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이구 선언한 날, 속 시원한 선언이라도 없을까 기대하는 중에 술 마시러 오라는 기별이 왔다.

 

인사동 ‘무다헌’에는 몸이 불편한 이계익 전 장관을 비롯하여 서양화가 신학철, 장경호, 시인 정희성,

김명지, 강고운씨가 모여앉아 술판을 벌여놓았다.

 

신학철선생은 두 달 전 아내를 하늘나라로 떠나보내 술자리를 자제해 오다 오랜만에 인사동에 나온 것이다.

물론 장경호씨의 전화에 비롯되었지만, 작업이 풀리지 않아 붓을 내던지고 왔단다.

 

시위현장의 야전사령관격인 신학철선생께서 술잔을 기울이며 오래 전 이야기를 꺼냈다.

격렬한 시위현장에서 돌멩이를 잡았으나 차마 던지지 못하겠더란다.

그 돌멩이에 누군가 맞을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마음 연약한 양반이 아직까지 시위현장을 맴돌아야 하는 현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장경호씨는 '무다헌'에서 팔지도 않는 막걸리를 공수해 마시며, 통풍 때문에 맥주 못 먹는 날 위해 시바스리갈을 시켜주었다. 

너무 감격스러워 박통처럼 총 맞아 죽어도 좋다싶었다.

 

모처럼 다들 즐거워하는 모습에 기분 좋아, 어린애로 돌변하는 주벽까지 슬며시 도졌다.

모든 걸 내려놓고 놀았으나 다행히 총 맞지 않고 살아남았다.

 

 

사진,글 / 조문호

 

 

 

 

 

 

 

 

 

 

 

 

 

 

 

 

 

 

 

 

 

 

신학철화백의 부인 김태순여사가 지난 18일 오후3시 30분, 소천하셨다.
파킨슨 증후군이란 희귀병에 걸려 13년 동안 고생하시다 운명하신 것이다.

장경호씨로부터 전해들은 비보에 가슴이 아팠지만,
고통스러운 삶의 끈을 놓은 것이 오히려 다행이란 생각도 들었다.
부디 극락왕생하셔서 이승에서 못다 한 행복을 오래 오래 누리시길 간절히 축원했다.

왕십리에 있는 한양대학병원 장례식장을 찾아 나섰다.
고인의 죽음을 슬퍼하는 듯, 이틀 동안 봄비가 부슬부슬 내렸다.

장례식장으로 들어가는 병원 주변에 핀 철쭉이 눈부셨다.
비에 젖은 처연한 자태에서 신성한 기운마저 느껴졌다.
부질없는 짓인 줄 알면서도 카메라를 꺼내 사진을 찍어본다.

장례장을 들어서다 양평에서 온 민정기화백 내외를 만났고, 

서양화가 장경호, 조신호, 이인철, 박홍순씨를 만나는 등 반가움의 연속이었다.

접객실에는 딸 신목원, 신세원, 신전원, 신윤원씨가 음식을 나르고 있었고,
영안실에는 사위 김우원, 최정열, 배정암, 윤호석씨가 예를 올리고 있었다.

항상 그랬지만, 문상객을 맞는 신학철화백의 표정은 수심이 가득했다.
저 얼굴의 그늘을 언제 거두어 드릴 수 있을지, 마음이 무겁다.

사진,글 / 조문호

 

 

 

 

 

 

 

 

 

 

 

 

 

 

 

 

 

 

 

 

 

 

 

 

 

 

 

 

 

 

 

 

 

 

 

 

 

 

 

 




 

 

 

신학철선생 부인 김태순여사의 장례를 기록하러 왕십리로 나왔다.
19일 정오무렵 집을 나와서는, 발인 할 때까지 견디려고 술도 아껴 마셨다.
그러나 그 것도 잠깐일 뿐, 술이 술을 마시게 했다. 

술이 취해 실수할까봐 틈틈이 휴게실에 앉아 졸기도 했다.
잠결에 문영태씨를 만났으나, 갑작스런 박재동화백의 전화에

사진 찍는 걸 잊어버렸다. 이제 잊어버리는 일도 다반사다.

문상객 중 장례식장을 가장 오래 지킨 분은 주재환선생이었다.
그렇게 열심히 마시고도 견디시는 걸 보니, 아직 청춘이셨다.
후배가 모셔드린다고는 했으나, 일산까지 잘 가셨는지 모르겠다.

자정이 넘어서는 인근 술집으로 자리를 옮겼다.
김정환, 김태서, 조경숙, 심광현, 김한영, 황호창, 김용철씨와 함께 했다.
술자리에서 노래를 부르며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김태서씨의 춤만 기억난다,

너무 취해 장례식장으로 돌아 와, 상주 틈에 비집고 누워 버렸다,
인기척에 눈을 떠니, 어제 갑자기 사라졌던 장경호씨였다.
벌써 발인할 시간이 되었다는 것이다.

시간이 가까워지니 좀 전에 같이 마셨던 김정환, 김한영, 황호창, 조경숙,
김용철씨가 복귀했고, 이상호씨는 조간신문의 부고를 보고 급히 달려왔다고 했다.
시락국으로 속을 달랜 후, 카메라 건전지와 CF카드를 점검했다.

그러나 김천 장지까지 따라 가려던 촬영계획이 갑자기 무산되었다.
가족끼리 오붓하게, 마지막 례를 올리겠다는 가족회의가 있었단다.
딸들의 파워를 시기한 김정환씨는 버스에 올라 버티기도 했으나, 이상호씨가 데려왔다.

가랑비 속으로 사라지는 상여차를 바라보며, 고인의 명복을 빌었다.

사진,글 / 조문호

 

 

 

 

 

 

 

 

 

 

 

 

 

 

 

 

 

 

 

 

 

 

 

 

 

 

 

 

 

 

 

 

 

 

 


 

지난 31일과 4월1일, 이틀 동안 연이어 인사동에 나왔다.  

 

첫 날은 보슬비가 보슬보슬 내려 술 생각나게 하더니,
이튿날은 화창한 봄볕으로  꽃놀이를 가고 싶었다.

31일 늦은 오후, ‘화신포차’에서 장경호씨를 만났는데,
뜻밖의 소식을 전해들은 것이다.

신학철형이 차에 받혀 갈비뼈가 세대나 부러졌다는데,

사고차량은 돌려 보내고 입원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남을 배려하는 형의 마음이야 이해하지만,

연세가 있어 쉽게 아물지 않을텐데 걱정스럽다.

 

그리고는 귀가 번쩍 떠이는 제안을 했다.

신학철형을 좌장으로 모시고, 마음 맞는 10여명이 ‘무다헌’에서 정기모임을 갖잖다.
모임 이름은 ‘노세! 노세!’가 어떠냐는 것이다.

요즘 인사동이 예전 같잖다.
거리는 관광객들로 들썩이고, 전시장은 많아도 텅텅 비어있다.
술 한 잔 마음 편히 마실 곳조차 없다.
인사동 마지막 낭만이 될지도 모를 ‘노세!’ 모임에 박수를 보냈다.

이튿날 한정식선생과의 오찬 약속으로 다시 나왔다.
밥 먹고 차 마시며 많은 말씀을 들었으나 기억에 남는 건, 딱 한가지였다.
혼자 사는 친구 소원이 저녁9시 뉴스를 같이 볼 수 있는 사람이란다.
얼마나 외로웠으면 그런 말씀을 했을까? 정말 남의 일이 아니다.

 

돌아오는 길에 '아라아트'의 '세월호 편지전'에 들렸으나 썰렁했다.

흐르는 세월에 모두들 세월호의 아픔조차  잊었나보다.

 

길거리에서 혼자 사는 이행자 시인도 만났다.


사진,글 / 조문호

 

 

 

 

 

 

 

 

 

 

 

 

 

 

 

 

 

 

 

 

 


 

지난 '청량리 588' 전시 때 팔렸던 사진들을 전해주려
마석의 장경호씨와 장안동 신학철씨 댁을 각 각 방문했다.
가난한 화가들이 사진을 사 줘, 그 고마움에 인사차 들렸다.

처음 들린 마석의 장경호씨 화실은 홀 애비 냄새가 물씬 풍겼다.
난간에 걸린 단출한 빨래가 그의 고단한 삶을 대변해 주었다.
장경호씨 댁은 일전에 방문한 적이 있어 살림살이를 대충 파악하지만,
신학철씨 댁은 처음이었다.


 


혼자 사시지만, 정리 정돈이 꽤 잘 돼 있었다.
김치냉장고에는 백김치를 잔뜩 담가놓았고, 장독에는 된장을 가득 담가놓았다.
오랜 세월, 병석에 누운 아내 간병하느라 살림꾼이 다 된 모양이다.

지금은 요양병원에 계셔서 짬을 낼 수 있으나, 그 전에는 꼼짝달싹 못했다.
인기작가로 부상해 여기저기서 그림을 찾고 있지만, 그릴 시간이 태부족이다.
아마, 신학철선생처럼 바쁜 사람은 이 세상에 없을 것이다.

그는 아내가 누운 요양병원까지 자전거로 다녀오며 하루일과가 시작된다,
집안 살림도 살림이지만, 시국현장마다 나서야 해 안 팎으로 바쁘다.
얼마 전 재야인사들로 모인 '국민신당' 창당준비위 공동대표까지 맡아 더 바빠졌다.

 

화구가 있는 작업실에 빨래가 널린 걸로 홀애비임을 말해준다.

 


아무리 바쁘지만, 그림도 열심히 그린다.

정교한 작품들을 완성하려면 많은 시일이 걸린다.

방마다 준비하는 자료와 그리는 작품은 있었지만, 마무리 된 작품은 하나도 없었다.

완성되기가 무섭게, 비싼 가격으로 팔려 나가니 남을 틈이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부자도 아니다.

돈만 생기면 가난한 재야단체나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니 통장은 늘 재로상태다.

그의 작품세계는 어떤가?  한국의 '고야'로 불릴 만큼 독보적이다.
민중을 중심으로 특유의 해석과 탁월한 상상력을 발휘한 기발한 내용들이다.
극 사실주의와 콜라주 기법으로 그려 낸  "갑순이와 갑돌이"시리즈와
'한국근대사' 연작들로 오래전 부터 화단의 주목을 받아온 터다.

 

 

신학철 작 '한국현대사-갑순이와 갑돌이' 부분.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신학철 작 '한국근대사'

장안동 술집에서 앞으로의 작업에 대해서도 귀띔해 주었다. 

 

작업 중인 '촛불시위' 외에도 남성문화와 전쟁문화를 비판하는 작품도 구상중이란다.
거대한 워싱턴기념탑을 남성 성기로 형상화할 것이라는데, 정말 볼 만하겠다.

 

의리의 신학철화백을 영원한 형님으로 모시기로 했다.

사진,글/조문호

 

 

 

 

준비중인 자료들을 설명하고 있다.

 

 

투병중인 아내의 고등학생 시절 찍은 사진이 거실 벽에 붙어 있었다.

축제에서 춘향으로 뽑혀 가장행렬에 나선 모습이다.

 

 

 

서재에 꽂힌 옛 자료들이 고풍스럽다 . 머지않아 신학철미술관에 남을 중요한 사료다.

 

언제봐도 소탈한 모습이 정겹다.

 

담배 피우는 장경호씨 표정 자체가 작품이다.

 

 

무슨 말을 저렇게 진지하게 할까? 술이 취해 찍어 기억이 안 나네.

 

 

늦은 시간에 누가 또 전화했을까?

 

 

아이구! 오줌마려워...

‘청량리 588’ 조문호사진전이 열리고 있는 ‘아라아트’ 전시장에는 연일 인사동 사람들의 반가운 만남이 이어지고 있다.

만화가 박기정, 박재동선생, 가수 최백호씨, 최혁배, 이대복변호사, 경기도미술관장 최효준씨, 소설가 임헌갑씨, 시인 신경림, 정희섭, 김신용, 조준영, 강고운씨, 건축가 김동주씨와 박경주씨, 미술평론가 최석태씨, 서양화가 신학철, 문영태, 장경호씨, 설치미술가 김언경씨, 피리연주가 김정남씨, 불화가 이인섭씨, 목조각가 신명덕씨, 영화감독 이창주씨, 연극배우 최일순씨 등 많은 분들이 다녀가시며, 588에 대한 감회를 되 새겼다.

이른 시간부터 부산식당에 자리를 잡은 신학철, 문영태, 최석태, 장경호씨 등, 그림 패와 어울려 낯 술에 취해 버렸다.

‘사동집’의 출판기념회는 박기정씨를 비롯하여 50여명이 모였으나, 책을 꺼내 놓지 않아  출판기념회가 아니라

술판기념회가 되어버렸다.

 

뒤늦게 간 ‘무다헌’에서 강고운, 정영신, 신학철, 장경호, 조준영씨와 어울려 밤늦도록 재미있게 놀았다.
제 각기 사연베인 노래를 부르기도 했고, 잘 못돼가는 세상을 한탄하기도 했으나,
창작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신학철 선생께서 한 말씀 던졌다.

‘난 예술지상주의를 거부한다’

 

 

 

 

 

 

 

 

 

 

 

 

 

 

 

 

 

 

 

 

 

 

 

 

 

 

 

 

 

 

 

 

 

 

 

 

 

 

 

 

 

 

 

 

 

 

 

 

 

 

 




지난 10일은 김준권, 박불똥씨의 전시가 동시에 열려
옛 민주투사들이 인사동으로 대거 몰려들었다.
전시가 파한 후 ‘부산식당’에서 ‘영빈가든’을 거쳐
밤늦게는 ‘소담’에서 ‘무다헌’으로 후퇴에 후퇴를 거듭했다.

‘무다헌’에는 박불똥씨를 비롯하여 이인철, 장경호, 최석태, 김정대, 
이명지씨 등 10여명의 장정들이 마지막고지를 사수하고 있었고,
안쪽에는 신경림, 정희성, 신학철선생 등 고참들이 죽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신학철사령관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러면 안돼요”
참모총장격인 신경림선생께 삿대질로 힐책을 한 것이다.
유리한 고지만 쫓는 우유부단함에 분노가 폭발했던 것 같다.

그 수행관 격인 김태서장교가 신학철사령관을 나무라자
장경호장교가 김태서를 제지했다.
결국 참모총장께서 퇴청하여 사태는 수습되었지만,
자칫했으면 12,12사태가 아니라 12,10사태가 날 뻔했다.

사진,글/ 조문호

 

 

 

 




전시가 시작되는 수요일의 인사동은 늘 분주하다.
지난 5일은 서양화가 정기호선생과 백영규씨의 ‘조선달’전시가 동시에 열렸다.
전시 오프닝에 오가며, “마중”과 “유목민”에서 각 각 뒤풀이를 한다지만 “부산식당”부터 갔다.
식당 앞에 서서  담배피우는 장경호씨의 모습을 봤기 때문이다.

부산식당을 들어서자 판화가 류연복씨가 먼저 반겼다.

지난 번 술자리에서 찍은 내 모습을 보여 준다며 핸드폰만 뒤적이고 있었다.
그 자리에는 신학철, 장경호, 이인철, 김정대씨를 비롯한 그림패들이 잔뜩 앉아 있었다.
여기도 전시 뒤풀인 모양인데, 모두들 인사동에서 가끔 부딪혀 안면은 있으나 성도 이름도 모르는 분들이 많았다.

 

옆 자리에 앉았던 중 늙은이가 갑자기 장경호씨 앞으로 옮겨 와 말을 꺼냈다.
“저, 모르겠습니까? 40년 전에 장선생한테 그림 배운 제자입니다”
의아한 눈으로 지켜보던 장경호씨는 그 이의 구구한 설명을 듣고서야 반색을 했다.
세상에, 어떻게 서울에서 같은 화가로 활동하며 40여년 만에 해후할 수 있는가?
세상은 넓고도 좁은 것이 아니라 좁고도 넓은 것이었다.

바깥 자리에는 이행자시인이 생일 술상을 받고 있었지만, 그만 일어나야 했다.
신학철씨 일행은 최민선생이 기다리는 ‘낭만’으로 가자지만 “유목민‘부터 들렸다.
“유목민“은 백자장인 백영규씨의 전시 뒤풀이로 부산했다.
전유성, 박인식, 무세중, 무나미, 노광래씨 등 많은 분들이 흩어져 술을 마시고 있었다.
여기 저기 돌아다니다 보니 무슨 술에 취했는지 몸이 비틀거렸다.

인사동을 한바퀴 돌아 '로마네꽁띠'에 들려오니 ‘낭만’ 갔던 팀들은 최석태씨, 유근오씨를 데려왔고,
‘마중’ 갔던 조경석, 조준영, 정영신, 공윤희, 이명희, 신영수, 김정남씨 까지 ‘유목민’에 와 있었다.
‘유목민’이 마치 인사동의 종착역인 냥  모여들고 있었다.
여기 저기 술 취한 이들의 혀 꼬부라진 소리는, 천국의 언어처럼 헷갈리기 시작했다.

인사동의 깊어가는 가을밤은 쓸쓸했다.
술과 벗 그리고 아내까지 옆자리에 있었으나 왠지 외로움을 탔다.
내 처지가 김종길시인의 시 “황락”에 비유되어서 일까?
허전한 마음을 달래려 목이 터져라 “불나비”를 불렀으나 자꾸 눈물이 난다.

사진,글 / 조문호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