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만화 100주년 기념, 박기정선생의 도록에 올린 김명성의 인사말을 옮깁니다.

"제자리 걸음에 대한 추억"

몇 주 전이다. 이른 폭염이 시작된 오대산 월정사 어귀 계곡 분지를 가득히 메운 청중들 사이를- 장사익, 최백호 형이 보이고
언제 들어도 찡하게 파고드는 노랫소리가 들린다.
'얘야, 문 열어라! 아버지 목소리 들릴 때마다 세상의 문을 열게 되었고....'
'굳은비 내리는 밤 그야말로 옛날 식 다방에 앉아 도라지 위스키...,'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사는게 이게 아닌데 그러면서 그러면서 사람들은 살았다지요.. 그랬다지요..'
그런 가사의 속절은 바로 옆자리에 앉아있던 노 시인의 눈시울마저 끝내 붉게 하는데 "뭘 생각하시는데요?" ,
"기쁨 반, 슬픔 반 뭐..." , "에이- 황선생님, 옛여인이 떠오르겠죠?" , "으응-그렇지,"

박기정선생님의 한국만화 100주년 기념 수상을 축하해 달라는 난데없는 SICAF의 요청을 받고, 팬클럽 오동추(오직 동심으로 추억하기) 의 과분한 회장직을 맡고 있는 염치없는 저로서는 아무래도 꽤나 긴 넋두리가 될 성 싶었지만, 가슴 찡했던 그때 그 사춘기적 얘기를 "제자리걸음에 대한 추억"이라 표제하고 싶었습니다.

느릿느릿 경적을 울리던 인천 뱃 다리 기찻길 사거리 초입,
비가오면 더욱 선명해지는 빨간 벽돌로 지어진 아주 오래된 초등학교 밑으로 즐비하게 늘어섰던 헌책가게들.
방과 후면 쏜살같이 달려가 아무데고 쪼그리고 앉아 저녁 늦도록 눈 떼지 못했던, 그제야 뿌듯했던 그 설레던 미래들,
경기도 배 소년체조대회 최고 선수로 뽑히던 날. 삼단 뜀틀 위를 멋지게 두번 돌다가 언뜻 보앗던 쌕쌕이 비행기. 폭음이었나 - 터지는 박수소리-
송글송글 잔잔했던 그 유년의 꿈들. 그러나 어느 날 깨어진 슬픈 기억 둘,
유복자였던 외삼촌, 어릴 적부터 신동이였던 형과 체조선수가 꿈인 나는 두어 살 터울이었다.
배운 것은 없었지만 인천에서 거부로 당당했던 아버진, 초등학교 1학년이 중학교 3학년 숙제를 해주는 형을 늘 대견스러워 했다.
1964년 제헌절 아침, 억수처럼 퍼붓던 장마빗속을 뛰어가던 문화극장 앞 신작로-
내 손을 쥐고 뛰던 형, 술 취한 미군 지프차. 폭우 속에 내 팽개쳐진 형의 신발 한 짝. 처음 보았던 아버지의 눈물....
새옷 입고 새신 신고 낯선 서울 하왕십리 판자촌으로 이사 오던 날, 이른 새벽부터 내 이름을 불러대며 문을 두드리는 친구들을 끝내 외면한 것은 헤어진다는 슬픔이 아니었지, 아버지의 거듭된 사업실패로 몰락해버린 살림, 집안 곳곳에 붙은 빨간 딱지를 보여주기 싫었던 부끄러운 자존심, 그래서 소년은 더욱 말이 없어지고..

서정춘선생님의; "꽃신"이라는 시에는 중학생때 처음 써 봤던 처녀시 두편 -장마. 미투리-와 비슷한 구절이 있었다.
어느 길 잃은 여자아이가-중략- /꽃 신발 한 짝만을 걸쳐서 들고 / 걸어서 맨발로 울고는 가고 / 나는 그 아이 뒤 곁에서 / 제자리 걸음을 걸었습니다. -중략-

그 뒤 곁에서 걷는 제자리걸음은 이제 와 생각해보니 때로는 박용래 선생님의 홍래( 鴻來)누이인듯도 하고 그래서 살얼음 기러기떼라며 눈 덮인 두만강 왼 종일 부르면서 그렇게 선생은 눈이오면 마셨겠구나!(지금도 비만오면 퍼마시는 내 모습처럼)
서울로 간 첫날 겨울인데도 비가 쏟아지던 날, 외삼촌이 데려간 청계천8가 바다극장,
동시상영 된 "황야의 은화일불", 이브 몽땅 주연의 "생사의 고백"을 구경하고 맛있는 호떡을 사들고 데리고 간 곳 -아버지의 기대를 저버리않고 전교수석을 한 나를 축하해준 것만이 아니라 나중에서야 그날이 훈이 같았던 외삼촌의 생일이라는 것을 알았다.-
청계천8가 허름한 만화대본소에서 나는 박기정선생님의 "불발탄"을 보았다.
가난했던 미술학도 훈이가 장래가 보장된 미미와의 파리행을 거부하며, 역시 가난했지만 버릴 수 없는 수경이에게로 돌아오는 꿋꿋했던 그 모습, 그리고 그가 전람회 출품작으로 그린 "입체파식 고양이" 채색도 없이 보라, 회색으로 표시한 그 만화책 한 쪽 그림은 그 후로도 오랫동안 제 일기장에 붙여 두었다.
사춘기 무렵의 그 일기장에는 세르게이 에세닌의 "문밖에서"라는 시와 함께 멕시코 작가 타마이오의 "Torsos"가 함께 생각나지만, 한편으로 저는 아버지와의 기대를 벗어난 외도를 하고 있었다.
장래희망란에 出家라고 써 넣는다던지, 방학동안 즐거웠던 일을 그려오라는 과제는 온통 회색빛 도시에 쇠사슬에 묶여 웅크린 사내를 그려 미술선생님의 빈축을 받기도했다.(그로 인해 곧잘 하던 미술을 포기하게 되었지만..)
그 후로도 오랫동안 슬픔과 기쁨이 무엇인가를 물으며 서툰 제자리걸음을 해 왔던 것입니다.

민병산선생님의 <고서이삭줍기>란 글중에 '슬픔과 기쁨'을 얘기한 대목입니다.
"슬픔은 책을 사고 싶은데 돈이 모자라 그대로 두고 나오는 일이지만 정말 큰 슬픔은 어느 선비의 혈육과도 같은 책이 도저히 임자의 손에서 떠날 리가 없는 그 책이 먼지를 뒤집어 쓴 채 어느 고서점에 팽개쳐져있는 슬픔이요, 기쁨은 오래 찾던 책을 만나고 무슨 책을 특별히 싸게 구하는 것도 좋지만, 가장 큰 기쁨은 그 고귀한 생명을 지닌 책이 자칫 휴지로 파해지는, 지금 막 저울에 달려는 그 찰나에 내가 손을 뻗어 구출하는 기쁨" 이라고 합니다.

오동추란 모임은 몇년전, 위에 서술한 바와 같이 엊그제에도 충남 서산 산골과수원 어디라던가? 사과봉지로 싸매져 자칫 휴지로 사라질 뻔한 28쪽 만화를 발견, 힘들게 구출했노라고 하는 오경수, 만화 100년사에 또 다른 모습으로 새겨질 열정의 만화애호가,
박기정, 이문구 선생님에 의하면, 청산리 벽계수처럼 시원시원하게 속도감 있는 문장과 푸더분한 산골냄새와 유장하고 걸쭉한 입담으로 홍 벽초가 한번 만나 보았으면 하고 먼저 날 잡아 기별해 올 법하다는 토종 문화제 <농심마니>대표 박인식 형의 헌신적인 주도로 이루어지게 됩니다.

또 다른 회원 최백호 형은 20대부터 자기 노래의 주옥같은 가사와 호소력 짙은 음악세계, 그리고 얼마후면 발표될 그의 미술전시회에 그려진 모든 그림들이, 오로지 박기정 선생님의 <도전자>로 부터 나왔다고 열변하는데 누가 진정 훈이 인지?
- 나는 그림 그리기를 포기했지만, 그로부터 40여년 지난 지금은 꽤 알려진 고미술 컬렉션이 되어 그림 모으기를 계속 했습니다.-

이제 제자리걸음에 대한 장활한 얘기를 마치려 합니다. 우리들의 감성어린 아름다운 젊은날, 학교에서 가르쳐주지 않던 그 모든 문학, 미술, 음악, 철학, 연애, 인생은 오로지 박기정선생님의 만화를 통해 나왔던 것입니다. 우리의 서툰 '제리리걸음' 에 대해 육조 혜능이신 박기정 선생님은 오늘 이렇게 설법하십니다.

"깃발이 저절로 움직인 것이 아니요
바람 때문에 깃발이 움직인 것도 아니다
그 제자리걸음은 앞으로도 언제나 그대들 가슴속 제자리걸음 아니겠는가?"

선생님 사랑합니다.

                                                                                                        2009년 장맛비 쏟아지는 아라재에서 김 명성


"월간미술" art lovers에 소개된 김명성이사장의 인터뷰 기사 전문을 옮김니다.

 

 "인사동 문예부흥을 꿈꾸는 열정의 컬렉터"

여기 시인이 되고 싶었던 소년이 있다. 중2때 멕시코 작가 타마이오의 그림과 러시아 농민시인 세르게이 예세닌의 시를

일기장에 스크랩했던 이 조숙한 소년은 가정 형편상 다른 길을 걷게되었다.
최근 예술의 전당 서예박물관에서 열린 9번째 명가명품시리즈"아라재컬렉션 조선서화보묵전'의 아라재가

바로 그 소년 김명성이다.
그는 단순한  고미술 컬렉터가 아니다.
근 30여년을 인사동에서 문화예술가들과 더불어 밤새 예술을 논하고 그들의 후원자로서 인사동을 예술의 중심지로 일구었다.
시인이 아닌 사업가가 되었지만 결코 단념할 수 없었던 예술에 대한 열망이 그를 자꾸 되돌려 새운 까닭이다.

그가 컬렉터가 된 데도 사실은 이런 배경이 있다.
예술가들과 어울리다보니 자연히 그들의 작품을 구입하게 되었던 것. 강찬모, 이청운, 최옥영, 조문호,이존수, 안창홍,

전항섭, 김영수 등의 작품을 소장하게 된 것은 그들을 후원하기 위한 것이지 컬렉션을 위한 것은 아니었다.
시작이 이러하니 지금도 소위 블루칩 작가에 대한 관심은 없다.
함께 예술의 터전을 일군 사람들에 대한 애정이 있을 뿐이다.

1980년대초 '시인통신'이라는 문화예술인 모임을 만들어 활동하면서 미술, 문학, 음악, 연극 등 분야를 막론하고

예술과 인문학을 오가는 폭넓은 크로스오버를 시도한 것이 1980, 1990년대 인사동을 예술의 중심지로 떠오르게 했다.

그가 컬렉터로서 본격적으로 나선 것은 1980년대 중반, 겸재 정선의 <단발령>을 구입하면서부터다.
그후 고암 이응노의 그림을 만났고 청관재 조재진 사장과 함께 고암의 최대 컬렉터가 되었다.
이뿐 아니다. 지금까지 20여년동안 민화, 조선의 서화, 도자기, 각종 공예품, 해외 작품 등 여러분야를 두루 섭렵했으며
특히 조선시대 전기부터 말기까지 작품을 고루 갖춘 그의 컬렉션은 이번 서예박물관의 소장품전을 통해 빛났다.

그리 길지 않은 시간에 구축한 비결은 무엇일까?
"보통의 컬렉터가 수중의 돈 천원에서 백원을 할애해 작품을 구입한다면 나는 가지고 있는 돈 백원에 30원을 더 빌려 130원을 작품에 '올인' 했다. 이것이 내가 남도다 빨리 좋은 작품을 수집하게 된 이유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수준 있는 컬렉션을 이루기 어렵다.
"컬렉터가 되려면 첫째 재력, 둘째 안목, 셋째 열정이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재력과 안목도 중요하지만 솔직히 나는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열정'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만큼 컬렉터에게는 열정이 중요하다"고 그는 덧붙인다.

그밖에 또 하나의 비결이 있다. 평소 아무 조건 없이 어려운 예술가들을 도운것.
그는 지난 20여년 동안 다양한 경로로 매달 수천만 원씩 예술가들을 후원해왔다.
그래서 설령 그가 가짜를 사도 상인들이 나서서 해결해 줄 정도다.

"나는 특별히 재력이 있어서 컬렉터가 된게 아니다.
3개를 사고 그중 2개를 팔아 하나를 지키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수 있다.
그러려면 좋은 안목이 있어야 한다. 좋은 컬렉션을 갖추기 위해 컬렉터는 평생을 두고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가 작품 수집에 이토록 열심인 이유는 무엇일까? 이에 그는 선문답처럼 "부끄러움을 아는 것이 문화다"라고 말한다.
그는 컬렉터로서 저평가된 작품의 진가를 알리고 제대로 자리매김할 임무를 느끼는데,
이런 자각이 열정의 원천이라는 것이다.

지금 그가 진력하는 것은 바로 '서예'다. 서예가 대표적으로 저평가된 분야라고 생각하는 그는
서예작품을 모으고 해외에 반출된 우리 전통미술품을 되찾아 오는데 '각고'의 노력을 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이 고미술 컬렉터가 해야할 일이라고 굳게 믿는다.
그런 뜻에서 아쉬운 대로 이번에 소장품전을 열기로 했던 것이다.

때마침 숭례문이 불에탄것이 결정적인 이유가 되었고 또 화재 이후 그에 대한 논의가 벌써 사그라진 것에 대한

안타까움이었으며, 이에 대중들에게 고미술과 거기에 어려있는 우리의 얼을 일깨우고자 하는 이유였다.

그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나에겐 젊은 시절부터 마음속 우상이 있다. 바로 서른한 살의 나이로 요절한 청년실업가 김동근 선생이다.
그는 전쟁 후 1955년 사재를 털어 폐허가 된 명동에 예술가들을 위한 복합문화시설 '동방문화회관'을 건립했다.
지금 그를 기억이하는 이는 거의 없지만 당시 그는 폐허 속에 다시 문화의 씨를 뿌리는, 그누구도 하지못한 일을했다.

지금 나는 그를 롤모델로 하여 인사동에 문화복합시설을 짓고 있다.
주말이면 5만 명씩이나 인파가 쏟아지지만 지금 인사동엔 뭐 하나 볼 것이 없다.
중국산 저질품이 거리를 메우고 원래 그곳에 있던 사람도, 화랑도 떠나고 없다.
문화예술은 사라지고 허깨비를 쫓는 구경꾼들만 몰리는 판이다.
그 인사동에서 다시 한번 문예부흥을 이루는게 나의 꿈이다.

" 지금의 그를 만든 것은 미술, 문학, 음악, 연극, 철학 등 분야를 막론하고 예술을 논했던 인사동 특유의 분위기와 거기에 서식했던 문화예술인들이다.
그래서 그런 분위기가 사라지는 것을 그는 누구보다 가슴 아파한다.
아직도 가슴 한 켠에 시인이 되고 싶은 꿈을 간직한 그. 가장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
전력을 다하는 그를보며 흉흉한 시대지만 그래도 '사람이 희망' 이며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심정원 기자

 

김상현씨 생일잔치 연락으로 오랫만에 들린 '뮤아트'에는 젊은 뮤지션들과 손님들이 좌석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캐나다에서 귀국한 하양수씨, 부산에서 올라 온 곽미영씨, 변명희, 임이준, 최보규, 이완수씨 등 반가운 얼굴들도 많았다.

 

별의 별 음악 듣느라 몇 시간을 보냈는데, 자정이 가까워 김명성씨가 나타냈다.
손님들이 대부분 빠져 나간 후 그를 위한 술자리가 다시 마련되었고 즉흥적인 연주와 노래도 이어졌다.

변선생의 바이얼린 연주나 '아베마리아' 선율에 춤을 춘 이름 모를 무용수의 춤도 좋았지만

임이준양의 떨리는듯 흐느끼듯 부르는 매혹적인 노래소리에 넋을 뺏겼다.
술자리에서는 사진을 찍지 않기로 한 스스로의 약속을 잊은채, 카메라를 꺼내지 않을 수 없었다.

어두운 조명이라 노출이 잘 나오지 않는데다 몸까지 흔들렸지만, 마음가는데로 사진을 찍었다.

 

새벽 네시경에야 김명성씨와 함께 일어났지만, 그 물귀신에게 끌려 다시 '노마드'로 옮겨야했다.
늦은 시간이지만 마지막 손님 배웅하느라 나온 전활철씨가 마치 마중 나온 듯 골목에 서 있었다.
모두들 곤하게 젖은 육신으로 무슨 미련이 그렇게 많은지, 오전6시까지 막걸리를 축내야 했다.

 

 

신이시여!

술 취하지 않고는 시도 쓸수 없고, 편하게 마음조차 내려 놓을 수 없는 벗이나

술 취하지 않고는 인사동조차 보이지 않는 이 불쌍한 중생들을 굽어 살피소서~

 

 

 

 

 

 

 

 

 

 

 

 

 

 

 

 

 

 

 

더블클릭을 하시면 이미지를 수정할 수 있습니다

 

 

 

 

 

 

 

 

 

 

 

 

 

더블클릭을 하시면 이미지를 수정할 수 있습니다

 


 

지난 26일 시인 강민 선생님과의 점심약속으로 아침밥도 거른채 인사동에 나갔다.
월요일이라 그런지 인사동은 별로 붐비지도 않았고 거리풍경도 호젓해 좋았다.

이제 그 징그럽던 더위도 한 풀 꺾였는지 제법 시원한 가을바람까지 솔솔 불었다.

강 민 선생님과 '포도나무집'에서 만나 가자미찜에다 복분자 술을 한 잔 했다.
오랜만에 선생님께 식사대접 한 번 할 작정이었으나, 선생님의 지인께서

포도나무 집에 제법 많은 술값을 맡겨놓아 한 동안 술값 걱정 안 해도 된단다.

 

28일 부터 몇일동안 경북지역 촬영이 있어, 나온 김에 김명성씨에게도 연락했다. 

'허리우드'로 자리를 옮겨 극작가 신봉승 선생님 그리고 김명성, 정현석씨를 차례로 만났고,

입담 좋은 신봉승선생님으로 부터 재미있는 옛날 이야기를 들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아내 정영신씨는 조경석선생님과 서양화가 김하은씨와 저녁 약속이 있었던 모양이다. 

'인사아트'에 들려 전시작들을 보며 시간을 맞춘 후 인사만 드리고 먼저 들어왔는데,

나중에 들은 이야기로는 ‘노마드’에서 김명성씨를  만나 자리를 같이 한 모양이다,

다시 나오라는 전화가 빗발쳤지만 몸이 힘들어 거절했는데, 아무래도 뒤가 좀 걸린다.

감히 마누라님의 하명을 거절했으니 밥 얻어먹는데 지장이 없을까?

간 큰 넘 같으니라고ㅎㅎㅎ

 

 

 

 

 

 

 

 

 

 

 

 

 

 

 

 

 

 

 

 

 

 

 

 


지난 14일 오후 늦은시간 안국동 '로마네 꽁띠'에서 김명성, 박인식, 최재왕, 이세기, 김기영, 이지연씨를 만났다.
몇 일 전 김신용씨와 의논에서 인사동 사람들이 뜻을 모아 김명성씨를 위한 자리를 만들자는 이야기가
나왔으나 본인의 일정과 의향을 몰라 확정하지 못했는데, 그 자리에서 뜻을 전하고 확답을 받았다.
김신용씨의 헵진 올해의 시상 수상 축하를 겸한 자리이기는 하지만 여러가지 어려움에 처해있는 그를 위로하고,
인사동 사람들 모두가 궁금해하는 '아라아트'의 진로와 그의 구체적인 계획을 한 번 들어보기 위해서다.
뜻 있는 분들은 참석하시어 그에게 조그만 마음의 힘이라도 보태주시기 바란다.

'노마드'로 자리를 옮긴 김명성씨가 술은 더 이상 마시지않고 계속 시만 쓰고 있길래 한 마디 했다.
그 날 희망적이고 혁신적인 제2의 6,29선언을 해달라고...


* 모임 일시 : 2013년 6월 29일 오후7시
* 모임 장소 : 인사동 '노마드'
* 참가비 : 1인당 2만원
* 장소 관계로 많은 분들을 모시지 못하오니 뜻 있는 분들은 댓글에 남겨주십시요.

 

 

 


지난 3일 일요일 오후 늦게 김명성씨의 전화를 받고 인사동으로 나왔다.

"노마드"에는 김명성씨를 비롯하여 장경호, 인오스님, 배성일씨가 막걸리를 마시고 있었다.

 

김명성씨는 술만 마시면 시를 쓰는 버릇이 있다.

몇 일 전 세상을 떠난 여운선생을 기리는 시를 쓰고 있었는데,

108배를 의미하는 108자로 구성된 "백야"라는 시였다.

 

전 날, 현장스님과의 과음으로 하루종일 끙끙거리다 나왔는데

빈 속에 달작한 밤막걸리가 들어가니 금새 술이 취해 버렸다.

늦은 시간이라 대중교통이 끊기기도 했지만 너무 힘들어 사랑방모텔에서 잘 것을 제안하자

장경호씨가 펄쩍 뛴다. 집에서 쫒겨 나온 줄 알고 전화 확인까지 하는 것이다.

여관비에 쓸돈 술집에 보관해 둔채, 그냥 택시에 실려왔다.

 

 

2013.3.4

 

 

 

 

 

 

 

 

 

오은정양의 혼례식이 지난 2월16일 오후4시부터 부산 해운대 센텀사이언스파크 컨벤션홀에서

많은 축하객들이 참석한 가운데 성황리에 치루어 졌습니다.

서울에서 내려간 인사동유목민으로는 최백호, 김명성, 박인식, 공윤희, 전인경, 정영신씨가

참석하여 결혼을 축하하였습니다.

 

 

2013.2.25

 

 

 

 

 

 

 

지난 28일, ‘인사동 유목민’ 카페 창립 일주년을 맞아 송년회를 겸한 모임을 갖기로했으나

댓글 신청한 회원들이 적어 모임 자체를 취소해야만 했다.

그러나 시간을 비워 둔 조준영씨와의 약속으로 인사동에 나왔다.

‘아라아트’에서 그를 만나, ‘백련’의 술자리에 가서는 신용철, 김기영씨를 만날 수 있었고,

한 시간 후 ‘노마드’에서는 배평모, 박영현, 장 춘, 김명성, 홍창희, 이영준, 신현수,

권양수, 허미자씨등 여러 분들을 만났고, 뒤늦게는 노광래씨와 정현석씨도 다녀갔다.

모임을 알던 모르던 자연스런 송년회가 되었는데, 더러는 약속장소였던 ‘사동면옥’까지 다녀 온 분들도 계셨다.

카페에 들려 댓글 한 줄 올리는게 그렇게도 힘들었을까? 박영현씨에게 카페에 시를 다시 올려 달라는 부탁도 했다.

자리들이 흩어져, 여기 저기 옮겨 다니며 막걸리에 소주, 맥주에다 와인까지 곁들이는 무리수를 두어

아쉽게도 먼저 퇴장해야만 했다.

 

2012.12.30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