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10월 창립전부터 화단은 물론 문화계 전반에 충격을 던졌던 미술동인 ‘현실과 발언’은 89년 말 발전적 해체를 결의한 뒤 90년 창립 10돌 전시회로 공식 활동을 마무리했다. 사진은 90년 10월6일 서울 관훈미술관 3층에서 ‘현단계 미술운동과 창작의 문제’를 주제로 열린 창립 10돌 기념 토론회로, 앞줄 왼쪽 넷째부터 임옥상, 유홍준, 원동석, 한 사람 건너 김정헌, 강요배씨. 객석 맨 오른쪽 고 문호근, 그 뒤로 심광현(안경 쓴 이)씨 등이 보인다. <한겨레> 자료사진

[길을 찾아서] 용태 형과 문화운동시대 ⑤

연재 회고록 ‘길을 찾아서’의 16번째 이야기 ‘용태 형과 문화운동시대’는 지난 5월 작고한 김용태(그림) 전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민예총) 이사장이 끝내지 못한 구술을 그와 더불어 한 시대를 헤쳐온 수많은 문화예술인들이 대신 들려주는 기획이다. 헌정 문집 <산포도 사랑, 용태 형>의 필진 가운데 20여명이 기꺼이 나섰다. 다섯번째로 작가 임옥상씨가 1979년 말 미술동인 ‘현실과 발언’ 때부터 시작된 35년 인연을 회고한다. 이어 고영직, 문영태, 박인배, 심광현, 유홍준, 이애주, 이태호, 이종률, 임진택, 조성우, 홍선웅, 황석영씨 등이 필진으로 참여할 예정이다.

사람 선별능력은 가위 동물적이다
저자가 순수하냐, 사가 끼어있냐
한번 투시로 꿰뚫었다
통과된 자는 그대로 믿고 품었다
그 규모가 일개사단은 넘을 것이다


김대중-노무현 정권에 관여하면서
형은 권력의 중심에 있었다
당연히 주변에 사람이 모였다
하지만 늘 무관이고 빈주머니였다
전술은 뛰어났지만 전략엔 약했다

 

■ ‘용태 형’의 미스터리


“임 작가, 차비 있냐?” ‘용태 형’은 누구에게나 헤어질 때 꼭 차비 있냐고 묻는다. 그러나 막상 차비를 받아 가는 사람은 없다. 나도 마찬가지다. 형은 역시 누구에게나 ‘작가’란 칭호를 붙였다. 물론 화가 동료들에게 말이다. 내게 처음 작가 칭호를 붙여준 게 아마 용태 형일 것이다. “임 작가” 얼마나 친밀한가! 여기에 차비까지 걱정해주니 뭘 더 바라겠는가. 나는 명색 대학교수였고 형은 늘 직업이 불안했다. 그런 형이 차비를 물으니 감동일 수밖에.


형은 두어 번 잡지사 주간을 맡은 적이 있었으나 길지 않았다. 도무지 가만두지를 않았다. 일이 있을 때마다 제일 먼저 호출(?), 차출(?)되는 것이 형이었다. 아니 제일 먼저 스스로 손들고 뛰쳐나갔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모두 망설이고 주저하며 결정을 못하고 있을 때 형은 즉발적이고 즉각 자원하고 나섰다. 모든 일이 다 민주화와 민중문화운동과 연결된 것들이었다. 그는 비록 미술계에 몸담고 있었지만 그의 행동반경은 넓고도 넓었다. 어찌하다 그가 그렇게 되었는지 난 사실 잘 모른다. 미스터리다.


나는 1979년 연말 ‘현실과 발언’(현발) 창립 무렵 그를 만나기 전까지 일면식이 없었다. 아니 전혀 알지도 못했다. 이름도 듣지 못했다. ‘현발’ 창립 준비모임에서 처음 그를 보았을 때, “나 김용태요!” 하면서 그가 먼저 손을 내밀었다. 처음인데 처음처럼 느껴지지가 않았다. 나도 곧바로 반말세례를 받았다.


현발의 공식적인 회의는 성완경 선생이 이끌었다. 최민 선생과 성완경 선생은 마치 의견을 조율이라도 하고 나온 듯 쿵짝이 잘 맞았다. 그러나 비공식 부분은 용태 형 몫이었다. “술 들어. 안 마시나? 마셔! 노래해봐, 뭐야? 빨리빨리 해! 그만 따져. 하면 하는 기지!? 치아라! 좋아. 됐어.” 모든 추임새는 그의 몫이었고 오락 진행도 그의 뜻대로였다. 그렇다고 회의를 방해하는 것은 아니었다. 자칫 재미없고 지루할 수도 있는 회의에 활력을 넣는 것, 그래서 회의를 유쾌하게 만드는 것이 그의 몫이었다. 현발 회의는 노는 것인지 장난치는 것인지 구분이 안 되는 정말 재미있는 장면을 항상 연출했다. 그 가운데 용태 형이 있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현발의 목적보다도 그 모임 분위기가 좋아서, 사람들이 좋아서, 용태 형이 보고 싶어서 참여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다고 그가 모든 사람을 다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한번 눈 밖에 나면 그걸로 끝이다. 어떤 감각 더듬이로 사람을 선별하는지 모르겠으나 여하튼 그의 선별 능력은 가위 동물적이다. 저자가 순수하냐, 혹은 사가 끼어 있느냐를 꿰뚫었다. 술좌석에서는 곧잘 술잔이 날아다녔다. 그의 성질은 그만큼 단호하고 과격했다. 그의 웃음은 너털웃음이지만 그의 안광은 야수처럼 꽂혔다. 지금도 그 앞에서 발발 떠는 자들이 있다. 마치 고양이 앞의 쥐처럼. 그는 한번 그의 직관력으로 파악된, 그래서 그 한번 투시로 통과된 자는 그대로 믿었다. 아니 믿음을 넘어 품에 품었다, 챙겼다. 마치 어미 닭이 병아리를 품듯이 늘 품고 보살폈다. 지금도 그 규모가 일개 사단은 족히 넘을 것이다. 나도 그의 품속에서 따뜻했다. 언제나 불러주고 놀아주고 안아줬다.


현발 초기 우리는 매일 만났다. 시도 때도 없이 만났다. 어디에선가 누군가들은 만나고 있었다. 나는 비록 광주나 전주에 있었지만 ‘언제 서울에 가나’만을 생각하고 기다렸다. 최민 형의 광화문 작업실, 용태 형의 관철동 사무실이 1차 모임 장소이자 사랑방 구실을 했고, 주변 술집으로 2차, 3차가 계속되었고, 끝내는 누군가의 집에까지 가서 합숙하기 예사였다. 이 집 저 집 가리지 않았으나 김정헌 형 집, 용태 형 집이 제일 개방적이었다, 편했다.


또 워크숍이, 스터디 모임이 계속되었다. 우린 모두가 쇼맨십이 대단했다. 농담할 줄 모르는 자, 즉각적으로 웃을 찰나를 못 맞추는 자, 노래 시켜도 빼는 자, 술을 못 마시는 자들은 설 땅이 없었다. 못 마셔도 마시는 척, 마신 척해야 했다.


우리는 전시회에서의 겨루기보다 술판 겨루기가 더 빡셌다. 술판이 주 무대고 전시는 뒷전이었다. 이게 더 정확하다! 아니 술안주를 위해 작품을 하는 것처럼 술좌석에선 작품 품평회가 질펀하게 농반진반으로 난무했다.


권력의 중심 그러나 빈 주머니


시국에는 격랑이 휘몰아쳤다. 나라는 풍전등화였다. 독재자 박정희는 갔지만 그가 남긴 유산은 녹록지가 않았다. 전두환, 노태우는 비록 ‘졸개’들이었지만 그 뿌리는 깊고 깊었다. 민주화와 연계된 민중문화운동의 초반은 문단에서 이끌었지만 그 뒤를 화단이 주도하는 양상이었다. 시각예술과 활자예술의 차이랄까. 민족미술협의회, 그림마당 민, 걸개그림, 벽화, 판화, 만화. 이제 그림은 먹물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용태 형이 그 중심에 있었다.


그사이 용태 형은 이미 그림판을 떠나 저만큼 앞서가고 있었다. 언젠가 프랑스 유학 중이던 최민 형이 용태 형에게 그림 그리라며 유화 물감을 사서 보낸 적이 있다. 나도 틈틈이 그림을 그리자고 권유를 했다. 하지만 용태 형은 84년 현발 동인들의 주제전 <6·25> 전시회 때 <디엠제트>(DMZ)를 끝으로 그림을, 작품을 손놓았다. 그러고선 민족미술협의회, 민족예술인총연합(민예총)을 만들었다.


용태 형이 아니었으면 못 할 일들이 현실로 실현되었다. 따라서 당연히 시간이, 절대적 시간이 형에겐 부족했다. 어느 때부턴가 나도 형을 보기가 힘들어지기 시작했다. 김대중 대통령이 입성하고 민예총이 자리를 잡으면서 형의 행동반경은 더욱더 넓어졌다. 이젠 전국을 망라해야 했다. 엔지오(NGO)로서 지오(GO) 영역까지 깊이 관여해야 했기 때문에 더욱 그랬고 노무현 정부 때는 정치적 입김이 더 커졌기에 또 더더욱 그랬다. 어느덧 형은 권력의 중심에 있었던 것이다. 당연히 그의 주변에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그러나 신은 공정(?)하게도 형에게 돈 관리 능력과 사람 관리 능력까지는 주지 않았다. 전술은 뛰어났지만 전략엔 약했다. 민예총이라는 전국 조직을 움직이기에 자본은 항상 구멍이 났고 사람을 꿰뚫던 안광도 한계가 있었다. 용인술에 문제가 있다 보니 조직이 타격을 받을 수밖에. 많은 사람이 모이고 많은 사람이 떠났다. 새로운 기획과 계획이 수립되었지만 그 인력과 자본으론 역부족이었다. 회원과 그 힘으로 조직이 움직여야 하는데 형은 늘 정치적 방식으로 해법을 찾았다. 정부와 밀착하는 만큼 일의 신선도가 흐려지고 의미도 바랠 수밖에 없었다.


권력을 창출하는 데 일조할 수는 있다. 그러나 권력은 경계의 대상일 뿐이다. 권력은 인격이 없다. 권력은 지배할 뿐이다. 권력은 썩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권력은 상처받지 않는다. 권력은 붕괴한다. 인간도, 예술도, 철학도, 과학도, 역사도 권력에겐 의미가 없다. 권력은 오직 권력만이 목적이다. 용태 형은 권력의 속성을 몰랐던가? 아니다. 권력이 용태 형을 삼킨 것이다. 그가 권력을 탐했거나 쫓아다녔다면 오늘의 모습일 수가 없다. 대신 남 좋은 일만 했다. 빈털터리. 처음이나 마지막이나, 아니 권력의 중심에서도 그는 늘 무관이고 빈 주머니였다. 물론 한때 관(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상임이사)을 쓴 적도 있으나, 실은 모두 다 심부름, 즉 ‘따까리’, ‘설거지’ 자리였다.


나는 계속 의문을 갖는다. 왜 그림 작업을 포기했을까. 작업하자면 그는 “됐어!” 그 한마디였다. 용태 형은 아마도 사람을 움직이는 것이 더 큰 작업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나는 이제야 깨달은 것을 말이다.

 
그의 대표작 <디엠제트>만 해도 그렇다. 이 작품은 그때나 지금이나 경이로운 작품, 작업이다. 의정부, 동두천 미군부대 주변 사진관에서 기지촌 여성들 사진을 수집하여 만든 이 작품은 우선 당시까지만 해도 ‘그림은 그리는 것이다’라는 통념에 젖어 있던 나의 뒤통수를 쳤다. 분단의 비극, 처연한 현실 앞에 나는 말을 잊었다. 미군 병사의 품속에서 웃고 있는 우리의 동시대로 살아가고 있는 여인들의 하나하나의 모습은 그대로 비수가 되어 가슴에 꽂혔다. DMZ, 맞다! 디엠제트는 바로 저 여인들의 모습 그대로다. ‘나는 결코 지옥에 갈 수 없다. 여기가 지옥의 한가운데인데 더 이상 다른 지옥이 또 있겠는가?’ 사진 속의 미국 병사는 말한다. 여기 한국보다 더한 지옥이 어디 있느냐고. 용태 형은 미술의 허망함을 보았을 것이다.


이 사진을 모으며 기지촌을 배회했던 용태 형에게 미술은 한낱 배부른 자들의 유한취미로 비쳤을 것이다. 세상은 사람을 움직여야 변한다고, 미술만으론 안 된다고 새기고 또 새겼을 것이다. 스스로 붓을 꺾고 현장에 뛰어들었던 낭만적 혁명가, 김용태 형! “형, 오늘 차비 있어? 오늘은 내가 형 차비 줄게!”


임옥상 화가·임옥상미술연구소 소장

 

 


김용태 선생은 1980년대 10년을 관통한 ‘현실과 발언’ 시절을 “진지하면서도 재미있었다”고 기억했다. 사진은 87년 봄 남양주 능내리 한강변에서 ‘현발’ 정기 워크숍을 마치고 찍은 것으로, 왼쪽부터 김용태, 임옥상, 두 사람 건너 김정헌, 김선화·박재동 부부, 박세형, 김건희·신금호 부부, 강요배. 앞줄 왼쪽부터 주재환, 김용태 선생 부인, 민정기, 안규철씨. <산포도 사랑, 용태 형> 중에서

 

 

“‘놀기도 잘 놀았어…서로 얘기하고 싶어 죽는 거지”

 

용태 형의 ‘현발’ 회상

 

“모두들 흩어져라!” 고 김용태 선생이 회상하는 ‘현실과 발언’ 결성 배경은 1979년 ‘12·12 쿠데타’의 공포와 겹쳐 있다.

 

“그해 ‘10·26’에 이어 전두환 신군부의 쿠데타가 터질 때였다. 여느 때처럼 청진동 중국집에서 ‘현발’ 창립 동인들이 거사(?)를 모의하고 있었는데, 느닷없이 김윤수 선생이 어떻게 알고는 뛰어들어와 고함을 질러 혼비백산했다. 음식을 시켜놓았는데 먹어보지도 못하고 흩어졌어. 김 선생은 70년대 초반 이화여대 교수직에서 해직된 경험이 있어서 일종의 행동요령을 알고 계셨던 거지.”(<산포도 사랑, 용태 형> 중에서)

 

마포의 <미술과 생활>을 떠나 78년부터 주재환과 함께 일하던 김용태의 종로 ‘관철동 편집실’은 사실상 ‘현발’의 회합 장소로 쓰였다. “관철동이라는 데가 명동에서 넘어오는데, 집세가 좀 쌌어. 그래서 번역하시는 분들, 신경림 선생, 민영 선생, 천승세 소설가, 그런 사람들이 우리 방에 와서 죽치고 있었어. 매일 같이 살았어. 그래서 문인들하고도 거기서 잘 어울렸지.”

 

‘술객’ 모임이 토론자리로 발전
“현발은 우리 나름대로의 반란”

 

하나둘 모인 ‘술객’들로 시작된 관철동 모임은 ‘10·26’ 이후까지 주말마다 한가지 이상의 주제를 놓고 토론하는 자리로 발전했다. “어느 날 손장섭 선생이 ‘미술 하는 사람이라고 그림만 그려야 되겠나. 어떤 기록을 남겨야 한다. 정물이나 풍경만 그려서는 안 된다’고 했던” 순간을 김용태는 ‘현발’ 태동의 계기로 기억한다. “특히 성완경의 주장은 영향이 컸어요.” 그 무렵 프랑스 유학에서 돌아온 미술평론가 성완경은 예술의 사회현실 참여 사례를 집중적으로 소개해 미술인들에게 큰 자극을 줬다.

 

유신 말기까지 이어진 관철동의 주말 토론 모임에서 멤버들은 예술가로서 비판적 시각으로 나름의 견해를 발표하고 차츰 자기만의 예술세계를 찾아 자연스럽게 ‘현발’이 탄생했던 것이다.

 

화제와 파문을 던진 80년 1월의 ‘현발’ 창립전 구상도 술자리에서 나왔다고 김용태는 기억한다. “저녁이면 답답하고 그러니깐, 관철동 설렁탕집에서 막걸리 한잔씩 먹는데, 어느 날인가 원동석이 ‘내년에 ‘4·19’ 20돌인데 가만있어서 되겠는가? 의기투합해서 전시회를 준비하자’ 했어. 그러면서 멤버들이 구체적인 목적을 가지고 일을 벌이게 된 거지.”

 

79년 11월 가장 막내 격인 윤범모가 “솜씨 좋게” 문예진흥원 미술관을 대여하면서 본격화된 창립전 준비 당시의 분위기를 그는 한마디로 “참 진지했다”고 증언했다. “긴장된 사회 속에 살다 보니깐. 우리 나름대로는 반란이지. 음모를 꾸민 거지.”

 

유신 말기, 술집에서조차 대여섯명만 모이면 신고를 하게 되어 있었던 암울한 시기였기에 ‘현발’의 결성은 모임 자체만으로도 용기가 필요한 ‘반란’이었던 셈이다.

 

 

하지만 김용태의 기억 속 그 시절은 여전히 ‘낭만이 살아 있던 시대’였다. “놀기도 잘 놀았어. 말하기 좋아하는 신경호·임옥상·노원희·박재동·강요배가 나타나면 서로 얘기하고 싶어 가지고 죽는 거지. 시끌시끌하고 재미있어.”

 

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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