‘똑딱이 카메라’를 들고 나타난 거였다. “하하. 이것도 필요없어. 눈으로 찍고 마음에 걸어두는 사진도 있는 법이지.” 그는 1박2일 동안 정말 한 장의 사진도 안 찍었다. 그러니 ‘사진계의 선승’이란 말도 듣는다. 더 특별한 일화가 있다. 그가 1982년 당대 고승이었던 성철 스님 사진을 찍겠다고 무작정 해인사 백련암에 쳐들어갔다. 사진은커녕 3000배를 하지 않으면 누구도 만나주지 않던 성철 스님이 웬일인지 그를 방으로 불러들였다. “사진은 뭐 하러 찍을라카나?” “스님, 만약 부처님 생전에 사진술이 있었더라면 세상의 불상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스님이 씨익 웃더란다. “그럼 한번 찍어봐라.” 여기서 그의 대답이 예상밖이다. “안되겠습니다.” 당시 신장이 좋지 않던 성철 스님의 눈두덩이가 좀 부어 있었다. “그렇다고 사진을 안 찍어?” “예. 나중에 다시 와서 찍겠습니다.” 그 후 다른 사진작가가 먼저 성철 스님의 사진을 찍은 걸 알고 다행으로 여겼다고 한다. “카메라로 찍는 사진이 아니고 내 눈으로, 마음으로 찍은 사진, 정말 천하무구의 사진 한 방을 남겼지.”

그가 대학에서 28년 동안 변함없이 가르친 사진론이 있다. “잘 찍으려 하지 말고 자기 것을 찍어라.” 1998년 대학에서 정년퇴직하면서 모든 직책을 싹 그만뒀다. 강남구 역삼동의 오피스텔 10층에 작은 작업실을 내고 들어앉았다. “정년이야말로 마지막 주어진 찬스거든.” 이번에 가보니 사무실이 그대로 하나의 선방이었다. 나무 바닥 한가운데 참선용 좌복이 놓였다. 그는 밤 10시에 잠자리에 들고 새벽 3시에 일어난다. 1시간 동안 참선을 하고 40분간 포행(산책)을 한다. 오전에 2시간을 더 수행한다. 산중의 스님들과 똑같이 15년을 꼬박 지켜온 일과다. 벌써 다음 작업에도 돌입했다. 이번엔 우리 삶에 오래된 앙금처럼 가라앉아있는 일상의 불교를 찍겠단다. “인생을 마무리하는 작업이 되겠지. 보다 성숙하고 심화되고 나다운 삶을 찾아내려고 해. 삶과 사진이 하나의 도(道)가 되는 것, 그 생사일여(生寫一如)의 작업이 될 거야.”

 

 

[경향신문]
김석종 논설위원·문화전문기자

 

지난 12일 인사동 ‘양반댁’에서 이명동선생님을 모시는 사진가들의 오찬 모임이 있었다.

이명동 선생을 비롯하여 육명심, 한정식, 황규태, 이완교, 구자호, 전민조, 유병용,

이기명씨 등 열명이 모여 정겨운 환담을 나누며 또 한 해를 떠나 보내는 아쉬움을 달랬다.

그 날은 돌아가며 차례대로 하고 싶은 이야기를 들려달라는 육명심선생의 제안으로

사진에 관한 많은 정보를 들을 수 있었다.

제일 먼저 ‘대구사진비엔날레’ 운영위원장을 맡았던 구자호선생으로 부터 여러 가지

그 뒷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었고, 이완교씨는 파리비엔날레에 초대되었던 당시의 보람과

애로를 말했다. 그리고 육명심선생은 몇일 후에 티벳 작업을 정리한 사진집이 나온다는

말씀을, 한정식 선생은 지병에서 해방되어 사진촬영을 다녀 온 말씀을 하셨고,

이기명씨는 자신이 추진하고 있는 ‘제주 해녀’ 프로젝트 대한 뒷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전민조씨는 역사박물관에 소장된 작가들을 초대한 심포지움에 대한 이야기를,

유병용씨는 내년 5월에 있을 개인전 준비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나는 아내 정영신과 600여개 오일장 순례를 마감하고, 그 보고서 형식의 전시를

올 연말에 하기로 했으나, 출판이 지연되어 내년 1월20일로 연기되었다는 말을 했다.

마지막으로 황규태 선생 차례가 되자 황선생의 말씀이 걸작이었다.
“나는 할 말도 없고, 조형! 그 팔팔이나 하나 줘요”


사진,글 / 조문호

 

 

 

 

 

 

 

 

 

 

 

 

 

 

 

 

 

 

 

 

 

 

 

 

 

 

 

 

 

 

 

 

 

 

 

 

 




그동안 이명동선생을 모시는 오찬회를 인사동에서 정기적으로 가져왔으나, 이번에는 이명동선생의 전시가 열리는 ‘한미사진미술관’이 있는 ‘어양’ 중식레스토랑에서 모임을 가졌다.

지난 7월 28일 정오에 가진 오찬회에는 이명동선생을 비롯하여 육명심, 한정식, 이완교, 전민조, 조문호, 구자호, 김영수, 유병용, 이기명, 고 김기찬씨 미망인 최경자씨등 모두 열 한 명이 참석하였다.

오랜 세월동안 한국사진사를 정리해 오신 육명심선생께서 우리나라 근대사진사에서 이명동선생의 활약이 가장 두드러진다는 말씀을 하셨다.

“우리나라 초창기 사진은 대부분 사진관 인물사진이었지요. 그 때의 사진관은 상류층들이 주로 활용하는 곳으로 대개 연미복을 입고 찍었어요. 사진관을 운영하는 사진가들도 대부분 일본에서 공부하고 온 엘리트로 국내작가로는 이해선, 서순삼, 현일영, 박필호씨 등이 주도하고 있었지요. 그런데 이명동선생께서 당시로는 아마추어 사진가에 불과한 임응식씨를 내 세워 ‘생활주의 리얼리즘’을 주창하며 사진계 흐름을 완전히 뒤집은 거지요. 그렇지만 그때 나는 이명동 선생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어요. 왜냐하면 사진협회 창설이나 '동아사진콘테스트'로 사진판을 좌지우지하는 모습이 싫었거든요. 그런데 이명동선생의 숙적이나 마찬가지였던 사진가 이종화선생이 돌아가셔서 장례식장에 갔더니, 문상 오신 이명동선생께서 달구 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장례가 끝 날 동안 지키고 계셨어요. 결국 이명동선생의 인간적인 면모에 끌려 생각을 바꾸게 된거지요. 그동안 사진계에서 이명동선생의 도움을 받지않은 분이 별로 없지만, 그중에서 임응식선생과 임선생의 직계였던 홍순태교수가 도움을 가장 많이 받았어요. 그리고 한 번 도와주기 시작하면 끝까지 도와주는 그런 분이예요. 모든 공적과 실리를 임응식선생께 돌리고 뒤에만 계시던 이명동선생께서 임응식선생이 세상을 떠나시니, 그 아들 임범택씨를 위해 팔방으로 애쓰셨어요. 분명한 가치관과 인간적인 의리로 똘똘 뭉친 분이지요.”

올해로 이명동선생의 연세가 아흔다섯에 이르지만 건강상태는 물론 기억력까지 너무 좋아 팔순 정도의 연세밖에 보이지 않는다. 아마 백수는 물론 아직도 십년 정도는 건강하게 사실 것으로 생각된다. 우리나라 사진계의 최고 원로이자 산증인이지만, 병석에 계신 사모님 간병으로 만년을 쓸쓸하게  보내고 계신다. 사진인들의 모임이 있을 때면 나오셔서 사진계 비사들을 들려주시는 것이 유일한 낙이라면 낙이다. 유병용교수가 인터뷰를 가져 많은 사료들을 기록해 놓았다니, 머지않아 한국사진사의 볼만한 책 한 권이 나올 것 같아 기대가 된다.

그리고 이번 모임에는 이명동선생 이야기 외에도 반가운 소식을 들었다.
얼마전 사진가 전민조씨와 고 김기찬선생의 미망인 최경자씨가 독일 사진비엔날레에 초대되어 다녀 온 것은 알고 있었지만, 서울시가 일억 오천만원 상당의 전민조씨 작품을 구입했다고 한다. 그동안 순수사진에 밀려 뒷전에 머물던 기록사진의 가치가 늦게나마 인정받았다는 것은 다큐멘터리사진을 하는 입장에서 엄청 기분 좋은 소식이었다.

 

 

 

 

 

 

 

 

 

 

 

 

 

 

 

 

 

 

 

 

 

 

 

 

 

 

 

 

 

 

      좌로부터 사진가 육명심, 전민조, 이기명, 한정식씨, 한미수석큐레이트 손영주씨, 원로사진가 이명동선생, 고 김기찬

      미망인 최경자씨, 사진가 이완교, 김영수, 구자호, 유병용씨와 앞 줄은 필자 조문호




이명동선생님을 모시는 자리가 지난 21일 정오, 인사동 '양반댁'에서 있었다.
그 자리에는 이명동선생님을 비롯하여 한정식, 육명심, 이완교, 김녕만, 구자호, 최재영, 유병용, 이기명 그리고 지금은 고인이 된 김기찬씨의 미망인 최경자씨 등 모두 열 한분이 참석한 가운데 오찬회를 가졌다.
올 해로 95세인 이명동선생님께서는 아직까지 젊은이 못지않은 열정으로 지난 이야기들을 들려주었고, 모두들 선생님의 무병장수를 바라는 축배도 들었다. 독일에서 곧 열리게 될 비엔날레에 한국작가로 참여하게 된 이완교씨와 대구사진비엔날레 운영위원장을 맡은 구자호씨로 부터 외국과 국내와의 비엔날레 운영에 대한 차이점을 듣기도 했다.
우리나라 사진계 문제점에 대한 이런 저런 이야기들이 거론되었으나, 주요 화제는 사진협회에서 주관해 온 사진공모전의 오래된 비리였다.

사협 공모전 비리가 어제 오늘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2010년에는 '한사전' 심사비리가 발각되어 사무처장 김모씨가 사전 구속되고 이사장을 비롯한 심사위원, 출품자 등 42명은 불구속 입건하는 등 사진계 초유의 비리사건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적도 있었다. 그 당시 경찰 발표에 따르면 김씨는 2008년 4월 대학로의 한 카페에서 대상수상을 부탁하는 진모씨로부터 3,000만원을 받는 등 2007년년부터 2010년까지 출품자 42명으로부터 총4억여 원의 금품을 받은 혐의다. 그는 보통 대상작에는 3,000만원, 그 외는 300만원에서 1,500만원을 챙겼다고 한다. 김씨는 심사위원들을 협회 이사장실이나 모텔로 불러 미리 출품작의 샘플사진을 보여주며 '눈도장'을 찍게 하거나 심사장에 여직원을 들어오게 해 해당작이 나오면 자리에서 일어서는 방법으로 신호를 보내 특정 사진을 수장작으로 만들었는데, 김씨가 기획부터 심사위원 선정까지 협회에서 주최하는 공모전의 모든 과정을 총괄한 것으로 알려졌다. 어떻게 8.000여명이나 되는 사단법인 단체에서 일개 사무처장에 의해 심사위원들이 좌지우지하는 이런 일이 있는지 모르겠다. 사진공모전 비리 문제는 '사협'이란 단체가 결성될 때부터 이어져 온 구악이라 그러려니 할 수도 있지만, 문제는 그러한 비리물증들이 고스란히 보관되어 왔다는 것이다. 그 물증을 근거로 출품자들을 협박해 돈을 갈취하다 고소당한 일이 발생한 것이다. 부탁한 사람들의 샘플사진 이면에 공모전명, 제공한 금액, 결과 등이 상세히 기록된 협박용 물증의 분량이 라면박스에 가득하다는 말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결론적으로 사협이란 단체에 작품사진을 심사할 능력 있는 분들이 없다는데 문제가 더 크다. 20여 년 전, 만연한 비리에 식상한 대학교수와 프로사진가들이 모두 탈퇴하였기 때문이다.

이명동선생님께서는 옛날에 있었던 비리의 한 사례를 들려주었다.
어느 출품자가 심사위원들에게 같은 양복기지(원단)를 뇌물로 돌렸는데, 출품자가 의뢰했던 양복점에서 심사위원들이 똑같이 양복을 만들어 입고 심사장에 나와 서로가 놀랐다는 이야기에 모두들 배꼽을 잡았다.

오찬 모임이 끝난 후 육명심선생과 함께 '갤러리 나우'에 들려 이순심관장과 차를 마시며 환담을 나누고 있는데, 사진평론하는 진동선씨와 김영태씨가 등장하여 반가운 만남의 시간을 갖기도 했다.

 

 

 

 

 

 

 

 

 

 

 

 

 

 

 

 

 

 

 

 

 

 

 

 



지난 2월 21일 인사동 오찬 모임으로 나섰는데, 인사동은 나설 때마다 마음이 늘 바쁘다.
갈 곳도 할 일도 많다는 생각이 앞서나 막상 당도하고 나면 새로운 전시를 찾거나 길거리를 돌며

사진 찍는 일이 전부다. 수시로 드나드는 인사동에 무슨 사진찍을 것이 그렇게 많으냐고 물을지

모르지만 "사진은 만남의 예술이고, 발견의 예술"이기에 부지런히 돌아다니는게 상책이다.


거리는 전통과 무관한 별의 별 장사들도 많지만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는 곳이 인사동이다.
세상의 중심인 사람보다 더 좋은 사진 소재는 없다. 그러나 이제는 사람을 함부로 찍을 수도 없는 시대다.

작년에는 인사동과 장터에서 사진찍다 문제가 생겨 종로경찰서와 안동경찰서에서 각 각 조서를

받은 적이 있지 않은가. 그렇지만 평생의 주제가 사람인데, 이제 와서 사진 작업을 접을 수는 없다.

그래서 오래 전 부터 허락한 사람의 이름과 나이를 기록해 두고, 정면 입상사진을 찍어왔으나

스냅의 가치 또한 무시할 수 없기에 가끔은 카메라를 휘 둘 때도 더러 있다.
찍을 때 사전 양해부터 구해야 되지만 순간적인 감정 표현이나 동작을 포착하려면 순서가 바뀌지 않을 수 없다.

상황이 바뀌기 전에 찍은 후  인사도 하고 양해를 구하는 식이었는데, 본인이 거부하면 즉석에서 지워줘

말썽의 소지를 없애면 된다. 그러나 그 사람을 찍지 않았는데, 찍었다고 우겨 가끔 문제가 생긴다.

정오무렵, 안국역 6번출구로 나오니 한 아주머니가 조각천을 이용한 밥상보등을 만들어갖고 나와

손바닥만한 노점상을 펼쳐놓고 있었다. 인사동에 어울리는 노점상이란 생각에 카메라를 들었더니

대뜸 손사레를 치며 “초상권 침해야~”라고 쏘아붙였다. 카메라는 내렸으나 뒷 맛이 씁쓸했다.

요즘 젊은이들이나 외국 사람들은 카메라를 들면 오히려 포즈를 취해 난감할 정도로 적극적인데 비해, 

나이가 지긋 할수록 거부하는 분들이 많은 건 무언가 피해의식이 있는 듯했다.
초상권이란 얼굴모습을 분별할 수 있는 사진이 상업용으로 활용되었을 때 문제를 제기할 수 있지만,
정면사진이 아니거나 군중 속에 뒤 섞여 있는 조그만 모습까지 시비 걸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거리에는 중국관광객들이 몰려다니기도 하고, 패션쇼를 홍보하는 모델들이 줄지어 다니기도 했다.
원로사진가 이명동선생님을 만났고, 음유시인 송상욱선생과 박찬성씨,사진가 육명심, 한정식, 이완교선생

그리고 현장스님도 만났다. 그래도 인사동 나들이의 묘미는 우연히 인사동 터줏대감이나 인사동을

사랑하는 유목민들을 만날 때가 가장 즐겁다.

'노마드'에 도착한 현장스님에게 카메라를 겨냥하자 쓸데없는 기념사진은 왜 만날 때마다 찍느냐고 반문하였다.

사람들이 기념사진을 너무 우습게 생각하는 것 같다.

한정식선생의 말씀처럼 "사진예술의 첫머리에 기념사진이 존재하고, 기념사진의 밑바닥에 초상사진이 존재한다"

는 것을 왜 모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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