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운 화백 1주기 유작전
1주일에 5일 인사동 머물며
문화계의 허브 역할 했던
정 많은 화가 유작 모아 개인전

아버지 떠난 지리산 작품 외
목탄 드로잉 등 50여점 전시
“지아비 위한 아내의 씻김굿”

 

 

 


그는 지리산으로 갔을 거다. 웅대함은 아비요, 넉넉함은 어미인 그 품으로. 지리산은 그리움이었고 마치지 못한 그림이었기 때문이다.
일주일이면 닷새밤을 인사동에서 머물어 ‘인사동 밤안개’로 불리며 문화계 허브 역할을 했던 여운 화백의 1주기 유작전 ‘민족혼, 여운을 남기다’가 19일부터 25일까지 서울 종로구 관훈동 인사아트센터에서 열린다. 1970년대 추상표현주의적인 작품에서부터 민중미술을 거쳐 목탄드로잉에 이르기까지 50여점을 2개 층에 걸쳐 펼친다. 지난해 1월 66세를 일기로 타계하기 전, 이리저리 궁리하려다 못한 제8회 개인전을 겸했다.
사람들은 대개 그를 두고 ‘정이 많은 사람’이라고 했다. 하룻저녁에 인사동 일대에 서너 군데 약속을 잡아놓고 장소를 옮겨가며 술을 마셨다고 한다. 수십년을 그리하여 으레 그러려니 된 터라 그에 얽힌 일화를 뚜렷이 기억하는 이가 많지 않다. 화가, 문인, 정치인, 종교인 등 두루두루 마당발이어서 내 사람이거니 챙기는 사람도 적다. 기억은 여운의 몫이고 챙기는 것 역시 그의 몫이었다. 1979년 오의정과 꾸린 수유리 신혼집은 시인, 묵객으로 북적였다. 배부른 새댁은 멋 모르고 국수를 삶아내고, 슈퍼에서 병술을 사서 날랐다. 수유리에서 ‘현실과 발언’이 태동하던 무렵이다. 광주항쟁 직후에는 황석영, 윤한봉 등 고달픈 이들이 그의 집에서 몸을 숨겼다. 한양여대 교수 월급은 주변인들 옥바라지와 주머니 가벼운 이들을 위한 술값으로 나갔다. 중국 노신대학 교환교수로 가서는 거기서 받은 월급을 모두 기부하고 빈손으로 돌아왔다.
여운은 퇴색한 부친의 사진을 늘 지갑에 넣고 다녔다고 한다. 부친 여창렬은 일본 와세다 대학을 나와 해방 뒤 여운형의 건준에 참여하고 좌우합작운동에 간여했다. 한국전쟁 중에 지리산 자락에서 행방불명되었다. 아비에 대한 기억이 없는 여운은 해남여고 교장을 지낸 모친한테서 소문처럼 들었을 터다. 어쩌다 남북회담이 열리면 혹시 아비의 소식을 들을까 하여 북한대표 숙소 언저리를 헤맸다고 한다.



 

그의 타계 1주기를 맞아 유고전이 19일부터 열린다. 아래 작은 사진은 ‘지리산’ 연작 중 한 작품. 오의정씨 제공
 


그의 화력은 가족사에서 확대된 슬픈 민족사와 일치한다.
1947년 전남 장성에서 난 그는 홍익대와 같은 대학원 서양학과를 졸업했다. 1970년 모더니즘 계열의 작품 ‘창’으로 1970년 한국미술대상전에서 우수상을 차지했다. 그해 김환기가 초대작가로 대상을 받았다. 창 연작은 유리창을 화폭 삼아 신문지 조각들을 콜라주한 모더니즘 계열의 작품이다. 일부 작품에서는 120년전 갑오농민전쟁을 이끈 전봉준 등 역사적 주제가 눈에 띈다. 1960년대 말 그는 친구 이두식을 통해 황석영을 만나고, 고은 신경림 백낙청 이문구 김지하 현기영 최민 유홍준 리영희 백기완 등 민족예술가들과 교류했다. 1985년 김윤수 신학철 오윤 김용태 주재환 민정기 등과 함께 민족미술협회를 창립해 2004년부너 4년간 회장을 지내며 민중미술 계통 그림을 그렸다. ‘동학’, ‘단절시대’, ‘별들의 전쟁’, ‘세상굿’ 등 민화풍 그림, ‘실향민’, ‘거리에서’, ‘먼 산 빈 산’, ‘곰나루 터’ 등이 이에 해당한다. 이 무렵 그는 장지를 즐겨 이용했다. 2006년 연 개인전 ‘검은 소묘’에서 목탄으로 그린 풍경화를 선보이는데, 말년에 선택한 목탄이 작가의 몸짓을 날로 드러내는 미디어인 점은 그가 소재로 삼은 철원, 대추리, 북한산, 지리산 등이 역사적인 장소인 점과 연계된다. 분단, 통일 등을 직접 말하기보다 말없음으로 말하는 초심으로 옮아갔다고 할까. 어쩌면 누르고 눌러온 속엣말을 펼칠 그만의 수단을 비로소 얻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알코올에 쩔은 그의 몸은 1994년 간경화를 진단받은 이래 가파르게 기울었다. 그림만 그리고 싶다는 바람은 2012년 정년퇴임 하면서 이뤄졌지만, 새로 사들인 캔버스를 다 쓰지 못한 채 타계했다. 그가 마지막으로 붓을 들고 마주 앉았던 그림은 아비가 사라진 지리산이었다.
그의 아내 오의정씨는 “여운은 병상에서 비로소 지아비로 돌아왔다”면서 “이번 전시는 죽은 지아비를 위한 아내의 씻김굿”이라고 말했다.


한겨레신문 / 임종업 기자 blitz@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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