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메고 다니던 카메라 가방이 사라졌다.

요즘 날이 갈수록 깜빡 깜빡 잊는 일이 잦아 졌다.
아는 분을 만나도 잘 기억나지 않는 경우가 있어, 난처하기 짝이 없다.




나이가 들수록 귀가 어둡고 말이 어눌한 것은
쓸데없는 일에 나서지 말라는 뜻일 테고,
기억이 나지 않는 것은 세상사 하나하나 잊으라는 것이겠지만,
문제가 생기니 문제인 것이다.




지난 19일 급히 정선 만지산집에 다녀 올 일이 있었다.
도봉산 이벤트 벌일 날이 닥아 와, 옛날식 뷰카메라를 챙겨와 개조해야 했다.
정선까지 가서 카메라만 챙겨 오기엔 억울한 감도 있었다.




지천에 늘린 나물은 차지하고라도 두릅이라도 좀 따 가고 싶었다.
조금만 딴다고 시작했지만, 욕심이란 게 끝이 없다.
마침 시기도 적절하여, 한 시간이 금세 지나 버렸다.
서둘러 돌아왔으나, 서울오니 오후 아홉시가 되었다.




사는 게 뭐가 그리 급한지, 서너 시간을 차 한번 세우지 않고 달린 것이다.
차 때문에 녹번동에 갔더니, 정영신씨는 화순 운주사에서 열릴
한정식선생 전시 오프닝에 갈 것이라며 짐을 챙기고 있었다.
두릅을 전해주고 동자동에 가려는데, 내 가방이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았다.




항상 몸에 메고 다녔는데,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그 가방에 돈은 몇 푼 없지만, 각종 신분증이나 교통카드가 든 지갑도 있고,
동자동 쪽방 열쇠에서부터 사진자료를 담은 유에스비까지 들어 있었다.
더 중요한 것은 어렵게 장만한 카메라가 있지 않은가?




두릅 따러가며 방에 두고 갔을까? 아니면 밖에 있는 탁자에 놓았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기억이 나질 않았다.


5월 초순경 야채 심으러 갈 때 찾아오면 되겠으나,
방안에 두었다고 단정할 수도 없었다.
밖에 있다면 누가 가져갈지도 모르지만, 비가와도 큰일이다.
그보다 가방이 없으니,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어 자리에 누웠으나, 도무지 잠이 오지 않았다.
이리 저리 뒤척이다, 날 밝기 무섭게 정선으로 달려간 것이다.
도착하니, 오전 여덟시 쯤 되었는데, 진입하는 조양강변이 너무 아름다웠다.
습관적으로 카메라를 찾았는데, 찾지도 않은 카메라가 있을 수 없었다.
한심스러운 생각이 더니, 쓴 웃음이 절로 나왔다.




집에 도착해 찾아보니, 카메라는 방에도 밖에도 아무데도 없었다.
온 집안을 샅샅이 살피다보니, 평소 지나치던 사물들이 눈에 들어왔다.
10년 전 ‘만지산 서낭당 축제’ 때, 전시한 봉화 신동여씨의 도예작품도 보였고,
눈에 익은 작물도 싹을 튀 우고 있었다.




더 이상 간 곳이라고는 두릅 따러 간, 산 비탈뿐이었다.
어제 갔던 길을 따라가며 사방을 두리번거리다, 갑자기 눈이 번쩍 띄었다.
난데없는 두릅나무 가지에 그 가방이 걸려 있지 않은가.
두릅 따다 글리 적 그리니, 가방을 거기다 걸어 놓은 것 같았다.




이런 바보가 어디 있을까? 보호자 없인 꼼짝 못하는 어린애나 뭐가 다른가.
씁쓸하긴 했지만, 가는 세월을 어쩔 것인가?
가방을 찾아 기분은 좋았으나, 긴장감이 풀리며 피로감이 몰려왔다.




무엇보다 반가운 것은 카메라였는데, 나무에 걸린 가방에서부터
눈여겨 본 사물들을 찍으며 내려 온 것이다.




차에 있는 빵으로 끼니를 해결하고,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
되돌아보니, 잠간의 건망증으로 너무 힘든 시간을 보낸 것 같다.


길에 뿌린 기름 값도 기름 값이지만,
운전하느라 시달린 장장 일곱 시간은 어쩔거냐?

한 곳에서 편하게 살지, 왜 이리 먼 정선을 오가야 하는지 모르겠다.





서울 쪽방은 본가이고, 정선 움막은 별장이라 변명해 왔는데,
오래전 ‘통인가게’ 관우선생께서, 한 말이 생각났다.
“제일 관리하기 힘든 것이 첩과 별장”이라고...





그런데, 돌아오는 운전 길은 긴장이 풀려 그런지 졸음이 쏟아져 죽을 지경이었다.
평소의 마구초까지 약발이 받지 않아, 열 번 넘게 차를 세워 원숭이 체조를 해야 했다.
그래도 차에 받혀 죽기는 싫어서...


왜 사는지 모르겠다.

사진, 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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