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동 아리랑’은 강 민 선생께서 긴 세월 인사동을 드나들며 쓰 오신 시의 제목입니다.
그 주옥같은 시편들을 모은 시집 “외포리의 갈매기”가 6월30일자로 출간되었습니다.
지난 7일 오후1시 무렵, 인사동 ‘포도나무집’에서 강민선생님을 만나 뵙고 시집을 받았습니다.

심우성, 김승환, 이행자, 이애정씨가 함께 하여 시집출판을 축하했습니다.

그 중 시 한편을 소개합니다.

인사동 아리랑 1
-비-

인사동을 걷는다.

스산한 경인년 여름, 비는 멎지 않았다
찻집[귀천]의 주인 목순옥여사도 떠났다.
그녀는 거기 하늘나라에서
그리운 천상병시인 만나
이 세상 소풍 끝내고 아름다웠다고 말하였을까

세월의 이끼 낀 인사동을 걷는다

흐르는 세월처럼
눈물처럼
비는 멎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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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일,  선생님들과의 약속으로 서둘러 인사동에 나갔다.
정오무렵, 원로사진가 이명동선생을 만나 뵙고 오찬을 함께했다.
세상 살아가는 이런 저런 말씀 듣느라 금방 두 시간이 지나버렸다.
연세에 비해 기억력이 너무 좋아, 잊고 있었던 옛 일들을 상기시켜 주셨다.
강 민선생님과의 약속으로 서둘렀으나 아쉬움이 남는 자리였다.

약속장소인 포도나무집에는 시인 강 민 선생을 비롯하여 소설가 김승환선생,
민속학자 심우성선생 등 인사동 터줏대감들을 두루 만나 뵐 수가 있었다.
강 민선생의 새 시집 ‘외포리 갈매기’가 이 달 하순에 출간된다는 말씀도,
심우성선생으로 부터 천상병선생 산소에서 찍은 사진원고 부탁도 받았다.

아마 잡지사로 부터 천상병선생과 관련된 원고 청탁을 받으신 모양이었다.  

 

낯 술에 약한 터라 막걸리 몇 잔에 취기가 올랐다.
한 낯의 햇살이 내리쬐는 인사동 거리는 온 몸을 나른하게 만들었다.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과 거리풍경을 찍었으나, 정겹기보다 왠지 낯설게 느껴진다.
장삿꾼들의 얄팍한 상술만 난무하고, 내 마음의 인사동은 보이지 않았다. 
이틀 뒤 정선으로 떠날 생각이었으나, 일정을 하루 앞 당겼다.

 

 

 

 

 

 

 

 

 

 

 

 

 

 

 

 

 

 

 

 

 

 

 

 


봄바람 부는 인사동에 막사발 2014개가 전시되고 있다.

 

20여 년 동안 막사발만 고집해 세계에 퍼트려 온 도예가 김용문씨의 전시다.
이번 전시의 색다른 점은 터키제자들과 함께, 오늘을 의미하는 2014개를 구웠다는 점이다.
오는 18일까지 열리는 막사발전의 중요한 정보는 한 점당 5만원이라는 점과 개수가 많아

엄청 좋은 작품들이 많다는 점이다.

 
김용문씨는 5년 전 부터 터키 국립 하제테페대학교 미술대학에서 한국 도예를 가르쳐 왔다.

그래서 제자 도예가 (비르칸 악차, 투바 외즈칸, 에스라 아칙괴즈, 무하메트 테케신) 네 명을

데려왔고, 함께 전시도 하게 된 것이다.

그동안 막사발 실크로드라는 이름으로 중국 산동성과 터키 앙카라 등지를 떠돌아 다녔으나

지난 해부터 전라북도 완주에 정착해 “세계 막사발 미술관”을 만들었다는데,

한 번 쯤 구경 갈 기회도 만들었으면 한다.

지난 12일 오후4시부터 ‘아라아트’3층에서 열린 개막식은 박인식씨 사회로 진행되었다.

무세중, 무나미선생의 행위예술과 국악연주가 이어졌으며, 윤여준, 민영 선생의 축사도 있었다.

개막식에 나오신 분으로는 참여 작가를 비롯하여 민 영, 심우성, 윤여준, 무세중, 서정춘, 송상욱,

김신용, 윤승길, 이청운, 박인식, 조준영, 이명희, 무나미, 편근희, 임경일, 노광래, 정영신, 전인경,

곽명우, 장경호, 강선화, 임헌갑, 황예숙, 박상하, 최일순, 명지혜, 유근오씨 등이다.

그런데 명단 적을 때마다 난감한 것은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것이다. “벌써 치맨가?”

 

 

 

 

 

 

 

 

 

 

 

 

 

 

 

 

 

 

 

 

 

 

 

 

 

 

 

 

 

 

 

 

 

 

 

 

 

 

 

 

 

 

 

어려움에 처한 김명씨를 돕기 위해 인사동 예술가들이 발 벗고 나섰습니다.
가난하기 그지없는 예술가들이지만 김명성씨의 안타까운 소식을 접한 분들이

하나같이 주머니를 털어 모금운동에 동참하고 있습니다.

처음 시작할 때만 해도 액수보다는 평소에 가까웠던 지인들의 마음을 모우려 했으나

몇 일만에 모금액이 무려 천만 원에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이는 무엇보다 인사동예술가들의 따뜻한 마음에서 우러났겠지만,

평소에 김명성씨가 그들을 얼마나 사랑하며 거두었는가를 알 수 있는 방증이기도 합니다.

사실 인사동에 김명성씨가 마지막 희망입니다.
오랜 동안 인사동이 전통문화와 예술이 살아 숨 쉬는, 예술가들의 보금자리 역할을 톡톡히 해왔습니다.

그러나 몰려드는 관광객으로 인해 전통문화보다는 돈이 앞서는 상업지구로 급변했습니다.

그렇지만 김명성씨는 사재를 털고 남의 돈까지 빌려가며 인사동에 지하4층, 지상5층의 대형 전시문화공간을 만들었습니다.

인사예술제(가칭)를 비롯하여 인사문화상(가칭) 창설을 준비하는 등, 인사동이 문화예술로 거듭나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이며 인사동을 드나드는 많은 문화예술인들을 물심양면으로 도아 왔습니다.

주위에서 돈 되는 호텔이나 백화점을 만들지 가망 없는 전시공간이 무어냐고 나무랐지만 개의치 않았습니다.

그런 저런 일로 주변에 그를 시기하고 모략하는 사람들이 많이 생겼던 모양입니다.
작은 물방울이 강을 이루듯, 그가 다시 현장에서 일 할 수 있도록 인사동 예술가들이 힘을 모아야 합니다.


지난 6일 제일 먼저 소설가 박인식씨가 성금을 기탁함으로서, 심지에 불을 붙였습니다.

정영신, 전인경, 전활철씨 등 가까운 분들의 동참아래 카페 '인사동 연가' 와 카톡으로 소식을 전했지만,

많은 예술가들이 아날로그 세대라 소식을 접하지 못한 분들도 많았습니다.

대부분 어렵게 사는 분들이라 돈 내라는 전화를 못드려 망설이는데, 원로시인 강민선생으로 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원로선생님들 중에 유일하게 강 민선생만 카페도 보고 카톡도 이용하는 분이셨습니다.

인사동 '포도나무집'으로 나갔더니 기꺼이 동참하겠다며 준비해 온 성금봉투를 주셨습니다.

정말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이었습니다. 강민 선생의 참여에 힘 입어, 술 한 잔 마신 김에 여기 저기 전화했지요. 

황명걸, 민 영, 채현국, 임재경, 송상욱선생을 비롯하여 서정춘, 이청운씨 등 많은 분들이 동참하겠다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포도나무집'에 강 민선생을 만나러, 친구 분들이 갑자기 들어 닥쳤습니다.
소설 쓰시는 김승환씨, 한국화가 홍용선씨, 서양화가 강녹사씨, 진부령미술관장으로 계시는 전석진선생께서 오셔서

함께 술 한 잔 나누었습니다.
꽃피는 4월이 되면 '진부령미술관'에서 홍용선선생께서 전시한다는 말씀에, 노래'봄날은 간다'를 질질 짤며 불렀으니

술만 마시면 정말 눈치코치도 없습니다. 안절부절하는 마누라 표정이 눈에 선합니다.

'포도나무집'을 나오는 길목에서 심우성선생을 만났고, '허리우드' 찻집에서는 채현국, 임재경선생을 만나 성금을

받기도 했습니다.  인사동 거리에서는 중앙일보에서 일하다 제주도로 삶의 터전을 옮긴 사진가 최재영씨도 우연히 만났습니다.

 

모두들 반가웠고, 힘을 실어 준 하루였습니다.

 

 

 

 

 

 

 

 

 

 

 

 

 

 

 

 

 

 

 

 

 

 



제주 사시는 심우성선생께서 몇 달 전에 인사동으로 나오셨다.
제주에 대궐 같은 집과 사모님을 남겨두고, 인사동에서 떠도는 이유가 뭘까?
고향처럼 포근했던 인사동이 눈에 밟혀, 아름다운 섬도 귀양 온 것 같았단다.

마침 종로경찰서 옆 좁고 외진 골목에 있는 '푸른별이야기'
쪽방을 집필실로 정하고, 식사는 '화목식당'에서 잠은 여관에서 주무신단다.
낮에는 집필실에서 지내며 오랜 친구들도 만날 수 있지만,
기나긴 겨울밤은 외로워 어떻게 지내셨을까?

팔순 노년의 지칠 줄 모르는 방랑벽을 누가 말릴까마는
마음대로 살 수 있는 그 용기가 가끔은 부럽다.

 

 

 

 

 

 

 

 

 




요즘 인사동에서 5,000원짜리 한 장으로 밥 먹을 곳은 없다.
그러나 3.000원으로 다양한 음식들을 선택할 수 있는, 딱 한 집이 있다.
점심때는 자리가 없을 정도로 붐비는 그 식당 이름은 '화목식당'이다.
위치는 조계사 맡은 편 템플스테이 빌딩에서 종로 방향으로 100m쯤
내려가서 '만리장성'이란 중국집 옆에 있다.

단, 삼천원에 식사를 하려면 미리 식권을 30장 구입해야 하는
애로는 있지만, 인사동에서 자주 식사하는 사람이라면 별 것 아니다.
그래서 그 곳은 주변에서 일하는 사람이나 아는 사람들이 많다.
그 곳의 대표적 단골손님으로 민속학자 심우성선생도 계신다.
우연히 그곳에서 만난 심우성선생께 가장 맛있는 음식을 물었더니,
시골청국장보리밥을 강력하게 추천하신다.

물론 탑골공원이 있는 낙원동에 가면 저렴한  밥집들이 많지만,
음식의 차원이 다르다.
찰밥에 정갈한 밑반찬과 구수한 된장국은 평소 집밥 그대로다.
마침 찾아간 시간이 어중간해 밥 먹을 시간이 아닌데도
주인장 김화영(56)씨는 '식사하라'고 성화다.
배가 불러 콩나물탕에 소주 한 잔 얻어 마셨는데, 인정까지 만점이다.

 

 

 

 

 

 

 

 

 

 

 



지난 3일 정오무렵, 인사동으로 나갔다.
정초에는 장이 서지 않아 자료 정리하느라 몇 일 동안을 컴퓨터와 씨름했는데, 뜻밖의 강 민선생님 부름에 얼씨구나 한 것이다.  약속한 ‘포도나무집’에는 강 민선생님과 조준영씨가 자리하고 있었고, 뒤늦게 심우성선생님도 오셨다.

강 민선생님과 심우성선생님은 한 살 터울의 친구인데도, 내가 보기에는 부자지간 같아 보였다.


그동안 조준영교수는 학회 일로 스페인을 다녀오셨다고 한다.
틈틈이 가족들 관광시키느라 힘들었는지, 눈의 실핏줄이 터져 한동안 고생했단다.
그리고 오래전부터 ‘푸른별이야기’ 안방을 집필실로 쓰는 심우성선생님께서는 지난 년 말 출판하였다는

‘통일 아리랑’이란 책을 주셨는데, 잠자리가 마땅치 않아 인사동 부근의 여관에서 투숙하신다고 하셨다.
무슨 사정으로 이 추운 날 가출해 고생하시는지 모르겠다.
옛 시절의 방랑벽이 도졌는지 모르지만, 인사동을 고향처럼 생각하시는 분인지라 그리 불편한 기색은 없었다.

인사동 구석 구석을 살피고 다닌 선생님 덕분에 최근의 따끈따끈한 인사동 정보도 입수 할 수 있었다.

조계사 맞은편, 농협 윗 골목에 ‘화목’이란 식당이 있는데, 한끼에 3,000원을 받는단다.
땅값 비싸기로 소문난 인사동에서 3,000원짜리 식사가 있다는 말에 귀가 번쩍 띄었는데,
"그냥 들어가면 5,000원을 받으니, 사전에 식권을 구입해야 한다"며 식권까지 보여주셨다.
90,000원을 주고 식권 30장을 한꺼번에 구입하는 애로는 있지만, 일단 음식이 먹을 만 하다는 것이다.
가까운 시일 내에 한 번 먹어보고, 블로그에 상세하게 소개할 작정이다.

2차로 ‘노마드’로 자리를 옮겼으나 대문이 걸려, 옆 커피집에서 기다려야 했다.
오후5시가 지나서야 자리를 옮길 수 있었고, 김명성씨와 권영진씨가 차례로 나타났다.

'아라아트' 김명성씨는 신특수씨의 대규모 전시 신청을 받고, 빈 자리가 없다는 반가운 고민도 했다. 

 

요즘은 낯 술에 영 맥을 못 춘다.

점심 때 마신 소주 탓인지 몸이 힘들어 더 이상 버텨 낼 수가 없었다.
지난번 한정식선생님과의 오찬회에서도 백세주에 맛이 가, 온갖 주정을 부리다 결국 그 이틀 날 자리에 드러눕지 않았는가.

 

"백세주가 내 한테 쥐약인줄 알민서도 마신 내가 미친넘이지!
새해 다들 몸조심하시고, 술도 에껴서 오래~오래~ 무입시더~"

 

 


 

 

 

 

 

 

 

 

 

 

 

 

 

 

 

 


[스크랩]특급뉴스 / 구중휘


 공주가 낳은 ‘민속학자’이며 ‘1인극배우’인 심우성 옹(81세)을 서울 관훈동 ‘푸른별 주막’ 문간방 ‘극단 서낭당’에서 만났다.

처음 만나기로 약속한 시간은 2014년 1월 5일 오후 12시 30분, 장소는 종로경찰서 앞이었다. 그러나 실제는 약속 시간보다 20여분 빨리 그 장소에 도착, 전화를 걸게 되었다.

마침 앉을 만한 의자가 있어서 편하게 기다리게 되었는데 마침 지나가던 두 아가씨가 다가와 “종로경찰서가 어디냐?”고 물었다. 외국인 학생이었다. 아가씨가 갈 때는 한국말로 “감사 합니다”라고 했다. 심우성 옹이 지금 머물고 있는 ‘푸른별 주막’은 인사동 바로 거기였다.

 

 

 

심 옹은 수염을 기르고, 지팡이를 짚고 있었다. 1934년생이니 우리나라 나이로 81세이다. 그러니 당연한 일이리라. 그러나 눈빛은 형형하고, 세상을 꿰뚫고 있었다.

구불구불한 골목을 돌아서 간 곳이 ‘푸른 별 주막’이었다. 원래 이 집은 제자인 최일순이라는 분이 제공했다고 한다.

원래 10여 평이 될까 말까한 이 작은 집은 이름 그대로 주막인데, 마침 일요일이어서 그런지 영업장임을 느끼지 못했다.

점심을 먹고 돌아와 집에 돌아와, “이 집이 얼마나 가겠소?” 하고 물었더니 현재 소유자인 제자가 7억원에 구입했다고 한다.

심옹이 머물고 있는 곳은 ‘푸른 별 주막’ 문간방으로 1평 정도가 되지 않을까 싶었다. 그래도 책상과 의자, 그리고 책장들로 배치되어 있어서 집필하기에는 적절해 보였다. 마침 책상 위에는 작성하던 원고가 놓여 있었다.

 

 

 

 그러나 잠을 잘 수 있는 공간은 없었다. 거기서 멀지 않은 곳에 숙소가 있다고 했다. 그곳도 이명선이라는 제자가 제공했다고 한다.

서울을 떠나 공주를 거쳐 현재는 제주도에서 살다가 10여 년 만에 돌아왔는데, 주위 사람들이 잊지 않고 있는 듯하였다.

이 외에도 친구인 전 윤보선 대통령 둘째 아들도 “자기 집에 있으라”고 권유한다고 한다. “마음이 편하지 않다”고 사양했으나, 1주일에 한 번 정도는 ‘푸른 별 주막’을 찾아온다고 한다.

 

 

현재 심우성 옹은 출판사 민속원과 작업을 하고 있었다. 《한국 민속학의 기억과 기록》[2013. 8. 20]과《통일 아리랑》[2013. 12. 30]은 작년에 작업을 끝낸 성과물이었다. 앞의 것은 직접 쓴 것이고, 뒤의 것은 엮은 것이었다.

《한국 민속학의 기억과 기록》은 2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처음 부분이 민속학자[이능화, 손진태, 송석하]를 다음 부분이 민속학의 발자취와 사상적 배경 등을 논의하고 있다.

‘조선학의 선각자 이능화’, ‘방법론의 개척자 손진태’, ‘조선 민속과 송석하’ 등이 논의의 대상이었다.

심옹은 우리나라 민속학의 본격적인 출발점을 1927년[《계명》제19호]으로 보았다. 이능화의 《조선무속고》와 최남선의《살만교차기》가 실렸기 때문이었다.

인터뷰 마지막 단계에서 앞으로 민속학의 미래와 방향을 물었다. 그런데 답변은 의외였다. “지금 열심히 고민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원로 학자가 아직까지도 ‘모색 단계’라는 말씀은 물론 그대로 받아드릴 사람은 없을 것이다.

다만 끊임없이 문헌적 연구와 현장 확인 등을 통한 정리 단계의 방향 모색이라고 보아지기 때문이다. 한국 민속학의 기억과 기록》의 후반부 ‘문화와 민중의식’에서 민속학의 모색이라는 열기가 느껴진다.

그러나 이러한 심옹의 글들은 새로이 작성한 것이라기보다 그동안 지면을 통하여 피력한 것들을 종합 정리한 것이라고 해야 할 듯하다.

《통일 아리랑》은 심옹이 엮은 책이다. 역시 총2부로 구성되었는데, 제1부는 학자들의 논문이고 제2부는 각 지역의 아리랑 모음집이다.

논문은 진용선의 ‘정선 아리랑의 보존과 전승’, 서정매의 ‘밀양 아리랑 보존의 필요성에 관한 제언’, 박병훈의 ‘진도 아리랑의 유래와 현황’, 최창호·홍강성의 ‘라운규와 수난기 영화’ 등이다.

대표적인 아리랑이 정성·밀양·진도에 있고, 세상에 널리 알려진 계기를 만든 것이 라운규라는 것을 보여 주고 싶었다고 짐작된다.

제2부는 심옹이 보는 아리랑과 신경림, 김연갑, 조규익·조용호 등이 찾아 나선 아리랑 관련 글들이다. 심옹이 《통일 아리랑》을 엮은 것은 결국 아리랑의 사랑 때문이다. ‘시작의 이야기’에서 쓴 것처럼 외형적인 책의 묶음이라기보다는 그 ‘이전에 마음 깊이 통일하고 싶은 아리랑’이라고 힘을 주었다.

그는 ‘일본군 위안부 아리랑’과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여, 4·3 고개를 넘어간다.’ 등의 1인극을 올린 바 있다. 사석에서 들은 바로는 ‘본인이 처음 우리나라 지도에 파란색을 칠한 깃발을 1인극에서 사용했다’고 한다.

그러면 민속원과 연관하여 얼마 동안 무슨 내용을 집필하려는가를 물었다. 그랬더니 민속원 홍기원 사장과는 오래 전부터 알던 사이인데, 심우성 옹이 내고 싶은 책이 있다면, 아무 이유 없이 모두 내주겠다고 했다고 한다.

그리고 “현재 작업 중인 것은 민속학 관련 수필집으로 총 60꼭지로 구상하고 있는데, 이미 30여 꼭지를 썼으며, 2월중에는 나오지 않을까 한다”고 밝혔다.

심옹은 매일 원고를 쓰고 있고, 그 원고의 일부는 어느 잡지(제목은 잊어버렸다)에 연재하고 있었다. “이렇게 좁은 연구실에서 자료도 없는데 어떤 방식으로 글을 쓰시냐?”고 물었다.

그는 태어나기만 공주에서 했지, 사실은 서울 사람이다. 서울의 민속현장을 체험으로 겪었다는 이야기이다. ‘기억’과 ‘현장 확인과 자료[주로 사진]’를 통하여 글을 쓰니 생동감이 있다고 보여 진다. 기대가 된다.

언제까지 서울에 머물 지에 대한 답변은 듣지 못했다. 작업과 관련된 일정일지도 모른다. 헤어지면서 그는 “이제 집도 자주 찾아와서 만납시다”고 웃었다.

 

 

여기서 한 가지 첨가해 둘 것이 있다. 필자는 심우성 옹에게 제안을 하나 했다. 백제 기악에 관한 책을 하나 내자는 것이었다.

백제 기악의 연구는 심옹 부자지간에 시작하여 일단락을 지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기악 탈은 심옹의 아버지 소민 선생이 만들었다. 그리고 ‘1인극 배우’답게 백제 기악을 복원하여 무대에 올리는 데까지 성과를 올렸다.

보다 구체적으로 이야기하자면, 612년 일본에 전수한 백제 기악의 일본인들의 발전 시켜 나간 과정과 정창원에 소장된 탈을 중심으로 우리나라에서 복원한 시대까지이다.

612년 백제기악이 중국 오나라 배워온 것이라면, 그 이전 즉 중국에서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하는 규명이 남아 있다.

여기서 아쉬움이 남는 부분이다. 한국에서 일본으로, 일본에서 한국으로 온 과정을 모색한 것이 심우성 옹이 엮어낸 성과이다.

그러나 중국에서 한국으로 오고, 천축[인도] 등 서역에서 중국으로 오는 과정 등은 아직 밝혀내지 못한 부분이다. 이 부분은 필자가 2012년 국제학술대회에서 발표한 바 있다.

1) a 서역에서 중국으로, b 중국에서 백제로, c 백제에서 일본으로 간 경위와 내용을 정리하고, 2) [현재 일본에서 진행되는 백제 기악을 바탕으로 복원된] 우리나라에서 무대에 올려진 백제기악에다가 서역에서 중국까지의 영향도 넣어서 보다 풍성하게 할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종합적인 백제 기악 연구가 나와야 한다고 본다. 그 책의 구성은 제1부 현재까지 복원되었거나, 복원될 백제 기악, 제2부 서역에서 중국을 거쳐 들어온 백제기악[구중회], 제3부 일본으로 건너가서 다시 우리나라로 돌아온 백제 기악[심우성] 등으로 묶어야 한다.

우리는 책[종합본 백제기악]을 내기로 약속했다. 하여튼 심우성 옹의 서울 생활은 원로 학자가 어떤 자세로 학문을 대하여야 하는 것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더욱 건승하시고 하는 정리 작업이 순조롭게 진행되기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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