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마누라 일정에 등달아 나까지 바빴다.


어제 산청 신등장과 산림박람회 다녀오느라 기름도 바닥인데, 차까지 밀리기 시작했다.
지방전에 보낼 액자 맡기러 삼각지 간 김에, 학원까지 데려다 주려고 사직동으로 핸들을 돌렸더니

갑자기 용산역으로 가야한다는 것이다.

왜 용산역에 가냐? 고 물었으나 대답이 없었다.
직관적으로 느꼈다. 아! 마누라가 뭘 숨기고 있구나.
말없이 용산역에 내려 주며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목요일마다 철학아카데미에 간다기에, 오래 전부터 듣던 강좌라 개의치 않았으나
올해 초 대학원에 등록 하려는 것을 강력하게 말린 적이 있었다.
장터 작업에다 벌여 놓은 일도 많지만, 그보다 중요한 건 돈이 없기 때문이었다.

아! 그거 였구나. 그래서 나를 속이고 다녔구나.
철학아카데미에 가는 것이 아니라, 대학원에 간다는 것을 늦게 알아챈 것이다.
집을 비우는 시간도 그전보다 많이 걸리는데다, 가끔은 말이 헷갈려 의심 했었는데,
집에서 융에 대한 책들을 발견하고는 확신하게 되었다.

벌써 한 참을 다녔으니 빼도 박도 못할 처지지만, 도대체 등록금은 어떻게 만들었는지 모르겠다.

태백에 있는 황재형씨가 강원도의 정체성을 담은 ‘미술에 담은 우리 강원’이란 기획안을 보내왔지만,

당장 제작비가 없어 참여를 포기해야 할 지경인데, 눈앞이 캄캄했다.
집에서 몇 시간 동안 책을 보았으나 하나도 머리에 남는 게 없었다.
마음이 콩밭에 가 있으니 책이 머리에 들어올 리 없었다.

그때 사 마누라가 지친 표정으로 돌아왔다.


“나 오늘 죽을 건데, 너 한데 남길 유언이 하나도 없구나!”

느닷없는 내 말에 “천기누설 죄로 백 살까지 살 것이니 걱정하지 말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이 나이 되도록 그 많이 들어 본 비자금은 커녕 숨겨둔 비밀구좌 하나 없고,

숨겨 논 첩의 자식하나 없으니 유언으로 남길 말이 없다”며 너스레를 떨어댔다.

죽어도 화색은 밝아야 한다고 독작하며, “대학원 공부는 할 만하냐?”는 갑작스런 질문에

마누라 눈이 휘둥그래진다. 도둑 공부하느라, 눈치보며 거짓말하는 것도 힘들었겠지만,

나는 나대로 거짓말하는 마누라를 의심했으니, 피장파장 힘들었던 것은 마찬가지였다.

고향에 조금 남은 논을 잡히고 등록금을 마련했다니 한 숨 놓았으나, 다음 등록금은 우짤꼬?
이실직고 하였으니 마누라도 속이 후련하겠지만, 나 역시 오해가 풀려 맘 편하게 술잔을 나눌 수 있었다.
둘 다, 돈 안 되는 다큐멘터리사진에 한 세월을 보냈으니, 그 가난의 죄를 자식까지 대물림하고 있는 것이다.

아들이라고 하나 있는 놈은 나이가 40이 되도록 장가도 못간 채, 돈 안 되는 진보정당의 쌈꾼 노릇이나 하고 있으니,

말은 하지 않아도 속은 새까맣게 타버렸다.

이 세상에 제일 불쌍한 사람이 돈에 중독된 사람인데, 아예 돈이 없으니 중독될 수가 없다고 낄낄대며 술잔을 들었다.

이제 체념에도 이골 나, 술맛은 더 좋았다.

사진,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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