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정영신씨 심기가 불편한지, 사사건건 딴지를 건다.
경우에 어긋 난 일은 물불을 가리지 않고 좌충우돌 씹어대니,
작심하고 버르장머리를 고칠 심사인 것 같았다.



첫 번째 녹번동 출입을 삼가해 달라는 것과

두 번째는 똥차를 폐차하여 나의 발목을 묶겠다는 심사인 것 같았다.


 

죽는 게 두렵지 않아 겁날 것은 없으나, 동지의 눈치는 살피지 않을 수가 없다.

똥개처럼 납작 엎드려 조아리니, 둘이서 떠나는 마지막 촬영이라며 고창에 간단다.

얼씨구나! 따라가서는 내가 먼저 모양성 감옥에 집어넣어 버린 것이다.


 

고창은 나에게 악몽 같은 일이 있었던 지역이라 고창을 고생으로 부른다.

몇 년 전 고창 오일장 가던 고속도로에서 차가 고장 난 일이 있었다.

고창 톨게이트를 얼마 남기지 않은 지점에서 갑자기 차가 섰는데,

정영신씨와 둘이 땀을 뻘뻘 흘리며 갓길로 밀어붙여야 했다.



억지로 시동을 걸어 차는 움직였으나, 브레이크만 밟으면 시동이 꺼져 버렸다.

그 짓을 반복하며 고창 정비소까지 어렵사리 끌고 갔는데, 중병에 걸렸단다.

엔진을 드러내어 대대적인 수술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숨이 턱턱 막히는 더운 날씨에 고창 장터와 정비소를 여러 차례 오갔는데, 저녁 무렵에야 수술을 끝냈다.

수술비도 만만찮았지만 종일 더위에 시달리며 고생한 것은 생각만해도 아찔하다.


 

고창은 우리나라에서 최대의 고인돌 밀집지역이다.

선운사도 있고 동리 신재효와 미당 서정주도 있지만, 고인돌과 읍성만 돌아 보기로 했다.

장터는 고창 상하장만 들렸는데, 손님이 없어 다들 낮잠만 잤다.

고창 복분자와 수박 축제도 열렸지만, 볼게 없어 복분자 수확하는 농민만 찍었다.



고창은 전북의 삼신산 중 하나인 방장산 줄기가 이어져 있는 곳이다.

삼한시대 마한의 54개 소국 가운데 "모로비리국" 시초로

백제 때에는 "모양현"으로 불렀고 고려시대 이래 "고창현"으로 불렀다.




제일 먼저 들린 곳은 고창읍성, 즉 모양성이었다.

여지 것 전국의 절터나 유적지는 얼추 돌아봤다고 생각했는데,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곳이었다.

날씨가 더워 꼼짝하기도 싫었지만, 그냥 있을 수가 없었다.





고창의 산야는 전라북도의 다른 고을에 비해 낮은 야산으로 형성되어 있었다.

읍성의 얕은 산 능성을 올랐더니, 천국이 따로 없었다.

얼마나 시원하고 좋은지 숲 속에서 정영신씨를 덮치고 싶었다.




울울창창한 소나무 숲도 절경이지만, 대나무 숲은 모골이 송연했다.

더러운 세상, 이런 곳에 유배라도 보내주면 개가천선 할 것 같았다.



대개의 조선시대 성곽들이 평야지대에 돌로 쌓아 만들고 성문위에 누각을 지어,

적을 감시하고 전투를 지휘하며 성내에서는 관민이 함께 생활하였다.

그런데 고창읍성만은 나즈막한 야산을 이용하여 바깥쪽만 성을 쌓는 축성 기법을 사용하였다.

성문 앞에는 옹성을 둘러쌓아 적으로부터 성문을 보호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또한, 성내에는 관아만 만들고 주민들은 성 밖에서 생활하다가 유사시에 성안으로 들어와서

함께 싸우며 살 수 있도록 4개의 우물과 2개의 연못까지 만들어 놓았다.


 

이 성은 나주진관의 입암산성과 연계되어 호남내륙을 방어하는 전초기지 역할을 했다.

성의 둘레는 1,684m 높이가4~6m, 면적은 5만 여 평으로,

, , 북문과 성 밖의 해자 등 전략적 요충시설이 두루 갖추어져 있었다.

본래 성안에는 동헌, 객사 등 22동의 관아건물이 있었으나,

전화로 불타 성곽과 공북루만 남은 것을 12동의 건물을 다시 복원했다고 한다.


 

특히, 이 성은 여자들의 성벽 밟기 풍습으로 유명한데, 이는 한 해의 재앙과 질병을 막는 의식이다.

성을 밟으면 병이 없어 오래살고 저승길엔 극락문에 당도한다는 전설도 있다.

성 밟기는 저승 문이 열리는 윤달에 해야 효험이 많다고 하며 같은 윤달도 3월 윤달이 제일 좋다고 한다.

또한 엿새 날이 저승 문이 열리는 날이라고 하여 초엿새, 열엿새, 스무 엿새 날에 답성 대열이 절정을 이룬단다.


 

성을 "한 바퀴 돌면 다리 병이 낫고, 두 바퀴 돌면 무병장수하며, 세 바퀴 돌면 극락승천 한다."고 한다는데,

 성을 돌 때는 반드시 납작한 돌을 머리에 이고 성을 돌아 성 입구에 다시 그 돌을 쌓아 두도록 하였다.

여인들이 성을 밟아 다지고, 그 돌은 무기로 사용하려는 전략이 아닌지 모르겠다.


 

두 번째 들린 성은 무장면 성내리에 있는 무장현 관아와 읍성이었다.

이 성은 성의 남문인 진무루에서 무장초등학교 뒷산을 거쳐, 해리면으로 가는 도로까지 뻗었는데,

성의 둘레는 약 1,400m, 넓이는 43,847평이란다.


 

무장현은 지정학적으로 고창의 서부 지역의 중심을 이루는 곳으로, 이 지역은 대부분 해안가를 끼고 있다.

따라서 이 지역의 바닷길은 인력과 물자가 쉽게 이동할 수 있는 통로지만, 외적의 침입을 쉽게 받을 수도 있었다.

고려 후기와 조선 초기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고 백성들의 생계와 안위를 위해서는 읍성 축조가 불가피했을 것 같다.


 


남문과 동문 등 2개의 성문이 있었으며, 그중 남문인 진무루(鎭茂樓)가 복원되어 있었다.

성내에는 현감이 집무한 동헌과 '송사지관'이란 현판이 붙은 객사도 있었다.



무장읍지의 기록에 의하면 조선 태종 17년에 병마사 김저래가 여러 고을의 백성과 승려 등

주민 20,000여명을 동원하여 그해 2월부터 5월까지 만 4개월 동안 축조했다고 전해진다.


 


한 쪽에 도열한 현감 공덕는 우리나라에 몇개되지 않는 철제로 만든 공덕비도 있었다.

그리고 동학 농민혁명이 이곳 무장읍성에서 맨 처음 봉기했던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마지막으로 들린 고창 고인돌 유적지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규모가 큰 고인돌 군집으로

1.5킬로미터 안에 440여 기의 다양한 고인돌이 모여 있는 고인돌 박물관이다

이 고인돌군은 청동기시대에 이미 취락을 이루고 생활하여왔음을 엿보게 한다.


 

선사 시대 마을을 복원한 선사 마을도 있었는데, 5채의 움집과 2개의 망루가 지어져 있었다.

선사시대의 생활상을 엿 볼 수 있는 움집 내부의 모습도 꾸며 놓았더라.


 

난, 장거리 촬영 떠나기 전 날 밤은, 어린학생들 소풍가는 것처럼 잠을 이루지 못하는 징크스가 있다.

날밤을 까고 운전을 하니, 옆에 있는 사람이 얼마나 쫄겠는가?

고인돌 유적지 입구만 둘러본 후, 차에서 잠이나 자는 게 편할 듯 싶어 정영신씨만 들어갔다


 

몇 십 년동안 그 짓을 반복해 왔는데, 아마 죽을 팔자였다면 오래 전에 죽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나만의 비책 하나가 있다. 차 깊숙한 곳에 묘약을 숨겨 둔 것이다.

그게 무어냐 하면 바로 대마초다. 대마초를 피우면 생각이 깊어진다.

졸음이란 무료해서 오는 것인데, 한 가지 생각에 집중하니 잠이 올 리 없는 것이다.


 

그런데, 한 참을 자고 일어났는데, 정영신씨가 감감소식이었다.

차량이 들어갈 수 없는 지역이지만다급해 그냥 있을 수가 없었다.

아무리 차량이 들어 갈 수 없다지만, 농민들이 출입하는 비상통로는 있을 듯 싶었다.

오며 가며 살펴보니 옆으로 들어가는 농로가 보였다.

비상등을 깜빡이며 달려가니, 관리인이 우두커니 처다보았다.

찌거러진 차도 그렇지만 늙은 몰골이 불쌍한지, 그냥 못 본채 했다.



무난히 들어갔으나 유적지가 너무 넓어 아무리 살펴도 보이지 않았다.

오죽했으면 고인돌 무덤 귀신과 신방차렸다는 등 별의 별 생각이 다 들었다.

한참 으니, 지칠대로 지친 정영신씨가 나를 보며 반색했다.

여기까지 어떻게 왔냐기에, "오빠가 누고?"라며 가오를 잡았다.


사진, 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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