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의동 ‘인디프레스’ 31일까지

‘인디프레스 서울’의 개관 2주년을 기념하는 신학철, 장경호, 박불똥 3인 초대전 개막식이 지난 8일, 경복궁 영추문 맡은 편에 있는 통의동 신관에서 열렸다.



▲박불똥2016 '환갑풍경'pigment print 334x148


개막식에는 권력에 저항하는 민중작가들이 총 출동했다. 그 것도 청와대 바로 앞에 있는 전시장이 아니던가. 예전 같았으면 어림 반 푼어치도 없는 일이다. 그런데 요즘 민중미술이 뜨고 있다. 하도 시국이 어수선하니 그럴까?


▲박불똥2016'세상풍경'pigment print 334x148


오프닝 세레모니로 펼쳐진 장순향교수의 춤도 인상적이었다. 세월호 희생자들의 넋을 달래는 춤이라 애잔하고 슬펐다. 시위나 집회 때 마다 춤으로 저항해 온 장순향교수는 80년대 민중춤꾼 이애주교수와 쌍벽을 이루는 투사다.


▲개막식에서 춤을 추는 장순향교수


초대된 신학철, 장경호, 박불똥은 80년대 민주화운동과 맥을 같이해 온 우리나라 민중미술의 선두주자들이다.

특히 신학철은 1987년 ‘모내기’ 그림 사건으로 표현의 자유와 검열 문제에 논란을 불러일으킨 작가로 한국 현대미술사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다. 그리고 장경호는 암울한 시절 ‘한강미술관’ 관장으로 민중미술에 불을 지핀 장본인이 아니던가.



▲장경호 2016 '악몽-방글라데시' oil on canvas 130.3x162,2


그리고 또 한사람 박불똥은 이름만 들어도 다 안다. 폭력적인 권력을 휘두르는 정권에 대항하는 메시지가 매서웠기 때문이다.

기존의 그림에서 벗어나 사진 오브제를 이어 붙이는 콜라주 기법으로 현실감을 더해주고 있다.


이 초대전에 관심이 많았던 것은 작가들의 출품작이 민중미술의 신작이기도 하지만, 장경호의 작품은 마치 그의 복귀전이나 다름없는, 잘 만날 수 없는 그림이기 때문이다.


장경호2016'귀' oil on canvas 140x150



최근 들어 독재, 군사정권, 서구 자본주의 등 사회 기득권층에 저항하는 민중미술이 상승세를 이루며, 신학철씨의 작품은 그리기가 바쁘게 고가에 팔려 나간다.


민중미술이란 본래 물리적 또는 경제적으로 일반 대중들과 가까운 미술이어야 하는데, 민중을 위한 미술이 부잣집의 응접실을 장식하거나 권세가의 밀실에 숨어든다는 것이 아이러니다. 민중의 그림조차 돈만 되면 끌어당기는 자본주의의 무차별적 소유욕을 보는 듯 해 씁쓸할 뿐이다.



▲신학철2016'무제' oil on canvas 112x194



민중적인 미술은 다시 말해 우아함, 장려함, 위대함, 고귀함 따위로 만들어진 모든 가치는 여기서 낯선 것이 된다. 그래서 민중을 위한 미술은 당연히 반 숭고, 반질서, 비복고적인 비판성을 띠게 되는 것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대중들에게 어떻게 어프로치하며, 그리고 얼마나 호소력을 갖고 있느냐의 문제다. 제아무리 잘 그려진 그림도 진솔한 발언이 없으면 한낱 미사여구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신학철2016'별이 된 소녀' oil on canvas 112x194


초대 전시된 그림들은 강렬했다. 편히 감상할 수 있는 그런 그림이 아니라 피부를 강제로 만지게 해서 촉각적 한기를 느끼게 하는 이미지들이다. 정치, 사회를 향한 그들의 강한 메시지는 예술이 갖는 존재 이유이기도 했다. 사회현상을 꼬집고 비웃는, 강력한 현실발언에 통쾌함을 맛볼 수 있었다.


▲좌로부터 신학철,장경호,박불똥.(사진제공=인디프레스)



시대와의 힘겨운 투쟁 속에서 만들어 낸 작품들을 ‘인디프레스’가 찾아내 새롭게 문을 여는 것은 뜻깊은 일이다.

전시는 31일까지 이어진다.


[인디프레스 : 서울, 종로구 통의동 7-25 / 전화: 010-7397-8498]


[서울문화투데이 / 조문호기자]





‘인디프레스 서울’의 개관 2주년을 기념하는 신학철, 장경호, 박불똥 3인 초대전 개막식이

 지난 8일 오후6시, 통의동, 경복궁 영춘문 맡은 편으로 이전한 신관에서열렸다.

개막식에는 권력에 저항하는 민중작가들이 총 출동했다.

그 것도 청와대 바로 앞에 있는 전시장이 아니던가.

오프닝 세레모니로 펼쳐진 장순향교수의 춤이 퍽 인상적이었다.
세월호 희생자들의 넋을 달래는 춤이라 애잔하고 슬펐다.
80년대에 민중춤꾼 이애주교수가 있었다면, 지금은 장순향교수가 있다.
시위나 집회때 마다 춤으로 저항하는 투사다.


초대된 세 사람은 80년대 민주화운동과 맥을 같이해 온 우리나라 민중미술의 선두주자들이다.

특히 신학철씨는 1987모내기그림 사건으로 표현의 자유와 검열 문제에 논란을 불러일으킨

작가로 한국 현대미술사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다.

그리고 장경호씨는 암울한 시절 한강미술관관장으로 민중미술에 불을 지핀 장본인이다.


박불똥씨는 이름만 들어도 알 만한 사람은 다 안다.  

폭력적인 권력을 휘두르는 정권에 대항하는 메시지가 매서웠기 때문이다.

기존의 그림에서 벗어나 사진 오브제를 이어 붙이는 콜라주 기법으로 현실감을 더해준다.

 

전시되는 작가들 작품이 민중미술의 신작들이라 관심이 컷지만,

장경호씨의 작품은 마치 그의 복귀전이나 다름없다잘 만날 수 없는 그림이기 때문이다.


최근 들어 독재, 군사정권, 서구 자본주의 등 사회 기득권층에 저항한 민중미술이 뜨고 있다.

신학철씨의 작품은 그리기가 무섭도록 고가에 팔려 나간다.

 

전시된 그림들은 편히 감상할 수 있는 그림이 아니라 피부를 강제로 만지게 해서 촉각적 한기를 느끼게 하는

이미지들이지만, 사회를 향한 강한 메시지들은 예술이 갖는 존재 이유로서 큰 반향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

사회현상을 꼬집고 비웃는 현실발언에 통쾌함을 맛볼 수 있는 것이다


전시장엔 참여 작가를 비롯하여 백기완, 김세균, 이수호, 황효창, 박재동, 임진택, 박 철,

조준영, 송경동, 최석태, 윤병기, 천호석, 이인철, 최경태, 박흥순, 곽대원, 이도윤, 김태서,

장순향, 강고은, 김명지, 정영신, 이지하, 김경일, 이명희, 마문호, 김영중, 배인석, 조경연,

이재민, 정재안, 강기욱, 손병주, 김갑빈, 곽명우, 노광래, 김정대. 전활철, 김 구, 배성일씨 등

백여 명의 축하객이 모여들어 전시장을 가득 메웠다.

인근 뒤풀이집에서 마시고 놀다, 인사동 ‘유목민’으로 넘어왔더니 김명성, 박인식, 김기덕,

황세준, 황예숙, 최일순씨 등  많은 분들이 모여 있었다.


그러나 카메라가 더위를 먹었는지, 더 이상 작동되지 않았다.

그만 찍고  집에 가라는 신호인 것 같았으나, 걱정스러웠다.

몇 일전부터 후레쉬도 작동되지 않으며 수시로 애를 먹이더니, 결국 문을 닫아버렸다.


이 전시는 31일까지 이어진다.


사진,글/ 조문호



-신학철 작-




-장경호작-






-박불똥작-


















































































































































































































































지난 24일 화가 장경호씨로부터 전화가 왔다.

장안동서 신학철선생과 한 잔하고 무다헌에 넘어 왔으니 빨리 나오소~”

이미 술에 취해 목소리는 흐느적거리고 있었다.

어제 마신 술로 주독도 풀리지 않은 상태에서, 내일도 마실일도 걱정인데, 가만 두질 않았다.

소 도살장에 끌려가듯 인사동에 나갔더니, 일찍부터 술집이 부산했다.

 

신학철선생은 반가워하셨으나, 장경호씨는 김정대씨와 입씨름하느라 아는 척도 안 했다.

금방 한 판 할 것 같은 기세였으나, 술 취하면 부르는 그의 행복한 노래쯤으로 생각하고 앉았다.

그다음엔 나한데 시비를 건다. “어찌 알고 왔어요?” 자기가 전화해놓고도 매사 이런 식이다.

술 취하면 부르는 그의 시비성 노래는 익히 알지만, 모르는 사람들이 보면 좌불안석이다.

나중엔 나죽으면 형이 가마니때기라도 한 장 덮어주소라기에 가마니는 구하기 힘들고

카시미롱 이불은 덮어 줄게라고 말했다.

 

신학철선생께서 처음보는 류제홍박사를 소개했다.

모내기그림이야기를 하는 걸 보니 꽤 오랜 교분 같은데, 너무 젊어 보였다.

내가 여자라면, 한 번 꼬셔보고 싶을 정도로 핸섬했다.

명함을 주고 받았는데, 너무 다양하게 바쁜 사람이더라.

사회경제를 통솔한다는 뜻도 가진 ‘planner’라는 글자아래 공공공간연구소 공간력소장이란 직함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바닥에 깨알같이 적힌 글을 보니 정신이 없었다.

문화학박사, 정책컨설턴트, 전통시장전략가, 도시마을계획가, 청년도시메이커, 세계대회기획사라 적혔는데,

사짜는 아닌 것 같았다. 점잖았고, 이야기도 진솔했다.

오죽하면 술 취한 장경호씨의 거친 말투가 류박사와 연결되면 곧 바로 공손해 지겠는가?

    















옆 자리에는 요즘 몸이 불편해 잘 나오지 않는 주임마담 강고운시인도 보였다.

언제 왔는지, ‘관객모독을 연출한 기국서씨도 있었다. 그도 한 가닥 하는 주당이다.

말은 별 없지만, 거슬리면 여지없다. 한 때 서정춘시인이 그의 헤딩 한 방에 날아가는 것도 보았고,

도예가 한봉림씨를 향해 늑대처럼 튀어 올라 얼굴을 활키는 것도 봤다.


작은 거인 기국서씨가 반가웠지만, 일행이 있어 인사만 나누었다.

뒤늦게는 미술평론하는 김준기씨가 등장해, 술자리 대화가 갈리기도 했다.

장경호씨의 십팔번 뒷동산 아지랑이~”를 뒤로하며 먼저 도망쳤다.
















돌아오다 습관적으로 유목민에 들렸다. 안국역 옆에 있으니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주인장 전활철씨와 박혜영씨는 손님받느라 정신없고,

인사동에서 풍요로움이란 회사를 운영하는 조원희씨가 같은 일가라며 엄청 반가워했다.

김기영씨와 함께 앉았지만, 술을 더 마실 수 없었다.

퓨전피아니스트 윤강욱씨와 노래하는 신현수씨도 있었고, 나오는 길에 노광래씨를 만나기도 했으나

이로서 모두 살아있음을 확인하는 인사동 술 방랑은 끝났다.

 

씰데없는 술주정 듣느라 고생했슴니더.”

 

사진,/ 조문호










































 


 



지난 13일, ‘인사아트’의 ‘리얼리즘 복권’장에 신학철선생 만나러 갔다.
신학철선생을 만나 입구에서 담배피우다 반가운 사람들도 만났다.
‘나무화랑’의 김진하관장과 광주의 목판화가 강행복씨였다.
강행복씨가 3월 초부터 ‘나무화랑’에서 전시를 한다는데, 술 마실 건 수 하나 생겼다.

‘하늘풍경’의 정치판에서 한 잔 하고 ‘유목민’에 들렸더니,
강행복씨가 독작하고 앉았고, 뒤늦게는 유진오씨가 나타나더라.
그 날 신학철선생과 귀신 씨나락 까먹는 이야기하며 잘 마셨는데,
먼저 간 강행복씨가 우리 술값까지 내 버렸네.

좌우지간 강행복씨는 만나기만 하면 행복해진다니까ㅎㅎㅎ

2016. 2, 13 / 사진,글 : 조문호
















전시장에서 만난 '노동 정치 연대' 양경규 상임대표와 신화철 화백


어느 애비가 자식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있겠냐마는,
하나 뿐인 나의 아들에 대한 회한은 남다르다.
왜냐하면 애비구실을 제대로 못했기 때문이다.
처음 태어났을 때 얼마나 좋았으면, 이름을 ‘햇님’이라고 지었겠는가.
밝고 강하게 살라 붙였건만, 눈물을 더 많이 흘리게 했다.

무슨 대단한 일 한다고, 자식까지 팽개치고 살았는지 모르겠다.
부산에서 사진 한다며, 무작정 상경했던 시절이었다.
석관동에 셋방 하나 얻어 살았는데, 대책없이 사창가에서 윤락녀들
사진이나 찍고 있었으니 집안이 편할리가 없었다.
결국 이혼하여 아내와 아들은 연고지인 부산으로 내려가게 되었다.

이삿짐을 싸던 날, 하필이면 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그 당시 중학생이었던 아들은 헤어지기 싫어 처마 밑에 서서 울고 있었다.
내 마음에 큰 대못을 박았다. 그렇게 헤어져 이산가족이 된 것이다.

내가 아들에게 한 것이라고는, '경성대' 사진과에 다닐 때 등록금 보내준 것뿐이다.
그 것도 등록금 때문에 ‘삼성항공’ 카메라 사업부에 계약직으로 들어갔으나 
아들 대학졸업과 동시에 그만두었다.

그 이후 아들은 패션스튜디오에서 일하기도 했으나, 돈이 되지 않아 사진을 접었다.
쥐꼬리만한 월급으로는 어머니와 외할머니를 부양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의료기 외판원에서부터 온갖 일을 다 한 것으로 알지만, 내가 도와 줄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가끔 페이스북에서 피켓을 들고 일인 시위를 하거나, 지역 봉사하는 사진들을 만나면
속이 터졌다. 그래서 정의당원으로 일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내가 말릴 일은 아니었다.
모순투성이인 세상을 바로 잡으려면, 누군가 나서야하기 때문이다.
나 역시 여지 것 정치판을 더럽다며 등 돌리고 살았으나, 비급하다는 생각에 마음을 고쳐먹었다.

그래서 오염이 안되었다고 판단한 정의당에 들어가, 아들과 동지가 된 것이다.
나야 정치판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모르는 초보에 불과하지만,
아들은 정의당 은평구위원회 사무국장으로 김제남의원 지역보좌를 맡고 있었다.

몇 일 전 신학철선생으로 부터 뜻밖의 전화가 왔다.
‘노동 정치 연대’ 상임대표로 있는 양경규씨와 같이 저녁식사 한 번 하자는 것이었다.
아들과 함께 오라기에 물었더니, 양경규씨를 돕기 위한 자리라 했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지난 13일 오후, 약속장소인 인사동으로 나갔다.
먼저 신학철선생을 만나러 간 ‘인사아트’ 전시장에서 양경규씨를 만났다.
노동분야 전문가인 그에 대한 이력은 알고 있었으나, 첫 만남인 셈이다.

만찬장소인 ‘하늘풍경’으로 옮겼더니, 정의당 공동대표인 김세균선생도 오셨더라.
그 날 자리는 노동과 예술을 연대하려는 양경규씨의 의도에 만들어졌다.
정의당 전사로 발 벗고 나선, 그를 돕기 위한 다양한 방안들이 모색되었다.
정의당의 대소사를 기록하고 알리는 일은 물론, 노동운동에 사진을 활용하는 방법도 제안했다.

세상이 정의롭지 못하다. 옳지 못하고 공정하지 못하다는 건 삼척동자도 다 안다.
대기업의 횡포와 각종 탈법과 편법적인 부의 대물림, 노동시장에서의 차별과 불공정,
힘없는 소수자에 대한 멸시와 핍박 등 공정 사회로 가려면 한 참 멀었다.
이런 잘못된 사회구조를 바꾸어야 한다. 그러나 물리적인 투쟁은 다수 대중과 더 멀어질 뿐이다.

인간적인 접근으로 대중의 힘을 결집시키야 할 양경규씨의 지혜가 절실하다.


사진, 글 / 조문호



정의당 김세균 공동대표


좌로부터 양경규, 김세균, 신학철선생


'노동 정치 연대' 양경규 상임대표





정의당 은평구위원회 사무국장 조햇님






좌로부터 조문호, 신학철, 김세균, 양경규씨



정월 초하루, 제사상 물리기가 무섭게 호출이 왔다.
독거노인 대표주자 장경호화백이 연출한 번개팅이란다.
감기 걸려 빌빌하지만, 독거 서러움 다독이려 찾아 나섰다.

설 날, 이른 시간이라 ‘유목민’ 문이 열릴까 싶었는데,
전활철씨 안사람이 친정가, 그 역시 독거라 가능하단다.

닫힌 대문을 살짝 밀어보니, 불 꺼진 술집에 노광래, 장경호, 전활철씨만 있었다.
이미 빈 술병들이 더러 보였고, 난 몸이 정상이 아니라 대번 기별이 왔다.
느닷없이 백발의 여인이 나타났다 사라지더니, 공윤희씨와 채현국선생께서 나타났다,

그리고 임재경선생이 오셨다 가시더니, 뒤늦게는 신학철선생까지 등장하셨다.
무슨 연극무대 배우 들락거리듯, 출연진들이 속속 뒤 따랐다.


술이 취하기 시작하니 목소리도 커지기 시작했다.
정치나 비평 같은 씨잘데 없는 소리는 나오지 않지만,
괜한 딴지가 딴지를 걸고, 울분이 분노를 토해낸다.
이미 고개 숙인 전사자도 속출하기 시작했다.
그 때쯤이면 어김없이 전활철씨의 기타반주와 노래가 시작된다.

“언젠가 가겠지 푸르른 이 청춘
지고 또 피는 꽃잎처럼..
달 밝은 밤이면 창가에 흐르는
내 젊은 연가가 구슬퍼“


"가고 없는 날들을 잡으려 잡으려
빈 손짓에 슬퍼지면
차라리 보내야지 돌아서야지
그렇게 세월은 가는거야"


‘살울림’의 ‘청춘’에 왠지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이미 세상을 떠나간 적음, 강용대, 김종구 이야기 끝자락이라,
그리움인지, 회한의 추억인지,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다.

인사동 ‘실비집’에서 시작된, 우리들의 낭만은 아린 사연이 많다.
30여년의 세월을 방황하다, 이제 끝자락에 머문 것이다.
모두들 인사동의 마지막 해방구라 아쉬워 하지만,

진 꽃잎 따라 지듯, 또 다시 누군가는 피우겠지...

사진, 글 / 조문호

 

 

 

 

 


 


 

 

 

 

 

 

 


 

 

 

 

 

 

 

 

 





페이스 북에 들어와, 세상 도는 꼴을 낱낱이 알았다.
모르는게 약이라며 등 돌리고 살았으나 비겁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잘 못된 현실을 바로잡을 수 있는 게 정치이기에 정당 입당부터 작정했다.
여지 것 정치하려는 사람이 있으면 악을 쓰고 말렸으나, 욕심만 없다면 말릴 일은 아니었다.

지난 28일, 예술가들을 규합하겠다는 야심찬 생각으로 인사동에 나갔다.
‘리얼리즘의 복권’전이 열리는 ‘인사아트’에서 많은 분들을 만났다.
‘유목민’에서 화가 장경호, 시인 조준영, 한겨레 논설위원을 지낸 김형배씨와
목만 축이고 ‘무다헌’으로 옮겼더니 신학철선생께서 먼저 와 계셨다.
뒤 이어 박불똥, 이인철, 최석태, 박은태, 김정대, 조경연씨가 들어왔다.

신학철 선생과 함께하는 술꾼 모임을 늘 ‘신학철사단’이라 불러왔다.
술 마시는 것도 전투에 속할지 모르지만, 무언가 일을 작당하려는 속내도 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조준영시인을 비롯한 한 두 사람만 빼고, 모두 정의당원이었다.
술자리에서 정치이야기는 안 하니까, 여지 것 나만 몰랐던 것이다.

아무도 하지 않는 악역 있으면, 좀 맡겨 달라고 신학철선생께 부탁했다.
죽든 살든 끝장내고 싶은 심정이었다.
“정치란 감정으로 하는 게 아니고, 이성으로 하는 거야.
여지 것 잘 하고 있잖아. 그대로 사진이나 찍어..”
하긴 늙은 놈이 힘쓸 것도 아니고, 내가 잘 할 수 있는 그 것 뿐인 것 같았다.

소주, 맥주, 양주 등이 오가는 술잔 속에 모두들 취하기 시작했다.
그 날 소주를 꽤 마셨으나, 왠지 술이 취하지 않았다.
노래를 부르라지만, 마음은 온통 초저녁에 본 ‘리얼리즘의 복권’전에 꽂혀 있었다.
자본권력에 농락당한다는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뜻밖의 소식도 들려왔다.
이인철씨가 ‘민미협’ 이사장을 맡았다는 소식도 들었고,

김정대씨는 더 큰 갤러리를 만들어 본격적인 화상으로 돌입한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사업을 확장하는 일이야 좋은 일이지만, 감투를 쓰는 것은 그렇게 달가워 보이지 않았다.
단체라는 게, 아무리 열심히 해도 욕먹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좌우지간 누군가 맡아야기에, 잘 끌어가길 바라며 축하해 주었다.

음악회에 갔던 아내도 돌아왔는데, 술 시간이 왜 그리 빨리 가는지 모르겠다.
조금만 일찍 일어났으면 좋으련만, 결국 마지막 지하철을 놓치고 말았다.
아내와 택시 뒷자리에서 느긋하게 가는 맛도 좋았지만, 스스로를 자성하는 시간도 되었다.
사단장님 말씀처럼 감정을 다스리려면 먼저 마음에 맺힌 분노를 녹여야하기 때문이다.
열 받지 말고, 닥치는 일을 편안하게 대처하자.

사진 : 정영신, 조문호 / 글 : 조문호










































신학철작



인사동 ‘가나아트센터’에서 198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의 리얼리즘 미술을 재조명하는

한국현대미술의 눈과 정신 ‘리얼리즘의 복권’전이 열리고 있다. 


민중미술은 1980년대 '현실과 발언'전으로 시작되어, 1984년 '한강미술관'개관, 1985년 '아랍미술관'의 

'20대의 힘'전 사건, 1985년 '민미협'창립, 1986년 '그림마당 민'개관 등은 70년대 이후 모더니즘 일색이던

화단에 큰 변혁을 일으키며 '80년대 미술'을 꽃피웠다.


작품들이 철거당하고 작가들이 연행되는 등 많은 질곡의 세월을 거쳤으나,

뜬 구름 잡듯, 현실을 무시한 예술지상주의에 쐐기를 박고, 미술이 사회현실에 참여하는 계기를 만든 것이다.

아무튼 기존의 미술이 예술을 위한 예술'이라면, 그 대척점엔 이른바 '민중미술'을 포함한 '리얼리즘 미술'이 있었다.


이 기획전은 당대의 정치 사회적 현실을 비판하는 ‘민중미술’의 구작들이 주를 이루었다.

민중미술계열 전시였으나, 이와 전혀 무관한 오치균, 고영훈씨를 끼워 넣어 기획의도를 아리송하게 했다.



콜라주 기법을 통해 역사의 흐름과 모순을 그려 낸 신학철의 한국 근대사, 황재형의 사북탄광 풍경과 광부,

그리고  이종구의 쌀 포대에 그린 농민들의 모습,  형상의 근원을 찾아가는 권순철,

시대의 부조리한 현실을 의식의 각성과 시각적 혁신을 보여주는 임옥상의 들불,

실경 산수를 새롭게 해석하는 민정기씨 등 우리나라 민중미술가 여섯 명이 참여했다.


이 전시는 우리 미술사의 한 부분을 다시 보여 준다는 것 외는, 큰 의미는 지니지 못했다.

참신한 기획력이 없고, 전시 구성도 왔다 갔다 했다.

민중미술 작가군에 끼지 않는 이질적인 작가를 뒤 섞어 놓은 것도 속보인다.

사실 단색화그림의 인기에 이어, 민중미술이 뜨고 있는 현실을 간파한 기획전이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민중미술의 특징은 사회적 현실을 다루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지난 향수를 돌아보다 것 보다, 현재 진행형이 더 중요한 것 아닌가?

그 많은 민중작가들을 제외한 채, 유명작가 위주로 향수를 건드린다는 건, 다분히 장삿속이다.

이건 오히려 민중미술의 힘을 꺾으려는 의도가 숨은 게 아닌 가 의심된다.

그 것을 뒷받침하는 사례로 지난 달 ‘인사가나아트’에서 열린 “7인의 사무(또)라이”전을 들고 싶다.

이 전시는 우리나라 민중미술의 일선에서 활약하는 젊은작가들이 모여,

없는 돈 끌어 모아 대관료까지 물고 열었으나, 전시 직전 갤러리 측에서 제동을 걸었던 전시다.

결국 전시장 입구에 가림 막을 치고 미성년자는 볼 수 없는 전시로 합의하여 전시는 치렀지만,

지레 겁먹어, 스스로 본색을 더러 낸 것이나 마찬가지다.

문화예술로 돈 버는 이가, 무슨 권력으로 표현의 자유를 침해할 수 있단 말이냐?

못된 자본권력이 문화권력으로 둔갑해 예술가들을 좌지우지하는 것이다.


'가나인사아트' 전관에서 열리는 이 전시는 2월 28일까지 이어진다. 관람료3,000원


글/ 조문호


전시된 황재형 작품일부


신학철작


신학철작


황재형작


황재형작


황재형작


이종구작


이종구작


권순철작


권순철작



임옥상작


임옥상작



민정기작


민정기작


오치균작


오치균작


고영훈작


고영훈작


위 아래 작품은 신학철씨의 작품으로 기존작품과는 전혀 다른 서정적 향토성을 띄고 있다.

소장자는 본 전시자문을 맡은 유홍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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