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동 ‘아라아트’에서 열린 구본주예술상 시상식에서 서양화가 신학철선생을 만났다.

 

그 상찬 뒤풀이에 어울려 기분 좋게 마셨건만, 뭔가 아쉬워 ‘무다헌’으로 자리를 옮기자는 것이다.

신학철선생을 비롯하여 서양화가 장경호, 시인 김정환, 송경동, ‘문학동네’ 강병선씨가 함께 갔으나

술집 문이 잠겨, 끝내고 들어간 주모 강고운 시인을 다시 불러내야만 했다.

 

인사동에서 담배 피며 술 마실 수 있는 집이 '유목민'과 '무다헌'외는 없는데다,

그 것도 숨은 듯 조용한 집이 바로 ‘무다헌’이기 때문이다.

자정이 가까워오자 김정환씨를 비롯한 나그네들이 한 사람 두 사람 빠져 나가고,

신학철선생과 장경호씨만 남아 쓰잘데 없는 이바구에 맥주를 말아먹었다.
문득 “오늘 강적에게 걸렸구나!”하는 생각이 스쳤으나 이미 빼도 박도 못할 형편이었다.

 

앵두나무 우물가의 바람난 처녀가 비내리는 호남선 타는 노래를 돌려 부르며 낄낄거렸으니 술 맛은 났다.

밤이 깊어가자 장경호씨는 꾸벅꾸벅 졸기 시작하고, 주모는 설거지하느라 자리를 비워 분위기가 착 가라앉았다.

그러나 신학철선생의 이런 저런 살아가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된 것이다.

띄엄띄엄 말하는 진솔한 이야기 속에서 신학철선생의 또 다른 인간적 면모를 보게 되었는데,

한마디로 '된장 같은 사람'이란 생각이들었다. 
옆집 아저씨 같은 소탈한 모습처럼, 소박하게 살아가는 의리의 사나이란 것쯤은 알고 있었으나

가까이 지켜보니 마음이 너무 따뜻한 사람이었다.

 

그렇지만 그의 얼굴은 늘 짙은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안으로는 오랜 세월 병석에 누운 아내 걱정과 밖으로는 세월호에 희생된 어린이들을 비롯하여 

세상 돌아가는 꼬락서니가 그럴 수 밖에 없겠지만, 우울하다 못해 너무 슬퍼 보였다.

 

그동안 아내 간병하느라 그림도 제대로 그리지 못했으나, 이젠 요양원에 입원해 좀 여유가 생겼단다.

그러나 남의 아픈 일을 그냥 보지 못하는 성격이라 세월호 집회를 비롯한 각종 투쟁현장에 쫓아다니느라 더 바쁘다.

이제 칠순을 넘긴 노장이지만, 야전사령관 같은 투사로서의 기질은 여전하다. 

 

여지껏 몸으로 부딪히는 일 외에도 ‘민예총’ 살림이나 남을 돕는 모금에도 먼저 나섰다.

경제적 여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자신의 아픔 보다 남의 아픔에 못 견디는 태생적 천성 때문이리라.
도울 일만 있으면 만사를 제쳐놓고 그림을 그려서는 그 그림을 팔아 도움을 주는 식인데,

자신보다는 남을 위해 그림을 그린다는 말이 맞는 말일게다.

그리고 집에 들어가면 가정주부나 다름없다.

긴 세월 떠맡아 온 살림이긴 하지만 여인네들 빰 칠 정도로 세심하고, 음식 맛을 내는데도 일가견이 있단다.

그가 끓인 구수한 된장국 냄새가 인사동까지 번지는듯 하다.

 

젠가 신학철선생 댁을 급습하여 된장국을 안주로 소주한 잔 하고 싶다.

 

사진,글 / 조문호

 

 

 

 

 




 

신학철작 '모내기'

 

 

서양화가 신학철선생의 작품 ‘모내기’는 한 때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세상에 널리 알려졌던 화제작이다.
1987년 인사동‘그림마당 민’에서 열린 ‘통일전’에 발표한 작품으로, 검찰에서 북한찬양죄로 기소하며 그림을 압수해 사회적 물의를 일으켰기 때문이다. 그런데 풍자와 해학이 용인되지 않고 예술에 대한 검열이 심했던 암울한 시대의 잔재가 아직까지 지워지지 않았다는 사실에 더 분개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말도 안 되는 죄목으로 기소한 검찰은 그림 하단이 남한이고 중간이 북한인데, 남한은 못 살게 그렸고 북한은 잘 살게 그렸으니 북한을 찬양했다는 웃기는 내용이었다. 그 이후 ‘모내기’ 작품은 국가보안법상 이적표현물로 압수되어, 99년 11월 유죄확정을 받았으나 시민단체와 예술인단체에서 유엔 인권위원회에 이 사건을 제소해 표현의 자유를 침해 했다는 판결을 받아낸 것이다.

 

몇 일전 양평 ‘물안개공원’에서 열린 황명걸시인의 시비제막식에서 신학철씨와 절친한 서양화가 장경호씨를 만났다. 그 자리에서 신학철선생의 ‘모내기’작품 소장자를 물었더니 작품이 파손되어 가치가 없다는 것이다. 무죄판결 후 작품을 돌려받아 보니 액자는 파손되어 없고, 그림은 여러겹 접은 자욱으로 복원이 어려웠다고 한다. 

 

오랜세월 권력의 시녀 노릇이나 하며 민주인사들을 탄압해 왔다지만,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

분명히 판결에서 표현의 자유를 침해한 사실을 인정하며 작가를 위한 구제조치를 취하라고 했었고,

그 구제조치란 유죄판결에 대한 보상과 그림의 원상복구 및 반환이었다는데...

탱크와 미사일, 양담배, 코카콜라 등의 자본주의 상징물들인 쓰레기 더미가 쓰레질로 밀려 나오는 그림은 당시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억눌림에 대한 짜릿한 흥분을 불러 일으키게 했던 명품이었다.

작품성은 차지하고라도 시대적, 역사적으로 끼친 영향이 큰 작품이라 영구히 보존되어야 할 작품이다.

오랜 세월 베일에 가려졌던 신학철선생의 '모내기' 작품을 파손한데 따른 변상이 조속히 이루어져야 한다.

 

광복절이었던 지난 8월15일, 아내와 함께 인사동에 나갔다.

배성일씨와 약속한 ‘툇마루’에는 그의 친구 양재순씨와 함께 있었다.
신소재로 개발된 알미늄이나 강판 프라스틱을 활용한 프레임의 한국 특판권을 가지고 있다는

양재순씨가 사진에 대한 자문을 얻겠다고 불러 낸 모양이었다.

그이가 가져온 샘플을 사진전시에 활용한다면 전시가 끝난 후 보관이 용이하고, 야외전시나 이동 전시 때도 유용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내용에 따라 어울리지 않는 사진이 있는데다 대중적이지 못한 것이 마음에 걸렸다. 

사진인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어울리는 기획사진전을 열어  액자가게들을 공략하는 방법론의 이야기도 나왔다.

그리고 인사동이나 정선시장 같이 사람들이 많이 몰리는 곳에서 커플들을 멋지게 찍어주는 것도 한 방법이란 말도 했다.

“이 프레임 안에 갇히면 평생 헤어질 수 없다”는 식의 퍼포먼스를 벌여 즉석에서 만들어 주면

그 홍보효과로 프렌차이즈 업소가 늘어나지 않겠느냐는 등의 의견을 나누며 술을 마시는데,

난데없이 신학철씨와 장경호씨가 나타난 것이다.

그들은 서울시청 앞으로 “세월호 특별법” 데모하러가다 막걸리생각이 나 잠시 들렸다는 것이다.

자리를 옮겨 마시다 보니 술은 좀 취했지만, ‘세월호 특별법’ 관철을 작당한다는데 함께하지 않을 수 없었다. 
더운 날씨에 술마저 취해 서울시청까지 걸어가기가 힘들었다, 그럴때는 사진 찍으며 천천히 걸어가면 좀 나아진다. 

집중력을 유지하기 위해 이 것 저 것 주변을 살피며 걷는데, 같이 가던 장경호씨가 힘 덜어 준다며 카메라를 받아 간 것이다.

갑자기 긴장감이 풀어지니 온 세상이 뽀얗게 보였다.
난생 처음 당한 일이라, 하늘이 노랗게 보인다는 말은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인 것 같았다.

당시 시청 앞에서 강민선생님을 만날 때는 완전히 혼이 빠진 상태라 인사를 드렸는지 모르겠다.

다시 카메라를 돌려받아 사진에 몰두하니 정신이 좀 차려졌다.  술 취해 사진 찍는 버릇이 중독된 모양이었다.

인사동 술자리에서도 술이 취하면 카메라 들고 인사동거리를 한 바퀴 돌아 오면 나아지고 그랬다.

아마 사진을 찍지 않았다면 벌써 죽은 목숨일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그 날은 벗들과 작당하다 진짜 죽는 줄 알았다.

 

 

 

 

 

 

 

 

 

 

 



'인디프레스 서울'(대표:김정대) 개관 기념전으로 열린 구본주, 신학철, 박불똥, 장경호 4인전 개막식이 지난 8월1일 오후6시 무렵, 효자동 전시실에서 열렸다.
아담한 전시장을 대가들의 거작으로 꽉 채운 것도 모자라, 박불똥씨의 작품은 영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오프닝에 참석한 인사들도 만만찮았다. 좀 늦게 도착해 백기완선생은 만나지 못했지만, 작년에 결혼한 미술평론가 성완경씨와 소설가 공선옥씨 부부를 비롯하여 민미협 그림쟁이들이 총 출동했다. 그러나 많은 지인들이 전시를 축하해 준 건 고맙지만, 가난한 작가들의 뒤풀이에 짐을 지우지나 않았는지 마음이 편치 않다.

구본주의 유작 '칼춤'과 신학철의 '관동대지진'은 이미 보았던 작품이었지만, 장경호씨의 신작은 귀가 번쩍 뜨이는 작품이었다. 그리고 네오록 광고에 소개된 신학철선생의 작품, 풀밭에서 소변보는 여인네 엉덩이가 무척 보고 싶었으나 검열에 걸렸는지 광고에서도 사라지고 전시장에도 걸리지 않았다. 물방아 도는 내력 후속 탄인 모양인데, 선정적이기보다는 오랜 향수를 끌어내는 눈이 번쩍 뜨이는 작품이었다.

참석한 분은 신학철, 장경호, 박불똥씨 등 출품 작가들을 비롯하여 백기완, 임진택, 성완경, 이강군, 문영태, 김태서, 최석태, 김명성, 조준영, 공선옥, 정영신, 김정대, 황정아, 정유정, 전인미, 배성일씨 등 50여명

 

 

 


 

 


 

 

 


 


 

 

 

 

 

 

 

 

 

 

 

 

 

 

 

 

 

 

 

 

 

 

 

 

 

 

 

 

 

 

 

 

 



인디프레스 서울 개관 기념전


신학철_장경호_박불똥_구본주展

2014_0801 ▶ 2014_0820

 

 

구본주_6월_브론즈_40×50×30cm_1995
 

초대일시_2014_0801_금요일_06:00pm

관람시간 / 11:00am~08:00pm / 월요일 휴관

 

인디프레스_서울

INDIPRESS

울 종로구 자하문로24길 58(효자동 40-1번지)

www.indipress.kr

 

광화문은 찬반의 논란 속에서 다시 부활하여 시민의 사랑을 받으며 서울의 중심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부근에 거대한 첨단의 빌딩들이 즐비하여도 그 존재감에 전혀 필적되지 못하는 이유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경외감을 온전히 품어 역사적 관조와 품격의 상징이 된 내력이 서려 있기 때문이겠지요. 그 광화문을 꺾어 들어가는 효자동 기슭에 인디프레스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순정한 인간정신의 응집으로 탄생한 예술작품의 가치정립에 일조하는 인디프레스가 되길 기원해 봅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김정대

 

 

구본주_칼춤_브론즈_25×15×15cm_1994

 

구본주_위험한 상상_철, 목조_45×60×30cm

 

신학철_한국근대사-관동대지진_캔버스에 유채_122×200cm_2012

 

 

Vol.20140802h | 인디프레스 서울 개관 기념展

 

 

 

 

 

 

 

 


 

‘용태형’ 추모식이 열렸던 장례식장은 전국각지의 협객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밤늦도록 문상객의 발길이 끊이질 않았고, 자리를 옮겨가며 술상을 지키는 술꾼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그러나 새벽 무렵에는 대부분 곯아떨어지거나 사라졌는데, 신학철사단을 비롯한 최종원, 김명성, 성완경, 정인숙씨 등 10여명만 남아 콩팔칠팔 논쟁을 벌이고 있었다.
이미 소주와 막걸리는 떨어졌고, 조금 남은 캔 맥주로 간신히 연료를 공급하고 있었다.

나도 의자에서 깜박 잠이 들었다 깨어났는데, 아마 한 시간 쯤 지난 것 같았다.
주변을 살펴보니 함께 마시던 최종원, 김명성, 성완경씨는 보이지 않았고, 호상 김태서씨와 신학철, 박불똥, 장경호씨만 남아 장례식장을 사수하고 있었다.
신학철사단의 용맹은 진작 인사동에서 보아왔던 터지만, 술이면 술, 작품이면 작품, 논쟁이면 논쟁, 그들을 당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 다음날 일이지만 노제, 화장터, 유골을 안치한 봉원사에 이르기까지 잠시도 이탈하지 않고, 술로 자리를 지킨 그들이다.
늦게는 그들과 헤어져, 김명성씨 일행따라 봉원사 이인섭선생 댁에 술 한 잔 더 하러 갔다. 그런데 돌아오던 길목의 어느 주막에서 술 마시며 논쟁하는 신학철씨와 류연복씨를 다시 발견한 것이다. 정말 대단한 깡다구였다.

이제 민중미술 판의 야전사령관이었던 ‘용태형’이 세상을 떠나, 그 역할을 대신할 인물이 절실하다. 시대적 상황이나 여건이 예전과는 다르지만 정신적 지주가 될 만한 인물이 필요한데, 그 역할을 맡을 분이 바로 신학철선생이 아닌가 생각된다.
신학철선생을 제2대 민중미술의 야전사령관으로 모시는 취임 축하연을 인사동에서 한번 열어야겠다.


 




용태형’의 유언대로 유골은 신촌 봉원사에 안치되었다.

한 때 세들어 살았던 봉원사 사가에 대한 추억들이 많았을 것이다.

봉원사 주변 길들을 돌아다니며 오랜 기억 조각들도 찾아보았다.

저돌적인 성격에 상처받았던 생각도, 잔잔한 정에 코 끝이 찡하기도 했다.

 

 

추모회 때는 ‘용태형’의 정확한 나이를 알게 되어, 실 웃음을 짓기도 했다.

그동안 나보다 한 살 많은 것으로 행세하며 항상 동생처럼 대했는데,

알고 보니 나보다도 한 살 적은 것으로 밝혀진 것이다.

같은 입장이던 김정헌씨가 오죽하면 조사 제목을 “야 임마! 용태”를 추도함“

이라 적었겠는가?

 

 

“이젠 나이가 한 살이라도 많은 것이 더 서러운 처지가 되었으니,

그도 다 부질없는 일이 되고 말았구나.

가끔 봉원사에 들려 술 한 잔 올릴테니 저승 소식이나 전해주고,

부디 극락왕생을 누리시게나

 

 


 



















                                              옛날 '용태형'이 살았던 봉원사 집이다










                                                아래사진 두 장은 사진가 정영신씨가 찍은 사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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