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일요일은 정선 가는 날이다.

그것도 사모님 모시고 가는 길이라, 더 더욱 신났다.

평창장에서 밥 사 먹고, 오전10시 무렵에야 만지산에 도착했다.

마당을 뒤덮은 시멘트에 속이 뒤집혔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을 어쩌겠는가?

 

내일 약속이 있어 일부터 서둘러야 했다.

만지산만 비가 피해 갔는지, 농작물이 나 처럼 비실비실 했다.

대마와 고추, 오이, 도마도, 호박, 가지 등 목마른 야채에 물부터 주어야 했다.

온 종일 더운 땡볕에서 풀 메느라, 오줌 누며 거시기 볼 틈조차 없었다.

 

이미 시기를 놓쳐 고개 숙인, 고추대도 박아 묶어줘야 했다.

사모님은 야채 거두느라 바쁜데, 무슨 불만이 많은지 입이 툭 튀어 나와 있다.

쉬지 않고 죽자 살자 일만 하는 늙은이 일 버릇에 심기가 뒤틀린 것 같았다.

해 넘어가는 오후 8시가 되어서야 일손을 멈출 수가 있었다.

 

어둡기 전에 마무리하느라 정신없었는데, 왜 이리 바쁘게 살아야 할까?

몸은 파김치가 되었지만, 다시 운전대를 잡을 수밖에 없었다.

옆 자리에 탄 사모님께서 무겁게 입을 열었다.

“내 년부터 농사짓지 마! 차라리 사먹는 게 낫겠다”

 

이젠 체력도 체력인지라, 농사를 포기해야 할 것 같았다.

호흡기에 문제가 생겨 담배도 끊어야 한다.

  20년 넘게 지은 농사를 포기하니, 시원섭섭했다.

농사짓기 힘들어서보다, 정선 집 마당을 덮은 시멘트에 만정이 떨어져서다.

만지산 땅을 팔아 더 조용한 곳에 여생을 보낼 조그만 집이라도 지어야겠다.

 

그 먼 길을 한 달에 몇 차례씩 오가는 일도 예삿일이 아니었다.

이 달 말쯤, 어머니 무덤부터 이장해야 할 것 같았다.

이런 저런 시름 달래며 운전하는데, 갑자기 앞바퀴가 기울며 덜거덕거리기 시작했다.

갓 길에 세워 확인해 보니, 운전석 앞바퀴가 터진 것이다.

 

이것 정말 난감한 일이었다.

안흥에서 새말 가기 전의 시골길이라, 어두워 위치도 파악할 수 없는데,

오후10시가 넘어 타이어 구할 곳이 없었다.

보조 타이어만 있다면 걱정할 것 없으나, 그마져 터진 지 오래되었다.

 

석 달 전, 함평 가는 서해안 고속도로에서 타이어가 터져 혼 줄 났는데,

보조 타이어를 준비한다면서 계속 미루어 온 것이다.

돈도 돈이지만, 폐차해야 할 차에 더 이상 처 바르기 싫어서다.

그 이후 부터 밤늦게 정선에서 돌아 올 때마다 조마조마 했다.

 

오래 전 영업용 택시 운전대 앞에 달랑거리던 ‘오늘도 무사히’를 되씹었다.

타이어가 빵구나더라도, 가능하면 서울과 가까운 곳에서 터지라고 빌었다.

목적지에 돌아 와서야 한 숨을 쓸어내린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 오랜 걱정이 현실로 다가오고 말았다.

 

더구나 혼자 오는 것도 아니고, 사모님을 모시고 오는데 말이다.

사모님 들으면 기분 나쁘겠지만, 행여 덤직한 엉덩이 무게에 터진 것은 아닐까?

보험회사에 전화 걸어 견인차를 불렀으나, 사고지점을 정확히 댈 수 없었다.

다행스럽게 핸드폰 위치를 추적해 냅다 달려 왔다.

 

차를 살펴 본 기사는 두 가지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고 했다.

가까운 여관에서 자고 내일 수리 하던지, 아니면 서울까지 견인해야 한단다.

보험사에서 제공하는 견인거리 50Km를 뺀 나머지 구간의 견인비가 십 육만원이란다.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해 망설이는데, 사모님께서 결정내렸다.

 

“서울 녹번동까지 견인 해 줘요. 밤늦게라도 집에 가서 할 일이 있어요”

견인기사는 어떤지 모르지만, 돈이 아까워 미치겠더라.

그 돈이면 새 타이어를 갈아 끼울 텐데...

 

퍼져 있는 고물차를 쳐다보니 만감이 교차했다. 임자 잘 못 만나 개고생한 차다.

그동안 정선 가는 일뿐 아니라 장터마다 찾아다니느라 다른 차의 몇 갑절 일을 시키지 않았던가?

얼음판에 미끄러져 머리가 깨져도 병원 한 번 데려가지 못했고,

그 먼 길 끌고 다니며 튼튼한 신발하나 사 주지 못해 미안할 뿐이었다.

 

결국 견인차에 끌려 갈 수 밖에 없었는데, 아이쿠야! 정말 사서 고생 하는 꼴이었다.

덜덜거리는 견인차 승차감에 비한다면, 우리 차는 벤츠에 다름 아니었다.

두 시간이 넘게 흔들리며, 쉼 없는 기사의 넋두리까지 들어줘야했다.

사모님께서 이 못난 기사가 얼마나 원망스러웠겠나?

 

“그래, 헛바람 든 인생보다 바람 빠진 인생이 낫다”

인생이 뭔지는 잘 모르지만, 속된 말로 '나이롱 뽕'이다.

 

사진, 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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