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카메라를 가까운 지인들 도움으로 한 달 만에 구하게 되었다.
카메라가 없으니 동자동과 인사동 기록은 물론 꼭 필요한 사진조차 놓칠 경우가 많았는데, 너무 고마웠다.

후배 사진가 하재은씨가 선물한 ‘라이카’도 있지만,

그 카메라는 행사 사진이나 부탁받은 촬영에만 사용하지, 일반적인 생활사 기록에는 잘 사용하지 않는다.

 





잃어버린 Nikon Coolpix P310 카메라는 휴대하기 편한 컴펙트 카메라라 술상에 젓가락 놓듯 항상 같이 놀 수도 있지만.

손바닥에 쏙 들어가 상대방이 의식하지 않을 정도로 자연스럽게 찍을 수 있는 편리한 카메라다.

그런데도 기능마저 탁월해 큰 카메라에 전혀 손색 없다.

이 카메라는 5년 전 정영신씨가 38만원에 구입해 물려 받아 사용한 것이다,

그러나 지난 년 말 노숙인과 놀다 잃어버려, 다시 구하려니 단종 되고 없었다.

기가 수만 좀 높아졌지 바뀐 게 전혀 없는 새 제품으로 둔갑해 58만원에 출시되어 있었다.

도둑놈이라 욕할 수도 없는 건, 그들은 돈에 영혼을 판 장사꾼이 아니던가.

카메라를 잃어버린 후, 중고 카메라를 구입하려 카메라점마다 돌아 다녔으나 도무지 구할 수가 없었다.

휴대폰처럼 사용하다 버리는 카메라인지, 아무리 찾아도 없었다.

새 모델을 살 수도 있지만, 그들의 상술에 끌려가는 것 같아 싫었다.






사실상, 살 돈도 없었다.

진즉부터 카메라를 잃어버린 것을 알게 된 김명성씨가 여러 사람에게 거두어 30만원을 만들어 주었으나, 사지 못했다.

이 곳 저곳 알아보았으나 카메라 자체가 없는데다, 돈이란 호주머니에 넣어두면 없어지는 요물이나 마찬가지다.

오랜만에 만난 조카 녀석들 용돈도 주고, 모자라는 술값을 보태는 등 야금야금 썼더니, 핫바지 방귀 새 듯 사라지고 없었다.

걱정에 걱정을 머리에 이고 살았는데, 몇 일전 원로사진가 한정식선생의 오찬장에서 또 다시 구세주를 만난 것이다.

디지털카메라를 잘 아는 김생수선생께 행여 구 할 수 있는 방법을 물었더니,

옆에 있던 엄상빈씨가 인터넷 중고시장에 검색하면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대뜸 최경자씨가 5만원을 내 놓으며 시동을 걸어 주었고, 엄상빈, 정영신씨가 각각 5만원씩 부담한 것이다,

모자라는 돈은 그 자리에도 없던 마동욱씨까지 합세하여 돈을 마련해 주었다.

이번엔 정영신씨가 직접 돈을 맡아 인터넷에서 찾아보기 시작한 것이다.





아무리 뒤져도 중고 카메라는 없었다는데, 이월 상품 하나가 나와 있는 것을 발견하고 즉각 돈을 보냈다고 한다.

신품인데도, 처음 나올 때의 정품보다 싼 25만원에 구입했다니, 횡재한 기분이었다.

그러나 정선 고드름축제장으로 떠나야 하는데, 주문한 카메라가 오지 않았다.

이번에 떠나면 축제가 끝나는 25일경에나 돌아 올 수 있으니, 마음이 다급했다. 

동자동에 카메라를 인수할 사람도 없는데다, 축제 사진도 찍어야 하니 그냥 출발할 수 없었다.






더 이상 기다릴 시간이 없어 택배회사까지 찾아가 어렵사리 카메라를 인수받아 정선으로 떠나게 되었다.

오랜만에 만져보는 카메라에 기분이 충천했다.

이 카메라는 엄상빈씨를 비롯한 네 분의 사진가들이 사주었지만,

그 이전부터 김명성씨를 비롯한 인사동 사람들의 마음까지 담겨 예사 카메라가 아니다. 


이 조그만 카메라에 십 여 명의 정성이 담겨 있으니, 그 의미가 남다를 수밖에 없다.

그 분들의 마음에 보답하는 길은 정신 바짝 차려 좋은 사진을 찍는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좋은 사진이란 역사적 기록으로서의 사진에 앞서, 사람답게 사는 세상에 이바지하는 사진이고 싶다.





이런 저런 일로 좀 늦게 정선으로 출발했는데, 정선에 도착하니 오후 네 시쯤 되었다.

전시장으로 만든 콘테이너 박스가 준비되어 있었으나, 좁은 면적에 그 많은 사진을 어떻게 걸어야 할지도 난감했다.

늦어도 디피를 끝내고 싶었으나, 전기 연결이 잘못 되었는지 불도 켜지지 않았다.

정영신씨와 의논하여 대충 자리만 잡아두고 나올 수밖에 없었는데, 숙소가 마땅찮았다,






만지산 집은 추운 겨울에는 살 수 없는 집이다.

군불을 때면 바닥은 따뜻하지만, 산중의 찬바람이 바로 들어오는 집이라, 방안에 있어도 입김이 피어 오른다.

그래서 보온텐트를 방에 치려 했으나, 모든 매장에서 제품을 철수하고 없었다. 이젠 봄 상품을 준비한다나...






하는 수 없이 인터넷으로 주문하고 내려 왔는데, 그 때까지 텐트가 도착하지 않았다.

10여 년 전에도 정선 읍내 일보러 나왔다가, 쏟아지는 폭우에 강물이 불어 이틀 동안 여관에 머문 적이 있지만,

이번에도 여관신세를 질 수 밖에 없었다.


 



먼저 ‘동호장’에 방이 있는지 전화를 걸었더니, 오늘은 방 하나에 5만원이지만, 내일부터 10만원이라는 것이다.

평창올림픽을 기화로 바가지 씌울 생각부터 하는 돈벌레라는 생각이 드니, 두 번 다시 돌아보기도 싫었다.

'그림모텔'에서 4만원에 잤는데, 생각 외로 괜찮은 여관이었다.

모든 게 다 좋았으나, 욕실 벽의 누드 타일이 좀 야하더라.

 

정영신씨와 모처럼 티브이를 같이 보는 시간도 가졌다.

둘 다 티브이가 없기도 하지만, 그 중독성에 이미 쐬기를 박은지 오래기 때문이다.

무슨 내용인지도 모른 채, 바뀌는 화면만 쳐다보다 잠들어버렸다.




 

정선 고드름 축제 개막식이 있는, 그 이틀 날은 더 추웠다.

축제장에서 정선군청에 근무하는 전상현씨를 만났으나, 전시준비에 정신이 없어 한가하게 인사 나눌 틈도 없었다.

전시 벽이 액자 무게를 지탱할 수 없을 것 같아 각목과 전기드릴이 필요했다.

어렵사리 구하여 디피를 마무리할 수 있었는데, 전시공간이 좁으니 유치원생 사생대회전이 연상되었다.


    

 



그 때서야 고드름으로 장식한 조양강 축제장 모습이 하나하나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둘 다 전시장은 비워두고 어린애처럼 구경하러 돌아다녔는데,

마침 취재 중이던 엠비시 황지웅 피디와 노기환 엠씨를 얼음동굴에서 만난 것이다.

정영신씨의 장터에서 백 만 가지 표정을 담다.’사진전이 열리는 전시장으로 안내했는데,

배고픈 줄을 어떻게 알았는지, 맛있는 음식을 가져다 주었다.

겨울송어낚시 행사장에서 노기환씨가 직접 잡았다는 송어를 회쳐 왔는데, 너무 맛있었다.

야전의 식사는 이럴 수도 있다며, 둘 다 손가락으로 허급지급 먹어 치웠다.



 


오후 두시 무렵 열린 개막식장에서 전정환 정선군수를 비롯하여 반가운 분들을 여럿 만났으나. 귤암리 주민은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너무 추운 날씨라 나올 엄두를 내지 못한 것 같았다.

축제의 열기는 고드름을 녹일 정도로 후끈했다.



    

 

썰매장에서 열리는 어린이들의 경기를 구경하다보니, 올림픽 성화 봉송팀이 도착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정선은 알파인스키활강과 슈퍼대회전, 복합 종목이 열리는 2018 평창동계올림픽대회 개최지가 아니던가.


올핌픽 개막을 이틀 남긴 시점의 성화봉송은 구절리와 아우라지를 잇는 레일바이크와 풍경열차를 타기도 했고,

배우 김보성씨는 병방치의 짚와이어를 타고 내려오기도 했다.

정선 고드름 축제가 열리는 조양강변 일원을 지날 즈음정선군청 앞에 마련된 무대에서는 축하공연이 펼쳐졌다.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화가 김형구씨를 비롯한 많은 군민들이 정선군청 앞을 메웠다.

많은 공연이 있었지만, 정선군립 아리랑예술단의 아리랑 별곡은 언제 들어도 정겹다.

평창동계올림픽 개막 축하공연이 끝나자 전정환 정선군수의 환영사와 김옥휘 정선군의회의장의 축사도 이어졌다.



 


그러나 그 날은 축하공연 때문인지 정선시내에 빈 방이 없었다.

결국은 증산에 있는 리브사이드모텔까지 찾아 가야 했다.

정선에서 승용차로 30분 정도 소요되지만, 요금도 4만원인데다 침구도 깨끗했다.

그동안 인터넷에 글을 올리기는 커녕 컴퓨터 구경도 할 수 없었으나,

그 날 저녁만은 컴퓨터에서 필요한 정보를 찾는 눈팅이라도 할 수 있었다.



    

 

그 이틀 날은 보온 텐트가 도착하여 귤암리 만지산에서 잘 수 있었지만, 결코 녹녹치 않았다.

얼마나 추운지, 두 사람이 양쪽 아궁이에 나누어 앉아 군불을 지피기 시작했다.

그래도 그 시간이 가장 행복한 시간이 아닌가 생각된다.

추위도 녹일 수 있는데다, 바짝 마른 장작에서 타 오르는 불길이 너무 아름답기 때문이다.

정신없이 불에 파묻혀 있다보니, 방에서 연기가 새어 나왔다.


깜작 놀라 들어가 보니, 이불에 불이 붙은 것이다.

불을 너무 많이 지피기도 했지만, 아랫목 시멘트 갈라진 틈으로 불길이 올라와 붙은 것 같았다.

일찍 발견하여 큰 탈은 없었으나, 자칫했으면 큰 산불로 옮겨 갈 수도 있는 여건이라 아찔했다.



 


주변을 정리하고 텐트 안에 들어가 누우니, 마치 산행에 나선 기분이었다.

바닥이 따뜻해 그리 춥지는 않았으나 텐트 밑으로 기어 들어오는 한기에 잠을 설쳐야 했다.

가마솥에서 밤새 끓은 물로 세수는 할 수 있었으나, 식사는 불가능 했다.

언제, 아침 식사라고 정해두고 먹은 지도 없었기에, 전시장으로 바로 나왔다.


그러나 급히 나오느라 빠트린 것이 있어 정영신씨만 전시장에 내려주고 다시 만지산으로 돌아가야 했다

가는 길에 어머니 계신 묘소에 들려 술 한 잔 올렸는데, 어머니께서 뭣에 삐쳤는지, 가는 길을 막아버렸다.





내리막으로 꺾어지는 산길에서 핸들을 돌렸는데, 내려가는 길이 꽁꽁 얼어붙어 있었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다. 후진은커녕 질질 미끄러져 내려가기 시작했는데, 핸들만 마음대로 움직여 준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결국은 벼랑으로 떨어져 소나무에 꽝 부딪힌 것이다. 충격의 순간은 얼마나 놀랐는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마침 백열등을 갈기 위해 전구를 사서 앞자리에 놓았는데, 그게 팅겨나가 유리창을 치며 터진 것이다.

한동안 멍청하게 앉아 있었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다친 곳은 아무데도 없었다.

운전석 문이 나무에 끼어 열수가 없어 옆 좌석으로 나갈 수밖에 없었는데, 터진 유리조각부터 치워야 했다.

간신히 기어 나왔으나 걱정스럽기 짝이 없었다. 그 곳은 도저히 견인차가 진입할 수 없는 지역이었다.






일단 그 곳에서 제일 가까운 아랫만지 골의 최연규씨 댁으로 내려갔다.

이 친구는 소를 50마리나 키우는데, 자동 물 공급기가 얼어 우사마다 돌아다니며 물을 주고 있었다.

차량 견인에 일가견이 있는 그에게 사정을 이야기를 했더니, 서둘러 따라 나서 주었다

사고현장을 보더니, 견인차로는 불가능하니 내일 포크레인을 불러 끌어내자는 것이다.

그럴려면 눈부터 녹혀야 하니, 염화칼슘 열 포와 모래부터 실어와 뿌려 두어야 일을 할 수 있다고 했다.



 


오늘 밤에 서울 다녀오기로 한 계획은 이미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정영신씨에게 버스 편으로 혼자 다녀오라는 전화를 했으나 걱정스럽기 짝이 없었다.

만지산도 차가 없으면 꼼짝할 수 없지만, 정영신씨도 조양강변 행사장에서 나오려면 제법 걸어야 했다.


마침 최연규씨 트럭타고 정선 읍내에 열화칼슘과 모래를 가지러 가는 길에

전시장에 잠깐 들렸다가 정영신를 태워 귤암리로 들어 와버린 것이다.

서울행을 하루 연기 한 것은 피차 마음이 편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정영신씨가 지켜보는 가운데, 신승철씨까지 합세하여 모래와 염화칼슘을 뿌렸다,

뒤늦게 소문 듣고 온 김익수, 윤인숙씨 등 여러명이 함께 어울려 술도 한 잔했다.

최연규씨 부인은 허리관절에 문제가 생겨 일어서지도 못하는 환자가 되어 있었는데,

최연규씨가 직접 두부찌개를 끓였으나 음식솜씨가 제법이었다.


그 자리에서 속이 후련한 반가운 소식도 전해 들었다.

2년동안 이어진 지루했던 만지산의 물싸움이 정선군청의 개입으로 종지부를 찍었다는 것이다.

김익수씨 노래로 술자리를 마무리하고, 윗방에서 하룻 밤 신세졌다.



    

 

그 이튿날 정영신씨는 윤인숙씨의 도움으로 전시장에 나가고, 난 포크레인 기사의 연락에 사고현장으로 올라갔다.

언 땅은 녹았으나, 내리막 시멘트 길이라 포크레인도 별 힘을 쓰지 못했다.

마을의 최종대, 나병연, 송용삼씨가 와서 보더니, 체인을 감아 끌어 올리더라도 견인차 도움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래서 견인차와 동내 주민들이 합세한 애마 구출작전이 펼쳐 진 것이다.


사람이 많으니 눈도 금새 치워지고, 내려 갈 길에 모래를 뿌리는 등,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난, 차가 끌려 나올 때 다칠세라 주변의 나뭇가지를 톱으로 자르기도 했는데,

두 사람이 당겨 감는 체인에 조금 식 조금 식 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한 뼘만 움직이면 돌을 괴기를 반복한 결과 억측 서럽게 버티던 자동차도 결국은 끌려 나오고 말았다.

동네사람들의 지혜와 견인기사의 협력이 이루어 낸 결과였다.





차가 파손된 부분이라고는 앞 범퍼와 운전석의 백 밀러, 그리고 유리창 빗물막이 뿐이었다.

백밀러만 끈으로 묶어 고정시키니, 운행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었다.

남의 일이지만, 자신의 일처럼 도와주는 주민들의 따뜻한 마음이 고마울 뿐이었다.


마침, 함평에서 농사지은 쌀을 정선에서 먹기 위해 20킬로 실고 왔는데, 그 것이라도 최연규씨에게 사례했다.

동내 분들은 서울 갔다 와서 술자리 한 번 만들겠다고 약속하고, 정영신씨가 기다리는 전시장으로 차를 몰았다.

일요일 하루만 전시장을 다른 분에게 맡겨두고, 서울로 돌아 온 것이다.

정영신씨는 군청에 보내 줄 서류도 만들어야 하고, ‘서울문화투데이에 송고할 정선고드름축제기사 작성하느라 바빴다. 

나도 몇 일 동안 밀린 일기를 한꺼번에 쓰게 되었는데, 이야기도 길지만, 빠진 내용도 많은 것 같다.



    



월요일 아침 여섯시에 정선으로 출발해 다시 전시장을 지켜야 하는데, 날씨라도 춥지 않았으면 좋겠다.

어차피 25일까지 전쟁을 치루어야 하지만, 더 이상의 시련이라도 없었으면 좋겠다


추운 날씨였지만, 벗들과 이웃의 따뜻한 온정에 봄날 처럼 훈훈한 시간이었다.

동자동으로 복귀할 수 있는 날이되면, 그 땐 진짜 봄이겠구나.

 

사진, / 조문호






















 





조양강을 끼고 있는 귤암리의 가을은 다른 곳처럼 울긋불긋 화려하진 않지만,

정숙한 여인네 콧대처럼 은근히 아름답다.

언제나 그렇듯, 강변길만 들어서면 일단 마음부터 편해진다.



 


지난 14, 별 거둘 작물도 없는 가을걷이 차 만지산에 들렸다.

항상 만지산 집만 가면, 세상살이 지친 마음 감싸 듯 편하게 하지만,

팔자에 역마살이 끼었는지, 한 곳에 찐득하게 있지를 못한다



 

 


그런데, 귤암리에 평소 보지 못한 카페가 만들어져 있었다.

지붕위에 자전거가 올라 있는 것으로 보아 자전거 여행객들을 위한 쉼터 같았다.



 


윗만지산 오르는 길 옆의 김익수씨 고추는 병이 들었는지 말라가고 있었다.





집에 도착하니 맛도 없는 땡감이 날 잡아잡수하듯 반겼다.

거둘 작물이래야, 한 단도 안 되는 정구지와 간신히 살아남은 고추 조금이다.



 


오후에 어머니 산소에 들렸더니, 최연규씨네 들깨 밭에서 타작을 하고 있었다.

쌍놈 발 떡이라고, 참 먹는데 끼어 앉아 탁배기 한 잔 얻어 마셨다.



 


다들 만나면 한숨이 깊다.

고추농사를 망쳐, 죽도록 일만하고 빚만 더 짊어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배운 게 농사 뿐인데, 그만 두지도 못한다.





내심 땅이라도 팔리길 바라지만 쉽지 않은 일이다.

오나 가나, 사는 게 만만찮다.

 

사진, / 조문호





















 









남원 '다담 콘서트'에 가다 시껍하고 돌아와서, 정영신씨와 살아 온 기념으로 또 한 잔 마셨다.

그러나 적당히 마시고 자야 하는데, 그게 참 마음대로 안 된다. 

술은 넘쳐야 하고 님은 품에 안겨야 한다는 말도 있지만, 술 병은 비워야 하지 않겠느냐?

내일 새벽 네시에 일어나 정선 가야 하는데, 자정이 넘어 자빠졌으니, 또 바쁠 수 밖에 없었다.


이젠 알람이란 놈의 성질머리를 알았으니, 더 이상 당하지 않고, 새벽 네시에 정확하게 일어났다.

지난 29일 오전 8시에 만지산에 들려 사진액자 두개 챙겨, 9시까지 화암면 그림바위 G갤러리에 전해 줘야 했다.

시간 맞추어 전해주고, 느긋하게 돌아 오는 귤암리 조양강변의 정취는 너무 포근했다.


만지산 살팔봉은 이미 익어버렸고, 조양강은 온천처럼 그 때까지 김이 무럭무럭 나더라.

아침 저녁으로 기온이 급변하고 있다는 평범한 자연의 이치를 말해주었다.





만지산 집으로 올라가니, 입구에서 코스모스가 너울너울 날 반기는데,

오래 전, 삼겹살 구워먹던 불판 가마솥까지 코스모스가 점령해 버렸더라.


"네 이놈~ 네 놈이 빨지산이냐? 계엄군이더냐?"

갑자기 고은시인의 시 구절이 생각나더라.

갈 때 못 본 불판, 돌아오니 화분으로 보이네.


예전엔, 친구 올 때 삼겹살 구워먹는 불 판이었는데, 

그 좋아하던 친구들을 일 하느라 멀리하였더니,

가마 솥 불판도 알아차려, 화분으로 둔갑해 버렸구나.

그래도 끝까지 지켜주어 고맙다. 힘없어 일 못하고 만지산에 돌아 올 때만 기다려다오.


그리운 친구 하나 하나 불러모아, 삼겹살 구워 소주 한 잔 마시게...

내가 그 때까지 살지도 모르지만, 친구들도 그때가지 살아있을지 모르겠다.


그 건 아무도 알 수 없고, 오직 만지산 신령님만 알 것이다.

난, 십년 전 '농심마니' 박인식씨 패거리를 만지산에 불러와 

산삼 심어드리며 알랑방구 뀌어났으니, 좀 봐줄 것 같다.





이튿 날, '정신아리랑제'에 정영신씨가 온 다는데, 그냥 있을 수는 없었다.

술 한잔 먹여 잡아 먹으려고, 정선시장에서 전어 열 댓마리 사다놓고,

강기희 사단의 '문학콘서트' 차에 달라 붙어 오는 정영신씨를 찾아 아라리촌으로 갔다.


'문학콘서트'에서 많은 반가운 사람들 만났으나, 술은 차 때문에 딱 두 잔만 얻어 마셨다.

사진은 200장이 넘게 찍어두었으나, 일은 언제 할지 모르겠다.


정영신씨를 납치해 만지산으로 돌아 와, 가을전어 노리짝하게 구워놓고 술 잔을 들었다.

저 푸른 초원에서 그림 같은 집을 짓고 님과 함께 살고싶은 꿈을 꾼게 아니라, 남진의 노래를 불렀다.

한 잔하니. 천하가 내 손에 있더라. 대마까지 한 분위기 잡아주네.


사진, 글 / 조문호





무더운 쪽방을 탈출하여 찾아 간 정선 만지산은 휴가지가 아니라 전쟁터였다.
몇일 내내 술에 절어 살아야 했고, 제 마음대로 자란 풀과 나무 벌목하느라 땀을 뻘뻘 흘리는 곤욕을 치러야했다.

그런데다 원주민과 이주민 사이에 벌어진 물 전쟁이 2년이 가깝도록 해결의 조짐조차 없으니,

해도 해도 너무 한, 편치 않은 여름휴가가 되었다.

지난 3일 이른 아침 도착한 만지산 집은 잡초에 뒤 덥혀 있었다.
온 종일 벌인 잡초와의 전쟁으로, 온 몸에서는 땀이 빗물처럼 흘러 내렸다.
그러나 갈증으로 들이키는 시원한 물맛이 유일한 보상이었다.
난, 오나가나 전쟁을 치룬다. 사람 사는 곳이 어쩌면 전쟁터가 아닌지 모르겠다.






이튿날은 반가운 손님들이 찾아왔다.
인사동에서 ‘유목민’을 운영하는 전활철씨와 홍천에 사는 화가 양서욱씨가 만지산으로 찾아 온 것이다.

덕분에 일에서 잠시 해방될 수 있었지만, 그 날은 술과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기를 구워 이른 시간부터 술판이 벌어졌는데, 옆집에 사는 윤인숙씨까지 합류하여 술판은 무르익었다.

역시 술자리에는 여성이 있어야 생기가 돈다.

옆집에 사는 윤인숙씨는 이사 온지가 2년 가까이 되었지만, 술자리에 함께 하기는 처음이었다.

가끔 마주치면 눈인사 정도 나누었지만, 함께 하기를 꺼려했다. 혼자 사는 여자라 신경 쓰이기도 했지만,

집이 붙어있어 수시로 들락거리다 보면 서로 불편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동내 소문도 일조했다.

남자 녹이는 킬러라는 소문이 파다했는데, 주변에서 “마음 약한 작가님은 특히 가지 말라”며

만날 때마다 신신당부했는데, 은근히 당하고 싶은 충동마저 일었다.






마침 윤인숙씨가 술자리에 인사하러 왔기에 자리에 앉기를 권했는데, 무척 친절한 분이었다.

사내들이 굽는 고기가 신통찮았던지, 대뜸 자기 집으로 자리를 옮기자고 했다.

우리 집이 구멍가게라면 그녀 집은 슈퍼마켙이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 테라스까지 만들어 놓은 주변 환경에 주눅 들었다.

밤 늦도록 전활철씨의 기타소리와 윤인숙씨의 북소리가 만지산을 쩌렁쩌렁 울렸다.

활철씨의 노래솜씨야 익히 알고 있었지만, 윤인숙씨의 소리도 보통은 아니었다.

급기야 전활철씨 와는 친구로, 양서욱씨와는 남매로 둔갑하는 친한 사이가 되어버렸다. 그의 친화력에 고개가 꺼덕여졌다.

사람 사는데 친화력보다 더 좋은 게 없으나, 시골 사람들에게는 사람을 잘 꼬시는 것으로 인식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친화력의 양면성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이 깊은 산골에서 여자 혼자 살려면 그러한 성격이 아니면 살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동네 물 분쟁에 시달리며 남자를 잘 꼬들기는 요녀로 둔갑한 것이다.
윤인숙씨가 기존 집을 사서 들어 올 때에 이미 동내 지하수가 연결되어 있었으나,

동네에서는 물 사용 기금으로 200만원을 내놓으라고 했다. 그런 법이 어디 있냐고 반발하자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라야 한다“며 동네에서 물을 끊어 버린 것이다.

난, 서울에 살아 한 달에 한번 밖에 들리지 못해 지하수에 대한 권한 일체를 동네 결정에 위임한 처지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형편이지만, 딱하기 그지없었다.

그 지루한 싸움이 오래 지속되어 정선 읍내에서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좋지 않은 소문이 파다했다.

신판 봉이김선달이라는 바아냥까지 받아야 했는데, 이제 제발 물싸움을 종식시키고 싶었다.






그 날 밤은 술에 취하고 분위기에 취해 완전히 맛이 갔다.
방으로 돌아와 정신없이 골아 떨어졌는데, 아침에 일어나니 옆집에서 밥 먹으러 오란다며 양서욱씨가 전했다.

가보니 친절하게도 가마솥에다 닭죽을 끓여 아침상을 준비해 둔 것이다.

자기는 정선에 손님 맞으러 가야 한다며 “서욱아! 잘 챙겨먹고 전화번호 두고 가”라는 말을 남기며 사라져버렸다.

싹싹하기도 하지만, 부지런한 여자였다.

전활철씨와 양서욱씨가 떠나 간 후 어머니 산소에 벌초하러 갔다.

내일이 어머니 기일이라 서울에서 가족들이 몰려오기 때문이다.

제초기와 기계톱만 있다면 간단한 일이지만, 낫과 톱으로 일하자니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무덤 앞을 가린 잡목들 베느라 얼마나 힘들었는지, 숨이 막힐 듯 헉헉거렸다.






이틀 날은 서울에서 영희 누님과 일산에 사는 동생 창호, 그리고 부산에 사는 여동생 진옥과 매제 김종성씨가 찾아왔다. 

교회에 다니는 동생들은 다들 묵념만 올렸지만, ‘엄마 덕에 반가운 가족들을 만나게 되었다“며 다들 좋아했다.
산소에서 내려 와 수박으로 더위를 식히는 자리에서 동생 창호가 말을 꺼냈다.

망가질 대로 망가진 내 꼴이 안 서럽던지, ‘형님 몸보신 좀 시켜야 되겠다’며 횡성한우 먹으러 가잖다.

정선에서 횡성까지 만만찮은 거리인지라, 밥 한 끼 먹으러 먼 거리를 간다는 자체가 이해되지 않는 일이지만,

모처럼의 제안이라 서울 가는 길 마중가는 셈치고 따라 나섰다.






제사 준비로 서둘러 돌아 와야 했는데, 이웃 최종대씨로 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오늘 저녁, 정대식씨 집에서 집들이가 있으니 참석하라는 내용이었다.

동네사람들이 모인자리에서 물 문제를 해결해야 겠다는 생각에서 만지산꼭대기로 올라갔다.

길이 너무 가파러 중간에서 시동이 꺼지는 일도 생겼지만, 주변 경관 하나는 끝내 주었다.

새로 지은 집은 조립주택 비슷했지만, 하늘 높이 뻗은 소나무 몇 그루가 산세의 위용을 대변하고 있었다.






다들 모여 술잔을 나누고 있었다.

동네 물 분쟁으로 얼굴들고 살 수 없다며 이제 타협점을 찾아 마무리 짓자고 했지만, 손톱도 들어가지 않았다.

물 기금으로 적립해 두기 위해 돈을 받는다지만, 모터가 고장나면 수리비까지 읍사무소에서 대 주는데, 기금은 어디다 쓸려는지 모르겠다.

새로 입주한 분의 입장을 지지하는 사람은 아랫만지 최영규씨 뿐이었다.

이 친구는 울 엄마 무덤까지 공짜로 빌려 준 인심 좋은 친구다. 그러나 동네 어른으로 사리대로 말했다가 주민들에게 따돌림을 당했다.

누가 해코지했는지 그 쪽으로 가는 물 라인에 구멍을 뚫었다는 이야기도 했다. 왜 이렇게 무서운 동네로 변하는지 모르겠다.






최영규씨 내외와 해결 방안을 찾기 위해 우리 집으로 내려왔다.

마침 물 논쟁 당사자인 윤인숙씨 댁에 술판이 벌어져 그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 곳도 손님이 찾아와 흥청댔다.

마당 한 쪽에 술상을 차려 집주인과 찾아 간 세 사람이 앉았지만, 실마리는 보이지 않았다.

그동안 200만원을 내 놓기도 했으나, 추가 공사비로 50만원을 더 요구해 무산되기도 했고,

결국은 200만원이나 들여 모터를 설치해 냇물을 끌어 올려 쓰지만, 가물면 그 물도 끊길 수밖에 없었다.

윤인숙씨도 여러 차례 자기주장을 굽히려 했지만, 아랫만지 장영서씨가 거듭 만류하고 나섰다고 한다.

어쩌면 갑질의 전형을 뜯어고치려 한 장영서씨가 일을  더 꼬이게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자기의 얄팍한 지식을 내세워 지역민들을 너무 무시했기 때문이다.

주민들 자존심을 건드려 수습의 실마리를 잃은 것인데, 결국은 장영서씨 댁 물도 끊기고 말았다.


물 기금을 확보하기 위해 가구당 30만원씩을 추가로 걷기로 했는데, 장영서씨가 못 내겠다며 버텼는데,

차라리 물을 먹지않겠다고 말한 것이 화근이었다. 정말 물을 잘랐는데, 이 더위에 물을 끊는다는 것은 살인행위나 마찬가지다.

이제 다시 물을 먹으려면 200만원을 내야하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지경이다.

집을 팔고 이 지역을 떠나겠다지만, 집 값조차 만만찮으니 쉽게 살 사람이 나서지도 않는다.






그 자리에서 최영규씨에게 말했다.
산골마을이 유난히 많은 정선군에서 지하수를 직접 관리하도록 건의하자고 했다.

군에서 지하수를 파주었으면, 지역민에게 맡길 것이 아니라 직접 관리하라는 것이다.

집집마다 계량기를 설치해 일반 수도요금처럼 군에서 징수해야 된다는 말이다.

그동안 지하수에 대한 분쟁은 귤암리 만지골 뿐 아니라 숱하게 많았는데, 언제까지 뒷짐 지고 남의집 불구경 하듯 보고만 있을 것인가?

수도요금을 징수하는 대신 수질검사도 틈틈히 하여 식수인지 허드렛 물인지도 주민들에게 알려 주어야한다.

지금은 물사용료 조로 모터 돌린 전기요금을 균등하게 나누어 내지만, 일반가정과 농가의 물 사용량이 같을 수도 없다.

어쨌든 얼굴 들기 부끄러운 물 분쟁을 이제 끝낼 수 있도록 정선군에서 적극 나서주기 바란다.

지역민들로 부터 따돌릴 것을 걱정했는지, 최영규씨는 나더러 나서지 말라는 충고도 했다.

그렇다면 이일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겠는가? 언제까지 옆집과 물도 나누어 먹지 못하는 이 야박한 삶을 살아야 하는가?
지금도 마을 어귀에는 “인심 좋은 마을 귤암리”라는 오래된 글이 돌에 새겨져 있다.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인심 좋은 귤암리가 되도록, 다 같이 한 발씩 양보하자.






자정이 가까워서야, 제사지내러 우리집에 돌아올 수 있었다.
술이 취했으나 정신을 차릴 수밖에 없었는데, 변압기가 터져 형광등이 나가버렸다.
부득이 제사상을 마루에 차렸는데, 어두워 유리컵이 방바닥에 떨어져 박살난 것이다.

어두운 방에서 한 조각 한 조각 유리를 찾아가며 파편을 쓸어 모으는 일은 숱한 인내를 요구했다.

제사상 차리는 정성을 엉뚱한 곳에 쏟는다는 생각도 들었으나. 술 깨도록 귀신이 보낸 일거리라 생각하니 마음 편했다.
큰 절을 올리며, 제발 살기 좋은 동네로 되돌려달라고 빌었다.


사진, 글 / 조문호






























































모처럼 시간 내어 정선 만지산으로 떠났다.
농사일 마무리하고 천천히 돌아올 작정이었으니, 마치 휴가 떠나는 기분이었다.
귤암리로 접어더니, 잔잔한 동강의 물결이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혔으나,
텃밭의 붉은 복사꽃이 그만 들뜨게 만들었다.





장모님이 좋아하는 살구나무를 몇 년 전 심었는데, 살구가 아니고 복숭아였다.
묘목장사가 속였는지, 얼치기였는지는 모르겠으나, 복숭도 먹지 못하는 탱자 같은 게 열렸다.

그러나 꽃의 미색 하나는 천하의 양귀비가 따르지 못할 정도로 귀가 막혔다.
얼마나 강렬한 정염을 토하는지, 온 몸이 부르르 떨린다.
만약 그 꽃이 여인네였다면, 사내들 상사병 여럿 났을 것이다.
비록 열매는 맛보지 못하지만, 봄마다 나를 들뜨게 하는 꽃 중에 꽃이다.






올해는 너무 늦어 만나지 못할 줄 알았는데, 나를 기다린 듯 시들지 않았다.
또 하나 기다리다 시들어가는 꽃은 조팝꽃이었다.
심을 때는 어떤 꽃인지도 모르고 이름이 좋아 심었는데, 이 꽃도 한 미색하는 꽃이다.
해 마다 윗만지골 최종대씨가 씨를 받아 갔으나 번번히 실패하여 마음 태운 꽃이기도 하다. 


지난달 몽우리 졌던 목련은 할머니 살결 같은 꽃잎만 흩뿌려 놓았고,
벚꽃도 진달래도 다 쓸쓸하게 작별을 고하고 있었다.






그나저나 꽃 타령에 날 셀 일이 아니다.
옥수수 심을 밭떼기 파 뒤집을 일 생각하니 아득했다.
옛날엔 소가 쟁기 끌어 뒤집었고, 요즘엔 대개가 포크레인으로 뒤집는데,
늙은이가 곡갱이로 파 뒤집어야 했으니, 그 꼴이야 보나 마다다.
한 고랑도 못 파고 헉헉거리며 퍼져 않아야 했다.


농사지어 돈 벌기는 커녕, 옥수수 나누어 먹는 게 고작이지만,
땅을 놀려서는 안 된다는 농부의 마음으로 생고생을 하는 것이다.
이건 휴가가 아니라 중노동이었지만,
모처럼 쪽방에서 벗어나 자연과 어울리기에 휴가로 치부한 것이다.






날씨조차 가물어 애를 태워야 했다.
한 달 전에 뿌려놓은 씨앗은 이제 겨우 움을 튀우고, 부추와 잔파는 성장을 멈추고 있었다.
물 퍼 나르느라 똥줄 타게 오르내려야 했는데, 지하수라도 있으니 가능했다.

몇 해 전만해도 슬피 우는 소쩍새 소리에 넋 놓고 쉬기도 했으나,
언제부터인가 소쩍새도 종적을 감추어 버렸다.
사람들이 뿌리는 농약 냄새가 싫어 떠났는지, 내가 싫어 떠났는지는 모르지만,
가끔은 그 울음이 그리워진다.

땅 파고 물주며 파종하는 일만이 아니라,
고사리도 꺾어야 하고 산에 돌아다니며 두릅도 따야 했다.
쌉쓰름한 두릅 안주로 소주 한 잔하는 맛도 일품이지만,
두릅 좋아하는 정영신씨가 신신당부한터라 각별히 신경 쓰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혼자 쓸쓸히 지내시는 이명동선생께 문안인사도 드려야 하고,
동자동 사랑방 식구들도 맛보이려면 많이 따야 했다,


높은 가지 꼭대기에 핀 순이라 따기도 만만치 않지만,
자칫하면 가시에 사정없이 찔리기도 한다.
결국은 량이 모자라 최종대씨가 따 놓은 두릅까지 얻어 와야 했다.






그러나 만지산에 어둠이 몰려오면 한결 여유로워진다.
낮에는 땀을 흘렸으나, 밤이 되면 추워 군불을 지펴야 한다.
타닥타닥 타 들어가는 불길을 지켜보며, 이런 저런 생각에 빠져드는 맛도 괜찮다.
고상한 명상에 빠져드는 것보다, 천박한 공상이 더 재밋다.
아무도 없는 산중에 처녀귀신이 느닷없이 나타나 수작 부리는 따위의...

일을 마치고 방에 들어가 늦은 저녁을 먹었지만,
아무리 시장이 반찬이라지만, 목구멍에 도통 넘어가질 않았다.
올 때 사온 일회용 곰탕을 끓였는데, 김치가 없으니 니 맛도 내 맛도 아니었다.

 
동자동처럼 빵으로 해결할 생각도 했으나, 힘쓰려면 밥을 먹어야 한다는 생각에
밑반찬도 없이 카레나 짜장 등 인스턴트 식품을 골고루 사왔는데,
끼니 때마다 곤욕을 치룰 수밖에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어머니 산소 갈 때 가져가는,
한 잔 밖에 나오지 않는 샘플용 소주 두병을 꺼내와 곰탕을 안주로 먹어야 했다.






서울생활이 디지털 삶이라면, 만지산은 아날로그 삶이다.
인터넷도 연결 되지 않지만, 핸드폰까지 꺼 버렸으니 세상과는 완전히 단절된 시간이다.


돌아오며 두릅 얻으러 찿아 간 최종대씨 내외를 만난 것 외에는
몇 일 동안 사람 한사람 보지 못했다,
사람을 만날 수 없으니 사진 찍을 일도 없지만,
습관적으로 일기장에 보탤 동강풍경과 사물사진만 몇 장 찍었다.


마치 무인도에 귀양 온 듯, 인적 없는 산중이지만,
어쩌면 저승이나 천국이 이러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모든 근심 걱정을 접어버리고, 스스로를 돌아보는 소중한 시간을 만들었다.
지난 가을에 동자동으로 왔지만, 한 가지 버리지 못한 것이 바로 사진이었다.
진솔한 사진을 담고 싶은 성취욕이 마음 한 구석에  똬리 틀고 있어,
그 욕심까지 과감하게 버리기로 작정했다.


동자동 사람들과 어울려 마지막 황혼을 즐기다, 조용히 돌아가고 싶다.


사진, 글 / 조문호





















정선 만지산 골짜기에 사는 이선녀씨의 인생은 드라마 보다 더 극적이다.
이제 나이 육십에 불과하지만 한 세기 전에 살았던 것처럼 살아 온 이야기가 전설 같다. 옛날 영화에 ‘여자의 일생’이란 제목도 있었지만, 마치 이선녀씨를 일컫는 말 같다. 남자 만나기에 따라 여자의 운명이 바뀐다는 이야기겠으나, 요즘 세상은 ‘남자의 일생’으로 바꾸어야 하지 않을까도 생각된다.

그녀가 귤암리 윗만지산 골짜기까지 시집오게 된 사연만 풀어도 한 페이지가 넘는 분량이라 ‘나무꾼과 선녀’로만 요약해야겠다. 삼대를 만지산에서 살아 온 최종대씨와 결혼하여 슬하에 두 아들과 딸 하나를 두었는데, 이만평 가까이 되는 산비탈 농지를 두 내외가 다 일군다. 힘쓰는 일이야 남편이 하겠지만 왠만한 일은 모두 이선녀씨 몫이다. 날만 새면 밭에 나가 살았으니, 지금 성장한 자식 셋 모두가 밭에서 일하다 낳았다. 시아버지가 며느리 치맛자락에 아이를 받아 툇 줄도 자르지 못한 채, 방으로 뛰어가는 장면을 한 번 상상해보라. 산후조리란 말은 사치에 불과하고, 애기를 낳아서도 광주리에 담아 밭에서 키웠다.


한 번은 둘째아들 용순이가 심하게 아파 13킬로미터가 넘는 정선 읍내까지 약을 사러 나간 적이 있다고 했다. 그러나 갈 때와 달리 갑작스런 폭우가 쏟아져 강물이 범람해 돌아 올 수 없는 지경이 되고 말았다. 자식을 살려야겠다는 모정은 약을 비닐로 머리에 동여매고 노도처럼 밀리는 강물에 몸을 던질 수밖에 없었다. 6킬로미터의 험난한 물길을 헤칠 땐 주변사람들이 하나같이 살아날 수 없다고 발을 굴렀지만, 귤암리 근처에 도달하여 나무뿌리를 잡고 기어 나오는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는데, 정말 ‘지성이면 감천’이 아닐 수 없다.

40여년이 넘도록 외지 나들이 한 번 하지 못한 채, 죽도록 일만 하고 살았으나, 아직까지 그 지긋지긋한 일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얼마나 고생스러운 삶을 살았던지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늙어 버린 것이다. 갈퀴손과 주름진 얼굴이 그의 한 많은 삶을 고스란히 증명해 주었다. 그 힘든 삶을 버틸 수 있게 한 것은 바로 술의 힘이었다. 시아버지로부터 배운 술은 고달픔을 잊게 하는 유일한 벗이 되어주었다. 소주를 한 홉들이 잔으로 들이키는 그의 주량은 아무도 따르지 못한다. 그리고 몸 빠르게 일하는 것처럼 노는 신바람도 보통이 아니다. 10여 년 전 이선녀씨의 여동생이 찾아와 함께 술을 마신 적이 있는데, 얼마나 신명이 넘쳤던지, 천정에 구멍이 뻥뻥 뚫려나갔다. 무슨 놈의 춤이 손가락으로 천정을 찌르는 요상한 춤을 추었는데, “멀리 기적이 우네~”라며 천정을 뚫어댔다.


밤늦게 이웃 동네에서 술이 취해 돌아오다 정신을 잃은 적도 한 두 번이 아니란다. 말이 이웃동네이지 산을 넘어야 하는 먼 거리인데, 한 번은 어두운 산길을 걷다 구덩이에 빠져 그만 잠들어 버렸다고 한다. 마치 어머니 품속처럼 포근했다는데, 잠결에 손님 이제 문 닫아야 하니 일어나 가시야지요란 말이 들렸다고 한다. 눈을 떠보니 새벽녘이고 자기가 빠진 곳은 장례를 치루기 위해 파 놓은 무덤이었다고 했다.

 

놀 때는 화끈하게 놀고, 일 할 때는 몸 아끼지 않는 스타일이지만, 그의 사려 깊은 인정 또한 따를 자가 없다.

집에 손님이 찾아오면 무언가를 못 먹여 안달이고 못주어 안달이다. 이웃에 경조사가 생겨도 손 걷어 부치는 성미라 일이 일사천리다.

 

작년에는 이웃에 살던 노성수씨가 사고를 당해 목숨을 잃은 일도 있었다. 한 밤중에 두 내외가 술이 취해 집으로 들어갔는데, 방문이 열리지 않아 유리창을 깨어 손을 집어넣었다고 한다. 문고리를 연 것 까지는 좋았는데, 손을 빼다 그만 유리에 동맥이 끊기는 어이없는 사고를 당한 것이다. 다른 방으로 들어간 아내를 아무리 불렀지만, 술 취해 잠든 아내가 알아채지 못한 것이다. 새벽 무렵에서야 현장을 목격한 아내가 이선녀씨에게 다급하게 전화했을 때는 이미 때가 늦었다고 한다. 겉옷 입을 틈도 없이 득달같이 달려갔으나 이미 피를 모두 쏟은 상태라 손을 쓸 여지가 없었다. 갑자기 남편을 잃은 부인을 다독이며 모든 뒷바라지를 이선녀씨가 다 했다. 얼마나 많은 피를 분수처럼 쏟아 부었던지, 천정에서부터 온 방은 피로 굳어 있었다. 그 응고된 피가 비료 포대에 몇 자루나 나왔다고 한다. 피로 얼룩진 방을 다 닦아내는 청소에서부터 모든 일을 그가 도맡아 했다.

   

그래서 그의 이름처럼 만지산 선녀로 통한다.

한번은 농기구 빌리려 그녀 집에 들린 적이 있었는데, 그만 못 볼 장면을 보고 말았다. 이곳은 외 딴 산이라 사람들이 오가지 않으니, 아무데서나 소변을 보기도 하고 더우면 찬물을 뒤집어쓰기도 하는데, 무더운 날씨라 혼자 목욕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를 보고 깜짝 놀란 그녀가 부엌으로 뛰어 들어갔는데, 얼핏 본 모습은 한 마리 백조가 날개를 퍼덕이며 갑자기 비상하는 바로 그런 자태였다.

 

, 이선녀씨를 생각할 때마다 선녀와 나무꾼이란 설화가 먼저 떠오른다,

목욕하러 지상에 내려 온 이선녀를 나무꾼 최종대씨가 옷을 숨겨 사는 것은 아닐까?

 

사진, / 조문호









전시 준비로 정신없이 보내다, 아내에게 미루고 정선으로 갔다.
고추도 따야 하지만, 기가 빠져 자연의 충전이 필요했던 것이다.
전 날 밤 서울은 더워 잠을 설쳤는데, 귤암리 조양강엔 제법 서늘한 바람이 불었다.
막바지 피서를 즐기는 젊은이들 레프팅 행렬로 강은 울긋불긋 요란했다.

밭에 달린 고추는, 빨리 안 따면 병들 것이라며 협박해댔다.
밤이 되니 쌀쌀해, 아궁이에 불을 지폈는데, 풀벌레 소리만 요란했다.
없는 반찬에, 소주 곁들여 저녁도 맛있게 먹었다.


따뜻한 방바닥에 드러누워, 방문 너머의 하늘을 보니 달이 훤했다.
취기의 등짝은 노골노골하고 찬바람까지 솔솔부니, 심신이 편안했다.


그래도 님은 그립더라.
이백의 명시 ‘월하독작’이 생각난다.


사진,글 / 조문호















휴가 떠나는 기분이지만, 정선 가면 할 일이 너무 많다.
집 주변을 온통 뒤덮고 있을 잡초와의 전쟁에서부터 텃밭 일거리가 널려 있다.

오늘부터 열리는 ‘강릉단오제’에도 들려야 한다.
20년 전에 찍은 만신들을 만나, 그들을 다시 찍을 작정인데, 몇 분이나 살아 계신지 모르겠다.

정선 읍내에서 열릴 강기희 출판기념회에 들려 술 마실 일에서부터 만날 사람도 많은데,

‘교육방송’까지 처 들어 온다니 그 것도 걱정이다. 또 얼마나 귀찮게 할지...

이번 주말까지 마무리하고, 울 아부지 제삿날인 주말에나 돌아 올 작정인데,

정선에는 인터넷이 연결되지 않아 페북 질도 못하게 되었다.
갔다 올 동안, 운영위원회가 열려 인사동사진축제 기획안이라도 나왔으면 좋겠다.


‘인사동사람들’ 블로그도 당분간 불이 꺼진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