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밤에, 죽은 사진기자 김종구씨를 만났다.

 

인사동거리에서 그를 만났는데, 대뜸 “조 선배! 강촌에는 언제 올 거요?”라고

물었다. “응 시간 맞춰, 근일 간에 한 번 갈게”라며 헤어졌으나, 꿈이었다.

“왜, 갑자기 죽은 종구씨가 꿈에 나타났을까?” 옛 생각에 잠시 빠졌다.

강촌은 그가 마지막 시간을 보냈던 곳이지만 한 번도 못 가봐,

늘 마음의 빚이 되고 있었던 게 사실이다. 그래서 꿈에 나타난 것이리라.

 

김종구씨는 인사동에서 청춘, 아니 인생을 불사른 사진기자다.

인사동과 친구들이 없었다면 그렇게 퍼 마시지도 않았을 것이고,

일찍 세상을 떠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최류탄 가루에 범벅이 된 몸으로 ‘귀천’에 앉아 진토닉 한 잔으로 울분을 삼킨 그다.

인사동 좋아하고 친구 좋아 해, 틈만 나면 인사동에 나와 마셔댔다.

하기야! 그 암울한 시대에 술 마시지 않고, 맨 정신으로 살기도 힘들었다.

 

술에 절은 까만 얼굴에 큰 입으로 낄낄거리며 웃는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근무하는 중학동의 ‘한국일보’사가 인사동 지척에 있었으니, 수시로 들락거렸다. 

당시 인사동 거지 예술가들에게 김종구씨는 영원한 호구며 구세주였다.

대개 ‘실비집’에서 퇴근하기를 기다리는데, 죽은 적음시인은 늘 목을 매고 기다렸다.

그렇게 하루도 쉬지 않고 마셔대더니, 결국 둘 다 술 때문에 먼저 세상을 떠난 것이다.

 

나는 그에게 술 만 얻어먹은 것이 아니라 필름도 얻어 썼다.

사진기자들은 필름에 구애받지 않아, 사진하는 이들의 선망의 대상이었다.

가끔 꼬불쳐 둔 필름을 한 두통씩 건네주곤 했는데, 너무 고마웠다.

특히 시위현장에서 필름이 떨어지면, 그를 찾는 수 밖에 없었다.

 

요즘은 87년도 민주항쟁을 기록한 사진 수정하느라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다.

그런데, 사진들을 수정하다 종구씨의 취재장면이 담긴 모습을 만난 것이다.

명동성당 입구에서 박종철 추모미사가 끝나기를 기다리던, 취재진 속에 섞여있었다.

육교 위의 나에게 카메라를 겨누고 있는 모습을 보니, 너무 반가웠다.

이 사진을 보려고, 그런 꿈을 꾸었나 생각되기도 했다.

 

그는 사진기자로서는 최선을 다했으나, 더 이상의 욕심을 부리지 않았다.

대개의 사진기자들이 별도의 카메라로 자기가 필요한 대상도 찍지만, 그는 고지식했다.

그 사진하기 좋은 조건에 있으면서도 한 눈 팔지 않았고, 남는 시간은 술 마시는데 소진했다.

‘한국일보’ 사진부 소속으로 ‘주간한국‘의 오지 촬영을 했을땐, 별도의 작업도 기대했으나 그러지 못했다.

 

그 후 아까운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는데, 그가 남긴 필름이 늘 궁금했다.

몇 년 전 두번째 부인으로 부터 '유카리화랑'의 노광래씨에게 전달되었다기에,

마침 천상병선생 20주기를 맞아 사진집 출판을 준비하던 즈음이라 찾아 나섰다.

특히 인상적인 그의 사진은 ‘귀천’에서 천상병선생 옆에 앉아 목여사님이 환하게 웃으시는 모습이었다.

그 필름을 비롯한 천상병선생 관련 자료들은 찾아 몇 장 빌려 쓸 수 있었지만,

나머지는 인터뷰 때 찍은 포트레이트사진들이 어수선하게 화일에 꽂혀 있었다.

 

사진기자로서 한국일보사에 남긴 기록적 사진자료들은 많겠지만,

사진으로 20여년을 살아 온 한 사진가의 자료치고는 너무 초라했다.

그래, 죽으면 어차피 빈손으로 가는데 남겨봤자 뭐하겠느냐“란 생각도 들었다.

그런데, 간 밤에 꿈에서 한 그의 말이 영 찜찜했다.

“강촌에 언제 올거냐?”가 아니라 “저승에 언제 올거냐?”란 말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야이! 술 귀신아~ 그거는 저승사자인 니가 더 잘 알지, 살아있는 놈이 우째 아노“

 

사진,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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