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창단 40주년 맞은 ‘극단76’의 연출가 기국서

최근 들어 ‘극단76’이 언론 지면에 빈번히 오르내리고 있다. 진원지는 연출가 이윤택(64)이다. 그는 한 달 전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창단 40주년을 맞은 극단76이 극장도 사무실도 연습실도 없다는 것이 도대체 말이 되는가?”라며 울분을 터뜨렸다. 얼마 후 자신의 극단 연희단거리패의 창단 30주년을 맞아 열린 기자회견에서는 “1970년대 전위연극을 이끌었던 기국서(극단76의 연출가)는 요즘 생계유지를 위해 비천한 노동을 하고 있다. 이게 제대로 된 사회인가?”라고 토로하기도 했다. 한국 연극판에서 극단76이 새겨온 족적이 결코 가볍지 않다는 뜻이다. 아울러 그런 의미 있는 극단이 자본의 위압에 쫓겨 변두리로 밀려나고 있는 상황에 대한 개탄이다.



서성일 기자 centing@kyunghyang.com



극단76이 어느덧 창단 40주년을 맞았다. 1976년 신촌에서 문을 연 이후, 전위적이면서도 사회성이 농후한 연극 세계를 펼쳐왔던 극단76은 한국 연극판에서 보기 드문 ‘반골(反骨)의 극단’이다. 이제 우리 연극계의 주요 연출가로 손꼽히는 박근형(53), 김낙형(46) 등이 수업했던 ‘연극적 친정’이기도 하다. 흰 눈이 펑펑 쏟아지던 16일 오후, 창단 40주년을 맞아 새 작품을 준비 중인 기국서(64)를 대학로의 카페에서 만났다. 유독 ‘언어’를 고심하는 작가 겸 연출가인 그는 “처음 20년은 행복했고, 그 후 20년은 난파선의 심정”이라는 말로 40년의 소회를 내비쳤다.

그의 육성을 최대한 전하기 위해 1인칭 시점으로 옮긴다.

“40주년? 사실 내 동생 기주봉(배우)이 40주년의 산증인이겠지. 나는 창단 2년 뒤에 합류했으니까. 당시 극단76에는 10개 조의 강령이 있었는데, 나는 그중 마지막 조항이 참 마음에 들었어. ‘진정한 꿈을 꾸는 자는 결코 헛된 꿈을 꾸지 않는다’라는 거였지. 지금 돌이켜보면 처음 20년은 매우 행복했지. 연극은 사회를 거울처럼 반영한다는 신념, 사는 게 팍팍해도 그 신념이 흔들리지 않았거든. 한데 다음부터는 변화하는 현실에 적응하는 게 쉽지 않았어. 풍랑의 바다에 표류하는 난파선 같았지. 아예 극단 이름을 난파선으로 할까, 그런 생각도 했어. 같이 탈 사람만 따라오라고. 경제적으로 어렵고 권력에 부딪히고…. 문예회관 대극장에서 <햄릿과 오레스테스>를 공연할 때였는데, 극장 앞에 ‘닭장차’들이 3대나 서 있더라고. 그게 5시간짜리 공연이었어. 공연 1부를 극장 내부에서 하고 2부는 로비와 계단에서 하는 거였는데, 공연 직전에 ‘로비 사용 불가’ 통보를 하더라고. 요즘 후배들이 겪고 있는 ‘검열’을 그때 먼저 겪은 거지.




동생 기주봉? 아, 말썽꾸러기였어. 고등학교 때부터 패거리 지어 다니고 싸움하고, 그 어린 나이에 도박도 했어. 세 살 위의 내 친구들한테도 반말로 엉겼지. 한데 대학 들어가더니 사람이 180도 바뀌더라고. 나하고는 굉장히 달라. 그 친구는 정말 몽상가거든. 돈암동 살던 어린 시절에, 우리 집에서 산양 17마리를 키웠거든. 그걸로 생계를 유지했어. 나하고 주봉이하고 산등성이로 양을 몰고나가곤 했는데, 나는 언제나 손에 책을 들고 갔고 주봉이는 머리에 대야 같은 거 뒤집어쓰고 손에는 긴 막대기 하나 들고 ‘생쑈’를 했지. 자기가 김삿갓이라는 거야. 10살이 안됐을 때부터 그랬어. 중학교 들어가더니 연극반에서 배우를 하더라고. 걔는 애초부터 배우가 되려고 태어난 거 같아.

나? 나는 연극을 우습게 봤어. 초등학교 때 어머니하고 여성 국극이나, <자명고> 같은 신파조 연극을 보면서 그런 생각이 굳어진 같아. 좀 엉성하고 웃기잖아. 나한테는 언제나 문학이 최고였어. 그러다가 고3 때 임영웅 선생이 연출한 <고도를 기다리며>를 봤거든. 물론 사뮈엘 베케트의 희곡을 먼저 읽었지. 그해에 노벨 문학상을 받았으니까. 그런데 뭔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더라고. 연극도 마찬가지였어. 꾸벅꾸벅 졸았지. 그러다 갑자기, 에스트라공을 연기했던 배우 김성옥이 ‘고도를 기다려야지!’라고 외치는 장면에서 잠이 번쩍 깼어. 아, 천둥 같은 소리였어. 연극에 뭔가 있구나, 그런 생각을 처음 했지. 그 다음에는 드라마센터에서 유덕형 연출의 <생일파티>를 봤거든. 뼈다귀로 이뤄진 무대에 조명을 비추고, 배우가 벽 속으로 스르르 사라지는데, 그 시각적 충격이 오래 가더라고. 팸플릿을 보니까 등장인물 맥켄은 메커니즘을, 골드버그는 황금만능의 자본주의를 상징한다고 써 놨더라고. 심오해 보이잖아. 20대 때는 그런 것에 심취하지. 그리고 세번째 본 연극이 오태석의 <루브>였는데, 정말 너무 웃겨서 계단에서 구를 뻔했어. 그 세 편이 연극에 대한 내 생각을 완전히 바꿨지.

극단76의 대표작 <관객모독>? 아, 징그러워. 1979년 초연부터 30년 넘게 했으니까. 가장 마음에 드는 버전은 초연하고 10년쯤 뒤에 공간 사랑에서 했던 공연이지. 아주 단순하게 연출했어. 그 다음부터는 자꾸 교묘하게 손을 대게 되더라고. 앞의 공연하고 달라야 하니까. 그런데 즉흥성이 강조된 이 연극의 형식은 지금도 유효한 거 같아. 배우들도 관객들도 그 즉흥이 재밌는 거지. 제작사에서 요청이 들어오면 또 할 수는 있어. 솔직히 돈이 들어오니까. 하지만 일단 부담스러워. 아휴, 이걸 또 해야 하는구나! 그런데 막상 연습 시작하면 또 재미있어. 나도 배우들도.

40주년 기념작? 한 편 준비하고 있지. <리어의 역(役)>(가제)이라는 작품인데, 평생 리어왕 역할을 해온 노배우, 치매에 걸려 살 날이 얼마 안 남은 그 인물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이야기거든. 작년부터 대본을 쓰다가 멈추다가 그래 왔는데, 이제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상황이야. 4월에 선돌극장, 5월에 게릴라극장에 공연이 잡혀 있어. 쓰는 건 정말 힘들잖아. 오늘도 7~8줄 간신히 썼어. 그래도 가장 행복한 곳은 연습실이지. 배우들과 같이 작업을 하면 어느새 생기가 나거든.”

경향신문<문학수 선임기자 sachim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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