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 파주 유적지 촬영을 떠난다는 정영신씨의 호출이 떨어졌다.
구체적인 갈 곳은 그녀만 알아, 네비의 안내만 따를 뿐이다.
제일 먼저 생각나는 곳은 용암사의 용미리마애불 입상이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제일 먼저 광탄면 용미리로 안내했다.






그 날은 비가 부슬부슬 나리는 분위기 좋은 날씨였다.
다르게 생각하면 운신이 불편한 궂은 날씨일수도 있다.
아마 가기 싫은 곳을 억지로 갔거나, 기분이 나빴다면 후자였을 것이다.
그때 상황이나 생각에 따라 판단도 달라진다.






용미리 마애불입상은 거대한 자연암벽을 그대로 조각하였는데,
머리 부분을 따로 만들어 얹은 것이 아쉽지만. 규모에서 압도적이다.
위압적인 규모의 형태는 좋지만, 얼굴에 비해 몸체가 너무 커 기형적인 느낌도 있다.
오른쪽의 사각형 갓을 쓴 불상은 두 손을 가슴 위로 올려 합장하고 있으나
두 마애불상의 양식적 특징에서는 거의 비슷하다.






두 번째 안내하는 곳은 법원읍의 신사임당과 율곡 이이 묘역이 있는 ‘자운서원’이었다.
자운산자락에 두 분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하여 세워진 ‘자운서원’에는
묘정비, 신도비, 이이선생상, 신사임당상, 능원 등이 있는데,
율곡기념관의 많은 부분이 어머니이자 예술가로 재능 있는 삶을 살았던
신사임당과 관련한 유물로 채워져 있었다.






능원에서 한 가지 풀리지 않는 의문은 대개 내외간의 무덤이 나란히 있는데 비해
제일 위에 이이 부인 노씨의 묘가 있고 그 아래 율곡 이이의 묘가 있었다.






대학자 율곡의 위업이야 거론할 필요가 없지만, 십만군사 양병설은 다시 생각케 했다.
젊은 시절에는 십만 군사만 양성하였다면 외적의 침략을 막아 달라졌을 것이라며
이이의 주장에 동조했으나 지금은 성호 이익의 반론이 더 옳다고 생각되었다.
십만군사 양성은 당시의 인구나 경제규모를 고려하면 무리였다.
만약 실행에 옮겼다면 살기 힘든 백성의 고혈을 얼마나 빨았겠는가?






나이에 따라 가치관이 달라지니, 세상이치에 답은 없는 것 같다.
더러 내 생각과 다른 것을 탓하기도 했으나, 다 부질없는 짓으로 생각되었다.






마지막으로 청백리로 알려진 황희정승 묘역을 찾았다.
문산 반구정로에 있는 황희선생 유적지는 갈매기를 벗삼아 말년을 보낸 반구정을 비롯하여
황희선생상, 방촌기념관, 월헌사, 방촌영당, 양지대, 등이 있다.
황희선생은 24년 동안 재상 직에 몸담으며 그 중 19년을 영의정으로 봉직했다.
팔순이 넘도록 관직을 지켰는데, 아무리 정치력이 뛰어났다지만 너무 오래한 것 아닌가?
나이가 들면 판단력도 떨어지지만, 후진들의 길을 막을 수도 있다.






정치인이나 의사, 법관들의 정년을 65세로 해야 한다고 페북에 올렸던 정승재교수의 말에 백 프로 공감한다.
정치판이 개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가장 큰 원인이 세대교체가 늦기 때문이다.






그리고 황희정승은 실록에 뇌물을 받았다고 거론된 것만도 열 차례나 되고
직책의 힘으로 비리를 무마시키거나, 역적으로 죽임 당한 박포의 아내와 통정을 한
사실도 있는데, 왜 청백리라 불렀을까?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젊었을 때는 청백리였으나, 나이가 들어 변한 것은 아닐까?






옛날부터 3대 거짓말로 처녀가 ‘시집 안 간다’는 말과
장사꾼이 ‘밑지고 판다’는 말, 그리고 노인이 ‘늙으면 죽어야지’라는 말을 꼽는다지만,
돌아오는 길에 스스로를 자책하며 “늙으면 죽어야지”를 곱씹었다.



사진, 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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