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사진이란 된장이나 와인처럼 세월이 흘러 숙성되어야 그 가치를 발휘하는 것이다.

어저께 인사동에서 민속학자 심우성선생님과 막걸리 한 잔 나누는 자리에서 말씀을 꺼내셨다.

“조군, 내가 두 살 때 어머니와 함께 찍은 사진이 한 장 있는데,

동생들이 갖고 싶어 하니 몇 장 복사해 주게"라고 하셨다.


사진을 달랬더니, 지척에 있는 집필실(푸른 별 이야기)로 달려가 조그만 사진틀

하나를 갖고 오셨는데, 사진이 너무 좋았다.

 

그 사진은 세월의 두께가 더해져 보석처럼 빛나고 있었다.
사진틀 뒤에는 1933년 6월 28일 종로 명륜동 자택에서 라고 적혀 있었고,
당시 명륜동에 있었던 '아리수 사진관'에서 출장 나와 찍은 사진이라고 설명하셨다.

모시 한복 차림으로 앉은 어머니와 어렸던 심선생의 모습은 아련한 향수를 불러 일으키게 했다.

80여 년 전, 유리원판 사진이라면 쉽게 찍을 수도 없던 시절이었다.

대부분의 사진가들이 예술 지상주의에 빠져 자기 생각들만 형상화하는 요즘,
다시 한 번 기록사진의 가치를 입증한 순간이었다.

기록사진이란 시사적 사회적 현상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러한 일상적 삶의 모습도 소중하다.
바로 이게 우리가 살아 온 역사 아니던가.

역사란 결국 사람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그 조그만 흑백사진 한 장이 말해 주고 있었다. 

글 : 조문호​

 

 

 

인사동 거리를 걷다보면 지팡이에 의지한 채,  쓸쓸하게 걸어가는 노학자 심우성선생을 쉽게 만날 수 있다.

 

원로 민속학자이자 일인극 배우인 남천 심우성(82세)선생은 요즘 인사동의 ‘신궁장’여관 206호에서 장기 투숙하신다.
인사동 변두리에 있는 ‘화목식당’에서 3천원짜리 식권으로 끼니를 해결하며 유령처럼 인사동 주변을 떠도는 것이다.

 

평소 인사동에서 자주 뵙기는 하지만 말씀이 없어시기에, 왜 제주에서 혼자 올라 와 계시는지 근황을 여쭈어 보았다. 

 

 

남천선생은 원래 충청도 공주가 고향이지만, 서울 명륜동에서 태어나 인사동 ‘수도약국’ 옆 골목에서 사셨다.

아버님이신 소민선생께서 인사동 고서점 ‘통문관’과 ‘관훈고서방’의 주인 분과 절친했기에,

일찍부터 그 곳을 들락거리며 우리 것에 대한 애착을 키웠다고 한다.


 


인류학을 전공해 KBS 공채 1기로 아나운서가 되었고, ‘대한뉴스’ 아나운서를 지내기도 했다.

그러나 직업이 주는 대우보다는 하고 싶은 일에 쏠려 직장을 그만두고,

본격적인 민속사 연구에 몰두했는데, 한 때 '공주민속박물관장'을 지내기도 하셨다.

탈과 솟대 뿐 아니라 민속극에 빠져 꼭두각시를 내 세운 넋전을 수 차례 열기도 했다.

 

['푸른별 이야기' 술집 골방에 마련한 집필실]


고향처럼 정겨운 인사동을 떠나지 못해 여기 저기 전전하시다 경운동 SK오피스텔에 사무실을 마련한 적도 있었다.

인사동을 출입하는 친구들과 어울려 풍류를 즐기시던 어느 날,

인사동에서 '완자무늬‘란 식당을 운영하던 김모 여인에게 마음이 뺏겨 모든 걸 바치게 되었다.

그러나 행복한 시절도 잠깐일 뿐, 감당하기 힘든 위암이 전위되어 사경을 헤메게 된다.

남천선생이 병석에 있는 동안 아내인 김여사는 전 재산을 처분해 자신의 고향인 제주도로 옮겨 버렸다.

얼마 후 회복해 기력을 차린 남천선생은 마음 변한 아내의 속내를 읽고,

자신이  평생 일구어 온 민속자료와 모든 것을 남겨 둔 채, 빈손으로 인사동으로 돌아오게 되었단다.

'열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말을 뒤늦게 절감하게 된 것이다.


 


남천선생의 어려운 사연을 알게 된 연출가 임진택씨와 춤꾼 이애주씨가 가끔 용돈을 챙겨드리기도 하고,

인사동에서 ‘푸른 별 이야기’란 주막을 운영하는 최일순씨가 술집 골방을 비워 선생님 집필실로 제공하기도 했다.

낯에는 골방에서 민속에 관한 글을 쓰고, ‘한국예술종합학교’에 특강을 나가는 등 

마음의 상처를 지우려 애쓰지만, 그게 말처럼 쉽지 않다.

 



오늘도 거리를 오가며 급속하게 변해가는 인사동을 안타까워 하지만, 각박한 세상 인심은 돌이킬 수 없었다.

몰려드는 인파에 밀려 외각 길로 돌아 다니지만, 죽을 때까지 인사동을 떠날 수 없다는 것이다.

돈에 밀려 난 인사동 문화와 병들어 쓸쓸한 노학자의 모습이 너무 닮았다.

스러져 가는 인사동 낭만, 버림 받은 인사동 터줏대감의 쓸쓸한 모습에서 슬픈 비애를 느낀다.

 

사진, 글 / 조문호

 

 



인사동은 오가는 사람들은 많지만, 낭만이 사라진 꺼져가는 등불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빈손으로 온 몸의 끼를  불사르는 인사동 사람들이 있어 한 올 희망을 가집니다.

대표적인 분이 행위예술가 무세중 선생, 음유시인 송상욱 선생, 민속학자 심우성선생 입니다.
모두 칠순을 넘긴 노익장이지만, 끊임없이 일을 저지르며 끼를 발산합니다.
요즘 젊은 사람들은 이해타산이 맞지 않으면 절대 손해 보는 일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분들은 자기 주머니를 털어서라도 굿판을 벌이고, 노래를 불러야 직성이 풀리는 분들입니다.

송상욱선생은 '반야월 추모가요제'를 엊그제 가졌고,

심우성선생은 얼마 전 가진“넋전”에 이어 또 다른 공연을 구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무세중 선생께서 ‘지랄발광’이라는 난장 굿을 갖는다는 연락이 어저께 왔습니다.

무세중선생 공연 소식에 “또 공연이야! 시간 내기도 힘든데, 입장료 2만원까지 내라니,,,”라며

부정적인 생각부터 앞세우는 분이 있을지 모르지만, 이젠 그러한 생각부터 바꾸어야 합니다.
이 각박한 세상에 누가 돈 안 되는 그런 일을 계속 하겠습니까?

어렵게 선보이는 작품을 보아주며 박수치는 것만으로도 우리 문화를 살찌우고,

작가에게는 힘을 주어 다시 일할 수 있는 용기를 주게 됩니다.

여지껏 늘 공짜로 구경하다 보니 돈 내는 것을 꺼리고, 부담스러워합니다.
공짜는 모든 걸 재미없게 만듭니다. 입장료를 투자하면 그만큼 작품에 관심을 쏟을 수밖에 없어

작품의 가치를 찾게 됩니다. 그래서 하잘 것 없는 팜프렛 한 장이라도 그냥 주어서는 절대 안 된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예전에는 김명성씨 등 일부 독지가들의 찬조로 비용을 충당하기도 했으나 이젠 그래서도 안 됩니다.

모두가 어려운데, 십시일반 입장료라도 내어 부담을 줄여 주어야 지속성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오는 25일부터 29일까지 인사동 ‘31갤러리’에서 공연하는 무세중의 난장 굿 ‘지랄발광’ 보러 갑시다.

 28일 일요일만 오후5시 공연이고, 나머지는 오후8시부터 랍니다.

 그곳은 작은 갤러리라 많은 분들을 수용할 수 없으니, 사전 연락도 필요합니다. (02-381-5335)

 

관람하실분은 김한님이나 장정우님에게 연락하시기 바랍니다.

25일(목), 26일(금),29일(월) - 김한 010-9984-9912

 27일(토), 28일(일) - 장정우 010-4611-9027

 

 



토요일부터 사흘간의 연 이은 외출로 하던 일의 차질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월요일인 지난 15일, 사진가 한정식선생과의 약속으로 아내와 함께 인사동 ‘여자만’에 갔다,
뜻밖에 그 곳에는 시인 강 민선생과 신경림선생 등 문인 몇 분이 자리하고 계셨다.
반가웠지만 함께 할 처지는 아니었는데, 오후4시 ‘유목민’에서 이명희씨를 만나기로 했다는 말씀을 하셨다.

식사를 끝낸 후 한정식선생과 ‘장은선갤러리’에서 전시중인 이창남씨의 사진을 보러 갔다.
장시간 노출에 의한 바다 풍경이 마치 회화 같은 몽환적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요즘은 회화와 사진의 경계가 사라졌다.

사진 같은 그림을 그리는 화가가 있는가하면 그림 같은 사진을 찍는 사진가도 있는데,

단지 붓과 카메라라는 표현도구만 다를 뿐인 것이다.

시간이 되어 ‘유목민’으로 가는 길가에서 이명희씨를 만났다.
반가워하는 말괄량이 여배우의 수다는 여전했다.
술집골목으로 접어드니 강 민선생과 심우성선생께서 노상카페에서 차를 마시며
술집 문 열기만 기다리고 계셨다.

강 민선생은 “문학의 집. 서울” 9월호에 게재된 “전쟁과 미로‘로 보여주셨는데,

옛 양평 집 에서 떠나올 때 마지막으로 찍었다는 기념사진을 보며 그리움과 아쉬움을 같이 했다.

심우성선생께서는 무슨 좋은 일이 있는지 화색이 만연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오는 10월 초순경 광화문광장에서 이애주씨와 공연을 갖는다는 것이다.
사람은 나이가 들수록 할 일이 생기면 신바람 나는 것이다.
그 느릿한 지팡이 굿이 벌써부터 기대된다.

그리고 조상의 가보로 물려받았다는 향통까지 가져와 보여주었는데,
심씨 가문의 기록들이 꼼꼼하게 새겨져 있었다.
이런 저런 이야기 끝에 아내가 “선생님께서 제일 좋아 하는 건 무엇입니까?”라고 여쭈었더니

망설임 없이 “난 여자를 제일 좋아 합니다”고 대답해 모두들 한바탕 웃었다.
솔직한 대답이었고, 노익장의 끼를 느낄 수 있는 말씀이셨다.

이 날은 송구스럽게도 심우성 선생께서 찻값에다 술값까지 다 내셨다.

 

 








인사동에 낭만과 풍류가 사라진지 오래다.

고서화점들이 몰려있던 70년대 쯤, 지금은 하늘나라로 가신 민병산, 천상병, 박이엽선생과

친구인 강 민, 민 영, 채현국, 황명걸, 신경림씨 같은 문인들이 관철동에서 옮겨오며 인사동문화가 꽃피기 시작한 것이다.

 

80년대 들어서는 술 때문에 먼저 간 사진기자 김종구, 서양화가 강용대, 이존수, 김용태, 시인 최영해씨와,

미국으로 이민간 최정자시인, 늙은 총각 구중관, 공윤희, 시인 김신용, 박종수, 조해인, 박중식, 김명성, 소설가 배평모, 

서양화가 이청운, 박광호, 최울가, 이목일, 전강호, 김언경, 도예가 김용문, 신동여, 사진가 이수영을 비롯해 

노광래, 김민경, 장익화, 장 춘, 이해림씨 등 많은 예술인들이 모여들었으나,

유명세로 몰려드는 인파와 그에 편승한 장삿꾼들의 얄팍한 상혼에 인사동은 본래의 모습을 잃어가게 된 것이다.

 

고풍스럽던 예전의 가게들이 화장품점이나 싸구려 중국산 민예품에 밀려나기 시작하더니,

이젠 아예 잡동사니거리가 되고 만 것이다. 돈에 의해 변하는 인심과 흐르는 세월은 아무도 말릴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인사동 골목골목을 돌다보면 가뭄에 콩 나듯 옛 기억을 소주잔에 부어 마시는

사라지기 직전에 있는 예술가들 몇몇은 남아 떠돈다.


하루라도 인사동에 나오지 않으면 온 몸이 쑤신다는 ‘인사동아리랑’을 노래하는 시인 강 민선생,

인사동에 사무실 얻어놓고 팔리지 않는 시집 만들며 노래나 부르는 음유시인 송상욱씨,

제주에서 무작정 상경한 후 대폿집 문간방 빌려 사무실로 쓰는 민속학자 심우성씨,

불편한 몸이지만 빠지지 않고 인사동 작업실을  지키는 사진가 한정식선생을 비롯해

극작가 신봉승, 임재경, 김동수, 이계익선생 등이 계신다.

 

그 외에도 사업장을 인사동에 둔 '아라아트' 김명성,'통인가게' 김완규, '옥션단'의 김영복, '유카리화랑' 노광래,

그리고 인사동에서 대폿집하는 '푸른별이야기' 최일순, '유목민' 전활철씨 처럼 생계와 연관되어 터 잡고 사는 분들도 있다.

 

예술로 빌어먹는 술꾼들이 외상술에 개똥철학 풀던 그런 대폿집들은 대부분 사라지고 없으나

그 시절의 낭만과 풍류를 못 잊어 마땅히 갈 곳도 없는 인사동을 배회하거나,

그 때 그 사람들이 그리워 만날 날만 기다리는 유목민들은 아직 남아있는 것이다.

행위예술가 무세중선생, 시인 조준영, 화가 장경호, 이청운, 연극배우 이명희,

뮤지션 김상현씨 같은 인사동파 예술가들이 있기에 모두들 미련을 떨치지 못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편하게 죽치고 앉아 회포를 풀 장소도 마땅찮거니와, 모두들 마음의 여유가 없어진 것 같다.

가끔 지인들이 전시회를 열거나 출판기념회라도 하면 한꺼번에 만날 수 있는 호사는 누리지만,

술자리 분위기가 예전 같잖다. 이 것 저 것 눈치보여 마음이 편치 않은데다, 신나게 놀 수가 없다.

기록이라도 남기고 싶어 부지런히 사진은 찍어왔지만, 이젠 기력마저 떨어진데다, 

그 동안 찍어 모아 둔 사진 정리할 일이 더 급하게 되었다.

각박한 세상을 살아가는 요즘 젊은이들은 잘 이해될지 모르지만,

낭만과 풍류가 있었던 당시의 인사동 문화는 질퍽하면서도 따뜻한 정으로 이어져 있었다.

모두들 주머니는 비었으나 밤새 외상술 마셔가며 예술을 이야기하고 인생을 노래했던 것이다.

이제 모두들 가버리거나, 떠나고 싶어도 마땅히 갈 곳마저 없어,

그 흐릿해 가는 추억만 까먹는 사람들이 인사동을 떠돌 뿐이다.

그래! 이런 케케묵은 감상들을 널어놓는다는 것 자체가 늙었다는 것 일게다.
결국 늙으면 죽는 것이겠지만, 저승에서 만나게 될 선생님들 뵐 면목이 없다.

 

지난 사진첩을 뒤적이며, 그 때 그 시절의 추억들을 꺼내본다.

 

사진 : 조문호, 정영신 / 글 : 조문호

 

 

 

 

 

 

 

 

 

 

 

 

 

 

 

 

 

 

 

 

 

 

 

 

 

 

 

 

 

 

 

 

 

 

 

 

 

 

 

 

 

 

 

 


지난 7월12일 오찬 약속으로 아내와 함께 일찍부터 인사동에 나갔다.
대상포진으로 오랫동안 고생하다 이젠 우울증까지 생긴 사진가 한정식선생을 만났는데,
같은 병으로 고생하는 아내와는 동병상련의 심정일게다.
‘여자만’에서 식사하고, 선생의 오피스텔에서 차 마시며 많은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건강이야기, 사진이야기, 살아가는 이야기 등등..

아내가 ‘허리우드’에서 조경석선생을 만나는 사이 인사동거리를 쏘다녔다.
관광객들로 번잡한 인사동 거리에서 송상욱시인과 고창수시인을 만났다.
오랜만이라 반갑다는 송상욱선생의 손에 끌려 ‘인사동사람들’에서 차도 한 잔했다. 
헤어진 후  심우성선생을 만났고, 통인가게 김완규회장과 세계일보 편완식기자도 만났다.

저녁 무렵에는  김명성시인과 사업가 정기범씨를 거리에서 만났고,
‘유목민’으로 자리를 옮겨서는 오랜만에 나온 김신용시인을 만났다.
“새를 아세요”(가칭)란 소설 원고를 출판사에 넘기고 왔다는데,
긴 작업을 마무리한 후련함이야 짐작할 만 했다.
'황야의 무법자'를 연상케 하는 그의 휘바람소리가 말해주었다.

예전에는 술자리에서 흰소리라도 지껄이고 노래를 불러가며 마셨기에

긴 시간 술을 마실 수 있었으나, 요즘은 조용히 마셔서인지 금새 취해 버린다.
조경석, 공윤희, 전은미, 김영길, 유진오, 노광래, 김상현씨 등 많은 분들을 만났으나
몸이 견디지 못해 먼저 줄행랑쳤다.

 

그 이틑 날은 마산에서 서양화가 이강용씨가 왔다는 전화를 받았다.
서울만 오면 하는 일 없이 인사동에서 사람 만나느라 바쁘다.
‘서울순대’에 미술평론가 유근오씨와 패션디자이너 손성근씨와

함께 있었으나, 끌고 나간 자동차 핑게로 일찍 들어왔다.

 

정선은 정선대로, 서울은 서울대로 가는 곳마다 할 일이 밀려있다.

당장 출판사 넘길 사진원고 찾는 일이 급하지만 인사동이 가만 두지 않는다.
그렇지만 떠도는 유목민마저 사라진다면 인사동이 얼마나 삭막해 질까...

 

 

 

 

 

 

 

 

 

 

 

 

 

 

 

 

 

 

 

 

 

 

 

 

 

 

 

 

 






견우직녀가 까마귀를 타고 만난다는 칠월칠석날을 맞아 세월호참사 희생자들의 영혼을 달래는 씻김굿 ‘넋전 아리랑’이 조계사 전통문화예술공연장에서 열렸다.

민속학자이며 일인극 배우인 심우성선생과 승무예능보유자인 이애주 서울대 명예교수, 본 ‘넋전 아리랑’을 무대에 올린 '극단 서낭당' 대표이며 연극배우인 최일순씨가 함께 섰다.

민족의식을 바탕으로 한 전통의례 의식인 “넋전 아리랑’은  산자와 죽은 자가 만나는 해원의 장이며, 무수히 희생된 무고한 영혼들께 헌정하는 진혼과 씻김의 장“이라는 연출자 최강지씨의 말이다.
“좌초하고 있는 우리나라에 어느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 한스러운 세태에 분노합니다. 그 가여운 영혼들이 못 다한 노래를 칠월칠석날을 맞아 만남의 장으로 불러내기 위해 ‘넋전 아리랑’을 마련했지요”

불편한 몸으로 무대에 올라 제단에서 넋들을 진혼하는 심우성선생의 모습이나 온몸을 떨며 절규하는 연극배우 최일순씨의 연기, 그리고 살풀이춤을 넋전에 결합한 이애주씨의 농익은 몸짓에는 차마 입을 다물지 못했다. 아마 이보다 더 처절한 몸짓은 없을 것으로 생각되었다. 세월호의 아픔이 채 가시지 않은 오늘의 상황에 맞물려서인지 그 몸짓들이 더 큰 울림을 주었다.

“우리의 춤은 단순한 표현 양식이 아니라 몸에서 저절로 배여 나오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버들가지에 몰 오르듯, 흐르는 물이 맞부딪히듯, 몸의 내면으로 솟구치는 것”이라고 이애주씨가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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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속학자이자 1인극 배우 심우성이 오는 2일 ‘넋전 아리랑’ 무대에 올릴 넋전 춤을 미리 보여주고 있다. 극단 서낭당 제공


팔순 민속학자·1인극 배우 심우성
“넋 위안하고 넋전춤도 되살리려”
이애주는 넋전·살풀이 결합한 춤
새달 2~4일 서울 조계사 공연장


팔순의 민속학자이자 1인극 배우 심우성은 ‘애기들’의 죽음 때문에 가슴이 아려온다. 신문에 실린 세월호 희생자들의 모습과 사연도 꼬박꼬박 스크랩한다. 그는 견우와 직녀가 만난다는 칠월칠석, ‘애기들’의 넋을 달래는 ‘넋전 춤’을 준비중이다.


“50여년 전까지는 무당집이나 절집에서 종이로 죽은 이의 넋을 만들어 ‘넋전’(종이인형)이라고 했어요. 대나무 가지에 그것을 두세 개 걸어 두 손에 들고 ‘넋전 춤’을 췄지요. 지금은 절집에선 아예 사라지고 무당집에서도 몇 군데만 남아 있습니다.” 심우성(80·우리문화연구소장)은 “우리 연극유산 중에서도 아주 소중한 분야입니다. 이번에 ‘애기들’이 죽어가는 걸 보고, 넋을 위안하고 사라져가는 넋전을 되살려보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라고 했다.


심우성은 직접 오려 만든 넋전을 들고 춤을 추다가 이애주(67) 앞에서 넘어질 생각이다. “이애주 선생, 이 넋을 받으십시오”라는 뜻이다. 중요무형문화재 제27호 승무 예능보유자 이애주는 “인형이 넘어진다는 건 세월호 아이들을 비롯해 모든 참사의 넋들을 되살린다는 의미”라고 설명했다.

 
25일 심우성과 이애주를 서울 인사동에서 만났다. 칠월칠석인 8월2일부터 4일까지 서울 조계사 전통문화예술공연장에서 펼쳐질 ‘넋전 아리랑’ 준비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심우성은 <한겨레>에 연재중인 ‘잊지 않겠습니다’를 오려 둔 스크랩북을 보여줬다. 이 연재는 박재동 화백이 세월호 희생자의 생전 모습을 그리고, 가족들이 그들을 기리는 내용이다. 심우성은 기사들을 틈틈이 꺼내볼 때마다, 피지도 못하고 스러진 어린 넋들 생각에 가슴을 쓸어내린다. 이번 무대에서는 남과 북이 만나는 ‘통일 아리랑’도 함께 그려낼 요량이다. “죽은 애기들과 산 자들이 만나는 것도 통일, 갈라진 민족이 만나는 것도 통일입니다. 우리 넋전 아리랑도 통일을 향해 나아갔으면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잡귀·잡신 같은 외세’를 말끔히 없애야 한다고 했다.


‘넋전 아리랑’을 연출하면서 직접 무대에도 오르는 최일순(48) 극단 서낭당 대표는 ‘넋전 아리랑’의 얼개를 설명했다. “이번 넋전 아리랑 공연은 네 마당으로 나뉩니다. 먼저 심 선생님이 쓴 내용대로 한반도 상황을 70년 전 둘로 갈라진 분단에서부터 2014년 4월 세월호 침몰사건까지 정리합니다. 그리고 제단을 차리고 망자들을 수습하고 염습한 뒤 넋들을 진혼하게 됩니다.” 하지만 심우성은 틀에 짜맞춘 ‘넋전 춤’을 경계했다. “그게 생각한 대로 될지는 그때 가봐야 압니다. 다만, 지금 난리가 난 상황을 정직하고 올바르게 한바탕 판으로 열어보자는 거지요.”


이애주는 살풀이춤을 넋전과 결합할 생각이다. “살풀이는 춤도 되지만 음악도 되고, 우리의 민족성인 거죠. 일어났다가 쓰러졌다가 다시 일어나는 게 살풀이거든요.”


심우성과 이애주의 인연은 깊고 길다. 1960년대 초 심우성은 이애주의 스승인 승무 인간문화재 한영숙(1920~1989)과 함께 국악예술학교 교단에 섰다. 1960대 말 한영숙이 애제자 이애주를 심우성에게 소개했다. 그 뒤 심우성과 이애주는 1970년대에 춤사위 조사작업을 함께했다. 그리고 ‘넋전 춤’을 이애주가 이어받게 됐다. 스승 한영숙이 일찌감치 ‘이애주가 심우성의 제자가 되는 인연’을 심어준 듯하다. “넋전 아리랑을 함께한다는 것은 심 선생님이 일생 일구신 것을 이어받는 의미다.” ‘제자’ 이애주가 말했다. “넋전 춤에서 ‘마음’을 가지고 이어받는 사람이 없었는데, 이애주씨가 그런 마음을 가진 듯하니 기분이 좋아요.” ‘스승’ 심우성이 답했다.


흥미로운 것은 국내에서 사라져가는 넋전이 일본에서 많이 보급됐다는 점이다. 심우성은 “내가 일본에서 넋전 춤을 많이 췄거든요. 도쿄, 고베, 오사카 등이었는데 총련 사람들이 많이 배워갔어요. 요즘도 많이 한답니다”라고 했다. 010-3204-3095.


손준현 기자 dus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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