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일 구와바라 시세이 사진전 개막식에 가려고 아내와 함께 지하철을 탔다.

 

평소와는 달리 한산한 지하철이었는데, 취기 있는 나그네의 대금 소리가 처량했다.

구성지게 부는 ‘동백아가씨’가 매끄럽지는 않았으나 덜커덩 그리는 지하철 소리보다는 나았다.

박수까지 쳐 주며 분위기를 돋구는데, 광화문역에서 팔을 깁스한 강 민선생께서 타셨다.

 

반갑기도 놀랍기도 해 자초지종을 여쭈었더니 두 달 전, 발을 헛디뎌 오른 팔목이 골절되었다는 것이다.

선생님을 뵌 지가 엇 그제 같은데 벌써 두 달이 되었다는 것도 놀랍거니와 그동안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는게 부끄러웠다.

뭐 대단한 일한다고 인사동 소식도 접하지 못한 채, 그리 바삐 다녔는지 모르겠다.

 

이 무더운 날씨에 깁스하고 지내려면 얼마나 힘들까?

이 날도 인사동에 나왔다가 들어 가시는 길이라지만,

내일은 양산 계시는 방동규선생이 오셔서 또 나오신다는 것이다.

 

강 민선생은 몇 안 되는 인사동 터줏대감이시다.

변해가는 인사동에 가슴조리며 하루를 마다하고 인사동에 나와야 직성이 풀리는 분이다.

얼마나 인사동을 사랑했는지는 선생의 시 ‘인사동 아리랑’연작에서 알 수 있다.

 

또 한 분은 민속학자 심우성선생이다.

제주도에서 올라와 인사동 여관에 장기투숙하신지가 어느 듯 일 년이 가까워 온다.

싸게 파는 식권으로 끼니 해결하며 후배가 운영하는 술집 모퉁이를 사무실 삼아

인사동의 마지막 낭만을 즐기시는 분이다.

 

강 민선생이나 심우성선생 같이 인사동을 사랑하는 분이 과연 몇이나 될까?

다음 주 초에 서울로 돌아오면 만사 제켜 놓고, 두 선생님 모시고 식사 한 끼하고 싶다.

 


사진,글 / 조문호

 

 

 

 



 

 

 

오래전 어른들로 부터 ‘사진 찍으면 혼 빠진다’고 찍지 말라는 말을 종종 들어왔다.

어떤 연유로 그런 이야기가 나왔는지 모르지만, 처음 본 도깨비 상자 같은 요상한 기계에서

자신의 모습이 나오는 걸 보고 질겁했는지 모르겠다.

연세 많은 분일 수록 카메라에 대한 거부감이 많다는 것을 사진을 찍어오며 알았다.

 

갑자기 찍히는 사람들의 표정들은 세대별로 큰 차이가 있었다.

눈길이 마주치면 무조건 웃으며 눈인사를 하거나 때로는 너무 멋지다는 말도 건 내는데,

외국인이냐 내국인이냐 아니면 신세대냐 구세대냐에 따라 상반된 반응을 보인다는 것이다.

 

일부 내국인들에 비해 외국인들은 아주 긍정적인 자세를 취해 준다.

그리고 또 하나 흥미로운 것은 우리나라 사람들은 세대별로 정 반대의 반응을 나타낸다는 점이다.

10대가 아주 적극적이고, 20-30대는 긍정적인 눈길을 주는 반면, 40-50대는 다소 의아한 눈길로 냉소적인 표정을 짓는다.

그리고 60-70대에 들어서는 노인일수록 아주 불쾌한 감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찍지 말라고 신경질까지 낸다.

 

왜 우리나라 구세대들이 이렇게 지나친 거부감을 가지며 피해의식을 느끼는지 짐작은 된다.

평생 당하고만 살아왔기 때문이다.

정치적 권력의 폭력과 돈에 짓밟히고, 때로는 사람들에 속거나 사기당한 일이 한 두 번이 아니기 때문이다.

특히 죽이고 죽임을 당한 한국전쟁을 겪은 노인층일수록 더 심할 것이다.

그만큼 이유 없이 당하고 탄압받으며 살아왔기에, 일단은 사람을 경계하며 부정적으로 보는 습관이 체질화된 듯하다.

 

그래서 아는 분들이 아니면 노인들에게는 가급적 카메라를 들이 대지 않는다.

적절한 순간을 놓치기 아쉬워 찍었더라도, 사정을 털어놓고 양해를 구한다.

한 때는 찍지도 않았는데 시비를 걸어 와 종로경찰서까지 끌려 간 적도 있기 때문이다.

사실, 감추고 싶은 사생활을 추적하는 파파라치가 아니라면 너무 신경 쓸 필요가 없다.

시장바닥의 할머니까지 “초상권 침해야~”를 외치는 시대에 어느 간 큰 사진인이 남의 얼굴을

허락도 없이 상업적으로 이용할 사람이 있겠는가?

 

세월이 흘러 너도 나도 세상을 등지게 되면, 그 사진들이 어느 한 곳엔가 남아돌아

우리의 후손들이 지난 시절을 기릴 수 있는 또 하나의 역사적 장면이 될 수도 있는데 말이다.

 

아래 사진은 지난 7월16일 오후 무렵, 인사동 거리에서 스냅한사진이다.

그 날 인사동 거리에서 아내를 만났고, '아라아트'에서 전시 중인 정비파씨 내외분과 인사동 터줏대감 심우성선생도 만났다.

 

사진.글 / 조문호

 

 

 

 

 

 

 

 

 

 

 

 

 

 

 

 

 

 

 

 

 

 

 

 

 

 

 

 

 

수요일만 되면 별 볼일 없어도 인사동에 나가고 싶어진다.

전시장들은 새로운 작품들로 교체되고, 거리에선 반가운 인사동 사람들을 쉬 만날 수 있어

모처럼 인사동 기운이 충천하기 때문이다.

지난 27일엔 사진가 변홍섭씨와의 오찬약속을 수요일로 잡아두어, 일찍부터 작정하고 나올 수 있었다.
변홍섭씨는 정선같이 한적한 곳에서 여생을 보내고 싶다며 자문을 구해왔으나

내가 사는 곳은 이미 관광지화 되어 추천할 수가 없었다.

‘툇마루’에 식사하러 가서는 음유시인 송상욱선생을 만났고,

‘귀천’에 차 마시러 가서는 민속학자 심우성선생을 만났는데, '귀천'엔 빈 자리가 없었다

인사동거리에서는 사진가 이갑철, 육명심씨, 시인 강 민, 이행자, 서정춘씨, 소설가 구중관씨,

서양화가 안창홍, 이종송씨, 미술평론가 윤범모씨, 사진평론가 최건수씨, 무이도 예술촌장 정중근씨,

예당국악원 조수빈원장 등 많은 분들을 만났다.

평소 인사동거리에서 아는 사람을 만나기란 고작 한 두 사람에 불과한데,

짧은 시간에 이렇게 많은 분들을 만난다는 것은 그의 대박수준이다.

그러나 대개 술을 마시고 집에 가는 길이거나, 금주령이 내려 진 분들이 많아 술 한 잔 하자는사람이 없었다.

무더운 날씨의 낮 술에 취하면 힘들 것 같아 점심식사 때부터 사양했지만,
막상 그냥 지나치려니 맹숭하고 허전했다.
그래도 반가운 사람들을 많이 만났으니 여한은 없었다.

사진,글 / 조문호

 

 

 

 

 

 

 

 

 

 

 

 

 

 

 

 

 

 

 

 

 

 

 

 

 

 

 

 

 

 

 

 

 

 

 

 



 

심우성 한국민속극연구소 소장

 


[짬] ‘전통문화의 오늘과 내일…’ 펴낸 심우성 민속극연구소 소장

 

1974년 <남사당패 연구>(동화출판공사)가 나왔을 때 민속학계는 깜짝 놀랐다. 민속학 연구의 새 지평을 연 내용뿐 아니라 우리말 문장도 빼어났기 때문이었다. 지은이는 민속학자이자 1인극 배우인 심우성(81) 한국민속극연구소 소장이다. 그는 1950년대부터 남사당패에 관심을 두고, 60년대 본격적으로 이 분야를 파헤쳤다. 그는 평생 우리 민속놀이를 연구하고, ‘살아있는’ 동시대 공연예술로 만들어왔다. 그는 뛰어난 작명가다. 이름을 불러주자 전통예술은 꽃이 됐다. 장고·북·꽹과리·징이란 각각의 악기를 묶어 처음으로 ‘사물놀이’라고 이름 붙였다. 일본 말투인 막(幕)은 ‘마당’으로, 경(景)은 ‘거리’로, 농악은 ‘풍물’로 가다듬었다. 그는 뛰어난 광대다. 2001년 분단의 아픔을 그린 1인극 <결혼굿>, <쌍두아>로 국제적 명성을 얻었다. 2009년 일본 도쿄의 세계적인 인형극장에서 1인극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4·3 고개를 넘어간다>로 4·3의 실상을 알렸다. 지난해엔 세월호 희생자의 넋을 위로하는 <넋전 아리랑>을 만들었다. 심 소장은 최근 <전통문화의 오늘과 내일: 그의 눈물과 웃음>(답게)을 펴냈다. 스스로 발굴하고 알린 남사당패 놀이, 솟대쟁이패 놀이, 인형극 등 민속놀이와 예인들의 삶을 짚어보고, 우리 민속놀이가 나아갈 방향을 제시한 책이다. 지난 18일 서울 인사동에서 그를 만났다.

1970년대 ‘남사당패 연구’ 이어
이번에 처음으로 책에 담아
솟대패들이 창호지 인형 만들어
넋 위로하는 춤 ‘넋전’도 수록
전통은 어제에서 내일로 가는 것
통일 등 현재의 내용 담고 싶어


‘민속학 80평생’을 이끈 첫 단추는 춤이었다. “다섯살 때부터 할머니 따라 최승희 춤을 보러 갔어요. 현재 서울시의회로 쓰는 부민관에서 춤을 췄는데, 할머니 덕에 최승희 춤에 반했지요. 최승희의 남편 안막이 우리 아버지 선배입니다. 그래서 일제강점기 때 회현동 최승희 집도 자주 놀러 갔어요.” 최승희(1911~1967)는 우리 춤에 서구 무용을 접목했다. 칼춤과 부채춤, 승무 등을 현대화해 조선 제일의 춤꾼으로 불렸다. 최승희는 카프(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의 이론가 안막(1910~미상)과 함께 해방 뒤 북한으로 갔다.


최승희에 빠졌던 심 소장이 우리 전통문화에 빠진 건 당연했다. 공연예술계에 끼친 그의 발자취는 뚜렷하다. 오태석 극단 목화 대표는 우리 고유의 연극 문법을 찾는 데 힘이 된 분으로 심 소장을 꼽은 바 있다. “그분 덕분에 산대 극본을 접할 수 있었으니까요. 산대놀이꾼들이 인간문화재라고 불리기 이전의 순수한 형태, 퀴퀴한 체취, 넉살, 말의 힘 등이 살아있는 그대로를 만날 수 있던 게 심우성 선생이 해온 작업 덕이었거든요. (제가 1973년 만든) 작품 <초분>도 그분에게 처음 들은 말이었어요.”


심 소장 덕분에 산대놀이가 박물관의 박제가 아니라, 우리 곁의 공연예술로 되살아났다. 그런 심 소장이니만큼 이번 책에서도 ‘민속놀이가 왜 전승돼야 하는가’를 거듭 강조한다. “민속은 한마디로 ‘민간의 풍속’의 준말이다. 민속의 바른 뜻은 옛날의 풍속이 아니라 오늘의 일상생활 속에 살아있는 풍속을 말하는 것이다.”(250쪽) 그는 책 내용을 더 자세히 설명했다. “민속, 전통문화 하면 자칫 막혀 있는 옛날이야기로 알거든. 그런데 전통은 어제의 것이면서 내일로 흘러가는 물길이어야지, 옛날이야기로 끝나면 살아있는 게 아니에요. 그런 얘기를 하고파서 이 책을 쓴 거지요.”


심 소장은 2007년 방북 때 봉산탈춤, 강령탈춤을 직접 보고 왔다. 그런데 실망했다. “내심 약간 기대를 했는데, 북한에서도 옛날 춤을 추고 있었어요. 죽은 춤을 추는 것은 남쪽이나 북쪽이나 똑같아서 슬픕디다. 남한에서도 아팠지만 북한에서도 아팠어요. 그건 흉내 춤이에요.” 여기서 심 소장은 친구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의 말을 인용했다. “나보다 한 살 많은 백기완은 나를 ‘우새이’(우성이)라고 불러요. 백기완은 늘 옛날 탈춤을 추지 말고 오늘의 탈춤, 통일탈춤을 추라고 소리치고 다녀요.”


사실 심 소장은 백 소장 때문에 남산 정보기관에 몇 번이고 불려갔다. 1970년대 서울 명동의 3층 건물에 한국민속극연구소 사무실을 열었을 때다. “백기완이 사무실에 와서 ‘야, 이 도적놈의 새끼야, 너 혼자 쓰냐? 나도 같이 쓰자’고 합디다. 그러곤 한국민속극연구소 간판 위에다 백범사상연구소 간판을 써붙였어요. 그랬더니 정보기관에서 불러 ‘같은 사무실을 쓰는 백기완이 뭐 하는 놈인지 털어놓으라’고 했어요.”


그는 1950년대부터 남사당 놀이에 관심을 가졌다. “저한테 남사당 놀이를 얘기해준 분이 남운용(남형우), 양도일, 송순갑 세 사람이에요. 이분들이 ‘우리는 남사당패하고 솟대쟁이패 두 패한테 미쳐 여기 붙었다 저기 붙었다 하면서 어린 세월을 지냈다’고 하더라고. 남사당패 연구는 1970년대에 책을 냈지만, 솟대쟁이패 연구는 이번에 처음으로 이 책에 담았어요. 솟대놀이는 경남 무형문화재로 지정됐고 요즘 진주에 강연하러 여러 번 갔지요.”


심 소장은 남사당, 솟대쟁이 연구뿐 아니라 ‘넋전’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넋전이란 게 뭔가 하면 솟대패들이 창호지로 넋전이라는 종이인형을 오려서 넋을 위로하는 춤을 춘 거거든요. 옛날 넋전은 절집하고 무당집에서 많이 했는데, 요즘은 전라도에서 굿할 때만 남아 있어요.” 그가 퍼뜨린 넋전은 한국뿐 아니라 일본에서도 성행하고 있다. “홋카이도부터 규슈 섬들까지 일본 전체에 가르치지 않은 곳이 없어요.” 팔순의 심 소장이 꼭 해보고 싶은 공연이 있다. “요즘 대학생들하고 함께 넋전을 무대에 올리고 싶습니다. 오늘의 젊은이들도 통일에 대한 생각을 해야 하지 않을까요?”


[한겨레신문] 글 손준현 기자, dust@hani.co.kr, 사진 김경호 기자

 

인사동 '갤러리3'에서 전시된 박미화씨의 '자장가'전에서  
민속학자 심우성선생과 연극인 최일순씨가 펼치는 진혼 퍼포먼스가 열렸다.

 

전시 마지막 날인 4월24일 오후7시 30분부터 8시까지

진행된 퍼포먼스에는 심철종씨 등 약 50여명이 참가했다.
세월호에 희생된 어린 영혼들을 잠재우는 자리는 숙연했다.

이 날 따라 세월호 1주기 추모행사의 시위행렬이 인사동으로

난입한다는 정보가 있었던지, 인사동 주변을 경찰병력들이 포진했다.
인사동입구에 처음으로 포리스라인이라는 벽이 쳐지기도 했다.

마치 '자장가' 진혼 퍼포먼스를 위한 보호막처럼 느껴졌다.


사진,글 / 조문호

 

 

 

 

 

 

 

 

 

 

 

 

 

 

 

 

 

 

 

 

 

 

 

 

 

 

 

 

 

 

 

 




 

 

지난 7일,  강민선생을 뵙기위해 인사동으로 나갔다.
일에 빠져 약속시간을 20분이나 늦어 송구스러웠다.

 

강 민, 김승환선생과 ‘포도나무집’에서 식사하며 딸기 술도 마셨다.

 

이차로 간 ‘유목민’에서는 이행자시인과 심우성선생,

장경호씨를 만났고, 늦게는 정기영, 허미자씨도 왔다.

 

해삼과 굴에다 밑반찬으로 더럽 까지 나와 술상이 그득했다.

낯 술에 약한데다 막걸리를 데워 먹었더니, 금세 올랐다.
술 취하면 돌아다니는 버릇이 발동하기 시작했다.

 

김주대시인의 문인화전과 조성제씨의 ‘우포늪’전에 들렸다.
인사동거리에서 김명성, 김주대 시인과 박진화 화백도 만났다.

늦게 간 ‘무다헌’에서는 너무 취해 모두 잊어버렸다.
얼마나 잤는지, 눈을 떠 보니 배성일씨가 와 있었고, 장경호씨는 취해 있었다.
주인장 강고운시인을 갑질 행세한다며 나무라고 있었다.

요즘은 갑의 수난시대다.
독수리도 까마귀 무리에 쫓기는 시대란다.
집에서도 갑보다 을이 더 편하던데, 왠 갑질 논쟁일까?

사진,글 / 조문호

 

 

 

 

 

 

 

 

 

 

 

 

 

 

 

 

 

 

 

 

 

 

 

 

 

 

 

 

 

지난 3월5일 정오무렵, 시인 강 민선생의 생일을 축하하는 오찬회가 인사동 한정식식당 '가회'에서 열렸다.
도서출판 '답게' 대표 장소임씨가 마련한 이 자리에는 강 민선생을 비롯하여 민속학자 심우성씨, 소설가 김승환,

남정현, 김이연씨, 시인 이행자, 박정희, 정두리씨가 함께해 선생의 생일을 축하하며 정담을 나누었다.

 

 

 

 

 

 

 

 

 

 

 

 

 


정영신,조문호의 ‘장에 가자’ 전람회가 이제 막바지에 접어들었다.

전시가 한 달간이나 이어져 지루한 감은 있지만, 언론사 나팔 덕택에 관람객은 꾸준했다.

 

지인이나 재방문 하신 분으로는 서양화가 문영태, 정복수, 장경호, 이길원씨 미술평론가 최석태씨

조각가 이재욱씨, 도예가 김용문씨, 시인 강 민, 김신용, 조준영씨, 시인 김수영씨 미망인 김현경선생,

‘눈빛출판사’ 이규상, 안미숙부부가 재방문 하셨고, 민속학자 심우성선생께서는 매일같이 출근하셨다.

성원해 주신 모든 분들에게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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