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서울문화투데이’에서 호출령이 떨어졌다.
조사할게 있으니 인사동으로 나오라는 데, 그것도 공범인 아내 정영신과 함께 오라는 것이다.

70년대 취조 당할 땐, 잡힌 현장 부근의 고려호텔에 끌고 가 물고문하였는데,

지금은 적당한 장소를 스스로 선택하라니, 엄청 민주적이란 생각도 들었다.

 

 

 

 

 

 


인사동 거리는 뜨거웠다.
관광버스에서는 중국인들이 쏟아져 나오고, 사람들은 햇볕에 시달리는 가시적인 것보다,

인사동의 정체성이 사라진 현실이 더 덥게 만들었다.

관청이나 인사동보존회의 사려 깊지 못한 관리에다, 돈만 쫓는 상인들 욕심으로

인사동 본래의 문화와 낭만적 정서가 사라진지 오래기 때문이다.

잡화점에 밀려 난 화랑들은 파리만 날리고 있었다.

 

 

 

 

 

 

 



 

취조 당하기 전에, 그 날 끝나는 ‘아라아트’에서 열리는 황세준선생의 개인전부터 들렸다.

에리베이터에서 내리니, 그 넓은 전시장을 작가 황세준선생 한 분이 지키고 있었다.

작품을 둘러본 후 “좀 팔렸냐?”고 여쭈었더니, 물어보는 사람도 없었다는 것이다.

스무 차례나 개인전을 연 베테랑작가의 현실이 비참했다.

 

 

 

 

 

 


조영남 대작사건과 이우환 위작사건이 연이어 터진 요즘은 미술거래가 뚝 끊겼다고 한다.
이러다가는 굶어 죽기 십상이라, 모든 예술가들은 국고지원이 따르는 농사나 지어야 할 것 같다.

목구멍에 풀칠하는 게 먼저고 예술은 그 다음이니, 전 국민이 미개인으로 살아야 할 게다.

정치권에서는 이러한 심각한 현실은 아는지 모르는지, 오로지 정쟁에만 눈이 뒤집혀 있다.

 

 

 

 

 


취조시간이 되어 ‘허리우드’로 내려갔다.
경찰서장급인 이은영 기자가 임동현 기자를 대동하고 나왔다.
말주변이 없는 나는 왠 만 한건 모르쇠로 일관했지만, 아내는 조근 조근 말을 잘했다.

묻지도 않는 말까지 실토했다.

난 최민식사진상 문제를 폭로하고, 춘천기획전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거짓 진술은 하지 않았으니, 좋은 판결이 날 것으로 기대한다.

 

 

 

 

 

 

 

 

 

 

술집 “유목민”에서 빨리 오라는 호출이 빗발쳤다.
부리나케 달려갔더니, 노동자시인 김신용씨가 모처럼 인사동 나들이를 했더라.

일찍부터 ‘아라아트’ 김명성씨와 대작해 술이 얼큰하게 취해 있었다.

‘인디프레스’에서 열리는 삼인전 보러 나왔다며 주인공 장경호화백도 불러냈다.

그런데, 생각 외로 김명성 시인의 얼굴이 밝아보였다.

모두들 인사동 마지막 등불이 꺼졌다고 한탄했으나, 모든 걸 내려놓고 나니 오히려 마음이 편한 듯 보였다.

그 와중에도 돌아 갈 차비로 신사임당 한 장씩을 나누어 주었다.

 

 

 

 

 



 

반가운 벗들과 맘 편하게 마시니 술이 땡겼다. 모두 주량 초과다.
나는 소주를 두병이나 마셨고, 장경호는 막걸리를 두병 초과했고,

김신용씨와 김명성씨가 마신 맥주는 병을 헤아릴 수가 없었다.
지나치던 퓨전피아니스트 윤강욱씨가 신세진 게 많았던지,

장경호씨를 대접하지 못해 안달이었지만, 더 마실 상황은 아니었다.

 

 

 

 

 

 

 

 

'다우문화' 김각환 대표도 김명성씨로부터 불려 나왔다.

인사 나눈 김신용씨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장경호씨에게 돈 봉투를 돌려주었다.

지난 번 소래포구에서 장경호씨가 찔러 준 돈 봉투를 그대로 가지고 나왔단다.

아무리 어려워도 벼랑에 선 장경호씨의 돈은 쓸 수 없었던가보다. 정말 가슴 아픈 장면이다.

 

 

 

 

 

 

 



그런데, 술판을 마무리 하는 퍼포먼스가 좀 썰렁하지만 재밋다.
김명성씨가 뒤늦게 나온 김각환씨를 장경호씨에게 소개하자, 김각환씨는 장화백을 잘 안다고 말했다.

그러자 장경호의 시비성 답이 김각환씨 염장을 질런 것이다.
“당신이 날 어떻게 아는 데요?” 그 뒤부터 날 선 말이 몇 마디 오가다 모두들 뿔뿔이 헤어졌다.

그냥 헤어지면 재미 없잖아...



사진, 글 / 조문호

 

 

 

 

 

 

 

 

 

 

 

 

 

 

 

 



지난 3일, 소래포구에서 열린 ‘서해안 배연신굿’에서 뜻밖의 벗들을 만났다.
내가 어떻게 소래에 온 걸 알았던지, 김신용시인과 장경호화백이 찾아 온 것이다.
장경호가 소래포구 인근에 사는 김신용에게 연락해,
남양주에서 세 시간이나 걸려 그 곳을 찾아 온 것이다.

신학철, 박불똥 화백과의 삼인 전을 닷새 정도 남기고 있어
그림 그리느라 정신 없을 그가 아닌가?
김신용도 몇 달 전, 그의 출판기념회에서 본 후, 처음이었다.

아무튼 너무 반가워, 굿이 채 끝나지 않았으나 배에서 내려버렸다.
허름한 식당에서 대포나 한 잔 할 작정이었는데,
장경호가 바가지 쓰기 딱 좋은 횟집으로 끌고 가는 것이었다.

아이구! 제일 싼 회가 20만원이 넘는데도 앉으라고 했다.
모처럼 바닷가에서 만났으니, 시원하게 한 잔 하자는 것이다.
정영신이가 있으니, 안되면 마누라라도 잡힐 생각으로 퍼져 앉았다.

김신용, 장경호는 모두 부산에서 올라온 인사동 떨거지들이라 속정이 깊다.
방어회 한 접시를 시켰다. 모두들 좋아하는 술이 달라, 소주 맥주 막걸리가 다 나왔다.
그리웠던 쌍다구들과 이런 저런 씨나락 까먹는 소리하며 마시니, 술 맛 나더라.
배에 남은 이지하에게 연락해, 빨리 오라 했더니,
이지하는 어물전에서 밴댕이와 병어회까지, 한 접시 사왔다.

술이 취하니, 김신용의 십팔번 ‘백만송이 장미’가 듣고 싶었다.
창 밖에 “명성노래방‘이 보인다며, 김신용은 좋아했다.
‘명성’이란 노래방 이름에 더 관심있어 했다.
안 그래도 몇일 전, 김명성과 술 마시다, 신용이 이야기하지 않았던가.
노래방은 싫어 하지만, 함께 일어났다.

그런데, 난리 났다.
모두들 주머니에 꼬불쳐 둔 신사임당 찾느라 정신없는데, 장경호가 모두 계산해 버렸다.
미리 준비한 듯한, 돈 봉투까지 꺼내 김신용씨 주머니에 찔러 준 것이다.
없는 놈 사정, 없는 놈이 안다고, 한 달 간 미술 강의해 번 돈, 다 턴 것 같았다.

야, 씨발! 눈물 나더라.
가진 놈들은 이리 재고 저리 재느라, 제대로 쓰보지도 못하고 자빠지는데,
씨뿔도 없는, 장경호의 깊은 속아지에, 또 감동 묵은 것이다.

노래방에 끌려가 김신용의 백만송이 장미도 듣고,

나도 돼지 목 따는 소리로, ‘보고 싶은 얼굴’ 한 곡 질렀다. 

정영신의 우아한 노래 ‘조각배’도 듣고,

장경호 노래하는데, 염장 질러가며 잘 놀았다.

김신용은  술이 취해 먼저 일어나고, 장경호씨와 나는 인사동으로 옮겨야 했다.
포구 깊숙이 박아 둔, 차를 끌고 가려니 대리운전을 불러야 했다.

차도 이인승 코란도라 앞좌석에는 마누라가 타고, 장경호와 나는 짐승처럼 뒷 칸에 실려야 했다.

두 시간 가량 이리저리 부딪혀 온 육신이 고달픈데, 장경호는 듣기 싫은 소리 해 샀제,

니미, 미치겠더라.

인사동에 도착해, ‘아라아트’에 차 박아넣고 ‘유목민’으로 한 잔 더 하러갔다.
마누라는 힘들다며 지하철로 도망치고, 장경호와 둘만 남아 개겼다.
자정무렵, '인디프레스'관장 김정대씨가 불려 나오는 것을 보며, 바통을 넘긴 것이다.

그런데 이틑 날, 인사동에 나가서 차를 끌고 와 보니,

회집에서 먹다 남은 회를 비닐봉지에 꽁꽁 묶어 차에 남겨 둔 것이다.
너무 아까워 곧 바로 냉동실에 집어 넣었다,
저녁 무렵 꺼내 혼자서 소주 한 잔 할 생각이었다.

처음에는 시원한 얼음에 쫄깃한 맛까지 나, 잘 먹었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녹아, 악취가 나기 시작한 것이다.
맛이 간 회 냄새가, 그리 지독한 줄은 몰랐다.


문제는 시간이 지날수록 서서히 배가 아파오는 것이다.
늦은 시간에 문 연 약방도 없고, 얼마나 배가 아파 혼났는지,

이제 회 소리만 들어도 이 갈린다.

사진 : 정영신, 조문호 / 글: 조문호





























‘서해안배연신굿 및 대동굿 보존회’에서 주관하는 ‘서해안 풍어제’ 정기공연이

지난 7월2일부터 3일까지 인천 소래포구에서 열렸다. 

첫날의 대동굿은 어시장에서 열렸고, 3일의  배연신 굿은 소래포구에 정박한 배 위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서해안 풍어제는 본래 황해도 해안 지방에서 정월에 치러졌던 풍어제였다.

이 배연신굿과 대동굿이 한 종목으로 묶여 서해안풍어제란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는데,

사실 배연신굿은 선주의 개인 뱃굿이고, 대동굿은 마을의 공동제사였다. 

뱃머리에는 무신도를 올려 세운 굿청이 마련되어 있었고,

배위 여기저기 무당들이 둘러앉아 부산이나 지화를 만들고 있었다.

부산이란 짚으로 동그랗게 엮은 일종의 땟목이다.

음식을 조금씩 떼어 놓고 불을 붙여 바닷물에 띄우는 것으로 부정을 가시는 것이다.

한 쪽 구석에는 김금화, 김매물 만신이 앉아 있었는데, 두 분 다 거동이 불편한지 지팡이를 짚고 계셨다.

모든 준비나 굿은 오태운, 조성연, 김혜경, 이순애, 오순근, 박이섭, 김태진씨 등 조교나 이수자들이 진행했다.

굿판에는 선주를 비롯하여 김용희 인천남동문화원장, 미술평론가 최석태씨, 김신용시인, 화가 장경호,

사진가 정영신, 이지하씨등 많은 분들이 함께 어울렸다.

화려한 복장을 한 무녀들의 춤과 악사들의 떠나 갈 듯한 장단이 분위기를 돋우었다.

여기에 서낭기, 호기, 장군기에 서리화, 봉죽, 백모란 등의 화려한 지화장식과 선주들의 오색 뱃기가 줄지어 장관을 이루었다.

뱃사람의 안전과 풍어를 기원하는 배연신굿은 바다 위 선상에서 펼쳐지는 뱃굿이라 흥미롭다.

개인 뱃굿이면서도 내용이나 형식, 규모가 대동굿에 버금가는 굿인데, 연희적인 아기자기한 맛도 있다.

그리고 신내림을 받은 강신 무당들이 벌이는 굿판이라 춤사위가 별신굿보다 훨씬 격렬하다.

신청울림, 상산맞이, 부정풀이, 초부정 초감흥, 영정울림, 소당제석, 먼산장군거리, 대감놀이굿,

그물올림, 쑹거주는 굿, 다릿발용신굿, 강변굿 등이 차례대로 펼쳐졌다.

배연신굿의 절정은 먼산장군거리였다.

이순신, 최영, 임경업 장군 등을 모시는 거리로 소머리에 삼지창을 꽂아 거꾸로 세우고,

손으로 쳐서 쓰러지지 않으면 굿을 잘 받은 것으로 믿는다고 한다.

이 날 먼산장군거리를 지켜보던 김금화 만신께서 제대로 서지 않았다며, 다시 세우라고 불호령을 내렸다.

영험함이나 예능적 끼를 타고 난 김금화 만신이지만, 이제 몸이 따라주지 않는다.

사실, 우리민족문화의 뿌리는 무속이었다. 악기나, 소리, 춤, 모두가 굿에서 비롯되었다.

기쁨이나 슬픔, 바람들을 굿으로 풀며 함께 어울려 놀았던 것이다.

그런데, 새마을운동이 시작되면서 미신타파니 허례허식이란 억울한 죄을 뒤집어쓰고 밀려난 것이다.

오래동안 전통무속을 타파의 대상으로 인식시켰으니, 불손하고 거친 시선이 쉽게 사라지지 않는 것이다.

무형문화재로 지정되며, 무대에서는 예술이 되었지만,

실생활에서는 아직까지 저급문화로 홀대하는 이들이 많으니, 이 무슨 아이러니인지 모르겠다.

사진,글 / 조문호

























































































































완주의 왈패 한봉림이가 화두를 보내왔다.

작은 영웅들의 동네 인사동’, 우리 그들을 만난다.”로 글을 쓰란다.

생각해 보니, 인사동을 풍미한 많은 걸물들이 떠오르더라.

 

더러는 저승사자한테 붙들려가기도 했지만,

대개 변두리에 처박혀 구멍 파느라 두문불출하고 지낸다.

인사동만 바람난 줄 알았더니, 그들도 바람났나보다.

 

민병산, 천상병, 박이엽, 중광스님은 그래 그래 놀다 가셨고,

별만 줄 창 그리던 강용대, 체류냄새 풀풀 풍기며 낄낄거리던 사진기자 김종구,

어디엔들 이 한 몸 머물 곳 없으랴산문집으로 폼 잡던 땡초 최영해,

민중미술 그림판을 좌지우지한 사단장 김용태, 인사동 밤안개 여 운,

성질 더러운 콧수염 사진쟁이 김영수 등 많이도 잡혀갔다.

 

김명성, 노광래, 전활철, 최일순 등 몇몇은 인사동에 남았지만,

소설이 안 팔려 작가폐업술집 낸 배평모는 풍기 갔고,

인사동만 나오면 인사불성 된다는 사기꾼 한봉림은 완주 있고,

품팔이 노동자 시인 김신용은 골병들어 소래있고,

부산의 파아란 바다를 그리워하던 이청운은 병원에 갇혀 산다.

 

막사발처럼 사는 상투꾼 김용문은 터키에 돈 벌러 갔는데,

대처승인지, 시인인지, 사기꾼인지 헷갈리는 신동여는 영주 살고,

임진각에 바람개비 날린 털보 김언경은 단양 살고,

떠돌이 유목민  최울가는 어디 있는지 정처 없고,

술버릇 지랄 같은 장경호는 남양주서 독수공방 기다린다.

 

날씨처럼 왔다 갔다 하는 게 인생인지 모르지만, 우리가 살면 얼마나 살겠나.

노세노세 늙어 노세, 죽고 나면 못 노나니...” 이 말 참 명언이다.

이 봄 가기 전에 인사동서 경노잔치 한 판 벌이자.

함양 호랑이 이목일이가 인사동서 잔치한다니, 떡 본 김에 제사지낼까?

다음달 27, 인사동의 갤러리M’이란다. (회비20,000원)

 

제목은 거창하게 작은 영웅들의 동네로 시작해 놓고,

글이 삼천포로 빠져 경노잔치 사발통문이 돼 버렸네.

지정곡은 싫어하는데다, 본디 글쟁이가 아니고 사진쟁이니,

너그러이 양해 바란다.

 

사진,/ 조문호




아래 사진들은 23일의 인사동거리다.






 

 

지난 23일 중복 날, 김명성 시인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형 어디 있어? 신용이 형이 인사동에 나왔어, 별 일 없으면 나와”

오후8시경 ‘유목민’에 도착했더니 김신용, 김명성, 박인식씨가 앉아 있었는데,

테이블에 빈병들이 그득한 걸 보아, 제법 마신 모양이었다.

 

좀처럼 외출을 하지 않기에 무슨 바람이 불었냐고 했더니 초창기 시집 ‘버려진 사람들’과

‘개같은 날들의 기록’ 두 권이 동시에 복간되었다는 것이다.

88년에 나온 ‘버려진 사람들’은 ‘도서출판 포엠포엠’의 포엠포엠 시인선9집으로 복간되었고,

90년에 나온 ‘개 같은 날들의 기록’은 ‘문학의 전당’의 시인동네 시인선31집으로 복간 되었다며 시집 두 권을 내 놓았다.

 

처음 나왔던 시집이 우리 집 책장에 아직 꽂혀 있으나 이미 사인을 해 두어 받을 수밖에 없었는데, 지갑이 비어 난감했다.

사진집 출판 경험에 비추어 저자의 심정을 헤아리기에 그냥 받기가 이젠 부담스러운 것이다.

자비 출판으로 주위에 나누어 보는 책이 아니라면 가난한 저자의 주머니를 터는 일이기 때문이다.

 

박인식씨가 내일 파리로 떠나야 한다며 먼저일어나자 김신용씨 마저 술이 취한다며 따라 일어섰다.

김명성씨와 단 둘이 마셨으나, 그날따라 왠지 술맛이 나지 않아 소주 한 병을 비우고는 자리에서 일어나야 했다.

돌아오는 지하철에서 그의 첫 시집 ‘버려진 사람들’을 펼쳐 보았다.

황량한 삶 속에서는 모든 버려진 것들을 사랑하는 것이 생존방법이며 시의 명제이자 출발점이라고 그는 말하고 있었다.

 

 

사진, 글 / 조문호

 

 

 

 

 

요즘 정선에다 사진전시를 벌여놓고, 영월의 동강사진제에다 여기저기 다니느라 혼자 바쁘다.

문제는 정선 집에 인터넷이 연결되지 않는데다 스마트 폰마저 없어 찍은 사진이나 전할 소식이 있어도 올릴 수가 없다는 것이다.

 모든 게 서울에 가야만 가능하니 소식들이 늦을 수밖에 없다. 늘 뒷북치는 이바구지만 오늘 있는 일인 냥 보아주기 바란다.

 

지난 주말, 일산 사는 노인자, 이대훈씨 부부가 녹번동을 방문했다.


오랜만에 두 내외분을 만나 ‘할머니 추어탕’에서 반주를 곁들인 오붓한 시간을 가졌다.
그날따라 소주도 입에 짝짝 달라붙었지만, 대화마저 잊을 수 없는 추억담이라 사탕처럼 달콤했다.

바로 10여 년 전 노인자씨가 인사동 골목에 차렸던 술집, ‘작은 뜨락’이야기였다.

아쉽게도 일 년 남짓에 문 닫고 말았지만, 그 곳은 인사동 풍류객들이 참새 방앗간처럼 들락거렸던 추억의 대폿집이었다.

‘실비집’을 비롯하여 ‘시인통신’, ‘하가’, ‘누님칼국수’, ‘레떼’, ‘평화만들기’, ‘귀천’, ‘수희제’ 등의

사라진 업소들이 인사동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듯이, ‘작은 뜨락’도 빠지지 않는 이름이다.

그만큼 이야기거리를 많이 만들어 낸 추억의 공간이기 때문이리라.

원래 건물 옆의 쓸모없는 골목에 천막으로 위를 가리고, 건물 벽에 좁은 선반 식 테이블을 붙여

폭 1미터에 길이 5미터 남짓한 공간을 마련했는데, 서양식으로는 스탠드바이고 우리식으로는 그냥 포장마차다.

폭이 너무 좁아 겨우 엉덩이를 걸칠 만한 간이의자만 놓았는데,

이 집에서 술 한 잔 하려면 한껏 몸을 웅크리고 벽을 마주 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재미있는 낙서나 그림들이 벽에 덕지덕지 붙어 볼거리를 더했다. 

 

기억자로 된 작은 목로주점 안쪽으로 들어가려면 길게 앉아있는 사람들과 일일이 눈인사를 주고받아야 했다.

가까운 사람이 아니더라도 이내 가깝게 되어버리는, 사람냄새 물씬 풍기는 정겨운 술집이었다.

그 곳으로 고양이가 생선냄새 맡듯 인사동 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툇마루’ 바깥주인이었던 박중식시인, 전설의 노동자시인 김신용씨, 관훈미술관장으로 일했던 서양화가 장경호씨,

‘작가폐업’이란 카페를 운영하다 풍기로 떠나버린 소설가 배평모씨, 서양화가 김진두씨와 그에게 그림 배웠던 헨리 윤,

인사동에 목맨 김명성시인, 임진각에 바람개비 날린 설치미술가 김언경씨, 막사발 전도사 김용문씨,

천연염색 한다며 술에 염색된 이명선씨 등 인사동을 제집처럼 드나드는 인사동예술가들의 아지트로 변한 것이다.

그런데 대폿집을 차린 노인자씨는 술장사만 처음 한 것이 아니라 돈벌이 자체를 처음 해본 것이라고 했다.

일찍이 큰스님을 모신 포교사 노릇으로 세계 곳 곳을 돌아다녔다는데,

봉사활동으로 아프리카를 종단하며 굶주린 원주민들을 위해 가진 돈을 모두 써버렸단다.

오히려 돈 버는 일보다 쓰는데 이력이 붙은 여자였다.

그런 사람이 술장사를 하니 제대로 될 리가 없다.

손님이 “얼마요?”하면 “몰라요. 먹은 만큼 알아서 주세요.”가 대답이고

술꾼들의 취향을 몰라 손님이 시키는 대로 음식을 만들어냈다.

그렇게 어리석 하게 장사를 하니 인사동 예술가들이 ‘작은 뜨락’을 돕고 나선 것이다.

 

이를테면 돈을 제대로 못 받는 주인을 대신해 모자를 돌려 돈을 거두기도 했고,

원가가 적게 드는 입맛에 맞는 안주를 개발해내기도 했다.

그리고 주인이 있든 없든 하루에 한 두 번은 꼭꼭 들려 ‘작은 뜨락’을 연락처로 삼았다.

그런데 그토록 정들었던 ‘작은 뜨락’이 갑자기 문을 닫게되어, 모두들 길 잃은 나그네 신세가 되어버린 것이다.
손님이 없는 것도 아닌데다 취객들의 주벽도 그리 심하지않아, 폐업한 동기가 늘 궁금했다.

아마 단골 중에 보기 싫은 사람이 생겼을 것 같다. 보기 싫어도 차마 말 못하는 주인의 성정을 잘 아니까...

이 세상 어느 곳에 '작은 뜨락'처럼 정겨운 목로주점이 다시 생겨 날 수 있을까?
눈 뜨고 코 베이는 세상에, 조그만 바구니 하나가 손님 스스로 먹은 만큼만 내라고 기다려주는

이런 촌스러운 술집이 말이다.

예술을 알고 인사동 낭만을 체득한 사람들도, 사람보다는 돈을 더 반기는 야박한 세상이 되어 버렸다.

인사동의 낭만과 멋도 그대로 머물지 않고, 멋 자체가 상품처럼 넘실댄다면 그건 이미 멋이 아니다.

멋들어짐이 지나치면 곧 바로 건들거리는 법이 아니겠는가.

그러니 인사동 거리가 죄다 사람 냄새를 잃은 채 건들거리고 있는 것이다.

인사동의 낭만과 인정이 점점 메말라가는 요즘 들어 부쩍 ‘작은 뜨락’이 그리워진다.

가끔은 술 취한 도공 김용문씨가 부르는 '돌아가는 삼각지'도 듣고싶다.

사진,글 / 조문호

 

 

 

 


지난 20일, 한정식선생과의 오찬 약속으로 인사동에 나갔으나,
할 일이 많아 서둘러 귀가해야 했다.

집에 도착해 여장을 풀기가 무섭게 ‘유목민’의 전활철씨로부터 전화가 온 것이다.
“형! 오늘 전시오프닝 아닙니까? 신용이 형과 조해인씨가 와서 기다립니다.”
"아뿔사!" 일전에 술좌석에서 한 말을 그대로 믿고 나온 모양이었다.
몸이 천근같이 무거웠지만 다시 나오지 않을 수가 없었다.

“유목민”에는 김신용씨와 조해인씨가 마주앉아 맥주를 홀짝거리고 있었다.
이미 김신용씨는 불콰하게 취해 있었지만, 오랜만의 만남이라 반갑게 술잔을 나누었다.
얼마 전 출간된 김신용씨의 소설 ‘새를 아십니까?’가 독립영화로 제작된다는 소식,
그리고 조해인씨의 소설이 내년에 ‘문학동네’에서 출간된다는 등 반가운 소식도 들었다.

조금 있으니 김명성, 박인식, 전인미, 김억씨 등 지인들이 나타났고,
나중에는 채현국선생께서 많은 손님들을 모시고 오셨다.
년 말 분위기가 무르익은 대폿집 ‘유목민’은 시끌벅적 달아올랐다.
한 사람 두 사람 빠져나간 자정 무렵에는, 몸도 마음도 취해 비틀거렸다.

 

사진,글/ 조문호

 

 

 

 

 

 

 

 

 

 

 

 

 




지난 6일 시인 김신용씨가 인사동에 나왔습니다.

얼마 전 ‘새를 아세요?’란 소설을 출간했으나 공식적인 출판기념회가 없었습니다.
몇 차례의 모임에서 사인회는 가졌지만, 인사동 주변의 가까운 분들끼리 모임을

한 번 가져야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참석하지 못한 분이 더 많았습니다.

그 날 김신용씨를 비롯하여 조준영, 이명희, 전강호, 박인식, 노광래,

조경석, 정영신씨 등 10여명이 모여 조촐한 술판기념회를 가졌습니다.

그러나 주인공이 관절염으로 술을 마시지 못해 술자리가 너무 조용했습니다.

나도 왠지 사진이 찍기 싫어 조용히 술만 마셨더니, 역시 조용히 취하더군요. 

김신용씨는 집에서 자전거를 많이 타는데, 본인의 키보다 낮은 자전거를 오래 타

관절에 염증이 생겼나봅니다. 자전거 하나 마음 편하게 살 수 없어, 

남의 자전거 얻어 끌고 다니는 가난한 시인의 삶이 참 안쓰럽습니다.

 

사진:정영신 / 글: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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