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부터 50년 전, 내가 총각딱지 떼던 때 이야기다.
영화에 푹 빠진 고딩 때는 ‘서라벌예대’에 진학해 멋진 영화 찍는 게 꿈이었다.
딴따라 대학이라며 않된다는 집안 반대에 도망질 쳐, 서울서 책 외판원도 했다.
몇 달을 고생만하다, 결국 덜미 잡혀 내려갔지만...

그 때는 이성에 뜨거웠던 사춘기지만, 내성적인 탓에 말도 제대로 못 건 냈다.

당시 종삼을 드나들던 분들 중에 글께나 쓰는 먹물들도 있다는 소문에 힘을 내, 

종삼 뒷골목으로 겁 없이 들어 간 것이다.

피카디리극장을 막 지나는데, 왠 여인이 어깨를 툭 치며, 오라고 손짓했다.
말없이 따라 간 골목 끝자락의 허름한 여인숙 방은, 선반위에 신발을 올려야 할 정도로 좁았다.

우두커니 서 있으니, 누나 뻘 되는 여인이 말했다.  “너 초짜구나?”

낌새를 알아차린 뒤부터 일사천리로 사랑 놀음을 끌어갔다.
벗으라면 벗고, 누우라면 눕고, 시키는 대로 홍콩 가는 비행기를 탔다.
얼마나 좋았으면, 반세기가 지난 지금까지 그 순간 순간들이 이토록 생생할까.

성교육 하나는 제대로 받았다 싶다.


‘종삼’이라 불리는 이 윤락가는 종로3가에서 부터 4가까지로 낙원동, 묘동, 봉익동, 훈정동,

인의동, 와룔동, 권농동, 원남동 등 꽤 넓게 번져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전쟁이 끝난 후에는 글 쓰는 문인들이 ‘종삼’을 많이 드나들었다고 한다.

전쟁 후의 황폐함과 허무감을 달래 줄  영혼의 안식처로 생각한 것이다.

한 원로시인은 1950년대의 폐허에서는 명동의 술과 '종삼'의 여자만이 작가의 고향이라 적기도 했다.

1968년 김현옥 서울시장은 도심 한 복판에 버틴 ‘종삼’을 없애기 위해 ‘나비작전’이란 것을 펼쳤다고 한다.

사창가를 없애려면 윤락녀보다 손님들을 못 오게 하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이런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나비 작전으로 250여 가구 1,400여명에 이르던 여인들이 ‘588’이나 ‘용산역’ 등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1968년 10월5일 새벽 다섯 시를 기해 마지막 남은 72명을 체포해 수용소로 끌고 갔는데,

버스 안에서 유리창을 깨부수며 난동을 부렸지만, 결국 ‘종삼’의 역사는 거기서 끝나고 말았다. 


나는 이십여 년이 지난 후, 사진에 미쳐 잘 나가던 가게 말아 먹고, 또 다시 서울로 도망쳤다. 

‘월간사진’에서 간신히 밥 빌어먹으며, 윤락녀들을 찍기로 작정한 것이다.
그 당시 ‘동아미술제’의 직업인이란 주제의 공모전 수상이 동기는 되었지만,

사회에서 멸시 당하는 그 녀들의 목소리를 전하려는 잠재의식이 더 컸다.


그 '전농동 588번지' 작업 자체가 종삼의 추억과 무관치 않을 것으로 늘 생각해 왔다.

세월이 흐르면서 그 때의 기억이 그들을 그리는 연민의 정으로 옮겨갔기 때문이다.

지난2월 하순 무렵 인사동에서 ‘청량리588’사진집 출간 기념전을 열었던 적이 있다. 
어느 날, 김수영시인의 미망인이신 김현경선생과 원로시인 강민선생께서 전시장을 방문하셨다.

김현경 선생은 구순을 넘기신 분인데도 체력과 기억력이 너무 짱짱하셨다.


전시된 사진들이 눈에 익은 풍경이라며, 김수영선생의 생전 일화를 들려 주셨다.

김수영선생께서  ‘종삼’을 더러 출입하셨다는데, 한 번은 술이 취해 아끼는 군용 털내의를

놓고 와 통탄해 하셨단다. 어느 집인지도 몰라 울기에 “다시 사 주겠다”며

간신히 달랬다는 말씀에 모두들 한 바탕 웃었다.



글 / 조문호

이 사진은 1968년 쫓겨 날 무렵의 종삼 골목같은데, 찍은 사진가를 알 수 없다. “Designersparty”에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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