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부지! 외할머니가 위독해요아들의 전화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 분은 35년 동안 등 돌린 채 살아 온 옛날의 장모다. 비록 햇님 엄마와 이혼하였지만, 아들이 어머니와 외할머니를 모시고 살았으니 그 연이 끊길 수가 없었다. 그동안의 안부는 아들로부터 들어 왔지만, 차마 찾아뵙지 못했다. 자신의 운명으로 끝내야 할 비운의 삶을 딸이 똑 같이 이어받았으니, 얼마나 나를 원망하였겠는가?

 

아들 외할머니가 입원했다는 서북시립병원으로 찾아가니 죽은 사람 만난 듯 반가워했다. 싸늘하게 여윈 손에서 병세를 느낄 수 있었으나, 오히려 늙어 초라한 내 모습이 걱정되었는지 밥은 먹었냐?”는 말에 눈물이 핑 돌았다. 노환이지만 기도에 문제가 생겨 음식을 삼키지 못했다. 물 같은 죽도 삼키지 못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지만, 손자가 입에 넣어주는 죽은 고통스럽게 받아먹었다. 병상 옆에는 햇님이 어머니까지 앉아 있었다. 허리에 문제가 생겨 걸음도 제대로 못 걷지만, 치매증상이 생겨 병원에 왔다는 것이다. 다들 목숨은 살아 있으나 자식에게 고통만 안겨주는 죽은 목숨이나 마찬가지였다.


 

옛날 장모였던 김득금(94)씨는 처녀시절 김해 대저국민학교 여교사였다. 당시 교장선생으로부터 총애를 받아 한 번도 본 적 없는 교장선생의 아들 ()고영보씨와 결혼하게 되었단다. 그러나 아내와 헤어져 서울에서 생활한 고영보씨는 명문여대를 졸업한 신식 여성과 눈이 맞아버렸다. 외동딸 고외수(72)씨를 두었지만 고향의 아내에게 이혼을 강요하게 되는데, 기구한 운명은 그렇게 시작된 것이다. 딸 고외수씨는 아버지에 대한 증오심으로 아버지를 따라가지 않고 외톨이가 된 어머니와 함께 살게 되었다.

 

공군대령이었던 고영보씨는 군사 쿠데타를 일으킨 박정희 정권에 가담하여 군사혁명 재판관이란 악역을 맡았다. 당시 육군참모총장이던 장도영씨를 반혁명행위라는 혐의로 무기징역을 내리기도 했는데, 그 다음에는 공보부차관이란 직책을 맡아 일 년간 군사정권의 나팔수로 일 했으나 토사구팽의 전형이었다. 그렇지만 더 이상 쿠데타 집단에 가담하여 죄를 짓지 않게 도와 준 일이었다.

 

딸 고외수씨는 아버지에 대한 원한으로 성장할수록 성격이 날카로워 진 것 같았다. 가끔 아버지를 만나게 되면 하고 싶은 말을 사정없이 퍼부어 고혈압인 아버지가 뒤로 넘어 진적도 있었단다. 그러다 고외수씨의 두 번째 비극이 나와 연결된 것이다.


 

, 그 당시 아버지 몰래 직장에 사표를 내고 부산으로 도망쳐와 에덴공원에서 음악실을 운영하였다. 친구들과 어울려 자유롭게 사는 히피족의 삶을 추구했는데, 어느 날 어떻게 알았는지 아버지가 그 곳을 찾아오신 것이다. 오랜만에 만난 아버지는 후두암 말기라는 청천벽력의 소식을 주셨다. 죽기 전에 아들 장가라도 보내고 싶다, ‘에덴공원원장 ()백준호 장로를 찾아가 장가보낼 의논을 한 모양이었다. 그 때 중매한 여인이 바로 고외수씨였는데, 딱 잘라 거절하지 못한 것이 한이 된다. 나 때문에 아버지가 병에 걸린 것 같은 자책도 작용했지만, 평소의 흐리멍텅한 처세가 문제였다.

 

결혼식을 올린 후 음악실 밑에 신방을 차렸으나 하루도 편한 날이 없었다. 시집 온 신부는 그런 생활에 도저히 적응할 수 없었던 것이다. 방음이 되지 않아 온 방이 들썩거리는 시끄러운 하드락의 굉음도 괴로웠겠지만, 정해진 시간도 없이 손님들과 어울리는데다 여자 친구까지 끼어 음악을 들으며 대마초까지 피워댔으니, 아마 제 정신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렇게 쌓인 불만은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오는 친구들에게 쏟아내기 시작했다. 가까운 친구일수록 술상을 뒤집어 그 친구가 다시 못 오게 만들었다.

 

친구를 좋아하는 나로서는 햇님이 엄마와 헤어지고 싶었으나, 성질이 모질지 못해 헤어지지도 못했다. 어쩔 수 없이 그 곳을 떠나 마산 오동동으로 옮겨 음악을 전문으로 하는 학사주점을 차렸는데 대박이었다. 그 무렵 아들 햇님이가 태어나, 비로소 가정에 안정을 찾아 간 것이다. 그런데 부산 남포동으로 가게를 옮겨 오며 성업은 이어졌으나, 사진을 시작하게 되며 또 다시 불행이 시작되었다. 주인이 사진에 미쳐 돌아다녀 가게에 신경을 쓸 수 없으니 손님이 서서히 끊어질 수밖에 없었다. 남포동에서 서면으로 옮겨가며 영업을 하다 결국 다 털어먹고 서울로 올라 온 것이다.


 

사진을 시작하며 손님과 부딪힐 일이 없어 햇님이 엄마와 싸울 일은 줄었지만, 그 때부터 또 다른 경제적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어렵사리 월간사진에 일자리를 얻었지만, 박봉으로 방세도 내기 어려웠다. 한 번은 햇님이 엄마가 사무실에 쳐들어와 행패를 부린 적도 있었는데, 그 성격은 아무도 말릴 수 없었다. 순간적으로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하는 성격에 앞뒤 가리지 않지만, 악의나 뒤가 없는 단순한 사람이다.

 

그런데, 햇님이 엄마에게 아들을 데리고 외가로 내려가 있으라고 종용한 것이 대를 이어 이혼의 상처를 안긴 불씨가 되었다. 하필이면 이삿짐 싸는 날에 비 까지 내렸는데, 헤어지기 싫어 처마 밑에서 울고 있던 아들 햇님의 모습은 여지 것 지워지지 않은 천형의 그림자가 되어버렸다.


부산으로 식구들이 내려갔으나 내가 도와 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수시로 걸려오는 저주에 가까운 전화를 감내해야 했는데, 아들이 대학에 들어 갈 무렵, 용케도 삼성카메라에 계약직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사진 때문에 한 직장에 오래 버티지 못하지만, 아들 학비를 마련하기 위해 4년까지 버틴 게 자식에게 도움 준 전부였다.


 

본래 여자를 좋아하는 편이지만, 혼자 사니 더 외로웠던 것도 사실이다. 사진하는 여인에게 정을 주었지만, 심지어 사진 찍으러 들어간 오팔팔 여인에게도 정을 주었다. 그런 무질서한 생활로 결국 이혼을 요구했는데, 그 때부터 아내에게 저주의 대상이 되어버렸다.


그런데, 또 하나 불행의 시작은 아들까지 사진을 공부해 어려움을 자초한 것이다. 사진 전공으로 살아가기 어려운 것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지만, 패션사진에서 웨딩사진에 이르기까지 여러 업체에 전전하였으나, 쥐꼬리만큼의 보수에 노동력을 착취당하는 더러운 현실을 버텨내지 못한 것이다. 사회의 부조리에 맞서 사회운동에 뛰어든 것이 정의당에 입당하게 되었지만, 세상을 바꾸기란 계란으로 바위 깨기일 것이다.

 

그 별난 어머니의 성질을 참고 견디며 외할머니까지 모시고 힘겹게 산 세월을 어찌 말로 다 할 수 있겠는가? 내가 짊어 질 짐을 자식에게 떠 넘겼으니, 난들 마음 편한 날이 없었다. 그렇지만 평생을 눈물로 보낸 두 여인의 삶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닐 것이다. 요즘 같으면 자식을 포기하고 새로운 삶을 찾아가지만, 예전의 어머니들은 그렇지 않았다. 수많은 한을 참고 견디며 살아 온 것이 우리 어머니들의 운명인데, 그 여인들의 삶은 누가 보상할 수 있겠나?


이제 마지막으로 옛날 장모와 햇님이 엄마에게 보답 할 수 있는 길은 자식이 잘 살 수 있도록 돕는 일 뿐이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잘 못 규정지어진 사회의 모순이나 사진계의 잘못에도 당당히 맞서려 한다. 후세들이 고통 받지 않는 좋은 세상을 위해 이 한 몸을 불사르고 싶은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이 글은 비운의 두 여인에게 보내는 속죄의 글이지만, 어쩌면 비슷한 운명에 처한 수많은 여인들에 대한 위로이고, 사진하는 남편을 두어 경제적 어려움에 봉착한 아내들에게 드리는 위안의 글이기도 하다.

 

다시 한 번 비운의 여인들에게 사죄드린다.

 

사진,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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