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미술" art lovers에 소개된 김명성이사장의 인터뷰 기사 전문을 옮김니다.

 

 "인사동 문예부흥을 꿈꾸는 열정의 컬렉터"

여기 시인이 되고 싶었던 소년이 있다. 중2때 멕시코 작가 타마이오의 그림과 러시아 농민시인 세르게이 예세닌의 시를

일기장에 스크랩했던 이 조숙한 소년은 가정 형편상 다른 길을 걷게되었다.
최근 예술의 전당 서예박물관에서 열린 9번째 명가명품시리즈"아라재컬렉션 조선서화보묵전'의 아라재가

바로 그 소년 김명성이다.
그는 단순한  고미술 컬렉터가 아니다.
근 30여년을 인사동에서 문화예술가들과 더불어 밤새 예술을 논하고 그들의 후원자로서 인사동을 예술의 중심지로 일구었다.
시인이 아닌 사업가가 되었지만 결코 단념할 수 없었던 예술에 대한 열망이 그를 자꾸 되돌려 새운 까닭이다.

그가 컬렉터가 된 데도 사실은 이런 배경이 있다.
예술가들과 어울리다보니 자연히 그들의 작품을 구입하게 되었던 것. 강찬모, 이청운, 최옥영, 조문호,이존수, 안창홍,

전항섭, 김영수 등의 작품을 소장하게 된 것은 그들을 후원하기 위한 것이지 컬렉션을 위한 것은 아니었다.
시작이 이러하니 지금도 소위 블루칩 작가에 대한 관심은 없다.
함께 예술의 터전을 일군 사람들에 대한 애정이 있을 뿐이다.

1980년대초 '시인통신'이라는 문화예술인 모임을 만들어 활동하면서 미술, 문학, 음악, 연극 등 분야를 막론하고

예술과 인문학을 오가는 폭넓은 크로스오버를 시도한 것이 1980, 1990년대 인사동을 예술의 중심지로 떠오르게 했다.

그가 컬렉터로서 본격적으로 나선 것은 1980년대 중반, 겸재 정선의 <단발령>을 구입하면서부터다.
그후 고암 이응노의 그림을 만났고 청관재 조재진 사장과 함께 고암의 최대 컬렉터가 되었다.
이뿐 아니다. 지금까지 20여년동안 민화, 조선의 서화, 도자기, 각종 공예품, 해외 작품 등 여러분야를 두루 섭렵했으며
특히 조선시대 전기부터 말기까지 작품을 고루 갖춘 그의 컬렉션은 이번 서예박물관의 소장품전을 통해 빛났다.

그리 길지 않은 시간에 구축한 비결은 무엇일까?
"보통의 컬렉터가 수중의 돈 천원에서 백원을 할애해 작품을 구입한다면 나는 가지고 있는 돈 백원에 30원을 더 빌려 130원을 작품에 '올인' 했다. 이것이 내가 남도다 빨리 좋은 작품을 수집하게 된 이유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수준 있는 컬렉션을 이루기 어렵다.
"컬렉터가 되려면 첫째 재력, 둘째 안목, 셋째 열정이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재력과 안목도 중요하지만 솔직히 나는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열정'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만큼 컬렉터에게는 열정이 중요하다"고 그는 덧붙인다.

그밖에 또 하나의 비결이 있다. 평소 아무 조건 없이 어려운 예술가들을 도운것.
그는 지난 20여년 동안 다양한 경로로 매달 수천만 원씩 예술가들을 후원해왔다.
그래서 설령 그가 가짜를 사도 상인들이 나서서 해결해 줄 정도다.

"나는 특별히 재력이 있어서 컬렉터가 된게 아니다.
3개를 사고 그중 2개를 팔아 하나를 지키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수 있다.
그러려면 좋은 안목이 있어야 한다. 좋은 컬렉션을 갖추기 위해 컬렉터는 평생을 두고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가 작품 수집에 이토록 열심인 이유는 무엇일까? 이에 그는 선문답처럼 "부끄러움을 아는 것이 문화다"라고 말한다.
그는 컬렉터로서 저평가된 작품의 진가를 알리고 제대로 자리매김할 임무를 느끼는데,
이런 자각이 열정의 원천이라는 것이다.

지금 그가 진력하는 것은 바로 '서예'다. 서예가 대표적으로 저평가된 분야라고 생각하는 그는
서예작품을 모으고 해외에 반출된 우리 전통미술품을 되찾아 오는데 '각고'의 노력을 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이 고미술 컬렉터가 해야할 일이라고 굳게 믿는다.
그런 뜻에서 아쉬운 대로 이번에 소장품전을 열기로 했던 것이다.

때마침 숭례문이 불에탄것이 결정적인 이유가 되었고 또 화재 이후 그에 대한 논의가 벌써 사그라진 것에 대한

안타까움이었으며, 이에 대중들에게 고미술과 거기에 어려있는 우리의 얼을 일깨우고자 하는 이유였다.

그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나에겐 젊은 시절부터 마음속 우상이 있다. 바로 서른한 살의 나이로 요절한 청년실업가 김동근 선생이다.
그는 전쟁 후 1955년 사재를 털어 폐허가 된 명동에 예술가들을 위한 복합문화시설 '동방문화회관'을 건립했다.
지금 그를 기억이하는 이는 거의 없지만 당시 그는 폐허 속에 다시 문화의 씨를 뿌리는, 그누구도 하지못한 일을했다.

지금 나는 그를 롤모델로 하여 인사동에 문화복합시설을 짓고 있다.
주말이면 5만 명씩이나 인파가 쏟아지지만 지금 인사동엔 뭐 하나 볼 것이 없다.
중국산 저질품이 거리를 메우고 원래 그곳에 있던 사람도, 화랑도 떠나고 없다.
문화예술은 사라지고 허깨비를 쫓는 구경꾼들만 몰리는 판이다.
그 인사동에서 다시 한번 문예부흥을 이루는게 나의 꿈이다.

" 지금의 그를 만든 것은 미술, 문학, 음악, 연극, 철학 등 분야를 막론하고 예술을 논했던 인사동 특유의 분위기와 거기에 서식했던 문화예술인들이다.
그래서 그런 분위기가 사라지는 것을 그는 누구보다 가슴 아파한다.
아직도 가슴 한 켠에 시인이 되고 싶은 꿈을 간직한 그. 가장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
전력을 다하는 그를보며 흉흉한 시대지만 그래도 '사람이 희망' 이며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심정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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