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찾아서] 용태 형과 문화운동시대

 

 

1987년 3월 민미협에서 기획한 <반(反)고문전> 때 출품한 박불똥 작 ‘우리나라 대통령이 부(끄)럽다’.

하지만 주최 쪽의 자체 검열로 그림마당 민의 전시장 대신 사무실에 숨기듯 걸었다가 그해 연말 작가의 개인전 <졸작전>에서는 공개 전시됐다.

 

 

‘힘전’ 출품 작가 즉심 회부 탄압에
민중미술 전시장 대관 불가능
당국 ‘민중’만 들어가면 눈 부라려
김정헌 형과 용태 형이 불러
“전시관 보증금·월세 570만원 좀…”
돈은 내가 마련해 볼게요”
수도약국 맞은편 ‘그림마당 민’ 탄생

 

 

■ 전시장 대관도 어려웠던 민중미술

 

 

모두가 “용태 형”이라고 부르는 김용태라는 인간은 죽어서도 ‘용태 형’답다는 생각이 든다. 그의 죽음을 계기로 이렇게 민중문화운동의 발자취를 세상 사람들에게 다시 들려줄 수 있는 자리가 생겼다는 것이 고맙기만 하다. 만인이 용태 형을 좋아하고 사랑함은 그에게는 사사로울 ‘사’, 거짓된 ‘사’가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것을 ‘사’ 자가 없다는 말로 요약한다.

 

 

이념으로 뭉친 단체는 말이 많기 마련이다. 민족미술협의회(민미협)이고 민족예술인총연합(민예총)이고 제도권에 도전하는 재야의 ‘운동’단체는 항시 당면 노선을 놓고 일대 혈전을 벌이기 일쑤다. 세월이 지나 생각해 보면 그 노선이라는 것에 큰 차이가 있는 것도 아니지만 눈앞의 현실은 당장 싸우느냐 참느냐, 이걸 하느냐 마느냐의 행동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치열할 수밖에 없다.

 

 

민미협 역시 독재정권에 대항하고 올바른 미술문화를 이룩하자는 재야단체였기 때문에 큰 틀에서는 모두 동의하면서 노선에서는 개인마다 그룹마다 차이를 보였다. 그러나 민미협은 기본적으로 미술가들의 모임이기 때문에 누구나 동의하는 것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작품으로 말해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미술이라는 장르는 아틀리에의 작업이 전시회에 출품됨으로써 객관화되고 사회화된다는 특성을 갖고 있다. 아무리 훌륭한 작품이라도 발표될 공간을 갖지 못하면 먼 훗날 숨은 이야기와 함께 드러날 수는 있겠지만 팽팽 돌아가는 현실에서는 아무런 힘을 얻지 못한다.

 

 

제도권에서는 화랑들이 작가 활동을 지원하고 전시회를 열어주는 구실을 했지만 80년대 벽두부터 불붙듯이 일어나는 미술운동을 지원해주는 화랑은 없었다. 작가들이 주머닛돈을 모아 전시장을 빌려 자기를 표현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은 당사자밖에는 기억하는 사람이 거의 없겠지만 미술평론가로서 내가 잊을 수 없는 해는 1984년이다. 그해 6월에는 무려 105명의 작가가 서울의 전시장 3곳을 빌려 <삶의 미술전>을 열었다. 7월엔 서울 한강미술관에서 <거대한 뿌리전>, 8월에는 부산·마산·대구를 순회하는 <시대정신전>, 9월에는 <서울미술공동체전>, 11월에는 <푸른 깃발전>이 열렸다. 이미 80년대 초에 결성된 ‘현실과 발언’, ‘임술년’, ‘실천그룹’, ‘두렁’, ‘광주시민미술학교’ 등의 연례 전시도 이어졌다.

 

 

젊은 작가들의 뜨거운 열기는 이듬해인 85년 7월 열린 <한국 미술 20대의 힘 전>에서 더욱 분출되었다. 그동안 사찰 당국이 미술은 그래도 순수하다고 관망하다가 급기야 이 전시회를 봉쇄하고 출품 작가를 연행해 즉심에 회부했다. 이에 대응하고자 민중미술탄압대책위원회가 꾸려졌고 그 활동이 결국 그해 11월, 민미협 결성의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독재정권의 탄압이 시작되면서 전시장 대관은 불가능하게 되었다.

 

 

■ “민씨 성의 대표를 찾아라!”

 

 

민미협이 결성되고 한달쯤 지난 12월 어느 날이었다. 당시 나는 인사동에 있는 선화랑에서 발행하는 <선미술>의 주간을 맡고 있었다. 용태 형과 김정헌 형이 점심을 같이 하자고 하여 우리가 즐겨 가던 부산식당에서 생태찌개를 먹는데 둘 다 정작 말을 꺼내지 않는 것이었다. 용태 형은 화를 낼 때는 목소리가 뱃속에서 나오고 곤란할 때는 약간 더듬는 버릇이 있었다. 용태 형이 먼저 더듬거리면서 입을 열었다. 용태 형은 아쉬운 소리를 할 때면 나를 유 대감이라고 불렀다. “유 대감, 우리 전시장을 한번 마련해 볼까 하는데 어때? 수도약국 맞은편 지하에 35평이 나왔어. 보증금 500만원에 월세 70만원이래.” “괜찮네.”

 

 

그러자 하는 말이 좋기는 한데 문제는 그만한 돈도 없거니와 그곳을 어떻게 경영해야 하는지 자신이 없다는 것이었다. 소위 팔리는 그림을 전시할 뜻이 전무한 상태에서 우리가 의지할 수 있는 것은 회비와 대관료뿐인데 가난한 민중미술가들에게 회비 납부를 강요할 수도 없고, 대관이 제대로 되지 않으면 건물 임대료도 낼 수 없다는 계산이 나온다는 것이었다.

 

 

내가 얘기만 듣고 아무 대답을 하지 않자 정헌이 형이 답답하다는 듯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유 대감, 당신이 보름 안에 돈을 융통해 올 수 있어?”

 

 

나는 한번 해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민미협 활동가들의 작품 발표장을 갖는다는 것은 민족문학가들이 이를 지지하는 문학잡지를 갖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형들이 적극 나선다면 돈은 내가 마련해 볼게요.”

 

 

당시 내 월급이 30만원이었으니 쉽지 않은 목돈이었지만 잘 아는 선배에게 빌려 보증금 500만원과 선금으로 내는 첫달 임대료 70만원 합쳐 570만원을 마련했다. 이 돈으로 계약을 하고 나서 우리는 본격적으로 전시장 운영 문제를 논의했다. 이번엔 전시장에 누가 상근하느냐는 문제였다. 형들은 내가 해주기를 바라는 것 같았다. 그러나 직장인으로서 그건 불가능한 얘기였다. 그래서 궁여지책으로 생각해낸 것이 어차피 필요한 민미협 사무실과 같이 쓰고 내가 운영위원장을 맡기로 했다.

 

 

이어서 우리는 전시장 이름을 지어보기로 했다. 갤러리니 미술관이니 전시회관이니 하는 말 대신 ‘그림마당’으로 하자는 내 제안에는 둘 다 동의했다. 그러나 그 앞뒤에 붙일 이름에 원칙론자인 용태 형은 어떤 식으로든 ‘민중’, ‘민족’이 들어가야 한다고 했고, 매사에 신중한 정헌이 형은 그렇게 직접적으로 노출하면 안 된다고 해서 끝내는 둘이 다투었다. 그렇게 언쟁 비슷하게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던 끝에 내가 그러면 ‘중’ 자는 빼고 ‘민’ 자만 뒤로 붙여서 ‘그림마당 민’으로 하자고 했다.

 

 

용태 형은 그것으로 좋다고 했는데 정헌이 형은 여전히 그렇게 직설적이면 안 된다고 주장했다. 민중미술에 대한 탄압이 심했던 때라 ‘민’ 자만 들어가도 당국이 신경을 곤두세우는 세상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정헌이 형이 양보를 하고 나왔다. “좋아. ‘그림마당 민’이 좋은데 이건 한글로만 민이라 쓰고 대표를 민씨에게 맡기자.”

 

 

그리하여 민씨 성을 가진 우리 쪽 사람을 찾아보니 민정기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용태 형과 정헌이 형은 ‘걔는 그림 그릴 줄밖에 모르는 애’라며 안 된단다. 정헌이 형 부인이 민씨이긴 했지만 입 밖에 꺼내지 않았다. 그런 탐색 끝에 우리는 민혜숙을 찾아냈다. 민혜숙은 나와 미학과 동창이고 내 친구 부인이기도 해서 아주 친한 사이였고 오윤, 정헌이 형, 용태 형과도 가깝게 지내는 사이였다. 우리는 조심스럽게 부탁했는데, 그가 흔쾌히 승낙해주어 너무도 고마웠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림마당 민을 운영하는 것은 돈 되는 일은 없고 오직 노력 봉사일 뿐인데 모두들 거기에 온 열정을 쏟아 넣었으니 무엇에 씌어도 단단히 씐 것이었다. 그것은 ‘민’ 자라는 거대한 멍석이었다. 용태 형은 그 멍석자리를 까는 데 누구도 따를 수 없는 마당쇠였다. 그는 친구 김선경에게 부탁해 거의 공짜로 실내장식 공사를 마무리해 아담한 공간을 연출해냈다.

 

 

그리하여 민혜숙 대표를 모신 ‘그림마당 민’이 세상에 탄생했고 86년 2월 민중미술가들의 작품을 한자리에 모은 초대전이면서 <40대 22인전>이라는 아주 ‘부드러운’ 제목으로 개관을 할 수 있었다. 민중미술가들의 기대와 축복 아래 개관전은 대성황을 이루었다. 그림마당 민의 등장은 민중미술 운동과 민미협의 활동에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앞으로 민중미술운동사 내지는 20세기 한국미술사를 서술함에 그림마당 민의 존재를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운영난에 미술강좌 수강료 보태고
정체성과 다른 전시도 불가피
회원 항의 땐 용태형 “니 죽을래?”
그 진정성은 누구에게도 통해
가나화랑·학고재 대표 등은
눈밝은 민중미술 후원가였다

 

 

■ ‘그림마당 민’의 성공과 한계

 

 

그림마당 민은 처음에는 그런대로 돌아가는 것처럼 보였다. 86년 6월 첫 초대전으로 기획된 오윤의 <칼노래>는 대성공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찾아왔고 모두들 그의 뛰어난 예술성에 감동했다. 그러나 오윤은 이 첫 개인전에 이은 부산 순회전을 마친 지 열흘 만에 세상을 떠났다. 결국 그가 이 전시회를 위해 마지막 1년 동안 제작한 70점의 목판화가 그의 대표작으로 남았다.

 

 

한 해, 두 해 지나면서 그림마당 민의 운영에 차질이 생기더니, 대관이 되지 않는 달은 적자를 메울 방법이 없었다. 용태 형, 민 대표 그리고 나는 매달 건물 임대료 마련하는 데 혼신의 힘을 다하지 않을 수 없었다. 건물도 낡아서 비만 오면 전시장이 물바다가 되는 바람에 매번 그걸 닦고 치우는 게 일이었다. 홍선웅·곽대원·류연복·유은종·최석태 등이 정말로 고생들 많이 했다.

 

 

게다가 민미협 사무실이 따로 독립해 나가고부터는 인건비 부담이 생겼다. 대관료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었다. 나는 신촌 우리마당에서 하고 있던 ‘젊은이를 위한 한국미술사’ 강좌를 그림마당 민으로 옮겨와 수강료를 받아 임대료를 내기도 했다.

 

 

민중미술 전문 전시공간인 그림마당 민은 늘 독재정권의 감시와 탄압을 받아야 했다.

사진은 1987년 3월 박종철군 추모 기념으로 기획된 <반고문전>을 원천봉쇄하고자 사복경찰들이

그림마당 민 입구를 막고 있는 장면. <한겨레> 자료사진


 

그런 와중에도 그림마당 민에선 정말로 많은 민중미술가의 개인전과 단체전 그리고 기획전이 열렸다. 해마다 열린 <통일전> 같은 전시에서는 이애주의 춤과 김남수의 굿이 더해져 열기가 뜨거웠다. 그러나 전시장 운영을 위해 그림마당 민의 정체성에 어긋나는 전시회에도 대관하지 않을 수 없는 일까지 생겼다. 그러면 민중미술의 노선을 따지던 회원, 노동미술을 지향하며 현장으로 나갔던 회원들의 항의가 거세게 들어왔다. 원칙적으로는 맞는 주장이었지만, 그 원칙에 맞추려면 문을 닫을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88년 한겨레신문 창간 기금 마련 캠페인으로 그림마당 민에서 <민중미술 예쁜 그림전>을 기획하였을 때도 앞뒤 사정을 모르는 민미협 회원들의 반발이 심했다. 나는 나대로, 용태 형은 용태 형대로 곤혹스러웠다. 지금 생각하면 있을 수 있는 전시회였다고 받아들일 만도 하지만 그때는 설득이 되지 않았다.

 

 

용태 형이 그럴 때면 잘 쓰는 말이 있다. “늬들, 정말 말 다했어. 늬들만 옳은 줄 알아. 죽을래!” 이 말은 용태 형의 전매특허 같은 대사였다. 그래도 그에게는 ‘사’ 자라는 것이 없었기 때문에 누구에게나 통했다.

 

 

여담이지만 젊은 작가들이 기획한 <미술과 성(性)>은 그 주제 때문에 민중미술과 관계없는 사람들도 많이 찾아왔다. 특히 인사동에 배치되어 있는 전투경찰들이 많이 구경하고 갔다. 그러나 87년 박불똥의 <졸작전>에서는 전두환이 경찰에 끌려가는 모습을 담은 ‘우리나라 대통령이 부(끄)럽다’를 전시장에서 뗄 수밖에 없었고, 88년 박종철군 추모 <반(反)고문전>에서는 그림마당 폐쇄 위협까지 받는 등 탄압이 끊이지 않았다.

 

 

■ 민중미술과 그림마당 민을 살린 후원자들

 

그림마당 민의 운영비를 마련하고자 나는 민중미술을 홍보하며 작품 판매에 전념을 다했다. “민중미술은 훗날 미술사적으로 반드시 승리한다. 그리고 민중미술 작품들은 언젠가는 반드시 재평가받을 것이다. 그렇다면 영리한 화상, 안목 있는 소장가라면 지금이 민중미술가의 작품에 투자할 가장 좋은 시기가 아니겠는가.” 이런 논리로 처음에는 친한 친구들에게 권해 보았는데 몇 명에게는 통했지만 한계가 있었다.

 

그다음엔 미술 작품은 역시 미술의 가치를 아는 사람이 사줄 수 있다는 생각에서 친분 있는 화상과 미술애호가들에게 다가갔다. 하지만 역시 냉담한 반응이었다. ‘이렇게 좋은 기량을 갖고 있으면서 왜 이런 정치성을 드러낸 그림을 그리는지 의아스럽다’는 선입견이 강했던 것이다.

 

그래도 눈 밝은 이들은 있었다. 가나화랑의 이호재 대표는 민중미술의 가치를 가장 먼저 인식하고 초기부터 작품을 많이 사주었고, 마침 그때 새로 창간한 <가나아트>의 초대 주간으로 용태 형을 모셔갔다. 나중엔 임옥상을 전속작가로 지원해주기도 했다. 그렇게 수집된 가나화랑의 민중미술 수집품들은 훗날 모두 서울시립미술관에 기증되었다.

 

나중에는 학고재 화랑의 우찬규 대표가 적극 후원해줬다. 학고재를 열기 전부터 기꺼이 작품 강매를 당해준 그는 심지어 걸개그림을 사달라는 무리한 요구도 들어주곤 했다. ‘제1회 민족미술상’ 수상 작가인 신학철 초대전의 전시장을 제공해주었고, 강요배·이종구를 비롯한 여러 민중미술가들의 초대전을 열어주었다.

 

순수애호가도 여럿 만나게 되었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분이 청관재라는 호를 가진 고 조재진 사장과 그의 부인이다. 매주 수요일마다 인사동 화랑가 순례를 하는 미술애호가였던 부부는, 아무런 설명 없이도 작품을 객관적으로 평가하는 안목을 지니고 있었다. 청관재의 민중미술 수집품들은 지금 국립현대미술관에 소장돼 있다. 임대료가 다급할 때면 코리아나 화장품의 유상옥 회장에게 달려가 도움을 구하기도 했다.

 

한때는 재야단체의 ‘기금 마련전’이 유행처럼 열렸는데 그럴 때면 나와 용태 형의 강매에 마지못해서 사준 이도 적지 않았다. 이런 민중미술의 이해자들이 있었기 때문에 그림마당 민은 그나마 10년간 장수(?)할 수 있었다.

 

그림마당 민은 나중엔 문영태 형이 나서서 운영을 맡으면서 조금 사정이 좋아진 때도 있었다. 그러나 어렵기는 매일반이었다.

 

유홍준 미술평론가·전 민미협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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