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동 터줏대감이신 시인 강 민, 소설가 김승환, 민속학자 심우성선생께서 모처럼 인사동에 나셨다.

‘툇마루’건물 1층에 새로 생긴 '나주곰탕'이 괜찮다며, 세 어르신께서 오찬모임을 가진 것이다.

복분자를 반주로 맛있게 드셨는데, 심우성선생은 다음 달 넋전공연을 앞둬 그런지 기분이 좋아 보였다.

그 날은 돈을 부쳐왔다며 선생께서 밥 값을 내셨다. 사실 세 분 중에는 주머니 사정이 제일 낫다.

여관비나 식권을 대주는 후배도 있고, 원고료도 가끔 들어오기 때문이다.

식사가 끝난 후, 옛 날에 즐겨 다니신 인사동 술집들은 어디였는지 여쭈어봤다.

80년대 중반은 ‘실비식당’이나 ‘하가’였지만, 그 이전 선생님들께서 다니신 곳이 궁금해서다.
관철동을 주 무대로 오가던 문인들이 70년대 후반부터 하나 둘 인사동으로 옮겨왔으나,

갈만한 술집은 그리 많지 않았다고 한다. 한 참 뒤에는 천상병시인의 부인께서 운영한 찻집 “귀천”이나

“누님손국수”에 자주 다녔고, 그 밖에 '사천집', '이모집' 등이 기억난다고 하신다.

‘인사동 사람들’에서 커피 한 잔 시켜놓고 시간죽이다, 심우성, 김승환선생은 먼저 들어가셨다.

강민 선생따라 술집을 찾아나섰으나 ‘유목민’은 아직 문이 걸려있고,‘푸른별 주막’은 청소가 한 창이었다.

그래도 모퉁이에 자리 잡아 막걸리와 노가리를 시켰다.
물 뿌려 빗질 한 후라 먼지 냄새가 자욱했지만, 오랜만에 맡는 먼지 냄새에 옛 생각이 왈칵 밀려왔다.

80년대 ‘실비집’에 들려 청소를 지켜보며 술벗들을 기다리던 생각이...

그 때나 지금이나 인사동을 찾는 예술가들은 벗이 그리워 인사동에 나올게다.
예전에는 핸드폰이란 게 없어, 무작정 나와도  벗들을 만날 수 있었지만,

지금은 전화통을 몸에 달고 다니지만, 더 만나지지 않는 게 현실이다.

상대를 배려한다지만, 어쩌면 마음의 벽이 두터워졌는지도 모르겠다.

강 민 선생도 술이 고파 인사동을 배회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그리워서일게다.
인사동에 그 많은 술집들이 널렸지만, 굳이 문 닫힌 뒷골목을 배회하는 것도,

행여 반가운 사람이라도 만날까하는 막연한 그리움 때문이다.

낭만은 사라지고, 인정이 메말라가는 인사동, 그 때 그 사람들이 그립다.


사진,글 / 조문호




















술 생각이 간절하던차에, 화가 장경호씨로 부터 전화가 왔다.
제대하고 돌아 온 아들 만나러 나왔으니, 술 한 잔 하자는 이야기였다.
‘유목민’은 문이 잠겼다기에 ‘포도나무집’으로 달려갔다.
과메기안주로 술 한 잔했는데, 소주가 입에 짝짝 달라붙었다.

요즘 장경호씨는 전시가 닥쳐 그림도 그려야 하지만,
방 구하러 서울 곳곳을 살피는데, 집구하기가 만만치 않단다.
100호 정도의 그림을 그릴 수 있는 넓은 공간이 필요하지만, 돈이 적기 때문이다.
의외로 경기도 지역보다 불광동이나 구파발 지역이 저렴하다고 했다.
그런데, 막상 집을 구하고 보니, 전세가 빠지지 않는 다는 것이다.

빼도 박도 못할 형편이지만, 사돈 남 걱정하고 있었다.
없는 놈이 없는 놈 처지 안다더니, 느닷없이 돈 봉투를 내민 것이다.
이미 작심한듯해 거절치는 못했지만, 나중에 돌려 줄 생각이다.
얼마나 가슴이 먹먹하고 편치 않은지, 계속 술만 마셨다.
뒤늦게, 식사하러 오신 ‘심우성선생도 만났다.

담배 피우러 골목에 나갔더니, 새로운 밥집 하나가 생겼더라.
상호가 “꽃, 밥에 피다”였다. 이름은 예쁘지만, 식당 이름으론 좀 그렇더라.
맛보다 멋을 더 좋아하는 젊은이를 겨냥한 듯싶었다.
‘무다헌’으로 자리를 옮겨 마시다, 인사동 밤거리를 쏘다니기도 했다.
추운 날씨 탓인지, 불 빛 탓인지, 인사동이 낯설어 보였다.

마치 이국의 밤거리를 걷는 듯, 허전하고 외로웠다.
에디뜨 피아프의 ‘사랑의 찬가’가 더 애절하게 들리더라.

사진, 글 / 조문호





















몸이 아픈 강 민시인은 단골식당에서 밀려남을 슬퍼하고,
음유시인 송상욱씨는 낙향하자는 사모님 채근에 슬퍼한다.


덩달아 심우성, 김승환선생까지 인생의 무상함을 슬퍼한다.

그렇게 하나 둘 떠나가고, 누군가 그 자리를 메우는 게 세상이치지만,
인사동 영혼과 그 낭만을 이을 자가 없으니 가슴 아프다.

‘툇마루’ 비빔밥으로 허기 메우고, ‘인사동 사람’ 맥주로 시름 달랬다.



인사동 / 2015, 10, 6

사진, 정영신 조문호 / 글, 조문호











































 

 

심우성선생께서 특별출연한 '양혜경의 통일 결혼 굿'[연출:김태수]이
지난 8월28일부터 30일까지 대학로 '예술 공간 오르다'에서 열렸다.

'통일 결혼 굿'이란 통일 전선에서 목숨 잃은 젊은 원혼들을 위한 합동결혼식이다.

심우성선생의 일인 극은 옛 남사당패들의 인형극처럼, 인형과 탈을 활용한 마당극이라 대사가 없고,
우리 전통 예능에 바탕 한 소리와 춤, 발림(마임)으로 펼쳐지는 것이다.

양혜경(혜인스님)씨는 30여 년 전에 본 심우성선생의 ‘결혼 굿’에 매료되어,
광복70주년을 맞아 자신의 ‘통일 결혼 굿’으로 재현해 무대에 올렸다고 한다.

지난 30일, 마지막 공연을 가까스로 볼 기회가 닿았는데, 늦게 들린 극장에는 이미 '길 닦음'이 펼쳐지고 있었다.
빈틈없이 준비된 자잘한 소품들에서, 혜인스님의 ‘통일 결혼 굿’에 대한 애착이 곳곳에 느껴졌다.
심지어 관객용 종이인형까지 만들어 나누어 주며 함께하도록 이끌었다.

양혜경의 '통일 결혼 굿'은 영령들을 위한 위령제처럼, 차분하게 진행되어 시종일관 숙연하게 만들었다.
후반부에 이르러 노구를 이끌고 무대에 등장한 심우성선생의 열연에 분위기는 절정을 이루었다.
통일을 염원하며 울부짖는 아리랑 가락에 모두들 설음에 북 바친 것이다.

사진을 기록하는 사람은 어떠한 상황이 벌어지더라도 냉정하게 볼 수 있어야 하는데, 그게 제대로 되지 않았다.
쏟아지는 눈물이 카메라 화인더를 가려 격정적인 순간을 놓치기도 했다.
한 맺힌 통일을 향해 흘리는, 그 통한의 눈물을 어느 누가 외면할 수 있었겠는가?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사진, 글 / 조문호

 

 

 

 

 

 

 

 

 

 

 

 

 

 

 

 

 

 

 

 

 

 

 

 

 

 

 

 

 

 

 

 

 

 

 

 

 

 

 

 

 

 

 

 

 

 

 

 

 

 

 

 

 

 

 

 

 



 

 

인사동을 짝 사랑해 상사병 난 사람들이 여럿 있다.

  세상을 떠나기도 하고, 더러는 변해가는 풍정에 등 돌리지만,

인사동을 못잊어 안타깝게 방황하는 사람들도 많다.

고향처럼 정들었던 인사동을 어찌 잊을 수가 있겠는가?

그 아름다운 낭만의 시절을...

 

 

 

 

제일 먼저 떠오르는 사람이 민속학자 심우성 선생이다.

제주도에 멀쩡한 집 두고, 인사동 여관방 얻어 혼자 지내시다, 이제 요양원에 갇힌 분이다.

매일 유령처럼 인사동을 떠돌며 아리랑 춤을 추셨다.


 

 

 

그 다음은 시인 강 민 선생이다.

두 시간이나 걸리지만, 인사동 나오지 않으면 온 몸이 쑤시는 분이다.

몸이 불편해도, 만날 사람이 없어도 상관없다.

 '인사동 아리랑'을 노래하며, 인사동을 기웃거리신다

 

 

 

 

음유시인 송상욱선생도 계신다.

인사동에 콧 구멍만한 사무실 하나 얻어놓고, 매일 같이 나오신다.

그 곳에서 시 쓰며, 흘러간 노래를 불러야 직성이 풀리는 분이다.

몇 일전 길거리에서 만나 통 사정하셨다.

"조형, 인사동에 재미있는 일 좀 만들어봐. 심심해 미치겠어!"

 

 

 

 

인사동에 제일 좋은 갤러리 세워서 망한 김명성시인도 있다.

인사동 르네상스를 꿈꾸며, 전 재산을 털어 넣은 사람이다.

정말 의지의 사나이다.

인사동에서 리어커를 끌지라도 떠나지 않겠단다.

 

 

 

 

인사동에서 미술관장 지낸 화가 장경호씨도 빼 놓을 수 없는 사람이다.

인사동에 반기는 사람 하나 없지만, 나오고 싶어 안달이다.

술을 좋아하지만, 인사동 나와서만 마신다.

꼬장꼬장한 성질머리로 문전박대 당해 "다시 안 나온다"면서도 또 나온다.

 

 

 


어디 그 뿐이겠는가?

골목 안 천정 낮은 주청에는 인사동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콩알처럼 박혀 있다.

그런 사람들이 남아 있기에, 나 역시 인사동을 방황하는 것이다.

 

 예술과 풍류가 넘실대던 그 때의 인사동은 온데 간데 없고, 얄팍한 상혼만 무성한 인사동. 

천상병, 민병산, 중광을 비롯한 인사동 예술가들의 자취하나 찾아 볼 수 없는 무정한 인사동.

옛 소문에 밀려드는 관광객에게 아무 것도 보여주지 못한채, 실망감만 안겨주는 인사동. 


인사동 장사꾼들이 모인 '인사전통문화보존회'와

장사꾼 말만 듣는 '종로구청'이 인사동을 망친 공범자다.

 제발, 상사병 난 사람들과, 인사동 살려 낼 방안 좀 연구하라.


 

사진,글 / 조문호

 

 


 

 

 

 

 

 

 

 

 

 

 

 

 

 

 

 

 

 

 

 

민속학자 심우성선생께서 인사동으로 올라 온지도 벌써 해를 넘겼다.
여관방에서 자고 끼니는 식권으로 해결하지만, 마냥 행복해 하신다.
매일같이 친구 만나고, 고서점을 더나들며 책 사 모우는 재미로 산단다.
거기다 간간이 들어오는 원고청탁에다 무대공연까지 있으니 신바람 난 것이다.

선생께서 혼자 상경하셨을 땐, 안 서러워 했으나, 지금 생각하니 잘 됐다 싶다.

천성이 떠도는 광대나 다름없는데, 갇혀 사셨으니 감옥이나 마찬가지였을게다.


 

지난 27일 인사동 ‘유목민’에서 술 한 잔 하시며 인사동 아리랑 이야기를 꺼내셨다.
인사동 숙소에만 아리랑과 관련된 서적이 50권이나 있고,
제주에는 나운규의 영화 아리랑 부터 아리랑에 관한 자료들이 없는게 없단다.
언젠가는 인사동에 아리랑박물관 하나 만드는 게 마지막 꿈이란다.

수집한 아리랑 책들을 보기위해 신궁장여관 숙소에 들렸더니, 여관방 자체가 박물관이었다.

한 평 남짓한 방에 오밀조밀 붙이고 걸고 쌓아, 마치 없는 것 빼고 다 있는 화개장터 같았다.

그 책들의 표지들을 모두 복사했는데, 더러는 귀중한 자료들도 여러 권 보였다.

심우성선생께서 신문에 난 사진자료까지 다 오려 스크랩하기에,

컴퓨터 한 대 들여 놓으라 말씀드렸더니 손사래를 치신다.

인터넷에 왠 만한 사진자료들은 다 있는데다, 원고지에 글 쓰는 게 안 스러워 한 말이지만,

민속학자가 컴퓨터 가지고 노는 것도 좀 웃긴다 싶었다.

비록 여관에서 혼자 지내는 신세지만 친구 분들 중에는 제일 부자다.
받은 원고료로 책사고, 남는 돈은 매일같이 친구들 술 받아 드린다.
“선생님께서 술값 내시면 여관비하고 밥값은 우짭니꺼?”라며 물었더니
제자들이 여관비로 한 달에 60만원씩 보내주고, 잘 아는 후배가 식권도 대 준다는 것이다.
부러웠다. 선생님은 분명 복 받은 분이셨다.

그 복으로 인사동 아리랑박물관까지 꼭 만들 것으로 믿는다.

사진,글 / 조문호

 

 

 

 

 

 

 

 

 

 




 

 

오늘은 인사동 아리랑을 노래하는 터줏대감들 만나러 가는 날이다.
그 분이 바로 시인 강 민선생과 민속학자 심우성선생이시다.
강민 선생께서는 시로 ‘인사동 아리랑’을 노래하고, 심우성선생은 몸으로 인사동 아리랑을 추신다.

두 분 다 인사동을 너무 짝사랑해, 인사동 아리랑고개로 넘어 가시겠단다.

지난 17일 오후3시 무렵, 두 분을 만나러 인사동 ‘예당’으로 갔다.
그 곳에는 강 민 선생을 비롯하여 소설가 김승환, 유금호선생, 그리고 시인 이애정씨가 계셨다.
좀 있으니 옷상자를 챙겨든 심우성선생께서 싱글 벙글 들어오신다.
대학로에 공연이 있어 상복 한벌 지어 오셨는데, 삼일동안의 출연료 대신 옷 한 벌 지어 달랬단다.

‘유목민’으로 술 마시러 가자는 강민선생의 말씀에 심우성선생께서 손사래를 치신다.
'오늘은 여자관계가 너무 복잡하다"며 서둘러 일어나신다.
‘유목민’으로 자리를 옮겨 복분자에다 민어회를 시켰는데,
그 술값을 유금호선생께서 다 내 주시어, 한시름 놓게 했다.

 

뒤 늦게 심우성선생께서 재 등장하시어, 복분자 한 병 추가했다.

사진, 글 / 조문호

 

 

 

 

 

 

 

 

 

 

 

 

 

 

 

 



 

 

지난 8월10일 오후의 번잡한 인사동 풍경이다.

 

더위가 한 풀 꺾였다지만, 여전히 더웠다.

수제 옷핀을 파거나 재활용품을 줏는 할머니들의 모습들이 안스럽다.

관광상품가게를 기웃거리는 외국관광객들에게는 인사동이 어떻게 느껴질지 궁금했다.

거리에서 화가 장경호씨를 만나 'M갤러리'의 '피서전'을 비롯한 여러 전시장을 돌아보았다.

인사동사거리 구석에 버틴 목공소 하나가 급변하는 상권에 밀려나지 않는 것도 참 용타 싶다.

목공소 담벼락에 묻은 삶의 손때에 더 무게가 느껴진다.

 

나와 인사동의 인연도 어언 30년이 넘었다.

그 곳에서 많은 벗들을 만났고, 예술과 낭만을 만났다.

그러나 지금의 인사동은 변해도 너무 많이 변해 버렸다.

풍정과 인심은 물론, 그 때 그 사람들 조차 대부분 사라진 것이다.

더러는 운명을 달리하기도 했지만, 대개 삭막한 인사동 출입을 자재한다.

 

인사동이 도떼기시장이 아니라 전통예술의 메카가 아니던가.

거리는 관광객들로 넘쳐나지만, 그 많은 전시장들은 텅텅 비어있다.

거리에 쏟아져 나온 그 많은 사람들을 전시장으로 이끌 수는 없을까?

군것질거리나 잡동사니를 파는 곳이 아니라 우리만의 고품격 문화를 팔수는 없을까?

 

인사동을 관할하는 지자체 관계자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다.

인사동 소재 갤러리의 큐레이트와 연계해, 주 단위의 인사동 전시 안내는 물론

좋은 전시를 행인들에게 알릴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야 한다.

전시별로 작업 내용이나 작가 의도를  간략하게 소개해 관심있는 전시로 행인들의 발길을 유도하자. 

이제 자녀들을 위해서라도 미술관에 자주 들려, 어릴 때부터 예술과 친숙해지도록 만들어야한다.

전시작가들도 텅 빈 전시장만 지킬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관객을 끌어들여야 한다.

예를 들어 옛날 영화관 광대처럼 등짐 북을 메고 돌며 전시를 알리는 퍼포먼서는 안될까?

 

그리고 인사동 문화를 통괄하려면, 전문지식이 없는 행정 공무원으로는 안 된다.

문화기획자를 영입하여 각계 문화 인사들과의 연결망을 구축해야 하는 것이다.

오래전 구청 문화과에 제안한 적도 있으나 ‘쇠귀에 경 읽기’였다.

작은 이득에 눈이 어두워 큰 것을 놓치는 상인들도 안타깝기는 마찬가지다.

단지 말 빨 없는 예술가들의 넋두리만 인사동 술집으로 흘러다닐 뿐이다.

인사동 터줏대감 격인 강민 시인이나 민속학자 심우성선생의 한숨 소리만 더 높아 간다.

 

행여 반가운 인사동사람들을 만날까봐 오늘도 하릴없이 인사동 거리를 방황한다.

변해가는 인사동 거리와 오가는 사람들을 기록하지만, 늦은 밤 술 취한 예술가들의 모습을 더 즐긴다.

같이 동화되려면,  카메라가 늘 막걸리에 얼룩져야 했다.

때로는 흔들리기도 하지만, 취중 분위기 그대로가 좋은 것이다.

 

나는 사진으로 인사동을 해석하고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일기처럼 기록할 뿐이다.

아무리 디지털카메라에 의한 이미지홍수시대에 산다지만,

세월이 한참 지난 후에는 그 사진들이 보석처럼 빛날 것을 믿기 때문이다.

그게 바로 역사 아니던가.

 

사진,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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