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22일, 한 달에 한번 가는 정선 집에 들렸다.
영월 사진축제 가느라 평소보다 일주일정도 앞 당겼다.
개막식에서 저녁 먹고 오니 자정이 가까웠다.
작물은 돌아볼 틈 없이 빈 집 청소만 하고 자리에 누웠다.
시간이 없어 군불 때지 않고 잤더니,
온 몸이 떨려 두시 무렵 잠이 깨 버렸다.

 

 

 



 

먼동 트기를 기다리기란 죽을 맛이다.
티브이도 컴퓨터도 핸드폰마저 없으니, 책 볼일 밖에 없다.
돋보기가 눈을 따르지 못해 30분만 보면 눈이 아프다.
영월에서 가져온 ‘동강사진축제’도록이나 뒤적이며 시간 죽인다.
드디어 동창이 밝아왔다.

 

 

 




밖에 나가 농작물부터 살펴보았다.
고추, 오이, 도마도, 옥수수 등 모든 작물의 성장이 멈춰있었다.
그 동안 한 두 차례 비 온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 같은데, 이곳만 피해간 듯하다.
간밤에 걸린 감기로 코를 훌쩍여가며, 물 조리 춤을 추었더니,
어느 듯 따가운 햇살이 비치기 시작한다.

 

 

 

 

 

 

사실, 다른 야채농사야 지어도 원가도 나오지 않는다.
심을 때 모종 값만 칠 팔만원 들어가는데,
농약을 치지 않으니, 병충해 때문에 수확을 제대로 못한다.
차라리 고생 안하고, 그 돈으로 시장에서 사먹는 것이 훨씬 싸게 먹힌다.
그 걸 알면서도 할 수밖에 없는 것은 농사를 짓지 않으면 잘 와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틈틈이 수확하여 정영신씨께 상납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무공해 야채 받고 좋아하는 표정에 온 몸의 피로가 싹 풀려버린다.

 

 

 

 

라면을 끓여 허기를 메운 후, 제초작업에 들어간다.
비가 오지 않아 농작물은 다 그대로인데, 왼 놈의 잡초는 그리도 잘 자라는지...
허리가 아파 앉은뱅이 의자를 끌고 다니며 일하지만,
보는 사람이 없으니 발가벗고 한들 어떠리...
한낮이 되니 더워서 더 이상 일 할 수가 없었다.

 

 

 

 

시원한 냉수 한 바가지로 땀 좀 식히고
이 곳 저 곳 돌아다니며 사물을 살핀다.
일하느라 눈 맞추지 못한 사물들과 교감을 나눈다.
탁자 위에는 오디가 떨어져 새똥처럼 굳어버렸다.
봐주는 사람 없어 혼자 노는 장미가 반긴다.

 

 

 

 

화장실은 숲이 가려 잘 보이지도 않았다.
문 열고 일보기 딱 좋은데, 똥 누며 보는 자연의 맛을 알랑가 모르겠다.

 

 

 

 

그런데, 새소리가 귀가 막힌다.
무슨 새인지 모르나, 어느 악기도 흉내 낼 수 없는 소리다.
한 놈이 째째째째~ 긴 노래를 부르니, 다른 놈은 까르르르 받아친다.
가끔 뻐꾸기가 뻐꾹~ 뻐꾹~ 추임새까지 넣어준다.
이렇게 자연과 노니는 시간이 좋아 만지산에 눌러 앉았지만,
나이가 들어가니 외로워서 못살겠다.

 

 

 

 

 


요즘은 님마저 발길이 뜸하니, 오래 있고 싶은 생각이 없다.
서울에 숨겨놓은 것도 없는데, 뭐가 급한지 떠날 채비부터 한다.
동자동도 인사동도 기다리지 않는데, 혼자 짝사랑한다.

 

 

 



 

떠나기 전에 산소에 들려 술 한 잔 올리며 울 엄마께 하소연했다.
“아따! 햇님이 힘 좀 실어주라고 그래 부탁했는데, 아슬아슬하게 떠랐뿌요?”
“야 이놈아! 산꼭대기 누워있는 내가 무슨 힘이 있노?”
하나 마나인 소리 주고받으며 시름 달랜다.

 

 

 

 

 


따놓은 상추와 고추 잎을 차에 실고 서울로 줄행랑쳤다.
그날따라 어둠이 몰려오는 조양강 풍경이 낯설었다.
평창올림픽으로 생겨 난 교각인데, 그동안 무엇이 바빠 관심조차 없었다.
그렇게 하나 둘 세상은 변해 가고 있었다.

 

 

 

 


황규태선생의 '묵시록'처럼 사람은 없고 살풍경만 있었다.

사진,글 / 조문호

 

 

 

 

 

 



늘 메고 다니던 카메라 가방이 사라졌다.

요즘 날이 갈수록 깜빡 깜빡 잊는 일이 잦아 졌다.
아는 분을 만나도 잘 기억나지 않는 경우가 있어, 난처하기 짝이 없다.




나이가 들수록 귀가 어둡고 말이 어눌한 것은
쓸데없는 일에 나서지 말라는 뜻일 테고,
기억이 나지 않는 것은 세상사 하나하나 잊으라는 것이겠지만,
문제가 생기니 문제인 것이다.




지난 19일 급히 정선 만지산집에 다녀 올 일이 있었다.
도봉산 이벤트 벌일 날이 닥아 와, 옛날식 뷰카메라를 챙겨와 개조해야 했다.
정선까지 가서 카메라만 챙겨 오기엔 억울한 감도 있었다.




지천에 늘린 나물은 차지하고라도 두릅이라도 좀 따 가고 싶었다.
조금만 딴다고 시작했지만, 욕심이란 게 끝이 없다.
마침 시기도 적절하여, 한 시간이 금세 지나 버렸다.
서둘러 돌아왔으나, 서울오니 오후 아홉시가 되었다.




사는 게 뭐가 그리 급한지, 서너 시간을 차 한번 세우지 않고 달린 것이다.
차 때문에 녹번동에 갔더니, 정영신씨는 화순 운주사에서 열릴
한정식선생 전시 오프닝에 갈 것이라며 짐을 챙기고 있었다.
두릅을 전해주고 동자동에 가려는데, 내 가방이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았다.




항상 몸에 메고 다녔는데,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그 가방에 돈은 몇 푼 없지만, 각종 신분증이나 교통카드가 든 지갑도 있고,
동자동 쪽방 열쇠에서부터 사진자료를 담은 유에스비까지 들어 있었다.
더 중요한 것은 어렵게 장만한 카메라가 있지 않은가?




두릅 따러가며 방에 두고 갔을까? 아니면 밖에 있는 탁자에 놓았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기억이 나질 않았다.


5월 초순경 야채 심으러 갈 때 찾아오면 되겠으나,
방안에 두었다고 단정할 수도 없었다.
밖에 있다면 누가 가져갈지도 모르지만, 비가와도 큰일이다.
그보다 가방이 없으니,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어 자리에 누웠으나, 도무지 잠이 오지 않았다.
이리 저리 뒤척이다, 날 밝기 무섭게 정선으로 달려간 것이다.
도착하니, 오전 여덟시 쯤 되었는데, 진입하는 조양강변이 너무 아름다웠다.
습관적으로 카메라를 찾았는데, 찾지도 않은 카메라가 있을 수 없었다.
한심스러운 생각이 더니, 쓴 웃음이 절로 나왔다.




집에 도착해 찾아보니, 카메라는 방에도 밖에도 아무데도 없었다.
온 집안을 샅샅이 살피다보니, 평소 지나치던 사물들이 눈에 들어왔다.
10년 전 ‘만지산 서낭당 축제’ 때, 전시한 봉화 신동여씨의 도예작품도 보였고,
눈에 익은 작물도 싹을 튀 우고 있었다.




더 이상 간 곳이라고는 두릅 따러 간, 산 비탈뿐이었다.
어제 갔던 길을 따라가며 사방을 두리번거리다, 갑자기 눈이 번쩍 띄었다.
난데없는 두릅나무 가지에 그 가방이 걸려 있지 않은가.
두릅 따다 글리 적 그리니, 가방을 거기다 걸어 놓은 것 같았다.




이런 바보가 어디 있을까? 보호자 없인 꼼짝 못하는 어린애나 뭐가 다른가.
씁쓸하긴 했지만, 가는 세월을 어쩔 것인가?
가방을 찾아 기분은 좋았으나, 긴장감이 풀리며 피로감이 몰려왔다.




무엇보다 반가운 것은 카메라였는데, 나무에 걸린 가방에서부터
눈여겨 본 사물들을 찍으며 내려 온 것이다.




차에 있는 빵으로 끼니를 해결하고,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
되돌아보니, 잠간의 건망증으로 너무 힘든 시간을 보낸 것 같다.


길에 뿌린 기름 값도 기름 값이지만,
운전하느라 시달린 장장 일곱 시간은 어쩔거냐?

한 곳에서 편하게 살지, 왜 이리 먼 정선을 오가야 하는지 모르겠다.





서울 쪽방은 본가이고, 정선 움막은 별장이라 변명해 왔는데,
오래전 ‘통인가게’ 관우선생께서, 한 말이 생각났다.
“제일 관리하기 힘든 것이 첩과 별장”이라고...





그런데, 돌아오는 운전 길은 긴장이 풀려 그런지 졸음이 쏟아져 죽을 지경이었다.
평소의 마구초까지 약발이 받지 않아, 열 번 넘게 차를 세워 원숭이 체조를 해야 했다.
그래도 차에 받혀 죽기는 싫어서...


왜 사는지 모르겠다.

사진, 글 / 조문호



























 

무너진 돌계단 주위에 진달래가 피어있다.

이 화창한 봄날, 왜 그리 슬퍼 보이는지..

도망치려는 내 마음을 눈치 챈 걸까?

아니야! 아니야!” 다독였으나,

내 마음 나도 모르겠다.





지난 3월 29일부터 만지산에서 나흘간 머물었다.

'동강할미꽃축제' 사진전이 날 붙잡은 것이다.

전시장은 정영신 동지에게 맡겨두고,

잠시 만지산 집으로 들어 왔다.





'통도사' 수안스님은 꿈꾸는 집이라 이름 주셨지만,

꿈만 꾸어 그런지, 힘들어 못 살겠다.

이제 영정사진으로 사용하려는 알 몸까지 지쳐버렸다. 



 


지난번 바쁘게 떠나며 챙기지 못한 것도 거두고,

방 청소를 하려니 물 부터 받아야 했다.

지하수 분쟁의 연결점인 우리 집 땅속 밸브는 늘 잠겨있다.


밸브를 열면 물이 새니, 마음대로 쓸 수가 없다.

조금만 받으려고 밸브를 살그머니 열었는데,

호스 연결점에서 물이 삐쳐 올라 물을 뒤집어 써야 했다.



 


제기랄! 이 짓을 언제까지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수도정 사준지가 오래건만, 옆집 때문에 고치질 않는다.

더 이상 다른 집은 물 주지 않는다는 내용의

연판장에 서명하지 않았으니, 미운털도 박혔을 것이다.


수시로 열리는 지하수 회의에 참석 할 수 없어

위임장에 도장 찍어 준지 몇년이 되었다.

얼마 전, 처음으로 본 정관에 어이 없는 항목도 있었다.

헌집을 새집으로 개조해도 이 백 만원 내야 한다는

우리 집을 겨냥한 내용도 있었다.



 


어떻게 사람이 그럴 수 있는지, 이해되지 않았다.

물싸움을 남의 집 불구경하듯 지켜본 죄다.

얼마 전 정선 군수 중재로 물주겠다는 약속을 했다지만,

아직 마음의 빗장은 열지 않은 것이다.


한 집은 연결되었다지만, 고장 난 우리 쪽 라인을 고치려면

수도관이 지나는 밭 주인의 동의서를 받아야 한다는 거다.

그 밭 주인이 누구더냐?

여지 것 물 분쟁을 주도한 사람이 동의서를 쓰 주겠는가?





이제 더 이상 쪽팔리게 하지 말고. 제발 끝내라.

자기중심의 정선 산골사람들 근성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돈 때문에 변해버린 사람들 모습이 싫어졌다.

아무리 살기 좋은 곳도 사람이 싫어지면 못 산다.

 

저 많은 짐들은 어쩌며, 울 엄마는 어쩔거냐?

아직은 미련이란 게 남았으니, 버리지도 못한다.

울 엄마 계신 산소 올라가, 술 한 잔 올리며 하소연 했다.



 


와, 지난번엔 차 쳐 박아 못가도록 용심 부렸소?

산소 왔다 발목 잡힌 지난 이야기부터 꺼냈.

~ 이놈아! 자식 못되게 하는 애미 봤냐?

그 날 가면 다치니까 잡은 거지

그 말을 믿어야지 어쩌겠나?

 

이제 영정이 새겨진 무덤 앞의 목판 사진도 지워지고 있었다.

저 사진이 지워지면 엄마도 지워질 것이라고 말한 그 때가 생각났다.

엄마도 이제 육신이 허물었겠네요. 그만 화장할까요?“라며 슬쩍 떠 보았다.





태우던 버리던 거기 무슨 소용이고!

니 마음 다 안다,

그냥 순리대로 살아라. 모든 건 때가 있다



 


정녕, 만지산의 봄은 오려나?

 

사진, / 조문호





















 

 

 

 


열길 벼랑에 처량하게 핀 동강할미꽃이 슬프다.

2018년 04월 06일 (금) 01:33:23 정영신 기자 press@sctoday.co.kr

정선의 동강할미꽃이 피어나야 강원도의 봄은 시작된다.

정선읍 귤암리의 ‘동강할미꽃 보존연구회’가 마련한 제 12회 ‘동강할미꽃축제’가

지난 3월30일부터 4월1일까지 3일간의 일정으로 ‘동강생태체험전시관’일원에서 열려, 봄나들이 한 상춘객들을 맞이했다.



▲ 귤암리 벼랑에 피어있는 동강할미꽃 Ⓒ정영신


‘동강할미꽃’은 아우라지를 사이에 둔 애틋한 연인의 연모가 조양강 뼝대에 모습을 드러냈다는 이야기도 있고.

동강할멈과 할아범에 대한 그리움이 동강할미꽃으로 피어난다는 소문도 있으나 아무런 근거는 없다.

꽃이 알려진 역사가 그리 오래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요즘 들어 근거 없는 이야기들이 전설이란 이름을 달고 등장해, 자칫 역사를 왜곡시킬 수 있기에 경계해야 한다.



▲ ‘동강할미꽃보존회’최완순 회장 Ⓒ정영신


동강물줄기를 굽어보는 척박한 환경에서 자라는 동강할미꽃은 머리카락 같은 미세한 뿌리가 바위틈에 들어가 자생하는 꽃으로,

마치 강원도 산골 사람들의 강인한 생명력을 보여주는 것 같아 더 애착이 간다.

산소에 피어나는 고개 숙인 할미꽃과는 다르게 하늘을 향해 꽃을 피우는 동강할미꽃에서 신비로운 자연의 경이로움을 느끼게 한다.



▲ 내빈축사하는 신주호 정선부군수 Ⓒ정영신


동강할미꽃이 세상에 알려진 것은 그리 오래 되지 않았다.

1988년 야생화 사진가 이석필씨가 최초로 촬영할 당시에는 강을 건널 땐 다리가 없어 헤엄을 쳐서 건너갔다고 했다.

이석필씨는 그 당시 들꽃이 살아가는 환경 차원에서 사진을 찍었는데,

그 후에 사진가 조문호씨가 이끌어온 '환경사진가회' 일원으로 활동하며

최초에 찍은 할미꽃 사진을 환경사진집에 발표한 것이다.

그 이후 1997년 김정명씨가 동강할미꽃을 찍은 꽃 달력 사진을 본 한국식물연구원 이영노박사가

2000년 ‘동강할미꽃’이란 이름을 달아 세계 유일종으로 발표하며, 세상에 알려진 것이다.



▲ 1988년 4월 야생화사진가 이석필씨가 최초로 찍은 동강할미꽃

(1999년 발행된 '동강' 환경사진집에서 스크랩)



한국특산종인 보랏빛 나는 ‘동강할미꽃’은 정선, 영월, 삼척, 태백 등, 석회암지대에서만 서식하는데,

그 중 굽이굽이 절벽으로 이어진 정선 귤암리의 아름다운 경관 속에 피어나는 꽃이 가장 아름답다.

그 이후 귤암리 주민들이 협력하여 ‘동강할미꽃 보존연구회’가 만들어지며, 2008년 정선군 군화로 지정된 것이다.

또한 동강할미꽃은 2,000년 동강댐 건설 백지화 결정에도 크게 기여한 식물이다. 당시 고 김대중 대통령은

세계 최초의 신종으로 추정되는 7종의 동식물과 20여종의 멸종위기동식물 보호 및 생태계 보전을 위해 동강 댐 설치를 막은 것이다.





▲ ‘아리랑예술단’의 아리랑공연 Ⓒ정영신


구구한 세월동안 석회암 절벽 바위틈에 뿌리를 내리며 살아 온 이름 없는 야생화가 세상에 알려지며,

사진인들이 몰려드는 등 오히려 수난을 당하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또한 꽃이 피는 4월이 되면 야생화를 사진에 담으려고 무분별하게 자연을 파괴하는 사진인 들이 많이 생겨난다.


자연환경을 다치지 않도록 있는 그대로의 꽃의 습성이나 주변여건까지 함께 담아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꽃만 부각시키기 위해 꽃을 보호하는 주변의 마른 풀을 다 뜯어내고,

심지어 꽃잎에 물을 뿌리는 일들이 종종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 '제12회 동강할미꽃 축제'에 참석한 내빈들모습 Ⓒ정영신


이를 막기 위해 주민들의 모임인 ‘동강할미꽃보존회’에서 생태계를 보호하려 공을 들이고 있다.

야생화가 있는 모습 그대로 자랄 수 있도록 둬야함에도 불구하고, 지역축제로 인해 자연생태환경이 몸살을 앓아 온 것도 사실이다.

야생에서 자라는 식물은 인간의 숨소리와 입김마저도 치명적인 독이 된다는 것을 진정 모르고 있는 것일까.



▲ 귤암리부녀회에서 음식을 장만하는 모습 Ⓒ정영신


강원도 문화관광해설사인 서덕웅씨는 “사진을 예쁘게 찍으려고 잎을 뜯어내는 과정에서 손을 타기 때문에 수정되지 않는다.

분별한 사람들의 행동이 자연을 죽이고 있다”며 안타까워했다.

서덕웅씨는 지역자산을 지켜야 한다는 일념으로 지금까지 동강할미꽃 보존을 위해 애쓰고 있다.



▲ 동강할미꽃지킴이 서덕웅님 Ⓒ정영신


이날 열린 ‘제 12회 동강할미꽃축제‘ 개막식은 정선 군립 ‘아리랑예술단’의 아리랑공연으로 시작되었다.

‘동강할미꽃보존회’ 최완순 회장의 개막선언과 신주호 정선부군수 등 내빈의 축사가 이어진 후,

다양한 공연과 전통놀이 마당, 동강할미꽃 심기 등의 많은 프로그램이 준비되어

축제장을 찾은 관광객들과 함께 즐기는 축제의 마당이 되었다.



▲ 동강할미꽃 심기 Ⓒ정영신


축제가 펼쳐진 생태공원에는 수필가 우애자씨가 준비한 한복체험도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교복과 한복을 입고 사진을 찍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는데,

어느 지역을 가보아도 똑같은 행사를 진행해 지역적인 특색이 보이지 않았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눈앞에 보이는 아름다운 자연을 즐길 줄 모르고, 타지의 가수를 초청해 흥을 즐기는데,

차라리 정선주민들의 삶의 애환을 노래한 정선아리랑을 관광객과 함께 배우는 시간이 마련되면 좋지 않을까 싶다.



▲ 떡매치기 하는 관광객 Ⓒ정영신


이번 축제엔 필자의 ‘장터 사람들’과 조문호씨의 ‘산골 사람들’ 사진전이 열려 멀리서 지인들이 찾아왔는데 다들 불편하고 불쾌감을 호소했다.

축제장으로 올 수 있는 교통편의가 마련되어 있지 않고, 손님을 맞을 기본이 되어있지 않다고 불만을 터트렸다.

정선터미널에서 축제장까지 셔틀버스를 운행해야하고, 물을 마실 수 있는 식수대하나 정도는 있어야 하는 것 아니냐는 것이다.




▲ '산골사람들'사진전시에서 만난 사진의주인공 이선녀씨와 사진가조문호 Ⓒ정영신



요즘은 지자체에서 마련하는 축제의 전성기다.

그러나 지역적인 특색은 사라지고 천편일률적인 행사로 관광객들을 식상하게 한다.

지역축제는 그 지역에 가야만 볼 수 있는 것들을 보여주는 소중한 체험을 통해 지역문화를 함께 향유할 수 있어야 한다.











  



지난 30일부터 4월1일까지 정선 귤암리 ‘동강생태체험전시관’에서 동강할미꽃 축제가 열렸다.
축제 부대행사로 정영신의 ‘장터 사람들’과 조문호의 ‘산골 사람들’사진전도 있었다.
작은 규모의 사진전이지만, 기회가 닿는 분들을 위한 정보차원에서 소식을 올렸는데,
많은 분들이 와 주셨다. 태백은 그리 멀지는 않지만 서울과 부산에서 오신 분도 있었다.
다들 반갑고, 고마웠다. 볼 것도 먹을 것도 없는 초라한 잔치에 와 주신 그 따뜻한 마음이...




전시된 산골 사람들’사진은 큰 쪽이 140cm쯤 되는 네 점을 액자 없이 벽에 붙였고,
정영신의 ‘장터 사람들’ 열 점은 다양한 크기의 액자라 이젤 위에 올렸다.
바람 불면 이젤이 넘어지기에 사진전 부스를 별도로 만들었는데, 손님 맞을 자리가 되어 주었다.




여지 것 우리 동네 일이면 아무 조건 없이 사진을 내 걸었는데,
이제부터 그래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시경비를 안 받으면 다른 사람에게 피해 끼질 우려도 있지만,
있는 사진으로 대충 채우니 제대로 된 전시도 보여줄 수 없었다.




귤암리 인심이 야박하다며 타박하기도 했으나, 어쩔 수 없다.
공과 사는 구분할 수밖에 없는데, 부스 하나 정도의 전시라면 평균 하루 50만원 정도의 비용을 받는다.
한 사람 전시라도 사흘이면 백오십만원을 받아야 했는데, 전시 작가에게 주는 식권 한 장 없었다.



좋아하는 자판기 커피마저 매번 천원 주고 사먹어야 했는데,
그것도 돈 받고 파는 사람이 이웃집 아낙이라, 내가 더 부끄러웠다.
참여 작가는 밥을 주기로 되어 있다지만, 구걸하는 것 같아 그냥 사 먹었다.
대개 찾아 주신 손님들이 밥과 술을 샀지만, 더러는 내가 대접해야 할 손님도 있었다.
두 사람이 나흘 동안 아무 일도 못한 채. 돈만 써야하는 자체가 한심스럽다는 생각도 들었다.




특히 밥값, 술값을 많이 내 주신 사진가 박병문, 이광수, 이정환씨께 감사드린다.

이정환씨는 제자 성유나씨와 함게 왔는데, 통풍으로 다리까지 절며 온 어려운 걸음이었다.
그리고 부산에서 오신 이광수교수는 내가 교주로 존경하는 분이라  송구하기 그지없었다.

동강할미꽃 축제에 온 것이 아니라, 그림바위마을에서 열리는 ‘산골 사람들’사진전을 보러 오셨지만,

가까운 지역민도 잘 찾지 않는 전시를 보기위해 멀리서 오셨으니, 더 고마웠다.




사실은 보름 전에 올 예정이었으나, 서로의 사정에 의해 전시가 끝나는 날 오게 된 것이다.

더욱이 아내와 함께 온다기에 더 기다려졌다.

저토록 기가 세고 거침없는 양반을 꼼짝 못하게 하는 분이 과연 어떤 분일까 궁금했기 때문이다.

힘으로 기를 제압하지는 않을 테니, 아마 한 수 위일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일단 아내인 유재희씨를 만나보니 첫인상도 좋지만, 상대를 참 편안하게 했다.

가끔 의미 있는 말을 한마디씩 툭툭 던졌지만, 별 말이 없는 것으로 보아 사려 깊은 분 같았다.

너무 잘 어울리는 부부인 것 같았다.

이성적인 아내와 감성적인 남편의 차이나, 말 잘하고 하지 않는 차이처럼,

서로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어 오히려 좋을 것 같았다,

문제는 두 분 모두 기가 세다는 점이다. 그래서 이광수씨가 집에서는 기를 죽이는 것 같았다.




이틀 동안 가리왕산휴양림에 여장을 풀고 등산도 하며 오붓한 시간을 보낸 것 같았다.

첫 날은 사진가 박병문씨와 함께 민물탕 잘하는 ‘짐포리식당’에서 한 잔하고,

그 이튿날은 사진가 이정환, 성유나씨와 함께 그림바위마을에서 열리는 ‘산골 사람들’사진전을 보러 갔다.

그림바위예술발전소 관장이며 화가인 김형구씨 내외가 반갑게 맞아 주었는데,

전시를 보고 와서는 ‘국일관’에서 백숙을 안주로 또 한 잔했다.




이광수, 유재희씨 내외 분을 비롯하여  이정환, 성유나, 하재은씨는 부산과 서울에서 와 주셨고, 

태백에서 온 박병문씨와 정선 읍내의 신주호, 김수복, 최원희, 최성준, 김형구씨 등

많은 분들이 동강할미꽃 축제장에 들려 사진전을 축하해 주었다.


사진, 글 / 조문호







































































올 해로 열 두 번째 맞는 동강할미꽃 축제가 지난 30일부터 4월1일까지

정선 귤암리 ‘동강생태체험전시관’에서 열렸다.
사실, 이 축제가 열린지는 오래되었지만, 주민들의 축제에 대한 몰이해로
상춘객을 끌어 들일 수 있는 좋은 여건에도 불구하고 제구실을 못하고 있다.




이맘 때면 동강할미꽃 찍으러 전국에서 몰려오는 사진인들 숫자 또한 적지 않아
그들을 염두에 둔 축제 기획이 되어야 하는데, 그러질 못하고 있다.
어린이 사생대회나 할미꽃사진전 등 간단한 행사들만 반복되는 

축제라기보다 동네잔치에 가까운 수준이다.




초창기에는 강변과 산길로 이어지는 동강할미 상여 길 연출, 섶 다리 재현,
조문호의 ‘신명’ 설치전 등 여러 가지 볼거리로 야심차게 추진하기도 했으나,
번거롭다는 주민들의 반대로 중단되고 말았다.



그 이후부터 개인 사진전이나 부탁하면 걸어 주었지만, 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렇지만 주민들과 읍내 있는 분들까지 한꺼번에 만날 수 있는 좋은 기회라
가능하면 축제 개막식은 봄나들이 겸 꼭 참석했다.




그러나 세월에 알려지며, 주말 상춘객이 늘어나자 그만 돈벌이에 맛들이기 시작한 것이다.
손님의 지갑을 열게 하는 것이라야 동네에서 만들어 파는 음식이나
재배한 동강할미꽃 화분 파는 게 고작인데,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른다.




그런데, 오랜만에 봄나들이 한 상춘객의 기분을 상하게 하는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다른 식당에서는 그냥 주는 좌판기 커피를 천원에 팔거나 음식이 비싼 거야
안 사먹으면 되지만, 목마르면 물은 마셔야 할 것 아닌가?



축제장 어디에도 생수대나 물 마실 곳을 마련해 두지 않은 채,
작은 생수 한 병을 천원에 판매한 것이다.
돈보다 손님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며 군청에 민원을 제기하겠다는 분들이 여럿 있었다.




장사도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다.
기본적인 물이나 커피를 비싸게 팔면 모든 음식이 바가지란 인상부터 주게 된다.
돈만 알지 장사의 기본을 모르는 사람들이다.



 
이 동네 터줏대감 이야기로는 장사해 남은 돈으로 일한 사람들 바닷가 회 먹으러 가는 것이 고작이란다.
'정선군청'이나 '강원랜드'에서 후원하는 금액만도 충분한데, 그 지원금은 다 어디에 쓰는지 모르겠다.




축제가 열리는 귤암리가 어떤 곳인가?


산 높고 물 깊은 두메산골 귤암리가 인심 좋은 동네로 소문났으나,
동강 댐 백지화로 생활환경이 바뀌며 변하기 시작했다,
다들 새집 짓고, 집집마다 티브이 안테나가 들어서며 눈을 뜨기 시작했는데,
이제 인심 좋기는커녕, 야박하기 짝이 없는 동네가 되고 말았다.



귤암리 만지골의 지하수 분쟁은 이년 넘도록 이어지고 있다.
주민들을 ‘신판 봉이 김선달’이란 소리까지 듣게 하는 이 분쟁 역시
이주민에 대한 원주민의 갑 질에 다름 아니다.
‘고래 싸움에 세우 등 터진다’는 말처럼 나까지 물 사용에 지장을 받고 있다.




옛날에는 낯선 사람이 귤암리를 찾으면 뭘 먹이지 못해 안달이었다.
없는 살림이지만 옥수수나 감자를 삶아 대접하는 등 인심 좋기로 소문난 동네였다.
깊은 산골이라 사람 만나기가 힘들 때라 반가워 그랬는지 모르지만,
아직까지 마을 어귀에는 ‘인심 좋은 귤암리’란 표석이 세워져 있다.




내년 부터는 동강할미꽃축제가 새롭게 태어나길 간절히 바란다.


축제기획 자체를 재정비하고, 최소한의 방문객 편의는 제공되어야 한다.
제일 먼저 해결할 것은, 이곳은 버스가 하루에 네 번밖에 다니지 않는 산골이라,
축제기간 동안 정선터미널에서 축제장까지 매 시간마다 출발하는 셔틀버스를 운행하라.
둘째, 축제장 서너 곳에 물을 마실 수 있는 음료대를 설치하라.
셋째, 동전 넣고 커피나 음료를 뽑을 수 있는 좌판기를 비치하라.




이런 기본적인 문제가 개선되지 않는 한, 동강할미꽃 축제의 미래는 없다,
그렇지 않으면 도시락 싸들고 다니며 못 오게 막을 작정이다.

아래 사진은 축제기간 동안 있었던 이런 저런 모습이다,

사진, 글 / 조문호



















































































































 




귤암리 벼랑에 동강할미꽃이 수줍게 고개를 내밀었습니다.
올해로 열 두 번째 맞는 ‘정선동강할미꽃축제’가
오는 3월30일(금)부터 4월1일(일)까지
정선읍 귤암리 ‘동강생태체험학습장’에서 열립니다.





동강할미꽃은 벚꽃과 개나리보다 동강의 봄을 가장 먼저 알리는 꽃입니다.
동강 변의 뼝대를 수놓을 무렵이 되면, 해마다 동강할미꽃축제가 열립니다.
수줍게 고개 내민 꽃도 꽃이지만,
만지산 살팔봉의 멋진 봄 풍경 만나러 나들이 한 번 하세요.





축제에는 백일장, 동강할미꽃 심기, 떡메치기, 공연 등의 다양한 행사와 함께
이곳 귤암리에 사는 정영신과 조문호의 ‘장터와 산골 사람들’ 사진전도 열립니다.

여러 가지 행사야 어디를 가나 볼 수 있지만,
동강의 따스한 햇살 맞으며, 농주 한 잔 하는 맛이 죽입니다.
시간만 맞으면 저희들이 사는 지척의 윗만지골도 안내할 수 있습니다.
짬나면 놀러오세요.

정영신, 조문호





'동강 할미꽃'

할미야 할미야
벼랑에 핀 할미야

열길 높은 벼랑에
누굴 그려 피었느냐

칼바람에 오무렸다
햇살에 얼굴 내미는
동강가에 할미야

죽은 울 엄마 그립게 하는
동강가에 할미야.



사진은 최초로 찍은 동강할미꽃 사진입니다.
태백의 야생화 사진가 이석필씨가 1988년 4월에 찍었습니다.
1999년 12월에 ‘한국환경사진가회’에서 발행한
‘아우라지 물길 따라 2백리 ’동강‘ 환경사진집에 게재된 사진을 스크랩했습니다.



이맘 때가 되면 전국에서 사진인들이 몰려오기도 합니다.


 


331일까지 정선 그림바위 예술발전소에서 열려...

 

 

스크랩 /  서울문화투데이 / 2018년 03월 19일 (월) 00:09:37

정영신 기자 press@sctoday.co.kr


 

다큐사진가 조문호의 산골 사람들사진전이 지난 32일부터 31일까지 정선 그림바위 예술발전소에서 열리고 있다.

 

전시된 사진들은 급속한 근대화에 빠르게 망각되고 훼손된 우리네 삶과 문화가 잊혀져가고 사라져 가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과 슬픔이 담겨있다.   그리고 우리네 것을 지키야 한다는 작가의 애착도 느낄 수 있다. , 사람, 생명에 대한 사랑의 메시지가 담겨져 있어,

나이 드신 분에게는 옛 것에 대한 추억을, 젊은이에게는 옛 것의 소중함과 새로움을 안겨 준다.




 

이 사진들은 동강이 수몰될 위기에 처해 있던 1990년도 무렵부터 촬영된 사진이다.

한국환경사진가회에서 자연생태환경을 기록하기 위해 귤암리 만지산 중턱에 캠프를 마련하면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동강의 생태환경과 동굴, 야생화, 조류, 어패류 등 각기 전문분야 사진가들로 구성되어 투입되었을 때,

회장을 맡았던 그는 생태환경에 앞서 그 땅에서 평생을 살아 온 주민들에 더 주목한 것이다.


그는 인본을 외치며 평생 사람만 찍어 온 사진가다.

강보다 사람부터 살아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며 타 환경단체와 다른 반대의견을 내놓았다.

긴 세월의 땜 건설 논란으로 빚더미에 올라 선 농민들부터 살리자며 피해보상을 주장한 것이다.




 

그때 시작된 작업은 한국환경사진가회에서 발행한 동강환경사진집, 그리고 동강 백성들포토에세이 집이 나오며 일단락되었으나,

다른 사진가와는 달리 그는 정선 만지산 캠프에 눌러 앉은 것이다.

주민들과 살아 온 그를 가까이서 지켜보았기에, 이 전시가 주는 의미가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200011월경 그는 현지주명 400여명과 함께 명동성당 부근 천막촌에서 농성에 들어 간 것이다.

그러나 추운 날씨의 야외 노숙이란 결코 만만찮았다고 한다.

당시 자신이 관리하던, 충무로의 한국현대사진가회사무실과 강의실 탁자를 치우고,

나이 많은 분들을 모아 잠자리를 차린 것이다.

동시에 지하철 충무로역과 혜화역에서 동강 백성들사진전을 열며,

동강에 투신자살한 수동마을 김진수씨의 사연과 사진을 담은 유인물을 명동으로 오가는 시민들에게 나누어 주는 등

동강현실 알리기에 온 힘을 쏟았다.



 

각 언론사에 알리는 보도 자료를 만들어 보내며, 심지어 청와대 김대중 대통령에게 동강백성들사진에세이 집과 함께

현 실정을 알리는 글을 보낸 것이다.


그 이튿날 문화일보사회면 톱으로 동강 살렸으면 주민도 살려라는 헤드라인을 단 기사로 크게 알려진 것이다.

자살로 이어지는 주민들의 피폐한 현실과 명동성당 앞에서 투쟁하는 농민들의 모습이 생생하게 보도된 것이다.

더 반가운 것은 청와대로부터 수몰지역대책위원장을 맡은 가수리의 이영석씨 등 주민대표를 부르는 연락이 왔고,

보상안으로 주택 건설비 보조, 비닐하우스 건설비 등 실질적인 지원약속을 받아 낸 것이다.


 

그 때의 기분은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이 좋았으나, 지금 생각하니 후회스러운 점도 많다고 한다.

순식간에 오래된 농가들은 흔적을 감추기 시작했고, 집집마다 티브이 안테나가 들어서며 순박한 산골사람들의 인심이 변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 당시의 구옥이란 캠프로 사용하던 집만 남았고, 국적불명의 양옥집들로 완전히 바뀌어 버린 것이다.

그리고 돈이 사람을 망치는 상황을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고 한다.

그렇지만 어떻게 그들만 힘든 원시의 삶을 살라고 할 수 있겠냐며 말꼬리를 감추었다.



 


동강 댐이 취소되고 보상이 이루어진 후, 4년 동안 기록한 농민들의 삶이 바로 이번에 선보이는 산골 사람들이다.

2004눈빛출판사두메산골 사람들사진집이 나오며 열린 서울 전시는 호응을 받았으나,

정작 주민들이 살고 있는 산골분교를 찾아다닌 순회전은 별 관심을 받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나 14년의 세월의 먼지를 떨쳐내고 다시 전시되자, 주민들도 다시 보기 시작했다고 한다.

당시의 정겨운 산촌 풍경이 반가운데다, 그 때 찍힌 집은 물론 디딜방아, 쇠죽가마, 물지게에서 비롯하여

농기구까지 사라지거나 바뀌어 버린 것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때 찍힌 가족이나 이웃들도 대개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세월이 흐르면 살아 온 삶의 기록이 역사가 된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당시 출판된 사진집 서문에 조문호-두메산골 사람들의 초상을 쓴 미술평론가 박영택교수는 이렇게 적었다.

 

두메산골 사람들의 삶의 풍경을 기록한 사진들은 뼈저린 향수를 불러일으키고 새삼 우리네 선조들의 삶의 모습을 환영처럼 떠올리게 한다. (중략) 사람들은 대개 자신이 평생 살았을 장소에 앉아 있거나 우연히 산 속에서 만난 사람 앞에서 잠시 멈춰서 있다. 초라한 의복에 대부분 무표정하고 무심한 자락을 온 몸에 드리우고 있다. 전형적인 시골사람들의 초상이다. 작가는 감정과 과잉의 표현을 자제하고 즉물적으로, 객관적인 시각을 가능한 유지한 채 인물에 근접했다. 그 인물은 모든 것을 말해주는 듯 하지만 사실 우리가 아는 것은 매우 피상적인 수준일 것이다. 모든 것을 드러내는 것 같으면서도 사실은 많은 것을 감추고 있는 것이 사진이다. 정면은 워낙 많은 것을 품고 있다. 우리가 이 정면에 쓰여 있는 데이터를 제대로 읽기란 무척 어려운 일이지만 그렇기에 더욱 진지한 독해가 요구되는지도 모르겠다. 모든 희노애락과 감정의 표현이 물기를 잃어 바짝 말라버린 듯한, 그러나 모든 것들을 넉넉히 받아들일 표정이 얼굴에 충만하다. 얼굴은 가장 인간적이다. 얼굴은 한 개인의 정체성의 표식이자 문화적, 사회적 징후이다. 얼굴은 세상의 끝이고 시작이다. 평생을 자연에 순응하며 세상과 등지고 살아왔을 이 이름 없는 민중들의 삶과 역사는 무엇이며 어떻게 말해져야 할까? 그들이 땅을 경작하고 식량을 채집하며 강하고 질긴 목숨을 꿋꿋하게 이어온 그 내력이 우리네 전통이고 역사였음을 이들의 얼굴과 몸에서 다시 확인해보는 일은 새삼 한국인의 정체성을 사유해 보는 일에 다름 아닐 것이다. 조문호의 사진은 비로소 그들의 소멸과 망각 이후에 유일하게 남아 그들의 삶의 언어를 묘석처럼 제공해 줄 것이다.“

 

이 전시는 31일까지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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