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가을, 일 년에 두 차례씩 전국 오지를 찾아다니며 산삼 씨앗과 묘삼(2-3년생 산삼)을

심어 온 ‘농심마니’가 생겨 난지도 어언 30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 창립30주년이 되는 내년의 기념행사 준비를 위한 단합대회가

지난 24일 오후7시부터 이틀간에 걸쳐 장흥 ‘신흥레저타운’에서 열린 것이다.

‘농심마니’는 1986년, 산악인이며 소설가인 박인식씨가 주동이 되어 만들어졌는데,

회원은 백명이 넘어나 평소에는 3-40명 정도 모인다. 잊을 만하면 나타나는 분들이 많다.

그동안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이젠 전국에 산삼이 널리 퍼지게 되었다.


회원들 주머니 털어, 여지 것 한 번도 거르지 않고 산삼을 심어왔건만,

다시 찾아가 확인하거나 캐본 적은 없다.

심은 곳을 알려고도 말하지도 않는 것은, 심고 난 이후부터 오로지 자연의 몫이라는 것이다.

그 날의 단합대회는 다른 일과 겹쳐, 두 시간이나 지난 오후9시경에 들렸다.

대회장에는 박인식 대장을 비롯하여 송상욱, 전유성, 김명성, 황예숙, 박세경, 서길헌,

김희갑, 김시인, 이상철, 김종수, 홍명도, 김정남, 송미향, 박용진, 조명환, 이상훈씨 등

20여명의 회원들이 여흥을 즐기고 있었다.

마치 산삼 심기 전의 전야제 같은 신나는 자리가 펼쳐지고 있었는데,

음유시인 송상욱선생의 기타 반주로 가요 반세기의 총 출동이었다.

‘농심마니’회원들은 삼산 심는 일만 열성인 것이 아니라 노는데도 한가락 한다.

“농심마니 잘 잤느냐 지난밤 꿈속에서 산신령이 하신 말씀 귓가에 새롭구나“로 시작되는

농심마니 노래는 산삼 심을 때 부르지만, 술자리에서 빠지지 않는 노래가 하나 있다.

그 날 밤엔 박세경씨가 불렀으나, 맛이 제대로 나지 않는다며 박인식씨 더러 다시 부르게 했다.

욕과 뒤섞여 재미있게 패러디 된 노래인데, 마지막 한 구절만 머리에 떠오른다.

“씹새가 다 파먹고 조껍데기만 남았네”

사진,글 / 조문호












































































구로구청장 이 성씨와 홍현숙씨의 장남 홍일군의 결혼식이
지난 10월24일 오후6시, 신도림 테크노마트 웨딩시티에서 있었다.


홍일 군은 오래 전에 한 번 보았는데, 너무 어엿하게 자라 있었다..

지금은 '우리은행' 두뇌로서의 역활을 충실히 한다는 소개도 있었다.
긴 주례사가 이어졌으나, 아무 소리 안 해도 잘 살 커플 같아 보였다.

축하객들이 많았으나 인사동사람으로는 최혁배 변호사 내외를 비롯하여 ‘아라아트’ 김명성씨와

공윤희씨, 소설가 박인식씨, 화가 전인경씨, 큐레이트 전인미씨를 만났을 뿐이다.

모두들 ‘아내는 왜 오지 않았냐?’지만, 어찌 심사임당 지폐 한 장 넣고,

두 사람이나 먹을 수 있단 말인가. 벼룩도 낯짝이 있지...

피로연장은 8층에 있는 뷔페식당이었는데, 여러 곳에서 이용하는 곳이라 그런지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

연회장이 얼마나 넓은지, 음식 가지러 갔다가 가방 둔 좌석을 찾지 못해 뷔페식당을 몇 바퀴나 돌았는지 모른다.

함께 있던 공윤희씨가 가방을 들고 다른 자리로 옮겨 버렸는데, 더 황당한 것은 자리는 찾았지만,

챙긴 음식 놓은 자리를 몰라 다시 찾으러 다닌 것이다. 완전 시골 노인 서울서 헤맨 격이었다.

기둥에 적힌 구역번호만 기억했으면 그런 곤욕은 치루지 않았을 텐데...

좀 있으니 이성씨 내외가 식사하러 왔으나, 이곳은 혼주의 테이블도 별도로 마련되지 않았다.

식사를 끝낸 우리가 일어나고 두 내외가 앉았지만, 어디에 있는지 모르는 축하객에게 인사 드리려,

국수 몇 젓가락만 들고 바삐 일어서야 했다.
오늘 같이 경사스러운 날, 한 끼쯤 굶어도 괜찮겠다마는, 왠지 안 서러워 보였다.

사진,글 / 조문호









 

 

우리나라 최대 규모의 전시 공간 인사동 '아라아트'센터에서 광복70주년 특별기획전을 마련했다.

경주의 목판화가 정비파(국토)씨와 마산의 서양화가 이강용(소멸의 시)씨의 작품들로,

우리의 뿌리를 찾으며 광복의 의미를 되새긴다. 

이 전시는 7월15일부터 시작하여 8월 20일까지 계속된다.

'국토'를 주제로 한 정비파의 목판화전은 1,000호에 가까운 대작들로 지하1, 2층을 가득 메우게 되고,

지상 4, 5층에서 전시되는 이강용의 '소멸의 시'는 80년도 중반, 한강미술관에서 선보인바 있는 초창기 작품,

고인돌 시리즈를 펼쳐 놓았다.

정비파씨의 '국토' 시리즈는 우리나라 산과 강의 혈맥들을 섬뜩하게 드러내며,

기운 생동하는 장엄함을 보여주고, 이강용씨의 '소멸의 시'는 우리 조상들의 혼불이 서린

고인돌로 우리민족의 자취를 더듬게 한다.

민초들과 함께해 온 민중미술가 두 명이 펼치는 이 신토불이 기획전은
광복70주년을 맞아 우리민족의 정체성을 돌아 볼 수 있는 좋은 기회로 생각된다.
관람료 내가며 보는 외국전 보다야 아무 부담 없이 영혼을 살찌우는 이 전시가 훨~ 낫다.

도록 발문에 쓴 박인식씨의 말이 생각난다.

"토종은 맛있다.
토종은 힘이 세다.
토종은 아름답다."

조문호

 

 

이강용 "소멸의 시"

 

 

 

 

 

 

 

 

 

 

 

 

 

비파 "국토"

 

 

 

 

 

 

 

 

 

 

 

 



 

 

오만철 “마치 도화살”전 개막식이 지난 20일 오후6시 인사동 ‘아라아트’3층 전시실에서 열렸다.
전시장에서 작가 오만철씨를 비롯하여 박인식, 공윤희, 공창호, 이상철, 이길원, 임채욱, 정영신, 황예숙,

김은경, 김희갑, 유근오씨 등 많은 분들을 만났다.

 

 돌아 오던 길에는 택시를 기다리던 구중서, 주재환선생도 만났다.

 

 

 

 

 

 

 

 

 

 

 

 

 

 

 

 

 

 

 

 



30년간 숨어있던 서양화가 김종숙씨의 '속초다'전 개막식이 지난 28일 오후5시, 인사동 아라아트 전시장에서 성황리에 열렸다.
전시장에는 김종숙씨를 비롯하여 기획자 박인식씨, '아라아트'대표 김명성씨, 출판인 정광호, 이규상씨, 만화가 박재동씨. 도예가 황예숙, 김희갑씨, 사진가 임채욱씨, 시인 송상욱씨, 김정남, 이상철씨등 많은 분들이 참석하여 성황을 이루었다.

김종숙씨는 강원대미대를 졸업한 후 20대 중반부터 홀로 아들을 키우느라 갖가지 ‘막일’을 해왔단다. 황태덕장 등에서 생선을 다듬고 갈무리하는 일부터 식당의 서빙까지 닥치는 대로 했단다. 고등어, 꼴뚜기, 가자미, 대구, 말린 도루묵, 명태, 열갱이 등등 화폭 속에서 비린내가 느껴질 정도로 살아 펄덕이는 갖가지 생선들은 화가의 남다른 체험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전시를 기획한 박인식씨는 '나는 꾸덜꾸덜함과 쿰쿰함에 이미 중독되었다”고 표현해 놓았다.

 

 

 

 

 

 

 

 

 

 

 

 

 

 

 

 

 

 

 




 

(왼쪽부터) 화가 김종숙 씨, 기획자 박인식 씨. 사진 김경애 기자

[짬] 첫 초청개인전 ‘속초다’ 여는 화가 김종숙 씨, 기획자 박인식 씨

낯선 이름의 화가로부터 전시회 초대장이 왔다. ‘속초다’라는 전시회 제목과 작품 사진에서 드러나듯, 강원도 속초에 사는 김종숙(50)씨가 속초의 사람과 자연을 그린 것이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초대인이 따로 있다. 그것도 무려 4명, 문화계에서 알아주는 이름들이다. 소설가이자 미술평론가 박인식씨, 아라아트센터 김명성 대표, 도서출판 낮은산 정광호 대표, 사진작가 임재욱씨다. 더구나 작가의 첫 개인전이자 아라아트센터의 기획 초대전이다.

“작품을 처음 보는 순간 ‘바로 내가 찾던 그림’이었고, 지금은 사라져버린 ‘정통 화가’를 발견했다는 직감이 왔어요. 보는 사람마다 ‘여자 고흐다’, ‘고흐+고갱이다’ 감탄들 합니다.”

초대전의 기획자이기도 한 박씨는 작품 못지않게 흥미로운 화가의 이력과 전시회 사연을 들려줬다.

미대 나와 속초서 혼자 작업해온 김씨
여고동창생들이 몰래 그림들고 상경
무작정 인사동 돌며 ‘전문가’ 수소문

작품 본 순간 감탄한 평론가 박씨
화랑 대표 등과 함께 ‘초대전 삼고초려’
“드문 정통 화가·회화 정신에 중독”

‘지난해 여름 화가의 속초여고 동창생 2명은 ‘물고기 그림’ 2점을 몰래 싸들고 무작정 상경했다. 친구의 작품이 골방에 숨겨두기엔 너무나 아까웠기 때문이다. 인사동의 화랑과 공방들을 돌아다니면서 그림을 가장 잘 보는 전문가를 수소문했다. 마침 한 공방에서 친분이 있던 박씨를 연결해줬다. 그림을 본 순간 감탄한 박씨는 곧장 아라아트 쪽에 초대전 기획을 제안하고, 속초로 달려가 화가를 만났다. 그런데 정작 화가는 동창생들에게 화를 내며 고개를 저었다. 박씨와 주위 사람들의 설득에 못 이겨 동의를 했던 화가는 인사동 아라아트센터 5층 전시공간을 보더니 또다시 고개를 저었다. “너무 넘치는 공간”이라는 이유였다. 이번에는 화가가 삽화를 그린 동화책 <그 꿈들>(글 박기범)의 출판사 대표인 정씨와 전시회 도록의 사진을 찍은 임씨도 가세해 초대인을 자원했다.’

그렇게 반년에 걸친 삼고초려 끝에 ‘은둔 화가’가 50년 만에 세상 속으로 나온 것이다.

전시회 개막 전날인 24일 전시장에서 만난 김씨는 여전히 주저하고 있었다. 1965년 속초에서 태어나 강원대 미대를 나와 ‘글과 그림’ 동인으로 활동하며 꾸준히 그림을 그려온 경력을 보면 첫 개인전이라는 게 의아스러울 지경이다.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일까?

“이제야 겨우 그림을 어떻게 그리면 되는지 알 것 같은데 대뜸 세상에 내놓기가 겁이 나요.”

그렇다고 다른 생업이 있거나 그림을 팔지 않고도 될 만큼 경제적 여력이 있거나 든든한 후원자가 있는 것도 전혀 아니였다. 오히려 20대 중반부터 홀로 아들을 키우느라 갖가지 ‘막일’을 해왔단다. 동해안 대표 항구도시인 만큼 황태덕장 등에서 생선을 다듬고 갈무리하는 일부터 식당의 서빙까지 닥치는 대로 했단다. 고등어, 꼴뚜기, 가자미, 대구, 말린 도루묵, 명태, 열갱이 등등 화폭 속에서 비린내가 느껴질 정도로 살아 펄덕이는 갖가지 생선들은 화가의 남다른 체험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마치 붓이 아니라 손가락이나 손바닥의 힘으로 물감을 통째로 찍어 놓은 듯한 그의 작품에 대해 박씨는 “나는 그 꾸덜꾸덜함과 쿰쿰함에 이미 중독되었다”고 표현해놓았다. “순수 회화에서 느낄 수 있었던 손맛이랄까 사람 냄새랄까, 80년대 이후 화단에서 보기 힘들어진 질감이 잘 드러나 있어요. 그것도 아주 기운차게.” 아라아트의 김 대표도 “회화의 원형과 정신이 살아 있다”고 덧붙였다.

이처럼 화가가 지금껏 자신만의 작품 세계를 지켜올 수 있었던 힘은 무엇일까. 김씨는 인생의 멘토들 덕분이라고 소개했다. 여고 시절 은사인 김경희 교사와 그의 남편인 고 황시백 선생이었다. 전교조 창립회원으로 강원지역 지부장을 지냈던 황 선생은 교단에서뿐만 아니라 지역 문화계에서 존경받는 어른이었다.

“어릴 때부터 그리는 게 좋았고 그래서 미대에 입학도 했지만, 누구나 그랬듯이 80년대 중반의 대학에서 공부에만 몰두하기는 어려웠죠. ‘반문명’이랄까 일종의 치기도 있었고요. 그래서 그저 혼자 그렸어요. 재미도 있었고, 내가 잘할 수 있는 일이 그리는 것뿐이었으니까요.”

이번 전시에서 함께 소개하는 동화 <그 꿈들>의 원화들에서는 사람에 대한 화가의 따뜻한 시선을 느낄 수 있다. 작가 박기범씨가 ‘인간방패’ 체험을 바탕으로 이라크 소년들의 꿈을 담은 이야기인 이 작품의 삽화들로, 2014년 전국 순회전을 하기도 했다.

“지금껏 그래 왔던 것처럼, 민중미술 이후 길을 잃은 회화의 원형을 찾아갈 겁니다. 때로는 막히고 절벽을 만날지도 모르지만, 한눈팔지 않고 뚜벅뚜벅 가고 싶습니다.”

김씨의 목소리는 낮고 어눌했지만 그 속에 담긴 강한 예술혼을 느낄 수 있었다. 그의 작품은 새달 17일까지 서울 인사동 아라아트센터 5층에서 볼 수 있다.

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

인사동 거리에 선 소설가 박인식

 

 

글 : 박인식 / 사진 : 조문호

 

인사동은 미술과의 인연이 아주 깊다. 조선조 때 양반들은 북촌에 살았고 화공이나 도공 같은 중인들의 거주지가 인사동이었다. 그 덕에 인사동은 조선 초기에 이미 미술 활동의 중심지로 떠올랐다.

 

 

그때 가닥 잡힌 ‘미술거리-인사동’의 이미지는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더 굳어졌다. 1924년 ‘통인가게’가 생기면서 이 일대에 서점, 필방, 화구점, 고미술 관련 상가들이 들어섰다. 1930년대에는 우리 전통예술의 상징인 골동품상거리로 탈바꿈했다.

인사동이 현대적인 화랑거리로 변모하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부터다. 박명자 씨의 현대화랑에 이어 동산방, 선화랑, 가나화랑, 경인미술관, 학고재, 금호미술관, 국제화랑, 미화랑, 진화랑 등 오늘날 한국 현대미술을 이끄는 메이저급 화랑들이 1970년대와 1980년대에 빠짐없이 인사동에서 문을 열었다. 이들을 따라 크고 작은 화랑들뿐 아니라 골동품점, 표구점, 민속공예점 등 미술 관련 가게들이 들어서며 500여 미술 관련 업종이 밀집한 인사동은 ‘한국 미술의 메카’로 불리게 되었다.

인사네거리에서 서쪽으로 난 인사동 5길을 따라 조금 걸어가면 하나로빌딩이 나온다. 그 빌딩 현관에 자그마한 표석이 하나 서 있다. 나의 인사동 나들이 출발점이다. 서울중심표석!

그랬다. 서울을 사대문 안으로 좁혀 보던 시절에 인사동은 분명 서울의 중심이었다. 태조 이성계가 한양으로 천도하여 이 자리가 ‘나라의 중심’임을 선언하는 표석을 세운 1395년 이래로 지금까지 인사동은 우리 미술의 중심일 뿐 아니라 서울의 중심이었던 것이다.

그 표석을 볼 때마다 나는 지금 어디에 서 있는가를 자문해 본다.

과연 서울의 중심에 서 있는가? 서울중심표석 앞에 선 너는 너라는 존재의 중심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는 있는가?

그렇게 스스로에게 물어보는 사이, 머릿속에서는 시간이 미끄러지는 타임슬립이 일어났다. 타임슬립은 인사동에 맨 처음 난장을 펼쳤던 조선조 화공과 도공이 ‘여기가 세상의 중심일세’하고 외치는 소리를 듣자마자 멈춘다.

그들과 서울의 중심에 함께 선 ‘인간중심’을 공유하는 것도 잠깐. 곧 역타임슬립 사면을 미끄러져 제정신으로 돌아온 그 자리는 이미 서울의 중심이 아니다.

지금 서울의 중심이 어디인지 나는 모른다. 나뿐만 아니라 누구도 모른다. 다들 서울의 중심 따위는 관심조차 없다.

돈에 영혼까지 팔게 된 요즘 세상이고 보면 ‘서울의 중심’은 다른 곳이 아니라 ‘돈의 중심’인 강남이나 여의도의 증권가나 금융가로 옮겨졌는지도 모른다.

어쨌건 이 자리가 더는 ‘서울의 중심’이 아니게 된 시점에 즈음해서 인사동을 떠난 ‘한국 미술의 중심’들을 생각해 본다. 어떤 화랑들은 강남 가는 제비가 되었고, 또 어떤 화랑들은 북촌이나 서촌 또는 평창동으로 옮아갔다. 1990년대 중·후반쯤 인사동의 땅값이 천장 높은 줄 모르고 뛰어오르면서다. 초기 인사동을 대표하던 화랑 가운데 아직 인사동을 지키고 있는 화랑은 동산방과 경인미술관, 관훈미술관, 선화랑 등 몇몇에 지나지 않는다.

인사동을 떠나는 화랑 주인들의 뒷모습을 떠올리며 쓸쓸해하는 내게 표석이 돌의 입을 연다. 목소리가 그지없이 단단하다.

“이봐! 힘내, 인사동은 아직 죽지 않았다고, 나는 이제 서울의 중심은 아니지만 아직은 한국 미술의 중심이라 자부하고 있어. 생각해봐. 인사동에 자리 잡은 1000여 상가 중 문화예술 업종이 그 절반인 500여 개가 되잖아. 그 나머지 절반도 거의 카페나 찻집 음식점들인데 모두 한국 전통을 표방하고 있거든.”

돌의 격려로 나는 ‘서울의 중심’이 아니라 ‘한국 미술의 중심’에 서 있다는 걸 알게 된다. 내 존재의 중심을 그 돌의 중심이 받쳐 주자 갑자기 어깨가 무거워진다. 그제야 나는 돌의 중심에 받쳐,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깨닫게 된다.

30년 넘게 인사동 소풍을 다녔지만 매번 새롭게 눈에 띈 화랑이 두어 개씩 나타났었다. 내가 눈썰미 없어서가 아니라 인사동에 아무리 오래 살았다 해도 인사동에는 죄다 기억할 수 없을 만큼 화랑이 많았던 것이다.

인사동의 미술문화지킴터인 경인미술관의 정원

 

이름이 잘 알려졌건 아니건, 크건 작건, 인사동에서 저 나름으로 미술문화의 꽃을 피웠던 그 낭만시대에 작가로서의 내가 만들어졌기에 그 낭만시대의 버팀목이 되어준 몇몇 미술관을 들러 안부 전해 달라고 그 돌은 내게 당부했다. 나는 거기로 가야 했다.

표석을 뒤로하고 다시 인사네거리로 갔다. 인사동 길과 마주치는 거기서부터 관광객 물결에 휩쓸렸다. 주말이라 그 물결은 거침없고 드세다.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중국어가 우리말을 압도한다. 그들이 주로 들락거리는 쇼핑몰로는 아리랑명품관, 동일전통공예관, 덕원빌딩, 인사아트프라자, 인사동마루, 그리고 쌈지길 등이 있다. 그 쇼핑몰들을 빼고는 죄다 화랑이거나 표구점이거나 공예품가게거나 전통찻집들이다. 쇼핑몰에도 어김없이 미술 전시 전문 갤러리가 들어 있다. 요는 인사동에 자리 잡은 이상 아무리 잡다한 관광기념품으로 관광객을 상대한다 해도, 그 공간에 문화예술의 낌새를 풍겨내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인사동이 인사동의 자리를 지켜가게 하는 가장 듬직한 힘이다.

중국 관광객 요우커(遊客)들이 ‘메이드 인 차이나’인 한국 전통공예품(그런 것들이 인사동 좌판에 많다)을 한국제로 알고 구입한다 해도, 그곳이 인사동인 이상 그 물품은 한국 전통예술기념품으로 둔갑하고 만다. 다른 곳에서 잡은 조기도 영광에서 말리면 영광굴비가 되듯이.

수도약국 못미처 오른쪽으로 꺾어진다. 이 길은 한산하다. 관광객 인파가 쓸고 지나가는 인사동 길에서 한 발짝만 벗어나도 이토록 달라진다. 조금 떨어져 바라보면 인사동 길은 사람 물결로 굽이쳐 흐르는 대하(大河) 같다. 사람 많이 몰리는 곳 또는 사람 가는 곳만 찾아가는 관광객인 것이다.

인사동 10길로 접어들어 다시 왼쪽으로 꺾어지면 경인미술관이 나온다.

여기 들를 때마다 고마움이 앞선다. 이 미술관은 옛 인사동의 정취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인사동 길을 벗어난 지 2∼3분이 지나지 않는데, 먼바다를 건너 외딴 섬에 닿은 느낌이다. 1983년에 개관했을 때와 지금의 경관이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한옥 전시관과 2층의 아담한 현대식 건축물이 정원에게 가운데 자리를 양보하고 한쪽으로 물러앉아 점잖다.

수도약국 맞은편의 가나인사아트센터와 북인사마당 가까이 올라간 곳에 있는 가나아트스페이스가 평창동으로 본거지를 옮겨간 가나화랑이 인사동에 남긴 흔적이며 그리움이다. 가나아트스페이스 바로 곁에 있던 학고재는 삼청동 쪽으로 떴다. ‘이즈’라는 대관 전문 화랑이 학고재를 대신하고 있다.

인사동 길 중간쯤에서 조계사 쪽으로 빠지면 인사동홍보관이 나온다. 모든 인사동 화랑주인으로부터 원로로 존경 받고 있는 박주환 옹이 창업한 동산방과 이 인사동홍보관 사이에 2012년 가을 지하 4층에 지상 5층 그러니까 9층의 큰 건물 하나가 들어섰다. 9개 층이 모두 전시실이다. 그림을 걸어두고 파는 상설공간은 일절 없다. 9개 층의 2000평(6600㎡) 공간 전체가 전시공간이다. 단일 미술관으로는 뉴욕이나 파리나 런던 등 미술 선진도시의 세계적 미술관이 무색할 만큼 큰 스케일에 공간 활용이 멋지고 기품이 넘치며 당당하다.

 

 

인사동을 상징하는 랜드마크 '아라아트'


인사동을 상징할 랜드마크가 들어선 것이다. 한국을 대표하는 메이저 화랑들이 속속 인사동을 뜨고 있을 즈음에 ‘시류의 반항아’인 김명성 씨가 인사동 르네상스를 꿈꾸며 이곳에 터를 잡은 2007년부터 나의 인사동 소풍 발길의 종점은 이 아라아트센터가 되었다.

기적이 따로 없다. 한국 미술시장이 해체 지경에 이르렀다는 한탄이 끊이지 않는 현실을 감안할 때 인사동에 이런 전시관이 한 사내의 집념으로 세워졌다는 것 그 자체가 이미 기적이다.


이 기적이 인사동 부흥의 기치를 한국 미술사에 드높이 치켜세우는 또 다른 기적으로 이어지기를 바라면서 아라아트센터를 찾는 인사동 사람들의 발길이 요즘 끊이지 않는다. 김명성 씨는 인사동 사람들의 술값 밥값 치르며 지난 삼십 년을 살아온 사람이다.

‘아라’라는 이름은 내가 지었다. 한자 표기는 ‘亞羅’다. 아시아로 뻗쳐 나가라는 바람을 담았다. 영어로는 ‘Asia Renaissance Action’ 곧 ‘아시아문예부흥운동’의 이니셜을 땄다. 인사동 아라아트센터가 ARA의 빛나는 거점이 되길 바랄 뿐!

이렇듯 인사동에는 아직 미술과 더불어 숨 쉬는 공간이 500곳 넘게 살아 있어, 인사동은 오늘도 미술세상의 중심에서 예술을 외친다.

[소설가 박인식씨가 문화일보에 기고한 글]

 


느낌이 있는 "신 풍물 기행"

작가 박인식이 본 인사동

 


인사동과 나 사이는 오래 묵은 된장이다.

그가 내 속에 들어와, 아니 내가 그 속으로 파고들어 정 주고받은 지 벌써 서른 몇 해를 넘겼다. 그동안 많은 인사동 사람을 만났다. 더러 꽃 시샘 바람으로 구차하고, 더러는 꼭두서니 빛으로 반짝였고, 또 더러는 평생 마실 술을 젊은 시절에 몰아 마셔 일찌감치 세상을 떴고, 또 다른 몇몇은 머리 깎고 산으로 들어갔다가 하산하여 도로 머리 기르고 장가들었다.

그들의 삶이 인사동 풍류 세상에서 빛나고, 또 예술세계에서 깊이 묻히거나 아주 저물다가 소식이 가물거릴 때마다 그들을 그리워하는 내 추억의 마음 한 자리에는 이야기가 되고 시가 된 사연들이 장독대에 내려앉은 함박눈(이 글을 쓰다 창밖을 보니 마침 함박눈이 퍼붓고 있네)처럼 차곡차곡 쌓여갔다.

그 눈을 맨손으로 ‘쓰윽’ 쓸어본다. 아주 잠깐 손끝이 시려올 뿐, 차가운 듯하면서도 따사한 기운이 손바닥을 부드럽게 감싸온다. 인사동과 내가 정분이 난 게다.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사랑이 이런 걸까. 만질 수 없는 그리움까지, 눈썹 밑에 살풋 밟혀온다.

인사동으로 나서면 언제나 그 그리움과 정분에 (60대 중반에 이른 할배 주제에) 철없이 온몸 들썩이게 된다. 그래서 나의 인사동 나들이는 낭만에 한목숨 건 ‘낭만파’이자 ‘인생파’인 인사동파 문화예술인의 삶 속을 걷는 오디세이가 된다.

‘기억의 방/기역자 모서리/추억의 기역자 방에서/기역으로 꺾어져/그리움의 지느러미 흔들며/헤엄쳐 나오는 기억의 물고기들/살가워 그리워라/하마, 서른 해나 정들었지.’ <박인식의 시 ‘아원의 추억2’>

쌈지길 들목에 있는 아원 공방의 그 기역자 방에서 나는 ‘인사동 3전설’의 한 분인 ‘거리의 철학자’ 민병산 선생을 처음 그리고 자주 뵈었다. 뵐 때마다 선생은 기침을 콜록였고, 말이 없었다.

인사동이 한국전통문화예술의 갯벌이 될 수 있었던 까닭을 파고들면 끝내 민병산이라는 ‘사람의 산’과 마주하게 된다.

바둑을 즐긴 선생은 원래 ‘한국기원’이 있던 관철동이 놀이터였다. 1980년대 들어서 관철동이 장사치들로 번잡스러워지자 선생은 늘 책이 한두 권씩 들어있는 헌 가죽가방을 메고 종로 큰길 건너편인 인사동으로 슬며시 발길을 옮겼다. 선생이 옮겨가자 선생을 따르는 숱한 문인과 화가와 언론인들도 아지트를 인사동으로 옮기게 되었다. 출애굽기처럼 출관철동기 또는 입인사동기는 선생으로 인해 이토록 은밀하면서도 장엄했다.

그로부터 몇 년 지나지 않아 선생의 회갑이 돌아왔다. 선생을 따라온 인사동 사람들이 그냥 지나칠 리가 없다. 한복도 한 벌 지어드리고 생일엔 모두 주머니 털어 자주 가던 ‘누님국수’집에서 회갑연을 열기로 했다. 그런데 생일 당일 모든 인사동 사람들은 자신이 소속된 인사동 계파의 연락책으로부터 이런 전화를 받게 된다. “음, 난데, …… 누님국수집으로 올 때 말이야. 부조금 봉투를 다시 써와! 민 선생이 아침에 돌아가셨대.”

‘…몸을 저승에 보내고도 인사동에서만 맴돈다/… 그의 죽음을 서러워하는 인사도 인사동에 앉아서 받는다//세상을 떠나서도/가진 것이 없을수록 좋더라면서/움직임이 적을수록 좋더라면서’<신경림의 시 ‘민병산 선생을 애도하며’의 부분>

출관철동기에 선생을 따라 인사동으로 들어온 시인으로 이 추모시를 쓴 신경림 시인 곁에 천상병 시인이 있었다.

‘내 나이 마흔다섯/노인으로 자처한다’ 했던 천상병 시인은 ‘인사동’이라는 음식을 세상 사람들이 맛있게 들 수 있도록 간을 제대로 맞춰준 사람이다. 그 역할로 천 시인 또한 ‘인사동 3전설’의 반열에 올랐다.

아원공방의 기역자 방에서 두 번째로 헤엄쳐 나온 기억의 물고기는 그곳에서 북쪽으로 얼마쯤 떨어진 학고재 골목길로 쫄랑쫄랑 지느러미 흔들며 앞서 갔다. 그곳에 천 시인의 아내 목순옥 여사가 꾸려가던 찻집 ‘귀천’이 있다. 목 여사도 몇 해 전 세상을 떴다. 지금은 목 여사의 질녀가 ‘귀천’의 팽주(烹主·차 따르는 사람)다.

천 시인에게 세상살이는 소풍이었다. 어린 시절 소풍날 김밥을 챙기듯, 천 시인은 막걸리값을 챙겨 허구한 날 인사동으로 소풍 갔다. 인사동 쪽에서 보면 소풍 왔다. 소풍 오는 사람이 워낙 열심이어서 인사동은 천 시인으로 인해 날마다 소풍날이었다. 소풍 온 사람은 소풍날을 만들어 준 사람답게 막걸리값을 뜯어냈다. 1980년대 초에 1000원이던 막걸리값은 그 뒤로 이어진 경제성장에 힘입어 1990년대 초에는 3000원으로 인상되었다. 하지만 3000원이 상한가였다. 1994년에 천 시인이 소풍을 끝내고 ‘귀천’해버린 까닭이다.

천 시인에게 시 한 수는 막걸리를 다섯 번 즐길 수 있는 술값이었다. 시를 얻게 되면 냅다 관훈미술관 3층에 있던 ‘한국문학’사로 달려간다. 이근배 시인이 오랫동안 편집주간을 맡았던 그 문예지 사무실로 시 한 편 들고 소풍 나온 날의 천 시인을 다시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 주간! 이 주간! 내 시 한 편 써왔다. 원고료 5000원만 도! 5000원만 도!”

이근배 주간이 1만 원짜리를 건넨다. “아이다, 아이다. 원고료는 5000원이다. 5000원만 도. 5000원만 도.”

그 얼마 뒤에 지금 ‘툇마루’라는 음식점이 있는 골목 끝에 있었던 ‘실비집’으로 가면 5000원을 꼬불쳐 쥐고 막걸리 소풍 즐기는 순진무구한 영혼을 만날 수 있었다. 인사동 소풍놀이에 익숙해진 인사동 사람들은 그럴 때마다 1000원짜리 지폐가 지갑에 있는지 미리 확인해야 되었다. 아, 우리에게도 1000원이면 막걸리가 대폿잔에 한가득 따라지는 영혼의 시대가 있었구나.

 

 

 

▲ 서울 종로구 인사동 거리는 평일, 주말 할 것 없이 추억을 찾아 나온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룬다.


세 번째로 헤엄쳐 나온 기억의 물고기는 인사동에서 가장 오랜 고서점인 ‘통문각’ 쪽으로 나아갔다. 인사동 큰길 곁이라 인파가 북적인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물고기에 신경 쓰지 않는다. 보이지도 않는가보다. 세 번째 물고기를 따라 들어간 곳은 ‘수희재’라는 전통찻집이다. 수희재의 다모(茶母) 장순정 씨가 정성껏 내린 녹차를 내놓자 물고기는 어느새 수천 마리 새끼를 부화시켜 내 콧속으로 들어오며 속삭인다.

“날 기억해? 여기서 차를 즐기던 박이엽 선생의 체취가 어린 차 향기 말이야.” 몇 년 선배인 민 선생을 닮아 박이엽 선생도 말이 없었다. 해소천식 환자였다는 점에서도 두 분은 닮았다. 그 지병으로 두 분 모두 일찍 귀천했다.

박 선생은 출중한 번역가로 알려져 있지만, 원래는 방송작가다. 1970년대 최고의 라디오드라마인 ‘아차부인 재치부인’의 작가다. 1970년대 말 군사정권에 의해 불순하다는 이유로 방송사 일은 끊어졌다. 기독교방송국만이 일거리를 줬지만 그걸로 생계 꾸리기는 어려워 막노동이나 다름없는 번역일을 시작한 것이다. 그가 번역하고 창비에서 출판한 ‘나의 서양미술 순례기’는 내가 가장 아끼는 귀중본이다. 미술에 별로 관심 갖지 않는 친구들에게도 선물해보면 그를 인사동에 보다 가까이 다가오게 만들 수 있었다.

이제 인사동이 인사동이 아니라는 장탄식이 무성하다. 다분히 그렇다. 주말이면 정나미 떨어진다. 관광지도 이런 관광지가 없다. 휴일에는 인사동에 인사동 사람들이 없다. 인사동의 정체성을 빛낸 여러 가게가 북쪽으로 서쪽으로 떠났다. ‘수희재’마저 2년 전에 문을 닫았다. 떠난 자리마다 ‘국적불명’의 관광상품가게가 들어섰다. 불난 호떡집에 사이비 엿장수가 설쳐댄다. 그게 인사동의 참맛인 줄 알고 꼬여드는 관광객들이 밀물 쳐 ‘인사동’이라는 이름의 짝퉁 한국전통 문화예술 기념품을 한 푼이라도 더 값싸게 사려고 이리 밀치고 저리 뛰는 장돌뱅이 판이 되고 말았다.

이런 날에는 인사동이 존재하는 한, 영원히 살아 있을 인사동 골목으로 들어가야 한다.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만이 아니라 인사동 골목에서 만나도 서로 피하기 어렵다. 그러니 원수 될 일 저지르지 말며 살라고 좁디좁은 인사동 골목은 가르친다. 그 골목 끝자락에 지금은 사라진 ‘실비집’이 있었다.

누군가 실비집을 실비대학이라 불렀다. 그와 동시에 이 선술집의 여주인은 총장으로 출세했다.

그 총장 전용 서랍 속에서 시큼한 막걸리 냄새 풍기며 잠자던 외상장부는 참 두툼했다. 인사동 사람들의 이름이 모두 올라가 있었다. 그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외상으로 마셔대던 막걸리는 유난히도 하?다. 하늘로 올라가서 다 함께 노상방뇨 하면 지금 내리는 저 눈발보다 더 함박스러운 함박눈이 되어 인사동 뒷골목에 납작하게 고개 숙인 한옥들의 낮은 어깨를 다독이며 ‘힘내라’ 격려해줄 수 있었을 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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