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어찌 이리 간이 컬 수 있을까?
정선 집 방문 앞에다 벌집을 만들고 있는데,
천장도 아닌 정면에 보란 듯이 작업 중이다.
이건 쪽발이 아베 신조가 하는 짓이나 마찬가지다.



산중에서 벌이나 뱀은 가급적 손대지 않으나
이건 도저히 지나칠 수 없는 도발이었다.
이전 같으면 벌집을 때내 멀리 버렸겠으나,
아베 신조 생각에 살충제로 씨를 말려버렸다.
빈 벌집은 도발의 표본처럼, 보란 듯이 붙여두었다.




찢어진 차양막은 점령군 깃발처럼 펄럭이고, 축대는 산사태 난 것 처럼 무너져 내렸다.
그러나 사는 데는 지장 없는 오래된 집이다, 쪽방에 비하면 대궐이지...
집을 비울 때는 찾아 올 손님을 위해 따뜻한 물도 준비해두고, 책장이 비좁아 오래된 책은 밖에다 내놓았다.
다들 그런 건 관심없고, 필요한 물건만 가져가는 야박한 세상이 되어버렸다.




이젠 전기세가 부담되어 온수기는 꺼버리고 오지만, 무게를 감당하지 못한 책장은 주저앉아버렸다.
오래된 책은 다들 버리라지만, 오래된 책일수록 버릴 수가 없다.
요즘 일이야 인터넷에 검색하면 다 나오지만, 오래된 소식은 옛날 잡지에서나 찾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한 달에 한 두 번 들리는데, 이번에는 이박삼일로 좀 여유 있게 잡았으나 금방 가버렸다.
옆집에서 술 한 잔 하라는 인정도 마다한 채, 혼자 동동거려야 했다.
날이 어두워져야 주변도 보이고, 이런 저런 생각도 할 수 있다.




서울이던 정선이던 한 곳에 눌러 살면 좋으련만, 그게 잘 안 된다.
쓰러지기 직전에 있는 정선 집이나 동자동 쪽방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데,
아직은 할 일이 남아 결정하지 못한다. 죽고나면 아무 필요없는 이 욕심을 어쩔까?
서울에 기다리는 사람도 없지도, 또 다시 가야 한다.




그 이틀 날은 새벽부터 서둘렀다.
늙어 버린 상추는 다시 파종하고, 지킴이로 봉숭화 한포기만 남겨 두었다.
무성한 잡초를 뽑아가며 농산물을 거두었는데, 한참 일하다 보니 안경이 없어졌다.
흐르는 땀에 밀려 잠시 벗어 두었는데, 어디다 벗었는지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았다.
시간만 지체되어 나중에 찾을 생각으로 산소부터 올라갔다.




지난번 떡갈나무 아래 수목장한 햇님이 외할머니와 어머니 무덤 앞에 무릎 꿇었다.
두 분이 생전에는 상면한 적 없으나, 햇님에게는 조모와 외조모라 각별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두 분 모두 손자를 지극히 좋아했으니, 모처럼 만나 많은 이야기를 나눴을 것 같다.
혼자 걱정하는 것 보다 두 분이 하니, 햇님이가 잘 풀릴 것 같은 생각도 들었다.




이젠 갈 일만 남았는데, 사라진 안경이 걱정이었다.
풀밭을 이 잡듯이 세 시간이나 뒤졌으나 나오지 않았다.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어 돌아왔으나, 흐릿한 초점으로 운전하려니 죽을 맛이었다.
별 탈 없이 오기는 왔으나, 좌우지간 명줄 하나는 길다.




길에 뿌린 기름 값에다 안경 맞출 돈까지 생각하니, 머리 아프다.
재수 없는 놈은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진다더니, 편한 날이 없다.


홧김에 쪽바리 아베에게 욕이나 퍼부었다.


사진, 글 / 조문호



























옛날에는 요즘처럼 몰려 다니며 피서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온난화에 의한 찜통 같은 날씨도 아니겠지만, 에어컨은 물론 선풍기도 없던 시절이 아니던가?

찬물에 발 담그는 탁족에 부채질하며, 죽부인이나 껴안고 딩구는 게 고작이었을 것이다.





음식물은 깊은 우물 속에 걸어두거나, 소쿠리에 담아 통풍이 잘되는 곳에 보관했다.

밤이 되어도 점 잖은 사람은 냇가에 나가 목욕할 처지도 못되어,

대문 걸어 잠그고 아내가 밀어주는 등밀이에 "어푸~어푸~"를 연발했다. 






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요즘은 정선 조양강에도 피서객들이 몰려들고 있다.

난, 사람들이 몰리는 강변을 피해 만지산 중턱에 살고 있지만,

피서객들의 차량이 좁은 산길까지 가로막아 바야흐로 피서철 임을 절감한다.






옛 귤암분교 터에 자리 잡은 캠핑장에는 야영객들로 넘쳐나고,

강가에는 가족들 끼리 낚시나 물놀이를 즐기며 더위를 식히고 있었다.
나는 이곳을 20여년 넘게 들락거렸으나, 강변에서 한 번도 더위를 피해 본 적이 없다.






젊은 시절부터 물가 찾아다니는 것 자체를 좋아하지도 않았지만,

이 곳 귤암리 강변은 그늘이 없어 무지 덥기 때문이다.

간혹 아는 분들이 밤 낚시를 부추기기도 하지만, 그마저 나서지 않는다.






현지에 사는 원주민들의 피서 법은 따로 있다.

이열치열이라 듯 부지런히 일하여 땀 흘린 후, 찬 지하수 물을 뒤집어쓰는 것이다.

축 늘어진 불알이 착 달라붙는 그 맛을 알랑가 모르겠다. 푸! 하하~
밤에는 고기 구워 소주 한 잔하는 맛도 죽인다.






그나저나 지난번에 허리를 다쳐 옥수수 밭을 매지 않았더니, 옥수수 밭이 풀 밭이 되어버렸다.

풀 밭이던 옥수수 밭이던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옥수수가 비쩍 말라 이빨 빠진 내 강냉이를 닮았더라.






그래도 다행스러운 것은 멧돼지가 먹어 치우지 않은 것이다.

강냉이가 부실해 봐주었는지 모르지만, 멧돼지들도 그렇게 얌체는 아니다.

오랜 세월 지켜 본 바로는 한 해 쑥대밭을 만들었으면 그 다음해는 그냥 넘어가 주었다.

하물며 짐승도 상대를 배려하는데, 어찌 전기 철망으로 막을 수 있겠는가? 



 


피서나 농사나 자연의 섭리대로 따를 수밖에...



사진, 글 / 조문호













지난 3일간의 연휴에는 정선으로 야채 심으러 갔다.
사진 찍어 올리며 사는 것도 그렇지만, 정선에서 농사짓는 것도 하지 않는 것만 못하다.
오가며 길에 뿌리는 돈도 만만찮지만, 모종 살 돈으로 사 먹는 것이 훨씬 싸게 먹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밥 팔아 똥 사먹는 일이라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땅을 놀리면 안 된다는 말은 구실에 불과하지만, 농사를 짓지 않으면 정선가기도 어렵고, 산소도 못 간다.
또 하나 못 말리는 것은 무공해 농산물을 좋아하는 정영신씨 때문이다.






오전 아홉시 무렵 평창에 도착하여 야채모종 부터 샀다.
고추 두 판, 상추 한 판, 옥수수 한 판, 도마도, 오이, 가지, 호박 등을 몇 포기씩 사다보니

모종 값이 육 만원을 넘어버렸다. 나머지는 씨앗으로 대체했다.





정선에 도착하여 짐을 내리니, 늘 반갑게 눈 맞추던 종이 사라지고 없었다.
일하러 밭에 나가면 밥 먹으러 오라 부를 때 치는 종인데,
치는 사람은 없지만, 늘 사람을 기다리는 종이었다.

요즘은 산골짜기 인심도 예전 같지 않다.
남의 땅에 있는 두릅이나 고사리도 먼저 본 사람이 임자다.
한 때는 두릅 철이 되면 서울로 가져와 나누어먹기도 했는데, 맛 본 지가 오래되었다.

산골 사는 원주민들이야 남의 것을 탐내지 않겠으나,
요즘은 외지에서 이사 온 사람들이 많아 누구의 소행인지 알 수가 없다.

공기 좋은 곳에 살러 왔으면 마음을 곱게 써야지...
사람들이 CCTV를 달라지만, 그러고는 쉽지 않았다.






밭에 난 잡초를 뽑고 땅을 고르며 비닐을 씌우는 등

오줌 누며 뭐 볼 틈도 없이 열심히 일하는 중에

갑자기 하늘이 깨질 것 같은 천둥소리를 내며 소나기가 쏟아졌다.
가문 날씨라 모종이 잘 살 것 같아, 비를 피하지 않고 부지런히 심었다.


한 시간 가량 쏟아지다 그쳤으나, 온 몸이 비에 흠뻑 젖어버렸다.
떨리는 한기는 견디겠으나 장화에 묻은 진흙이 무거워 움직이기가 힘들었다.
물가로 내려가다 미끄러져 돌계단에 허리를 찧었으나 어디 하소연 할 때도 없었다.
그 것으로 그 날의 일은 끝이었다.






준비해 둔 빵조각과 우유로 저녁 끼니를 때운 후
군불 땔 힘도 없어 전기장판 위에 드러누워 끙끙대다 잠든 것이다.
한 밤에 진땀이 흐르기도 했으나, 자고나니 견딜만했다.






다음 날은 땅바닥에 퍼져 않아, 시름시름 옥수수를 심었다.

작년에는 멧돼지가 들쑤셔 한 톨도 건지지 못했지만, 또 한 번 투기를 한 셈이다.
곳곳에 철쭉과 조팝꽃, 복사꽃이 너울대니, 새들도 좋아라 지저긴다.
무슨 놈의 새 소리도 요상하다. “찌찌 찌~ 찌찌 찌~‘ 엿 먹이는 소린가?
그래, 마음먹기 따라 지옥이 되기도 하고, 천국도 될 수 있구나.






그 이튿날은 다시 마음이 바빠졌다.
모종이 모자라 정선 나갔더니, 연휴에 몰린 자동차로 도로가 몸살을 앓았다.
좋아하는 짜장면이라도 한 그릇 사먹어려던 생각은 포기해야 했다.
차댈 곳도 없지만, 한가하게 기다릴 시간이 없었다.
내일 약속이 있어, 모든 일을 끝내야하기 때문이다.


어머니 산소부터 들리고는 일을 서둘고 있는데, 옆집의 한순식씨가 빨리 오란다.
연휴기간 내내 옆집은 손님들로 북적였는데, 여러차례 술자리에 불렀지만 사양했다.
그 날은 아랫집의 김익수씨가 왔다기에 얼굴이라도 볼 겸 잠시 내려간 것이다.






낮부터 백숙을 안주로 소주를 까고 있었으나, 난 밥을 먹었다.
소화제라며 딱 두 잔 받아마셨는데, 술이 달았다.


사라진 종 이야기를 꺼냈더니, 또 CCTV를 달란다.
안 달면 도둑을 키우기도 하지만, 엉뚱한 사람 의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자리에서 먼저 일어나 너덜거리는 창호지를 뜯어내고 도배를 하는데,
술 취해 몸을 못 가누는 김익수씨를 한순식씨가 부축해 가고 있었다.
공기가 좋아 아무리 마셔도 자고나면 멀쩡하다고 자랑하더니, 너무 많이 마신 듯 했다.
나이도 나이지만, 술에 장사 없다.






무너진 돌계단도 손봐야 하지만, 다음으로 미루고 떠날 채비를 했다.
연휴가 끝나는 날이라 차 밀릴 것이 걱정되어서다.





아니나 다를까 양평 가까이 도착하니 차가 밀리기 시작했다.
수동 변속이라 다리에 쥐 날 지경이나, 무사히 돌아 옴을 자축했다.

뭐 사는게 별거냐?



사진, 글 / 조문호






























지난 13일 새벽 일찍 정선 만지산으로 떠났다.
봄 눈이 내리는 변덕스런 날씨라 파종한 씨앗이 얼어 죽었을 것 같아 다시 씨를 뿌리러 갔다.





오전 아홉시 무렵 도착하니, 지난 동강할미꽃 축제 때는 봉우리만 맺었던 목련이 활짝 반겼다.





얼어 죽었을 거라는 걱정은 기우에 불과했다.

잡초에 뒤섞여 싹이 돋아나고 있었느데, 강인한 생명력이 놀라웠다.

기특하기 짝이 없으나, 왕복 일곱 시간의 고생이야 차지하고라도 길에 뿌린 기름 값 오만원이 아까웠다.

어차피 보름 후에 야채 심으러 다시 와야 하는데, 그 돈이면 일주일 지낼 생활비가 아니던가.






온 김에 일이라도 넉넉하게 해 두려, 호박 심을 구덩이를 여러 군데 파서는 변소 똥을 옮겨 묻었다.

그리고는 올 여름 지낼 솔밭 쉼터도 둘러보았다.





요즘 호흡 장애로 숨쉬기가 힘들어져, 여름철 쪽방 생활이 아무래도 힘들 것 같았다.

피난 가려는 정선집도 동자동에 비한다면 신선놀음이지만, 한 더위에는 스래트 지붕으로 내려 앉는 열기가 장난 아니다.





그래서 오래전 부터 집에서 백 미터 쯤 떨어진 솔밭 숲속에 쉼터를 만들어 둔 것이다.





산길을 오르다보니, 사람 손길이 미치지 않은 것은 아무것도 그냥 두지 않았다.



몇년 전 요염한 자태를 뽐내던 복사나무


돌계단은 허물어지고, 멋지게 가랑이를 쩍 벌린 복사나무는 둥지가 부러져 있었다. 





산으로 기어오르던 전선은 숨 줄을 끊지 못해 살려 달라 아우성치고 있었다.





잠시 쉬어가는 나무의자는 썩어 무너져 내렸다. 남아 있는 것은 방향을 표시한 돌덩이 뿐이었다.






10년 전에 심은 은행나무는 한 그루만 살아남아, 짝이 없어 은행도 달지 못하는 신세가 되어버렸다.





옻나무에는 시커먼 칡 넝쿨이 뱀처럼 똬리틀고 있었다.

볼 때마다 질리게 하는 옻나무라 이웃집에서 베어가겠다지만, 그냥 두라했다.

오래 살다 보면 옻도 오르지 않을 것이란 생각에서다.






숲속 놀이터도 그냥 둘리 없었다.
탁자는 날아가 낙엽에 파묻혔고, 평상 위의 소반은 주저앉아 자연으로 돌아가려 했다.

살아남은 것이라고는 독한 비닐뿐이었다.





다행스럽게 평상 밑에 넣어 둔 스치로폼 박스는 그대로 있었다.

전기 콘센터와 여러 집기들이 숨을 죽인채 숨어있었다.  

 




평상을 감싼 비닐장판이 그나마 평상을 거두었고, 비닐텐트도 간신히 골격을 유지하고 있었다.

지프를 열어보니, 청소만 하면 당분간은 사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쪽방 촌에가며 버려 둔 낙원은 전쟁터 처럼 쑥대밭이 되어 있었다.

불과 3년 밖에 되지 않았지만, 아무것도 그냥 두지 않았다.





내가 생각해 봐도 너무 무심했던 것 같다.

그동안 수시로 정선을 들락거렸지만, 일하느라 쉴 틈도 없이 돌아 왔으니, 챙길 겨를이 없었다.





애인 생기면 마누라 거들떠보지 않는 잡놈 근성은 어쩔 수 없었다.

무슨 일에 빠지면 한 곳에 미쳐버리는 더러운 고질병을 어쩌겠는가?

내가 지은 업으로 받아들여야지... 


 



사람도 나무처럼 썩어 문드러진다는 생각에 이르니, 무릎 꿇은 소반이 내 자화상 같았다.

그래, 썩어 문드러지기 전에 추억이나 남기자.

야채 심으러 올 때는, 날자를 넉넉하게 잡아 놀이터까지 손 볼 작정이다.






육년 전 정영신씨와 함께 소나무 숲에서 놀던 그때가 그립다.
올 여름에도 아름다운 추억 한 자락 만들어야지....



사진, 글 / 조문호


















제13회 동강할미꽃 축제가 지난 29일부터 31일까지 정선읍 귤암리 ‘동강생태체험학습장’에서 열렸다.

오전10시 30분부터 진행된 개막식은 정선아리랑시장 문화장터를 움직이는 MC 정춘경씨 사회로 시작되었다.





동강할미꽃축제 최완순 추진위원장의 인사와 정태규 정선군 부군수를 비롯한 인사들의 축사가 이어졌다.

지역인사들이 참여한 동강할미꽃심기도 진행되었는데, '그림바위' 김형구 관장 내외도 자리했다.

관광객이 없는 축제라 동네잔치나 마찬가지였다.





작년에는 축제장을 찾은 관광객 한 분이 정선군에 민원을 제기한 적도 있다.

대중교통이 불편해 정선터미널에서 축제장을 잇는 셔털버스를 운영해 달라는 민원과

축제장을 찾는 관광객이 먹을 수 있는 식수를 제공하라고 했으나, 바뀌지 않았다.

올해도 축제장 차림표에 작은 생수 한 병에 천원, 자판기 커피 한 잔에 천원이란 가격표가 붙어 있었다.

정말 한심했다. 작은 욕심이 큰 것을 잃는 걸 왜 모를까?





개막식이 끝날 무렵 최승준 정선군수와 귤암리 최연규씨가 나타났다.

손님을 맞은 최연규씨가 차려낸 음식을 보고 불평을 쏟아냈다.

손님 대접을 어떻게 저렇게 할 수 있냐며, 잔치 집에 돼지라도 한 마리 잡아야 할 것 아니냐는 것이다.

최연규씨만이 아니라 귤암리 어른 대부분이 불만이 많지만, 젊은 사람들에게 욕먹기 싫어 입 다물고 있을 뿐이다.

‘인심좋은 귤암리’란 말은 옛 이야기가 되고 말았다.





나 역시, 문제를 떠 벌일 필요가 없다고 생각되었다.

어차피 외지인이 없는 지역잔치로 자리잡아가고 있는데, 동네잔치라도 잘 하도록 돕는 수밖에 없다.

그 대신 동강할미꽃 축제에 외지인을 끌어들이는 홍보는 일체 않기로 했다.

그렇지만 귤암리 주변의 수려한 경관과 함께 동강할미꽃을 만날 수 있는 삼월 하순경의 귤암리 여행은 적극 추천한다.





정선 ‘동강할미꽃’은 동강 유역의 석회질 바위틈에서 자라는 한국 특산종이다.

다른 할미꽃과는 달리 절벽의 척박한 환경에서 자라며 하늘을 향해 꽃을 피우는 것이 특징이다.

하얀 솜털이 아름다운 순수한 자태는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동강 할미꽃의 신비와 자연의 경이로움만으로도 행복한 봄 여행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동강할미꽃이 필 시기만 되면 전국에서 아마추어 사진인들이 몰려든다.

처음에는 꽃에 물을 뿌리거나, 꽃을 감싸는 마른 잎을 제거하는 등, 꽃이 견디지 못하도록 위해를 가했다.

이젠 그런 일이 사라졌는데도 일부 방문자가 올린 글을 보니, 아직까지 그런일이 벌어지는 것 처럼 적어놓았다.




 


그래서 동강할미꽃 훼손에 대한 지난 이야기를 다시 언급하려 한다. 

사건의 발단은 2015년 동강할미꽃 축제에 초대 전시된 야생화 사진가 김모씨 사진이 불씨가 되었다.

물을 뿌려 이슬처럼 보이게 하거나 마른 잎을 뜯어내는 것은 물론, 심지어 인공조명까지 비춘 사진이 있었다.

아마추어 사진인들을 지도하고, 들꽃 사진을 심사하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라 그냥 두고 볼 수 없었다.

그런 사진을 보고, 그 사진이 좋은 사진으로 생각하니 아마추어 사진인들이 답습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2015년 동강할미꽃 축제에 초대 전시된 야생화사진 전문가 김모씨의 사진, 꽃잎에 물방울이 맺혀있다. 



결국 야생화사진 전문가라는 사람조차 생태사진의 가치를 제대로 모른다는 말이다.

동강할미꽃은 햇볕이 들어 따뜻해져야 꽃 봉우리를 피우니 이슬이 맺힐 수가 없고, 사진처럼 마른 풀이 없을 수가 없다.



2015년 동강할미꽃 축제에 초대 전시된 야생화사진 전문가 김모씨의 사진, 옆에서 인공조명을 비춘 흔적이 역역하다.



생태사진이란 꽃의 습성이나 자연적인 주변 환경이 중요하다는 것을 왜 모를까?

특히 동강할미꽃은 꽃송이만 크로즈업 하는 것보다 높은 벼랑에 피는 주변 환경이 나타나야 가치가 있다.

 


 88년 4월 최초로 동강할미꽃을 찍은 이석필사진, 주변환경이 잘 나타났다



그래서 작심하고 전시된 사진을 문제 삼은 것이다.

‘서울문화투데이’ 칼럼과 ‘인사동 사람들’ 블로그에 “수난 당하는 동강할미꽃‘이란 제목으로 내막을 샅샅이 까발린 것이다.

당사자인 김모씨에게는 치명적인 상처가 될 수밖에 없지만, 공익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그 당시 야생화를 찍는 엄청난 수의 아마추어 사진인들이 블로그에 접속하는 등 파문을 일으켰는데,

다행스럽게도 그 이후부터 동강할미꽃의 수난이 수그러들었다.





결정적인 것은 생태사진에는 인위적으로 변형시킨 사진이 좋지 않은 사진이란 것을 아마추어 사진인 스스로 깨달았다는 점이다.

문제는 야생화를 찍어 달력을 만들어 팔거나 사진원고를 팔아서 사는 야생화 사진가 김모씨의 사진계 위상은 물론

상업행위에 따른 수익에 치명타를 입은 것이다.

그 일로 명예혜손으로 나를 고소한 지가 일 년이나 되었으나,  법원에서 아직까지 감감소식이다.



13회 동강할미꽃 축제장에 전시되어 있었으나, 누가 그린 그림인지 작가를 밝히지 않았다.



동강할미꽃이 슬픈 꽃인지, 수난이 너무 많다.


“할미야 할미야 벼랑에 핀 할미야

죽은 울 엄마 그립게 하는 동강가에 할미야“



사진, 글 / 조문호




















지난주에는 정선 만지산으로 가을걷이 하러 떠났다.
해마다 이맘 때만 되면 월동 준비 겸 가을걷이에 나서지만, 이번엔 별로 거둘 것이 없었다.
그러나 추워지면 잘 가지 못하니, 밖에 내놓은 정수기도 들여 놓고, 텃밭의 고추대도 뽑아야 했다.
무엇보다 산소에 들려 어머니께 추운 겨울 잘 견디시라는 인사드리는 것도 가야할 명분 중 하나다.






새벽 녘 정선으로 떠나면, 가끔 눈요기 거리가 펼쳐진다.
매번 양평을 거치는 국도로 가는데, 일교차로 피어나는 양수리 물안개가 너무 멋지다.
온천처럼 물 위로 김이 오르기도 하고, 물위로 구름이 몰려다니기도 한다.
그런 장면이야 사진에서 많이 볼 수 있지만, 현장에서 느끼는 감회에 비길 수가 없다.
풍경사진은 좋아하지 않으면서 나도 모르게 길가에 차를 세우고 카메라를 들이댄다.





몸에 베인 습관이라 죽기 전에는 고쳐기 어려울 것 같다.
자연이나 사물은 찍던 말든 탓하는 이가 없으나, 사람이라면 사정이 좀 달라진다.
반가운 사람 만나면 인사도 하지 않고 카메라부터 들이대니, 기분 더러울 것이다.
오래된 지인들은 의례 저 인간은 저러려니 하겠지만, 친하지 않은 분들은 의아해 한다.
모르는 분이라면 쓴 소리가 나오거나, 잘못하면 경찰서까지 가야 한다.






꼭 그래서만 아니지만, 난 모르는 사람보다 아는 사람 찍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사람이나 사물이나 대상 자체를 모르면, 아무 의미가 없다는 생각에서다.
그러나 거리스냅 사진은 어쩔 수 없이 행인이 들어갈 수밖에 없는데, 그 땐 처신을 잘해야 한다.
찍을 때는 항상 웃고, 눈이 마주치면 손을 들거나, 멋지다는 엄지를 치켜세워 주었다.





그래도 문제 삼으면 찍은 이미지 보여주며, 상대의 결정에 따라 지우거나 양해 받으면 그만이다.

그러나 별에 별 사람이 다 있는지라, 트집 잡는 사람은 어쩔 수가 없다.
간이 뒤집혀도 웃어야 한다. 자칫 같이 화를 냈다간 싸움되기 십상이다.
마음의 문을 닫아, 불신만 가득 찬 현대인의 슬픈 자화상이다.






만지산에 도착하면 산소부터 올라간다.
지난 겨울엔 산 길이 얼어붙어 차를 쳐 박은 일도 있었지만, 늦가을의 산길은 아름답기 그지없다.


무덤에 술 한 잔 올리고는 귀신과 이야기 나누는 재미도 쏠쏠하다.
누가 그 걸 보면 미친 놈이라 여겨도 상관없다. 
아무에게도 털어 놓을 수 없는 시시콜콜한 이야기까지 다 하면, 속이 후련해진다.


그 날은 가까운 사람에게서 받은 배신감을 메주알 고주알 풀어 놓았더니, 보나마나한 답이 돌아온다.

“친구 좋아하더니, 꼴 좋다. 내가 뭐라 카더노? 
돌아서면 남보다 못하니, 대강 어울려 다니라 안 카더나.”





집으로 내려와 가을걷이를 시작했으나, 거둘 것이 별로 없었다.
따고 남은 꽈리고추 한 광주리, 호박 열 개, 부추 한 단이 전부였다.
기특한 것은 올 봄에 도망친 토끼가 먹어 치운 대마초 한포기가 살아 남아 씨를 잔뜩 안고 있었다.
씨만 없었더라면 한 철은 잘 지내련만, 영양가 없는 씨 때문에 조져버렸다.





지천에 늘린 산초열매나 땡감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매번 힘들여 따지만 버리기 일수다.
제 작년엔 산초를 잔뜩 따서 기름 짜려고 방앗간에 가져갔더니, 냄새가 독해 다른 기름을 못 짠다며 짜주지 않았다. 
담아 둔 산초 장아찌도 일년은 더 먹을 양이 남아 있다.






내버려 두고 일을 줄이니 하루 만에 가을걷이가 끝나버렸다.
정선에서 하루도 자지 않고, 오후 여섯 시경 서울로 돌아왔다.
그것도 명색이 가을걷이라고 정영신씨는 술상을 차려놓고 기다렸다.
복분자술이 세우와 전어 몇 마리를 거느리고 있었다.






정영신씨는 고추 다듬느라 정신없었으나, 난 대마초를 술병에 옮겨 담았다.
정영신씨가 서인형씨로부터 선물 받아 둔 연태 고랑주를 거기다 쏟아 넣었다.
아끼던 좋은 술이건만, 더 멋진 술을 맛 보고 싶은 인간의 끝없는 욕망이다.


혹시 알 수 있나?
그 술이 약술되어 봄이 돌아올지...

사진, 글 / 조문호

































 

 

 


지난 10일 정선 만지산에 반가운 손님이 오셨다.
삼척 도계에 사시는 이재일씨와 윤정일씨로, 이재일씨는 16년 전부터 잘 아는 분이다.

 

 

 



 

그동안 소식이 끊겼다가 페이스북에서 만나 소식을 주고받아 왔던 터다.
십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했으나, 나만 쭈그러진 영감쟁이로 변했지, 재일씨는 하나도 변하지 않았더라.

 

 

 



 

진즉부터 도계에 한 번 놀러오라 했으나, 차일피일 미루다 못 갔더니,
옛 기억을 더듬어 만지산까지 직접 찾아온 것이다.

 

 

 



 

이재일씨를 보니 재일씨의 사촌동생 박남일씨가 생각났다.
그는 ‘일필선사’로 불린 옛 친구인데, 의료사고로 세상을 등진 불운의 사나이였다.
그는 우리나라 최고의 대마재배 전문가였고, 대마 애연가였다.

 

 

 

 

발길 닿지 않는 한지에 매년 서너 포기 키웠는데, 얼마나 지극정성으로 공을 들였으면,
아무도 그 향과 맛을 따르지 못했다.

 

 

 

 

수확 때만 되면 주변 친구들에게 나누어 주기도 했는데, 그 맛은 과히 작품의 경지였다.
심지어 위스키에 담가 둔 대마주나 차로 우려내기까지 했는데, 정말 일품이었다.

 

 

 

 

그 재배법을 전수받지 못한 아쉬움이 너무 많다.

 

 

 

 

 

 

 

 

 

이제 전설이 되어버린 일필선사를 잊지 못하는 것은, 대마보다 그의 인간적인 면모에 더 매료되었을 것이다. 

 

 

 


 각설하고, 만지산을 찾은 손님들과 어울려 낯부터 고기를 구워 술판을 벌였다.
이가 신통찮은 것을 알고 부드러운 등심을 사오셨는데, 고기보다 술이 더 잘 넘어갔다.

 

 

 

마침, 옆집의 윤인숙, 한순식씨와 더불어 이웃마을 최재순씨가 산에서 돌아온 것이다.
버섯 따러 갔다 왔다는데, 올해는 날씨가 특이해 버섯 대풍이라고 했다.

 

 

 

생전 먹어보지 못한 계란버섯과 밤버섯을 안주로 내 왔는데, 고기 맛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다들 새로운 친구가 되어 훈훈한 정을 나누었다.

 

 

 

운전 때문에 술 마시지 못하는 이재일씨 때문에 술자리가 길지는 못했으나, 소주 여덟 병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술에 취하고 인정에 취한 정선 만지산의 하루였다.



사진, 글 / 조문호

 

 

 

 

 

 

 

 

 

 

 

 








지난 17일 새벽 일찍 정선으로 떠났다.

피서를 겸해 좀 쉬었다 왔으면 좋으련만, 겨우 2박3일의 일정이었다.

특별한 일은 없지만, 느긋하게 있을 마음의 여유가 없는 것이다.





만지산에 당도하니, 옥수수 밭이 쑥대밭이 되어 있었다.
멧돼지가 쳐들어 와 난장판을 벌인 것이다.
알맹이라고는 한 알도 남기지 않고 깨끗하게 먹어 치워버렸다.






옥수수 챙겨주기로 한 약속들도 결국 헛소리가 되고만 것이다.

우리 밭만 전기 철조망을 설치하지 않았으니 한 해 걸러 당하는 일이지만,
전기 철조망까지 쳐가며 농사짓고 싶은 생각은 없다.




 


주렁주렁 열린 고추에는 옆집에서 시키지도 않은 농약을 쳤다고 한다.
한 집만 농약을 치지 않으면 모든 고추가 탄저병이 걸린다는 이유인데,
농약 없는 유기농 풋고추 먹으려는 노력 또한 공염불이 되고 말았다.
이리저리 망친 농사에 답답해 하는 중에 가족들이 찾아왔다.






동생 조창호, 큰누님 조영희, 김순화 형수, 조카 영란이가 찾아 와 산소에 올라갔다.
어머니 무덤에 절 올리며 나눈 대화는 햇님이 장가가는 이야기 뿐이었다.
다들 신부 얼굴을 보지 못해 궁금해 하니, 영란이가 핸드폰을 뒤져 신부 사진을 찾아냈다.
참 좋은 세상이다. 산 위에서 블로그 사진을 꺼내 볼 수 있다니...






점심식사를 한 후 가족들이 돌아가고 나니, 혼자 바빠졌다.
냉장고가 정전되어 모든 음식물이 썩어 있었는데,

손님 오면 대접하려고 아껴 둔 돼지고기까지 몽땅 버려야 했다.
어찌된 일인지, 밖에 노출된 배전함 스위치가 내려져 있었다.






뒤늦게 냉장고 청소하랴, 집 청소하랴, 똥 오줌 못 가릴 정도로 부산을 떨어댔다.

더위에 지친 사정을 알았던지, 옆집에서 술 한 잔하자는 기별이 왔다.
옆집의 윤인숙씨가 이웃 최재순, 한순식씨와 함께 염소 탕을 안주로 술판을 벌여 놓았단다.






술 자리에서 기가 막히는 이야기를 들었다.
키우던 강아지 두 마리가 누군가가 던져놓은 독약 묻은 고기를 먹고 즉사했다는 것이다.




 


그 말을 듣고 보니 우리 집 정전도 누군가의 해코지가 아닌지 의심되었다.
지하수 분쟁에 대한 화풀이라는 추측이 나왔으나, 아무런 물증은 없다.

이젠 산골짜기에도 씨씨티브이를 설치해야 할 형편이다.
어쩌다 순박한 산골 인심이 이 지경이 되었는지 모르겠다.






마침, 아랫동네 최연규씨가 나타나 그의 구수한 옛이야기에 잠시나마 즐거울 수 있었다.

뗏꾼들이 즐겨 찾았던 '전산옥'의 살 냄새 풍기는 이야기에서 부터
‘정선아리랑시장’에서 떡메치기 훈수 두던 우스개로 좌중을 웃겼다.


“너무 많이 치면 아파요. 잘 안되면 물 좀 살살 발라 쳐요.”






술이 취해 방으로 돌아오니, 평소에는 정겹게만 보이던 벽의 사진이나
온돌 열기에 그을린 포스터까지 귀신 나올 집처럼 음산해 정나미 떨어졌다.
사실, 귀신이 무서운 것이 아니라 사람이 더 무서운데 말이다.






날이 밝아오니, 어제 일은 까맣게 잊어버렸다.
마당 아래 핀 도라지꽃은 장관을 이루었고, 배나무엔 돌배가 주렁주렁 달렸다.





동강 댐이 무산되어 다들 배나무를 뽑아낼 때, 한 그루 옮겨 심어 놓았는데,
20여 년 동안 가꾸지 않고 버려두었더니, 자연스럽게 돌배가 된 것이다.
그것도 돌배 술을 만드니 호흡기 나쁜 나에게는 도랑치고 게 잡는 격으로,
최고의 약인 셈이다.






그 이튿날은 하루 종일 잡초와의 전쟁을 벌였는데,
잡초 더미 속에서 탐스러운 호박이 굴러 나오기도 했다.
이런 저런 생활에 정들어 어머니까지 모셨으나,

사람들이 자꾸 마음을 뜨게 만드네. 



 


어쩌면 피하지 못할 운명인지도 모르겠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빼지도 박지도 못할 처지에 한 숨만 나온다.



사진, 글 / 조문호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