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개인전ㆍ그룹전 잇달아 갖는 민중미술가 신학철 화백 단독 인터뷰


[헤럴드경제=김아미 기자]


2016년 민중미술이 화두다. 서울 메이저 갤러리와 경매회사들이 앞다퉈 2016년 미술계 키워드로 민중미술을 잡았다.

민중미술은 1980년대 진보 성향 미술인들을 중심으로 펼쳐진 미술운동이다. 심미주의적 모더니즘에 대한 반성이었고, 민주화운동과 맥을 함께 해 왔다. 1970~1980년대 미술계 주류였던 모노크롬(단색화)과는 반대의 길을 걸었다. 



신학철 화백. [사진=윤병찬 기자/yoon4698@heraldcorp.com]


단색화를 대표하는 이우환 화백의 과거 발언을 빌자면, 단색화가 1970~1980년대 군사정권에 대한 ‘침묵의 저항’이었다면, 민중미술은 ‘온 몸의 저항’이었다.

지난해 말 경매회사 서울옥션이 오윤, 신학철, 권순철, 황재형, 강요배, 임옥상, 이종구 등 민중미술가 작품들을 시장에 띄우며 ‘아트포라이프(Art For Lifeㆍ삶을 위한 예술)’라는 타이틀을 걸었듯, 민중미술은 ‘아트포아트(Art For Artㆍ예술을 위한 예술)’와는 대척점에 있는 장르였다.

아이러니다. 2년여 지속돼 온 단색화 열풍이 오래도록 침체돼 왔던 국내 미술시장에 활기를 불어 넣으며, 그 대척점에 있던 민중미술까지 함께 주목받고 있으니 말이다.

미술계에서는 ‘포스트 단색화’로 민중미술을 꼽는 이들이 많다. 게다가 갤러리와 경매사를 통해 그림을 사는 컬렉터들, 자본을 가진 기득권층이다.

독재, 군사정권, 서구 자본주의 등 사회 기득권층에 저항했던 민중미술가들의 그림이 다시금 그들 사이에서 회자되고 있다는 건 매우 흥미로운 현상이다.

▶민중미술가, 신학철을 만나다=민중미술가 신학철(72)은 한국 현대미술사에서 가장 중요한 작가로 언급된다. 1960년대 미술그룹 AG(아방가르드협회)에서 활동했고, 1985년 김정헌, 임옥상, 오윤과 함께 한국민족미술협의회(민미협)를 구축했으며, 1987년 ‘모내기’ 그림 사건으로 한국미술사에서 표현의 자유와 검열 문제 논란을 불어일으킨 장본인이다.

심광현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는 과거 전시 서문에서 “한국 근ㆍ현대사의 트라우마와 끈질기게 대결해 온 작가”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지난 10여년간 미술가에서 신 화백을 만나기란 쉽지 않았다. 2007년 평창동 가나아트갤러리에서 열렸던 대규모 민중미술 그룹전 ‘청관재 민중미술컬렉션전’ 이후 간간히 미술관 기획전에 그의 그림이 걸리긴 했지만 말이다.

올해 국내 메이저 갤러리들이 여는 민중미술 전시에 신학철이라는 이름은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가나아트센터 기획 그룹전이 2월 초 예정돼 있고, 학고재갤러리는 9월 신학철 개인전을 준비 중이다.

지난 8일, 신 화백을 서울 동대문구 장안동 자택에서 만났다.

신 화백은 10여년간 아픈 아내 병수발을 해 왔다. 붓을 들 새가 없었던 이유다. 그리고 지난해 봄, 아내를 저 세상에 떠나 보냈다. 하루 담배 한 갑을 태운다는 그는 3시간이 넘는 인터뷰 내내 반 갑 가까운 담배를 태웠다.

인터뷰에 잘 응하지 않기로, 까칠(?)하기로 소문난 신 화백은 소문과는 달리 따뜻하고 다정한 어른이었다. “대중언어를 잘 못 쓰고 말투가 거칠어서 걱정”이라고 했지만, 느린 말투로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가는 내내 ‘허허’, ‘껄껄’하며 웃는 그에게서 투사의 이미지 같은 건 찾아볼 수 없었다. 



                           

오래된 화구들과 커다란 캔버스. 서울 동대문구 장안동 자택 거실 햇볕 잘 드는 한 켠이 바로 신 화백의 작업실이다. 십년 넘게 투병생활을 하던 부인을 지난해 봄 떠나 보낸 후 혼자 지내게 되면서부터 집안 곳곳은 사진 자료와 콜라주 등 작품 활동을 위한 것들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사진=윤병찬 기자/yoon4698@heraldcorp.com]



▶민중미술도 결국 상업화= ”글쎄요. 상업화 돼 가는 거죠. 가격으로 판단하는 거니까요. 민중미술은 사회운동이었어요. 그런데 지금 현상은 그거랑은 전혀 관계가 없어요. 비싸게 사 주면 좋긴 한데. 장삿꾼들은 돈 되는 걸 정확히 알잖아요.”

국내 미술계가 화두로 내 건 민중미술의 대표 작가 신학철은 의외로 무덤덤했다. 돈 되니까, 팔리니까 시장에 나오는 것 아니겠냐는 반응이다.

“제가 잘 쓰는 표현인데, 나는 니들 욕하면서도 내 그림 팔아 먹는다 그래요. 안 팔아야 하는데 차라리…. 아유 참, 또 묵고(먹고) 살라고 하니. 허허”

사실 신학철의 그림은 편히 감상할 수 있는 그림은 아니다. 김영준 부산시립미술관 학예사의 표현을 빌자면 ‘달달한 추상도 만만한 눈요기도 아닌, 딱딱하기 그지없는 피부를 강제로 만지게 해서 촉각적 한기를 느끼도록 강요하는’ 이미지들이다.

1980년대 콜라주나 유화 작품들은 피부와 살점, 근육과 힘줄이 캔버스 밖으로 터져 나올 듯 세고 강렬하다. 그러한 직접적인 이미지 언어로 한국 근ㆍ현대사를 기록해왔다. “사변적인 것보다 내가 직접 보고 느낀 것들을 믿는다”는 화백은 현대미술의 주류였던 ‘무(無)이미지’를 당당히 거부해 왔다.
신 화백 작품의 주요 컬렉터로는 2007년 작고한 민중미술 컬렉터이자 영창피아노 대표였던 청관재 조재진 씨와 가나아트 이호재 회장 등이 꼽힌다. 이후 일부가 국립현대미술관과 서울시립미술관 등 국ㆍ공립 미술관에 기증 형태로 들어가게 됐다.

정작 신 화백이 갖고 있는 그림은 한 점도 없다. 다 팔았기 때문이다. 때론 ‘공짜’로 팔기도 했다. 그러니까 시장에서 그의 과거 작품들이 높은 가격에 거래돼도 화백에게 돌아오는 건 없다는 뜻이다.

그림과 함께, 그의 이름 석자도 내 줬다. 각종 정치, 사회단체에서 그를 필요로 하며 찾아올 때마다 신학철이라는 이름을 선뜻 내 줬다.

“1980년대에 다 줘버렸죠 뭐. 사회단체에서 기금전 하고 그럴 때 다 내줬어요. 100호짜리도 주고 그랬으니까. 민미협 화가들이 그랬어요. 자기 돈 들이고 몸으로 때우며 문화운동을 했죠. 내 그림은 흩어진 건 별로 없어요. 몇몇 컬렉터들이 가져 갔으니까요.”

▶표현의 자유, 10년의 저항=신학철 하면 빼놓을 수 없는 그림이 ‘모내기’ 그림이다. 한국 미술계 표현의 자유와 검열 논란의 상징적인 그림이다. 신 화백은 이 그림 한장으로 석달 간 구치소 생활을 해야 했다.

모내기 그림은 1987년 민미협 통일전 때 신 화백이 출품했던 작품인데, 1989년 한 청년단체에서 부채를 제작하며 이 그림을 사용했고, 당시 부채 제작을 맡았던 학생이 ‘이적 표현물 제작 및 운반’ 혐의로 기소됐다.

이후 신 화백 역시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기소돼 1, 2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으나, 2000년 대법원이 원심 파기환송하며 징역 10월형의 선고 유예와 그림 몰수 판결을 확정했다. 그러나 2004년 유엔인권위원회는 표현의 자유 침해 사실을 인정하고 유죄판결 취소 등을 결의하기도 했다.

신 화백은 모내기 그림에 대한 이야기를 한참 동안 이어갔다.

“그림을 위 아래 반으로 나눠 놓고는 위는 북한, 아래는 남한이라는 거예요. 그런데 나는 통일의 이미지로 이걸 그린거예요. 통일된 세상의 무릉도원으로. 쓰레질 하는 모습은 통일에 걸림돌이 되는 것들을 쓸어내는 거고요.”

‘그들’이 백두산이니, 만경대니 이적 표현물이라고 주장했던 그림의 배경은 사실 신 화백의 고향 김천의 모습이다.

“가만 그려보면 고향이 꿈 같아요. 봄에는 보리밭이 파랗고, (볏짚, 밀짚으로) 이어놓은 지붕은 노오랗죠. 그리고 그 위로 분홍 살구꽃이 화악 피는 거예요. 그 이미지가 너무나 생생해요. 무릉도원이죠. 그런 걸 자꾸 이 놈들이 만경대라고 하니. 허허.”

‘문제작’이 된 모내기 그림은 총 3점이 있다. 재판 때 압수된 원본, 호남지역 인사로부터 요청받아 신 화백이 똑같이 다시 그린 것 하나, 그리고 마지막 또 하나.

“내가 급해서 또 화랑에 팔아 버렸네. 껄껄. 조만간 전시 때 나올지도 모르겠네요.”


신학철 화백. [사진=윤병찬 기자/yoon4698@heraldcorp.com]



▶아내 떠난 자리에서, 다시 붓을 들다= “헌신적이었죠. 모내기 그림 때 고생을 좀 했을 거예요. 이틀에 한번 꼴로 의왕구치소까지 면회오고 그랬으니까. 석달간 구치소 살다 나와 만나니 (살이 빠져서) 젖가슴이 하나도 없는 거예요. 아휴….”

이 화백의 아내는 2002년부터 파킨슨 병을 앓았다. 그런 아내를 13년 동안 보살폈다. 거실 천정 한 곳에 철사 옷걸이로 만들어 놓은 뱃줄(음식물을 공급하기 위해 위에 관을 연결시켜 놓은 것) 걸개가 떠난 아내의 흔적으로 남아 있다.

“나는 내 생각, 그림 생각만 했지 다른 건 못해요. 은행도 동사무소도 아무 것도 모르니까. 가슴이 먹먹해오더라고요. 그런데 10년 정도 수업을 많이 했죠. 이제는 김치 담그는 거, 고추장, 된장 담그는 것도 다 내가 해요.”

다행히 대한민국 의료시스템이 잘 돼 있어 병원비로 고생하진 않았다고 했다. 그렇지만 그는 여전히 TV 뉴스를 보는 일이 불편하다.

“세상이 좀 바로 됐으면 싶어요. 민중미술이 뜨면 그 안에 있는 의미까지 같이 조명돼야 하는데 정작 그러질 못 하네요. 어찌보면 지난 10년 동안 대한민국에 문화 역동성이 많이 줄어든 것 같기도 하고요.”

“그려 놓을 것만 그려놓고 고향에 내려가고 싶다”는 그에게 그림은 ‘의무’같은 것이다.

앞으로 한국 현대사를 가로 20m길이의 캔버스에 압축시켜 놓은 대작 ‘갑순이와 갑돌이(1998-2002)’의 앞 뒤 이야기를 조금 더 연결시킬 생각이다. 또한 4ㆍ19, 5ㆍ18 등 한국 현대사의 중요한 사건들 역시 그의 힘찬 붓 끝에서 생생하게 기록될 예정이다.

▶에필로그=인터뷰 내내 들었던 생각. 민중미술이 단순히 값비싼 사치품으로 사고 팔리는 것에 그치지 않기를, 민중미술가의 삶과 그 그림 안에 진정성이 함께 조명되기를, 신학철이라는 한국 현대미술의 중요 인물이 섣부른 진영 논리에 희생당하지 않기를….

amigo@heraldcorp.com












노동개악을 저지하고, 백남기씨 쾌유를 비는 3차 민중총궐기대회가 전국에서 동시 다발로 열렸다.

지난 19일 오후 3시,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열린 소요문화제에는 약 팔천 명 정도의 시민들이 참가했다.

 

소요가 무엇인가? 사전에는 많은 사람들이 떠들썩하게 들고 일어나 술렁거림이라고 적고 있다.

경찰이 물대포로 백남기씨를 사경에 빠트린 그 사건에, 소요죄를 적용한다는 데 따른 저항으로 '소요문화제'라 했다.

 

시민들은 지내들 입맛대로 갖다 붙이는 엉터리 법에 전혀 개의치 않았다.

모두들 탬버린, 부부젤라, 막대풍선, 호르라기 등을 가져와 소란을 떨어 제켰다.

심지어는 양은그릇과 숱 가락을 가져 나와 두들기기도 했다.

잘 못된 법을 조롱한 것이다.

 

그리고 복면시위법을 비웃으며 가면을 쓰고 나온 분들도 많았다.

평화롭게 진행된 소요문화제를 사법처리하겠다는 등, 정권은 선량한 국민을 범법자로 내 모는데 혈안이 되어있다.

다시 유신독제로 돌아가는 것 같은 살벌한 시국이다.

 

박석운 민중의 힘대표가 단상에 올라 부마사태 소요죄를 적용한 박정희는 심복에 살해됐고,

광주시민들에게 소요죄를 적용한 전두환은 사형선고를 받기도 했다며 분노를 터트렸다.

 

이 날의 행사에도 백기환선생과 신학철, 장경호, 하태웅씨 등 여러 명의 지인들이 끝 까지 자리를 지켰다.

비록 그 분들만이 아니지만, 왜 이 추운 날씨에 시멘트 바닥에 앉아 생고생을 해야 하는지 마음이 아팠다.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현실이 더 암담했다.

 

행사를 마치고, 청계로를 거쳐 백남기씨가 입원해 있는 서울대병원으로 거리행진이 시작되었다.

청계로를 막 지날 무렵, “노동악법 중단하라는 구호에 맞서 시위를 중단하라는 조그만 소리가 들려왔다.

청계천을 산책하던 70대 노인이 비아냥거리듯 한 말에, 옆에 있던 할멈이 옆구리를 찌르니 말꼬리를 감추었다.

시국을 잘 못 인식한 저런 분 때문에, 박근혜가 더 기고만장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까지 국민을 이렇게 양분시켜 놓고, 놀 것인가?

 

도저히 맨 정신으로는 집에 갈 수가 없어, 인사동 유목민에 들렸다.

시위현장에서 만났던 장경호, 하태웅씨와 술 한 잔 했다.

뒤늦게 배인석, 이승철씨가 합류했고, 채현국선생과 정선의 전상현씨를 만나기도 했다.

술 자리에서, 소모적인 시위에서 벗어나 마지막 승부를 걸어야 한다고 말했다.

    

말이 통하지 않으면 말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냥 "묵시(默示)"로 가자 

백 명이고 천명이고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은 모두 모여, 식음을 전폐하자.

병원으로 실려 가던, 화장터로 실려 가던, 끝 장을 내자.



사진,/ 조문호














































 

 

 

 

 


 

 

“꽝~ 퍽~ 쨍~
승용차를 오함마로 두들겨 부수는 통쾌한 소리다.
폐차일지라도, 세월호에 성난 국민들의 분노고
음모의 틀을 깨부수라는 원혼들의 절규였다.“

이건 성남에서 열린 '저항예술제' 퍼포먼서 한 장면이다. 
이 퍼포먼스 하나가 저항예술제의 모든 걸 말해주고 있었다.

 

양혜경씨는 어린 원혼들을 위한 넋전 춤을 추고 있었고,

삐라가 어지럽게 늘린 행사장 주변에는 다양한 게릴라성 퍼포먼서가 이루어졌다.

사진가 김영준, 장영식, 정남준씨가 참여하는 '저항전'도 눈에 띄었다. 



한국민예총과 성남민예총이 공동 주최한
'제1회 저항예술제' ‘예술대단지사건’은 그렇게 열리고 있었다.

지난 23일, 신학철화백을 비롯하여 최석태, 하태웅, 강고운시인과
성남 오리공원에서 열리는 '저항예술제'에 참여하기로 작정했다.

충청도에서 함께 지내다 목적지에서 만나기로 약속했으나
고물 핸드폰이 꺼져버려 연락이 끊겨 버린 것이다.
일행들의 전화번호 하나 외우지 못했으니 난감했다.

여기 저기 다니며 사람 찾느라, 진득하게 보진 못했으나
눈에 띄인 '저항예술제'의 면면을 담았다.

사진, 글 / 조문호

 

 

 

 

 

 

 

 

 

 

 

 

 

 

 

 

 

 

 

 

 

 

 

 

 

 






 

 

세상을 하직 한지 어언10년이 넘은 김진석화백의 유작을 찾아 길을 떠났다.
미망인 강고운시인과, 절친이었던 신학철화백, 그리고 후배 장경호화백과 미술평론가 최석태씨,

무예가 하태웅씨 등 가까운 몇 명이 조를 맞추어, 흐릿해져 가는 그의 혼 불을 찾아 나선 것이다.

길을 떠난 22일은 윤주영선생의 사진전과 민미협 ‘역사의 거울전’ 개막식이 동시에 열리지만,

오래전부터 나들이 약속을 잡아둔 터라 펑크 낼 수가 없었다.

더구나 강고운씨는 인사동 가게 문까지 걸어 닫고 떠날 준비를 한다는데...

사실 김진석화백의 유작전을 위해 작품들을 촬영하려는 이유였으나,
패밀리를 자처하는 이들 끼리 콧바람 한 번 쐴 계략도 한 몫 한 것이다.
아침 일곱시에 만나 작품들이 보관된 충청도로 떠났다.

현장 창고에 보관된 작품들을 훑어보니, 이게 장난 아니었다.
작품들도 많지만 100호나 되는 대작들을 밖으로 끌어내기가 만만찮았다,
유리 낀 작품들은 신경이 쓰였으나, 모두들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신학철선생의 지휘로 하태웅씨가 끌어내면, 강고운씨는 걸레로 닦고,

최석태씨가 규격과 내용을 메모해 두면 장경호씨가 정리하는 식인데, 셔터만 누르는 내가 제일 편했다.

최석태씨는 바닥에 쓰인 깨알 같은 글씨를 판독하느라 아예 땅바닥을 기었고,

장경호씨는 미술관장의 오랜 관록을 보여주듯 안전하게 작품들을 정리해 넣었다.

김진석화백은 80년 국전대상 수상작가로, 홍익대를 거쳐 전북대 미대교수로 재직하다 2004년 2월경에,

환갑도 넘기지 못한 나이로 아깝게 세상을 떠났다. 사랑하는 남편을 떠나보낸 아내 마음이야

그 그림들이 원수처럼 보이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니 오랜 세월 창고에서 먼지만 쌓였던 것이다.

고인의 유작들은  황토 길을 헤집은 개미집 같기도 하고, 때로는 시멘트 바닥의 기포 같은 물질적 표상들을

패턴화하고 있었다. 작품마다 작가의 깊은 고뇌와 사유가 엿보였다.

그러나 창고 깊숙이 들어앉은 먼지 쌓인 작품일수록, 감성이 출렁였다.

학창시절이나 젊을 때의 작품들은 마치 물감이 캔버스 밖으로 밀려날 것 같았다.

김진석화백의 초창기 작품에서부터 마지막까지, 그 많은 작품들을 훑어보며 한 작가의 변천 과정도 읽을 수 있었다.

아무튼 오랜만에 외출하게 될 그의 혼 불이 재조명되어, 많은 영감을 주는 기회가 되었으면 한다.

너댓시간의 작업을 끝마친 후 계곡에 가서 토종 닭을 안주로 몸보신도 했다.

때로는 절집을 돌아다니기도 했는데, 자연 속에서 마시는 술은 잘 취하지도 않았다.

'앵두나무'에서 '오동동'으로 넘어가는 메들리로 시작하여 '성냥공장'에서 '봄날'까지 모조리 불러재꼈다.

얼마나 꼬라지가 불쌍하게 보였으면 팁으로 신사임당 지폐가 두 장이나 나왔겠는가?

 

술이 객기에 부채질 한 것까지는 좋았으나, 너무 과해 제풀에 꺾여 잠들게 만들었다.

그래서 중계방송이 중단된 것이다. 이건 분명 직무유기로 파면감이다.

사진,글 / 조문호

 

 

 

 

 

 

 

 

 

 

 

 

 

 

 

 

 

 

 

 

 

 

 

 

 

 

 

 

 

 

 

 

 

 

 

 

 

 

 

 

 

 

 

 

 

 

 

 



 

 

경주의 목판화가 정비파씨의 전시 뒤풀이가 지난 15일 오후7시경 인사동 '부산식당'에 마련되었다.

오랜만에 만난 지인들의 술자리 인데다 부산식당의 명물 생태찌개 맛이 너무좋아 과음해 버렸다.

이 날은 정비파씨 전시 외에도 도예가 김용문, 서양화가 이강용씨 등 인사동에 전시오픈이 여러 군데 있어

여기 저기 오가느라 불알에 요령소리가 났다.

와인에다 막걸리에 소주까지 섞어 마시다보니 이차로 간 '무다헌'에서는 너무 취해 뻗어 버렸다.

잠들기 전까지 부지런히 사진을 찍었으나, 얼마나 취했는지 이틀 날 확인해보니 카메라에 CF카드가 없었다.

부산식당에서 빼내며 갈아 끼우지를 않았던 모양이다.

부산식당 뒤풀이에는 작가 정비파씨를 비롯하여 서양화가 신학철, 박진화, 정복수, 김정대, 성기준씨 목판화가 류연복, 김영만씨 제주4,3연구소 김상철이사장, 아라아트 김명성회장,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종률총장, 국회의원 임수경씨, 미술평론가 최석태씨, 손예진, 오덕훈, 이도윤, 김영진씨 등이 함께 했다.

 

 

사진, 글 / 조문호

 

 

 

 

 

 

 

 

 

 

 

 

 

 

 

 

 

 

 

 

 

 

 

 



 

 

경주의 목판화가 정비파씨의 기획초대전 '국토'가 지난 15일 오후5시30분, 인사동 '아라아트'센터 지하1-2층 전시실에서 성황리에 개막되었다.

우리나라 산과 강의 혈맥들을 섬뜩하게 드러낸 정비파씨의 방대한 목판화 작품들을 보며 기가 번쩍 솟는 느낌을 받았다.

한 작가의 끈질긴 집념이 이루어 낸 결과들인데, 그 6미터에 달하는 대작들을 경주 작업실에서 어떻게 옮겨 왔는지도 궁금했다.

이 날 개막식에는 작가 정비파 가족들을 비롯하여 우리의 건달 할배 채현국선생, 서양화가 신학철, 임옥상, 박진화, 정복수, 김정대, 성기준씨 목판화가 류연복, 김영만씨 제주4,3연구소 김상철이사장, 아라아트 김명성회장,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종률총장, 국회의원 임수경씨, 김명곤 전 문화부장관, 미술평론가 곽대원, 최석태, 유근오씨, 무도가 하태웅씨, 문학평론가 구중서씨, 사진가 정영신씨, 소설가 구중관씨, 손예진, 오덕훈, 신상철, 한소라, 김영진씨 등 많은 분들이 참석하여 자리를 빛냈다.

 

광복70주년 기념으로 기획된 정비파 목판화전은 오는 8월 20일까지 계속된다. 꼭 한 번 볼만한 전시다.

사진,글 / 조문호

 

 

 

 

 

 

 

 

 

 

 

 

 

 

 

 

 

 

 

 

 

 

 

 

 

 

 

 

 

 

 

 

 

 

 

 

 

 

 

 

 

 

 

 

 

 

 

 

민중미술가 문영태씨가 지난 9일 아침, 이 세상을 떠났다.

 

뇌경색으로 갑자기 쓰러져 사경을 헤매다 장례 준비가 끝나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그의 갑작스런 죽음은 미술계를 비롯한 인사동 사람들에게 큰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또 하나의 별이 떨어졌다는 참담한 심정으로 모두들 이대목동병원 장례식장으로  모여 들었다.

 

지난 7월 10일 오후6시 무렵 들린 빈소에는 부인 장재순여사와 아들 문지함, 딸 문지민, 며느리 김윤지씨가

슬픔에 잠겨 있었고, 가득메운 문상객의 대부분이 화가이거나 문화예술인이었다.

특히 민미협 소속의 화가들이 많았는데, 모두들 생전의 이야기들로 서로 위안하고 있었다.

 

그 날 저녁 장례식장에서 만난 사람들로는 서양화가 신학철선생을 비롯하여 김정헌, 류연복, 정복수,

박진화, 이종률, 박인배, 최석태, 이인철, 조경숙, 성기준, 박 건, 김진하, 김석주, 김천일, 양상용, 박미정,

류충렬, 송 창, 김진열씨 등이 기억된다.

 

사진, 글 / 조문호

 

 

 

 

 

 

 

 

 

 

 

 

 

 

 

 

 

 

 

 

 

 

 

 

 

 

 

 

 

 

 

 

 

 

 

 

 

 

 

 

 

 

 

 

 

 

 

7월 첫 날  인사동 풍경입니다.
징그럽던 메리야스는 정상을 찾은 것 같으나,

여름 비수기라 그런지 전시장들이 많이 비었습니다.
그 자리를 신바람나게 팡팡 돌릴 수 없을까요?

 

통인에서 오픈한 Mutlu Baskaya도예전에서 한 잔 하고,

'무다헌'에서 장경호, 정희성선생과 어울려 좀 마셨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신학철선생을 만났으나 일행들이 있었습니다.

취해 집에 들어가는 장경호씨의 어깨가 무거웠습니다.

 

그 놈의 성질머리 좀 죽여야하는데...

뒷 손에 잡은, 그 우유팩이 안 스럽습니다.

 

사진,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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