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병으로 사람 만나지 말라는 엄포에 만지산에 격리되었다.

말 안 듣기로 소문난 놈이 무서워서 격리된 게 아니라 그냥 쉬고 싶었다.

정선 집은 인터넷이 되지 않아 이참에 마약 같은 페북도 들락거리지 않을 생각이다.

단지 ‘인사동 사람들’ 블로그는 정선 읍내 피시방에 들려 가끔 소식이나 전할 작정이다.

 

그래도 동자동에서 하는 일이 있어 매주 화요일은 서울나들이를 해야 하기에,

그 때 사모님께 문안드리기로 했다. 사모님께서 부르면 언제나 달려 갈 기사의 각오는 되어있다.

확실한 유배도 격리도 아닌, 길거리에 돈만 뿌리게 된 셈이다.

머지않아 정선 집을 정리할 생각으로, 긴 세월의 아쉬움이 한 몫 한 것이다.

 

이번에는 지난 금요일에 들어 와 이틀 동안 밀린 일하느라 똥오줌을 못 가렸다.

지루한 장마가 계속된 한 달 넘게 못 왔더니 집구석이 엉망진창이었다.

농작물인지 잡초인지 도저히 분간하기 힘들었다.

 

그리고 긴 장마로 방안이 눅눅해 군불을 좀 지폈더니 완전 찜질방이 되어버렸다.

방문을 열어놓은 채 발가벗고 잤더니 새벽녘에는 추워서 오들오들 떨어야 했다.

콧물이 쉼 없이 나오는 걸 보니 개도 걸리지 않는다는 여름 감기에 단단히 걸린 것 같다.

 

장보러 정선 읍내 갔다 오는 길에 ‘귤암리캠핑장’에 잠시 들렸다.

그 앞을 수시로 들락거렸지만, 20년 만에 처음 들린다면 믿겠는가?

 

옛 ‘귤암분교’ 자리인 그곳에서 ‘동강변 주민을 위한 굿마당’을 연 후 처음인데 많이 바뀌었더라.

성수기인데도 캠핑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코로나 때문인지 장마 때문인지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하루 이용료가 4만-5만원이란 안내판이 붙어 있었다.

 

날씨마저 흐렸다 개였다 내 마음처럼 변덕을 부렸다.

내일이 화요일이라 사모님께 상납할 옥수수도 따고 호박도 몇 덩이 차에 실었다.

더 중요한 것은 따끈따끈한 오빠의 마음을 실었다는 것이다.

 

사진, 글 / 조문호

 

사진, '아세아경제' 스크랩

오래전부터 대마에 대한 약리작용이나 실용성은 널리 알려졌으나.

새로운 연구결과들이 속속 밝혀지고 있다.

몇 일전 YTN ‘사이언스 투데이’에서 ‘대마 성분’으로 뇌 시계 되돌린다“는

내용이 방영되어 치매성 질환을 앓는 분들의 귀가 번쩍 뜨이게 만들었다.

 

사진, YTN에서 스크랩

독일 본 대학과 이스라엘 예루살렘 히브리대학 공동 연구팀이

대마 성분으로 뇌 인지기능에 대한 변화를 연구한 결과 놀랍게도

대마 성분을 투여한 늙은 쥐의 인지기능이 젊은 쥐처럼 개선되어

늙은 쥐의 생체 시계가 되돌아간 것 같다"고 말했다.

 

사진, 외신에서 스크랩

사실 오래전부터 대마가 뇌전증과 치매에 대한 효능이 인정되었으니, 뜬금없는 결과는 아니라고 본다.

그리고 외신에 의하면 대마가 코로나19의 잠재적 치료법 목록에 올랐다고 할 정도로

방대하고 신비한 대마의 효능에 세계 석학들이 주목하고있다.

 

하기야! 대마의 CBD성분이 알츠하이머성 치매, 파킨슨질환, 뇌전증, 암,

우울증, 다발성경화증, 심뇌혈관질환, 당뇨 합병증 등 17개 질환 치료에

효과가 있다는 것은 이미 검증되었으니 최고의 약초임은 틀림없다.

 

사진, 외신에서 스크랩

약으로서의 효능 뿐 아니라 종이와 삼베, 에너지 등 산업용으로 활용가치도 높다.

어제는 대마로 만든 배터리가 리튬이온보다 성능이 8배나 더 좋다는 외신 기사를 본 적이 있다.

뒤늦게나마 정부가 안동시를 산업용 헴프(HEMP) 규제자유특구로 지정하기 직 전이고,

춘천에서도 대마특구를 추진한다고 한다.

 

대마에 대해 궁금한 분에게는 최근에 나온 책 "올 어바웃 카나비스"를 소개한다.

한국에 나온 대마초 관련 책 중에서 가장 심도가 깊으면서 방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이미 중국에서 대부분의 특허를 독점한 상황이라 때늦은 감은 있지만,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다.

 

엊거제 정선 가려니, 자동차가 없어 난감했다.

차를 폐차해 발이 묶인 셈인데, 하루만 차를 빌린다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어렵사리 인사동 ‘유목민’의 전활철씨께 부탁했더니, 새벽 일찍 차를 끌고 왔더라.

고맙기 그지없으나, 너무 염치없는 부탁을 한 것 같았다.

 

그런데, 차 주인이 떠난지 5분도 지나지 않아 갑작스런 사고가 터져버렸다.

조용한 새벽이라 백 밀러를 보지 않고 출발하는 실수를 저질렀는데,

뒤에서 달려 온 택배차량이 운전석 앞 펜더를 치고 가 왼쪽 눈알이 튕겨 나와 버렸다.

보험처리할 형편이 되지 않아 전전긍긍하고 있는데,

갈 길 바쁜 택배기사가 쌍방 과실이니 각자 수리하자며 먼저 떠나버렸다.

 

일단 수습은 되었으나, 정선에 가야할지 망설여졌다.

튀어나온 헤드라이트야 밀어 넣어면 운행에 지장은 없으나

운전대를 잡자말자 터진 사고라 불길한 예감이 들어서다.

 

그러나 제사는 미룰 수 없는 일이었다.

차가 소나타라 운전하기는 편했으나, 마음의 짐은 무거웠다.

가는 길에 평창 자동차정비소에 들려 상담을 받았는데,

도장하는 시간도 많이 걸리지만, 비용이 적잖으니 그냥 타라는 거다.

거지인줄 알아챘는지 모르지만, 타는 속을 어찌 알겠는가?

 

활철씨께 수리비를 건네줄 작정을 했으나, 받아 줄지 모르겠다.

운전하는 내내 걱정에 쌓여 목적지에 도착했다.

마당 밑을 뒤덮은 도라지꽃과 조롱조롱 달린 돌배에 그나마 위안되었다.

 

서울로 돌아와 자동차를 돌려주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수리비를 받지 않겠다고 한다.

보험처리하면 된다고 안심시켰으나, 마음의 큰 빚을 지게되었다.

 

사진, 글 / 조문호

 

 

지난 일요일은 정선 가는 날이다.

그것도 사모님 모시고 가는 길이라, 더 더욱 신났다.

평창장에서 밥 사 먹고, 오전10시 무렵에야 만지산에 도착했다.

마당을 뒤덮은 시멘트에 속이 뒤집혔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을 어쩌겠는가?

 

내일 약속이 있어 일부터 서둘러야 했다.

만지산만 비가 피해 갔는지, 농작물이 나 처럼 비실비실 했다.

대마와 고추, 오이, 도마도, 호박, 가지 등 목마른 야채에 물부터 주어야 했다.

온 종일 더운 땡볕에서 풀 메느라, 오줌 누며 거시기 볼 틈조차 없었다.

 

이미 시기를 놓쳐 고개 숙인, 고추대도 박아 묶어줘야 했다.

사모님은 야채 거두느라 바쁜데, 무슨 불만이 많은지 입이 툭 튀어 나와 있다.

쉬지 않고 죽자 살자 일만 하는 늙은이 일 버릇에 심기가 뒤틀린 것 같았다.

해 넘어가는 오후 8시가 되어서야 일손을 멈출 수가 있었다.

 

어둡기 전에 마무리하느라 정신없었는데, 왜 이리 바쁘게 살아야 할까?

몸은 파김치가 되었지만, 다시 운전대를 잡을 수밖에 없었다.

옆 자리에 탄 사모님께서 무겁게 입을 열었다.

“내 년부터 농사짓지 마! 차라리 사먹는 게 낫겠다”

 

이젠 체력도 체력인지라, 농사를 포기해야 할 것 같았다.

호흡기에 문제가 생겨 담배도 끊어야 한다.

  20년 넘게 지은 농사를 포기하니, 시원섭섭했다.

농사짓기 힘들어서보다, 정선 집 마당을 덮은 시멘트에 만정이 떨어져서다.

만지산 땅을 팔아 더 조용한 곳에 여생을 보낼 조그만 집이라도 지어야겠다.

 

그 먼 길을 한 달에 몇 차례씩 오가는 일도 예삿일이 아니었다.

이 달 말쯤, 어머니 무덤부터 이장해야 할 것 같았다.

이런 저런 시름 달래며 운전하는데, 갑자기 앞바퀴가 기울며 덜거덕거리기 시작했다.

갓 길에 세워 확인해 보니, 운전석 앞바퀴가 터진 것이다.

 

이것 정말 난감한 일이었다.

안흥에서 새말 가기 전의 시골길이라, 어두워 위치도 파악할 수 없는데,

오후10시가 넘어 타이어 구할 곳이 없었다.

보조 타이어만 있다면 걱정할 것 없으나, 그마져 터진 지 오래되었다.

 

석 달 전, 함평 가는 서해안 고속도로에서 타이어가 터져 혼 줄 났는데,

보조 타이어를 준비한다면서 계속 미루어 온 것이다.

돈도 돈이지만, 폐차해야 할 차에 더 이상 처 바르기 싫어서다.

그 이후 부터 밤늦게 정선에서 돌아 올 때마다 조마조마 했다.

 

오래 전 영업용 택시 운전대 앞에 달랑거리던 ‘오늘도 무사히’를 되씹었다.

타이어가 빵구나더라도, 가능하면 서울과 가까운 곳에서 터지라고 빌었다.

목적지에 돌아 와서야 한 숨을 쓸어내린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 오랜 걱정이 현실로 다가오고 말았다.

 

더구나 혼자 오는 것도 아니고, 사모님을 모시고 오는데 말이다.

사모님 들으면 기분 나쁘겠지만, 행여 덤직한 엉덩이 무게에 터진 것은 아닐까?

보험회사에 전화 걸어 견인차를 불렀으나, 사고지점을 정확히 댈 수 없었다.

다행스럽게 핸드폰 위치를 추적해 냅다 달려 왔다.

 

차를 살펴 본 기사는 두 가지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고 했다.

가까운 여관에서 자고 내일 수리 하던지, 아니면 서울까지 견인해야 한단다.

보험사에서 제공하는 견인거리 50Km를 뺀 나머지 구간의 견인비가 십 육만원이란다.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해 망설이는데, 사모님께서 결정내렸다.

 

“서울 녹번동까지 견인 해 줘요. 밤늦게라도 집에 가서 할 일이 있어요”

견인기사는 어떤지 모르지만, 돈이 아까워 미치겠더라.

그 돈이면 새 타이어를 갈아 끼울 텐데...

 

퍼져 있는 고물차를 쳐다보니 만감이 교차했다. 임자 잘 못 만나 개고생한 차다.

그동안 정선 가는 일뿐 아니라 장터마다 찾아다니느라 다른 차의 몇 갑절 일을 시키지 않았던가?

얼음판에 미끄러져 머리가 깨져도 병원 한 번 데려가지 못했고,

그 먼 길 끌고 다니며 튼튼한 신발하나 사 주지 못해 미안할 뿐이었다.

 

결국 견인차에 끌려 갈 수 밖에 없었는데, 아이쿠야! 정말 사서 고생 하는 꼴이었다.

덜덜거리는 견인차 승차감에 비한다면, 우리 차는 벤츠에 다름 아니었다.

두 시간이 넘게 흔들리며, 쉼 없는 기사의 넋두리까지 들어줘야했다.

사모님께서 이 못난 기사가 얼마나 원망스러웠겠나?

 

“그래, 헛바람 든 인생보다 바람 빠진 인생이 낫다”

인생이 뭔지는 잘 모르지만, 속된 말로 '나이롱 뽕'이다.

 

사진, 글 / 조문호

 

자연을 지키느냐? 편리하게 사느냐? 하는 것은 원칙과 현실에서 늘 갈등하는 문제다.

천만다행으로 편리하게 살 여건이 되지 않아 자연을 지키는 원칙을 따르며 살아왔다.

그러나 뜻밖에 원칙을 어긴 이변이 생겨버렸다.

 

정선 만지산 집 마당에 레미콘 한 차를 부려놓은 사진이 정영신씨 핸드폰으로 보내 온 것이다,

옆집의 윤인숙씨가 보낸 것이라며 날더러 보라고 했다.

지난 번에 도로 포장하는 사람 있으면 움푹 파진 입구 좀 부탁 했다는데, 마당부터 덮어버린 것이다.

그 마당은 자기 내 주차장으로 사용해 레미콘 비용의 반은 자기가 부담하겠다는 거다.

 

누가 들어도 고맙다고해야 할 일이라 아무 소리 못하고 20만원을 보내 주기로 했단다.

레미콘 값만 아니라 콩크리트를 바닥에 골고루 펴는 일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백 번 고맙다고 말해야 하지만, 한편으론 마당을 차지한 점령군 같았다.

이미 엎질러진 시멘트라 쓸어 담을 수도 없었다.

 

그 집은 25년 전 동강 환경캠프로 빌려 사용하던 집인데,

이년 여의 활동이 끝 난 후, 개인 작업을 위해 혼자 눌러 앉은 집이다.

밭으로 지정된 땅에 무허가로 지은 농가주택인데, 불편하긴 해도 사는 대는 지장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 환경캠프에 함께 한 회원 한 사람이 그 집을 사겠다고 나선 것이다.

그렇다면 집을 비워줘야 하는데, 그 많은 짐을 어디로 끌고 간단 말인가?

부랴부랴 아내에게 부탁해 복에 없는 그 집을 사게 된 것이다.

당시 시세보다 비쌌지만, 울며 겨자 먹기로 살 수 밖에 없었다.

 

한 곳에 오래 정착하지 못하는 유랑민 체질인지라

아름다운 자연도 버릴 수 있겠다 싶어 돌아가신 어머님까지 그 곳에 묻어 두었다.

 

김대중정부에서 댐을 취소하는 결단을 내림에 따라 동강 환경운동도 끝나게 되었는데,

문제는 농민들의 보상이 이루어지며 모든 게 달라졌다.

주택건설비를 비롯해 축사나 버섯재배장 같은 농가지원이 실시되며,

오래된 농가주택은 모조리 사라지고 국적불명의 양옥이 들어서게 된 것이다.

아마 그 때 주택이라고는 내가 사는 집이 유일하지 않을까 싶다.

 

그뿐 아니라 집집마다 티브이 수상기가 들어와, 사는 방식이나 습관마저 달라지기 시작했다.

그보다 가슴 아픈 것은 순수하기 그지없었던 동내 인심이 서서히 변해갔다는 것이다.

 

산골에 살다보면 마당에 제초작업도 해야 되고 소나기라도 퍼 붓게 되면 땅도 질퍽거리지만,

별 신경 쓰지 않았다. 마당에서 조차 흙을 밟을 수 없다면 굳이 산골에서 살 의미가 없는 것이다.

옆집 차가 자주 들락거려 잡초도 자랄 틈이 없지만, 자주 머물지 못하니 불편하지 않았다.

 

 

여름이면 마당가에 코스모스가 너울거리고, 딸기가 조롱조롱 달리는 풍경도 이제 볼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10여 년 전 여름 폭우 속에 만난 아름다운 장면도 이제 사진으로만 남았다.

 

집에 없는 샤워한다며 알몸을 드러낸 아내의 몸에 빗물이 줄줄 흘러내렸는데,

황토물이 발 위에 튀어 오르는 소란스러움과

무성하게 핀 맨드라미의 붉은 꽃술은 정염을 토하듯 매혹적이었다.

아쉽게도 보도검열에 걸려 아직 빛을 보지 못하고 있지만,

이젠 그 장면도 서랍 속에 갇힌 풍경이 되고 말았다.

 

지난 19일 정선 집에 들려보니, 마당의 2/3는 콘크리트로 하얗게 덥혀있었다.

이젠 그대로 둘 수도 없는 처지라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 날 두 번째 레미콘 차가 도착했을 때는, 함께 도와 바닥을 고를 수밖에 없었으니,

이제 탓하기는커녕 고맙다고 인사해야 할 처지가 되고 말았다.

 

아무리 좋게 생각하려 했으나, 영 마음이 편치 않다.

만지산과의 인연을 끝내야 하는 것 인가?

정이 떨어지니, 모든 사물까지 싫어진다.

 

사진, 글 / 조문호

 


89년 귤암리 옛집에서 촬영한 최종대, 이선녀부부


정선 최종대씨는 만난 지가 25년이 넘은 오랜 인연으로 이웃을 넘어 동생처럼 가까웠던 사이었다.

그러나 2년 전 지하수 사용에 대한 이웃과의 분쟁에 휘말려 등 돌리고 말았다. 그가 주도한 갑질을 용납할 수 없어서다.




그런데, 작년 말 갑자기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접한 것이다.

뒤늦은 부고로 장례조차 지켜보지 못해 어쩔줄 몰랐는데, 이야기를 듣고보니 가슴이 미어졌다.




최종대씨는 하루에 담배를 서너 갑씩 피우는 골초로, 운명하기 전부터 심한 장애를 겪었다고 한다.

변을 당하기 하루 전에는 장모 생신을 맞아 가족들과 진주를 갔는데, 차 안에서 눈물을 그리도 많이 흘렸다고 한다.

아마 죽음을 예견한 것 같았다.




돌아와서도 얼굴 붉혀가며 악착스럽게 살아 온 지난날이 후회스러운지, 한 없이 울었다고 한다.

술 좋아 하는 아내에게 술 좀 줄이라고도 부탁하고, 내가 보고 싶다는 등 평소에 하지 않던 말을 많이 하더란다.

그러더니 갑자기 뇌출혈을 일으켜 손도 한 번 제대로 써보지 못한 채 임종한 것이다. 


 

정말 인생무상이란 말을 절감했다.

떠나기 전에 따뜻하게 다독여 주지 못한 게 한이 되어버렸다.

앞으로 집안 일은 누가 꾸려 갈 것이며, 그 많은 농사는 어쩔지 걱정스런 일이 하나 둘 아니었다.

더구나 큰 아들 창수는 정신병을 앓아 병원을 들락거리지 않았던가?




그런데, 믿기지 않는 일이 생긴 것이다. 아들 창수가 언제 정신병을 앓았냐는 듯 멀쩡해진 것이다.

아버지가 하던 일을 하나하나 챙겨가며 어머니를 돕는다고 했다.

해마다 엄청나게 짓는 고추 농사를 그만두고, 손이 덜 가는 유기농에 전념하기로 했단다.



농장이름도 엄마이름을 딴 ‘선녀농원’으로 지어 새로운 삶을 예견하게 했다. 남편 잃고 자식 살린 셈이다.

이선녀씨는 남편을 떠나보낸 슬픔도 잠시 뿐, 목소리에 힘이 실려 있었다.




지난 4월 25일은 정선에 땅 뒤집으러 갔다가 카메라와 지갑이 든 가방을 두고 와 

십 여일 동안 사진 한 장 제대로 찍지 못하고 가슴 조려왔기에 빨리 정선 갈 날만 기다렸다.



5월5일 야채 파종하러 갈 때는 정영신씨가 따라 붙어 마치 야외 나들이 하는 기분이었다.

두릅 철이라 두릅 따러 간 것이다. 신세진 분들과 나누어 먹을 심산인 것 같았다.




그런데, 요즘 운전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기름 값이 경유 1리터에 970원까지 내려 간 것이다.

예전에 전국 장터 쫓아다닐 때는 1500원까지 올랐는데, 그때 비하면 공짜나 마찬가지다.

살다보니, 코로나 덕도 보나 싶다.




평창장에서 야채 모종을 산 후, 만지산에 도착하니 오전 10시쯤 되었다.

열흘 전에 핀 탐스러운 도화꽃과 배꽃은 시들시들하고, 새롭게 핀 철쭉이 맞이했다.

“그런데, 이 일을 어쩔까?” 갑작스런 더위에 두릅이 다 피어버린 것이다.

어차피 양이 적어 창수네 두릅을 사기로 했지만, 아까워 미칠 지경이었다.




예전에는 정선 가면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즐기며 여유롭게 지내다 왔는데,

요즘은 서울에 예쁜 여자 숨겨둔 것도 아닌데, 왜 이리 바삐 설치는지 모르겠다.

죽도록 일만하고 돌아와, 이젠 정선 가는 게 두려워진다. 아마 동자동에 살며 생긴 조급증인 것 같았다.




평창장에서 구해 간 야채 모종부터 옮겨 심었는데, 그 날은 보슬비가 내려 모종에 물줄 일은 덜었다.

하던 일을 끝내고 창수네 집으로 올라갔는데, 창수엄마가 반가워 어쩔 줄 모른다.

나야 운전 때문에 술 마실 처지가 못 되지만, 술 마시며 하는 이야기가 눈물겹다.




처음 시집왔을 때, 낮 시간의 중노동이 끝나도 밤에 디딜방아 찧는 일도 일상의 하나라고 했다.

시아버지가 막걸리와 콧등치기를 좋아해 옥수수를 비롯한 여러가지 곡식을 찧었는데,

체중이 가벼워 디딜방아가 올라가지 않았다고 한다.

시어머니가 큰 돌을 등짐에 짊어지고 밟으라고 시켰다는데, 찧고 나면 온 몸이 파김치가 된다는 것이다.




구절구절 지나간 이야기보다 앞으로 살아 갈 이야기가 더 기대되었다.

여지 것 일에 치이고 남편 눈치 보느라 못 푼 신명을 다 풀 것 같아서다.

헤어지기 아쉬워하는 이선녀씨로 부터 두릅을 전해 받았는데, 두릅 값을 기어이 받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것도 이전에 못 전한 조의금을 겸한 두릅 값인데, 정말 입장 난처했다.




“우리 사이는 돈이 오 가는 사이가 아니지요”라는 창수엄마 말에 할 말을 잃었다.
“그래요. 다음에 맛있는 거 많이 사오리다. 부디 좋은 일만 있기를 바랍니다”

사진, 글 / 조문호




맑은 날 사진은 4월25일 찍은 사진이고, 흐린 날 사진은 5월5일 찍은 사진.

아래는 삼년 전 ‘인사동 사람들’ 블로그에 올린 창수엄마 이선녀씨 이야기랍니다. 
  http://blog.daum.net/mun6144/4251















 

지난 일요일 새벽녘, 정선 만지산으로 떠났다.
별로 거둘 것은 없으나 겨울채비를 위해서다.
정선 가는 구불구불 옛길은 언제 가도 정겹다.
평창읍내에 들려 오늘을 견뎌 낼 김밥 두 줄 샀다.
한 줄은 아침이고, 남은 한 줄은 저녁거리다.

 

 


집보다 먼저 들리는 곳은 어머니가 계신 산소다.
방랑벽으로 어머니를 저당 잡혀둔 죄책감에서다.
단풍으로 물든 산소 길은 아름다웠다.
샘플로 만든 미니 소주 한 병 따라놓고 하소연한다.
사는 게 지겹다고... 

 

한 달 만에 들린 집은 변한 게 아무것도 없었다.
얼어 터질 것만 안으로 들이고, 가을걷이에 들어갔다.
거둘 거라고는 호박 몇 덩이와 익다 만 고추뿐이었다.

 

주렁주렁 달린 아기 감은 다 어쩌지?
따고 보관하기도 힘든 것이 먹을 것도 없다.
한 입에 쏘옥 들어가는 감인데, 씨가 반이다.
천덕구러기 신세로 박스 안에서 초가 될 경우가 더 많다.
따기 귀찮아 포기하며 새들에 선심 쓰는 행세를 한다.

 

“잘 묵고 잘 살라”고...

사진, 글 / 조문호

 

 

 

 

 

 

 



 

2019,10,6 정선아라리공원 / 귤암리 사는 장승쟁이 서덕웅씨

 


"우잉~ 이기 우얀 일이고?"
이 핑계 저 핑계 안 가던 정영신씨가 날더러 정선 가자네.
외롭게 혼자 정선을 들락 거린지가 벌써 일 년이 넘었는데...

 

 

 

2019,10,6 봉평 섶다리

 

한 동안 몸이 아파 정선 집에 통 가보질 못했다.

태풍이 지나갔다는데 별 일 없는지, 작물은 어떻게 되었는지,

몸은 서울 있어도 마음은 콩밭에 가 있었다.

 

 

2019,10,6 / 정선 아라리촌

 

몸이 나아 바로 못 간 것은 일거리가 생긴데다 서초동 촛불까지 발목 잡았다.

월요일쯤이나 갈 작정을 했는데, 정영신씨가 일요일에 가잖다.

촛불집회가 끝난 그 다음 날 새벽에 부리나케 정선으로 떠났다.

 

 

2019,10,6 / 정선 아라리촌

 

정영신씨는 가는 김에 여기저기 갈 속셈이 있는 것 같았다.

늘 다니던 국도로 갔는데, 쉼터로 활용하는 ‘풍수원’에 잠시 세웠더니,

‘풍수원성당’에 한 번 가보자는 것이다.

 

 

2019,10,6 / 정선 아라리촌

 

20년 넘게 ‘풍수원성당’ 앞길을 수없이 지나치고 쉬어갔지만,

어찌 그 유서 깊은 ‘풍수원성당’에 한 번 들리지 않았단 말인가?

무엇이 그리 바빠...

 

 

2019,10,6 / 풍수원성당

 

‘풍수원성당’은 강원도에서 처음으로 생긴 성당이다.

천주교 박해를 피해 산간벽지로 피신한 사람들이 다니던 성당이 아닌가?

처음으로 올라가 보니, 길가에서 불과 200미터에 불과했다.

 

 

2019,10,6 / 정선 아라리촌

 

첫 인상이 한 마디로 고풍스럽고 아담했다.

마치 서울 약현성당을 떠 올렸다.

정면에 종탑부가 있고 출입구는 아치형으로 되어 있었다.

 

 

2019,10,6 / 풍수원성당

 

난, 한 때 ‘프란체스코’란 세례명까지 받은 적이 있다.

그 뒤 ‘진공’이란 법명으로 바꾼 변절자지만, 지금은 무신론자다.

신이 있다면 악의 세상을 그냥 둘리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 배신의 세월을 되돌아보았다.

 

 

2019.10.6  정선아라리촌 / 정영신


정영신씨는 집에 가기 전에 들려야 할 곳을 말해주었다.

봉평 이효석 문학관, 정선 아우라지 나룻터, 정선아리랑시장, 정선아리랑 축제장,

 

우메~ 봉평 까지 가면 집에 가서 일은 언제하지...

 

 

2019.10.6  정선아라리공원 / 정선 사람이 정선아리랑 한 자락 못하면 간첩이지.

 

그나저나 정선에서 ‘정선아리랑제’가 열리는 것도 모르고 있었네.

아무리 바빠도 정선아리랑제가 열릴 때는 꼭 갔는데, 요즘 내 정신이 아니다.

 

 

2019.10.6  정선아우라지

 

봉평을 거쳐 아우라지에 도착했는데, 느닷없이 아우라지는 왜 찿는지 모르겠다.

 

요즘 지역 장터와 유적을 잇는 책을 쓰다 보니, 아마 자료가 필요한 것 같았다.

한 많은 뱃길은 아우라지로부터 시작되니, 그 곳에서 흔적이라도 찾을 모양이다.

 

 

2019.10.6  정선아리랑시장

 

정선 읍내 들어오니 벌써 점심때가 되었다.

정선아리랑시장에서 곤드레 밥으로 요기 하고 시장부터 한 바퀴 돌았다.

한 때 ‘정선아리랑시장’에서 사진찍는 일을 한 적도 있었다.

 

 

2019.10.6  정선아리랑시장 ㅣ 시장살림을 도맡은 임미순씨를 만났다.

 

축제 중이라 장날은 아니지만, 장은 열렸다.

공연장에서 ‘정선아리랑시장’ 또순이 임미순씨를 만났다.

고맙게도 커피를 두 잔이나 사주었는데, 난 자판기스타일이라 어쩌지...

 

 

2019.10.6  정선아리랑시장 / 시장에서 소설 쓰는 강기희씨 모친을 만났다.

 

시장에서 장사하는 강기희씨 어머니를 만나 안부도 묻고,

장삿꾼 이숙란씨 만나 사는 이야기도 들었다.

 

 

2019.10.6  정선아리랑시장 이숙란씨

 

‘정선아리랑제’ 리프렛을 뒤져보니, 일요일이라 큰 행사는 없었다.

 

 

2019.10.6  정선아라리촌

 

먼저 ‘정선아라리촌’부터 들렸다.

정영신씨는 ‘아리랑박물관’에서 열리는 ‘정선아리랑 포럼’에 가고,

난 잘 정리된 ‘아라리촌’을 돌아다니며 산책을 즐겼다.

 

 

2019.10.6  정선아라리촌

 

‘아라리공원’으로 자리를 옮겼더니, 그 곳에는 사람이 엄청 많았다.

길에서 최성준 정선군수를 만나 안부를 나누기도 했다.

아라리공원 입구에서 열리는 ‘평화기원 아라리 장승제'에 들렸다.

 

 

2019.10.6  정선아라리공원에서 최성준군수를 만났다. (정영신사진)

 

귤암리 서덕웅씨가 마련한 행사라 동네 사람들이 많이 왔는줄 알았는데,

아는 분은 서덕웅씨 내 외 뿐이었다.

고사를 지냈으나 차 때문에 고사 술 한 잔 얻어 마시지 못하고 돌아왔다.

차도 차지만, 요즘은 해가 빨리 넘어 가 일할 시간이 없어서다.

 

 

2019.10.6  정선아라리공원 서낭제에서..

 

우리 집은 태풍 피해가 없었다.

이십 여 년을 살며 한 번도 태풍이나 수해를 당한 적이 없다.

사방의 산이 막아주어 요새나 마찬가지다.

 

 

2019.10.6  정선아라리촌

 

고추, 열무, 가지, 호박 등 별 게 없으나 농작물 피해도 없었다.

정영신씨는 고추에 더 관심이 많더라,

 

 

2019.10,6 / 만지산 고추밭

 

해 넘어가기 전해 거두어야 할 것이 많건만, 옆집에서 오라고 성화다.

“다정도 병이련가?”

 

 

2019.10.6  만지산 옆집에서 잔치 벌어졌네

 

이 집은 얼마나 손님이 많이 오는지 갈 때마다 잔치다.

그 날은 옆집 윤인숙씨 딸과 사위가 왔단다.

딸이 서천에 들려 사왔다는 대하와 이름도 모르는 조개를 한순식씨가 숯불에 꿉고 있었다.

술도 벌 술에다 돌배 술 등 귀한 술은 다 나왔더라.

 

 

2019.10.6  만지산 옆집 윤인숙씨

 

그런데, 내일 급한 일이 생겨 밤에 가야하는데, 차 때문에 술을 마실 수 없네.

정영신씨 좋아하는 세우나 염체 없이 까 날랐다.

원님 덕에 나팔 부는 거지 뭐.

 

 

2019.10.6  정선 만지산


좌우지간, 만지산은 정영신씨 없으면 앙코 없는 찐빵이라니까.

 

 

사진, 글 / 조문호

 

 

 

 

 

 

 

 

 

 

 

 

 

 

 

 

 

 

 

 

 

 

 

 

 

 

 

 

 

 

 

 

 

 

 

 

 

 

 

 

 

 

 

 

 

 

 

 

 

 

 

 

 

 

 

 

 

 

 

 

 

 

 

 

 

 

 

 

 

 

 

 

 

 

 

 

 

 

 

 

 

 

지난 구월 첫날 정선에 울 엄마 무덤에 벌초하러 갔다.
새벽길의 양평 물안개는 뭐가 뭔지 오리무중이고,

정선 만지산 살팔봉의 지조는 변함없었다.

 

 

 

만지산골에 도착하니, 눈이 뻔쩍 뜨이는 궁디가 수줍은 듯 날 반겼다.

 

 

 

두 달 넘게 뻔질나게 들락거렸지만, 엉뚱한데 신경 써다보니 온 밭이 잡초세상이었다.

호순이 유혹도 마다하고 잡초와의 전쟁에 들어갔는데, 허리가 뻐근했다.

 

 

 

 

 

 

울 엄마 무덤에 벌초하러 갔다.

벌초 할 때 마다 손가락에 피 칠갑을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기일과 추석에 맞추어 일 년에 두 번씩 벌초하지만, 이번 기일에 조카가 한 말이 떠 올랐다.

초죽음의 몰골로 벌초하는 삼촌을 본 안타까움에 비롯된 제안이었지만,

할머니 시신을 화장하여 모두가 편하게 서울 인근 납골당에 모시자는 것이다.

 

 

 

사실, 아버지가 묻힌 우리 집 산소는 경남 영산의 영축산 대암골에 있건만,

울 엄마를 만지산에 묻어야 했던 사연도 기가 막힌다.

생전에 나에게 두 번이나 간곡하게 부탁한 것이다.

문호야~ 내 죽으마 절대 너거 아부지 옆에는 뭍지마라

자유부인 처럼 진보적인 삶을 원한 울 엄마가 보수적인 아버지 밑에서,

억눌린 삶을 저승까지 끌고 가지 않으려는 부탁이 아닌가 생각 되었다.

 

 

 

그래서 아버지 무덤에 비수를 꽂는 불효 아닌 불효를 저지르고 말았던 것이다.

그 업으로 장례 치루는 날 장대같은 비가 무섭도록 쏟아지더니,

가족이 탄 승용차가 개울에 전복하는 등 만지산에 난장판이 벌어졌다.

장화 신은 발이 흙에 달라붙어 꼼짝하지 않는 상황에서 시신을 묻는다고 한 번 생각해보라.

그건 분명 지옥도의 한 풍경이었다.

 

 

 

벌초를 하는 중에 이런 저런 하소연을 했다.

엄마~ 짜마 이번 벌초가 마지막 벌초가 될지 모르겠네 예!

지난여름 조카 향이가 할머니를 가까운 서울에 모시자는데, 엄마는 우째 생각합니꺼?”물었더니,

아이구! 야야~ 여서 많이 놀았다 아이가~ 우리가 어디 간들 못 놀겠나?

고마 새끼들 하는 대로 놔 두 봐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던 중에 느닷없이 산소에 인기척이 들려왔다.

세워 둔 차를 보고는 누가  조작가~ 뭐해요?”라는 것이다.

그 사람은 다름 아닌 이 산소를 빌려준 지주 최연규씨였다.

제초기도 아닌 낫으로 사부작 사부작 벌초하는 것을 보고 하는 말이 더 웃긴다.

아이구! 효자 났군, 효자 났어

제초기가 없어 낫으로 벌초한다는 것은 모르고, 어머니 무덤을 정성껏 깎는다고 생각한 것이다.

 

 

 

고맙게도, 무덤 들어가는 길목에 제초제를 뿌려주어 편하게 갈 수 있도록 길을 튀워 두었다.

연규씨! 제초제 뿌려 준것 고마워~”라고 인사했더니, “에이~ ..”하며 얼굴 붉힌다.

 

 

 

제초기로 하면 30분도 걸리지 않을 일을 세 시간이 넘도록 하고보니, 어느 듯 해도 뉘엿뉘엿 넘어갔다.

중놈 머리처럼 말갛게 깎아놓고 내려와 대충 챙겨 먹고 정신없이 쓰러져 잤다.

 

 

 

한참을 자다보니, 온몸이 부들부들 떨려 잠을 깨야했다.

미처 방에 군불을 지피지 않고 잔 것이다.

엊저녁은 동자동서 더워서 빌빌거렸는데, 하루 만에 추워 벌벌 떨다니...

정선 방은 동자동 쪽방에 비한다면 여섯배나 큰 방이 아니던가.

극과 극의 세상을 원망하랴! 아니면 흐르는 세월을 원망하랴!

 

 

 

그러나 몸은 늙어도 마음속의 봄은 지워지지 않는다.

그 호박같이 편한 고향의 봄을...

 

사진, / 조문호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