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3일 아침,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울먹이는 햇님의 전화를 받았다.

병세가 위중한 상태에서 한 달 넘게 버티어 잠시 잊고 있었는데, 기어이 떠나신 것이다.



 


서울서북시립병원’ 병실에는 햇님 엄마의 낮은 통곡이 처절하게 깔리고 있었다.

엄마 미안하데이! 그 흔한 꽃구경 한 번 못시켜주고, 맛있는 거 한 번 못해주면서, 지랄 같은 성질머리로 맨날 욕만 끌어 퍼부엇제.

새벽 네시만 되면 햇님이 잘 되라고 기도했는데이제 그 기도는 누가 하라고 가버렸노? 흐흐흐~"





불효자가 더 슬피운다는 말처럼, 그 울음은 한 여인의 한 맺힌 통곡이었다.

차마 눈을 감지 못한 채 숨을 거두어, 지켜보는 햇님도 연신 눈물을 훔쳐내고 있었다.

밖에는 남지현이가 첫 돌도 지나지 않은 손녀 하랑이를 안고, 햇님이와 교대로 병실을 드나들었다.



 


외할머니 연세가 올해로 아흔 셋이고, 큰 고통없이 돌아가셨으니 호상임은 틀림없었다.

더구나 고난의 삶을 마감하는 죽음 자체를 축복으로 여기는 내가, 이토록 슬픈 것은 왜일까?

아마 버림받아 힘겹게 살아 온 두 모녀의 기구한 운명 때문일 것이다.






슬픔도 잠깐일 뿐, 눈앞에 닥친 장례절차와 비용이 더 걱정되었다.

'정의당' 은평지역 일에다 지역봉사에 매달려 벌이가 신통찮아,

틈틈이 공사판 노가다 일이라도 찾아야 하는 어려운 사정을 잘 알기 때문이다.

장례 비용이 싸다는 서울서북시립병원장례식장 조차 수리한다는 명목으로 문 닫은 지 오래되었단다.

연고자 없는 쪽방 빈민처럼, 화장터로 직행하는 방법도 생각해 보았지만, 그건 아닌듯 했다.



 


대개의 경조사 경비조달은 서로 돌아가며 도와주는 축의금이나 조의금에 의존하지 않던가. 

알리는 것이 구걸하는 것 같아, 형편이 어렵지 않던 친 어머니 초상은 주변에 알리지도 않았지만,

막상 형펀이 어려운 햇님 외할머니 장례는 알리고 싶어도 알릴 수가 없었다. 


30여년 전 햇님이 엄마와 이혼한 사이라 가족관계가 끊긴 것이다.

획일화된 장례절차도 개선할 점이 많지만, 가족제도의 모순에 직면하기도 했는데,

아무튼, 내가 도와 줄 수 있는 일이라고는 몸뚱이 하나 뿐이었다.


그리고 햇님 엄마의 무데뽀 성격에 친정은 물론 주변사람들이 모두 등을 돌려 알릴 곳도 없단다.

오죽하면 햇님 엄마를 잘아는 오랜 친구들이 고외수씨를 고악질 여사라고 불렀겠는가?



 


국화 한 송이 없는 간소한 장례지만, '은평장례식장' 장례비도 만만치 않았다.

더구나 문상객 한 사람 없는 빈소를 지키고 있으려니, 애가 터졌다.


돈이라고는 사정을 잘 아는 사진동지 정영신씨가 오십 만원 보태 주었고

햇님 엄마 외가 오빠가 준 오십 만원이 전부였다.

다행스럽게도 '정의당' 당원들이 마지막 날 늦게 몰려 왔는데, 그 조의금이 이백만 원이나 되었단다. ,

큰 부담을 줄여 준 동지들이 고맙기 그지 없었다.


장례비 오백만원 중 부족한 돈은 햇님이 카드로 막았으나, 늘어난 빚이 걱정되었다.

가난한 사람을 위한 2일장 같은 간소한 장례절차도 생겨야 할 것 같았다.



 



이틀 날 아침 6'백제화장터'로 옮겼으나, 납골당 비용도 걱정이었다.

정선에 수목장 하자는 내 뜻이 받아져 돈은 들지 않았으나, 먼길이라 어려움도 따랐다.

하필이면 정선 만지산에 도착할 즈음에는 장대 같은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십 팔년 전에도 폭우가 쏟아졌던 기억이 생생하다.

승용차가 계곡에 추락해 가족이 다치기도 하고, 질퍽대는 땅에서 치룬 장사는 생지옥이 따로 없었다.

공교롭게도 그 어머니 제사가 바로 오늘인데, 같은 날 치루는 수목장도 만만치 않았다.

우의를 입고 땅을 팠으나, 자세가 좋지 않았던지 허리를 삐꺽한 것이다.

은행나무 밑에 나무상자를 파묻고는 비닐로 덮어 비를 피하게 해두었다.

내일 가족들이 몰려오지만햇님 더 머물 형편이 되지 않았다.



 

 


그런데, 수목장은 30일 이내에 군청에 신고해야 한다는데, 장소가 임야라야 된다는 것을 뒤늦게 알았.

매장한 곳이 농지라 산소로 이장해야 할 처지가 되어버렸는데, 삐꺽한 허리의 통증은 시간이 흐를수록 아팠다.

앉거나 누우면 괜찮으나, 서있거나 걸어 다니면 죽을 맛이었다.


어머니 제사를 간소하게 지낸 후 자정이 지나 겨우 잠 들었는데느닷없는 전화가 걸려왔다.

모르는 전화번호였는데, 누가 이 깊은 밤에 전화를 거는 것일까?

전화번호를 바꾸어 아는 사람이 열 손가락에 꼽을 정도인데 말이다.

다시 전화가 울렸으나 받지 않았는데, 그 뒤로 잠이 오질 않았다.





간신히 한 두 시간 눈 붙이고 일하러 나가니, 그 때 또 다시 전화가 걸려왔다.

도대체 시도 때도 없이 거는 전화가 누구인지 궁금해, 안 받을 전화를 받았더니 햇님 엄마였다.

전화번호를 어떻게 알아냈는지 모르지만, 전화 건 사연이 기가 막혔다.

화장하는 걸 두 눈으로 보고도 "시신 묻을 때 빠트린 것이 있다며 추가로 유품을 묻을 수 없냐?"는 것이다.

하도 기가 막혀 "백제화장터에서 화장하는 걸 직접 보지 않았냐?"고 냅다 소리 질렀더니,

그때 사 생각났는지 갑자기 통곡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치매 증세가 심해진 스스로를 한탄하는 울음이라 마음이 편치 않았다.



 


허리가 아파 앉아서 땅을 파고, 뿔뿔 기어다니며 벌초하였더니,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렸다.

낫까지 들지 않아 잡초를 베는 것이 아니라 거의 뜯는 수준이었다.

아침 여섯시에 시작하여 정오 무렵 끝났으니, 한 두 시간에 끝낼 일을 무려 여섯 시간이나 걸린 것이다.

마치 시간을 맞춘 듯 인천의 형님가족이 산소에 도착했는데, 흙과 땀이 범벅된 내 몰골을 보고 기급을 한 것이다.



 


엄마! 오늘 오빠 좆 됐소” 

농담을 지껄여 다들 웃었지만, 너무 힘들었다.

형님이 준비해 온 음식을 차려놓고, 햇님 외할머니와 잘 지내라는 부탁을 드리기도 했다.

점심 먹으러 읍내 나가자는 형님 말을 사양한 채 만지산에 남았는데,

아픈 몸을 이끌고 상추와 고추 따느라 또 다시 두 시간 남짓 씨름한 것이다.





몸을 씻고 떠날 준비를 하니, 그때 사 집 주변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정선에 머문 이틀 내내 카메라 한 번 꺼낼 겨를이 없었는데,

마당 밑에는 도라지꽃이 만발하고 언덕에는 산딸기가 주렁주렁 달렸다.



 


꽃도 딸기도 다 싫고, 한시라도 빨리 정선을 떠나고 싶었다.

빨리 가서 눕고 싶기도 하지만, 가만히 앉아 운전하는 자세가 그 중 편하기 때문이다.


연극처럼 파란만장한 인생, 이제 그만 잠들고 싶다.

 

사진,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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