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사는 분명 경산데, 걱정거리하나 생겼다.
아들 햇님이가 장가가겠다며 색시를 데리고 나타난 것이다.

지난 번 선거유세장에서 유세 돕는 처녀를 얼핏 보았지만,
막상 마주앉아 보니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무 능력 없는 애비로서 그 뒷 감당을 어찌해야 할지 막막했다.
못 치는 사기지만, 사기 칠 여유도 없이 밀어붙이면 난 어쩌란 말이냐?






걱정은 다음 문제고, 갑자기 햇님이 엄마와 첫선 볼 때의 40여 년 전으로 필름이 돌아갔다.
무슨 말부터 해야 할지, 눈도 제대로 마주 치지 못하던 그때의 심정이었다.
새로운 가족이 눈앞에 앉았으니, 어찌 마음 설레지 않겠는가?

일단은 생각지도 못한 복덩이가 굴러왔으니, 표정관리하기 힘들었다.
나이가 40이 넘도록 두 노인 뒤치다꺼리 하느라 장가도 못 갔는데,
그 오랜 소원을 이루게 해 주었으니 얼마나 고맙겠는가?
부모님 근황을 물어보며 찬찬히 살펴보니, 참 예쁘고 착해보였다.
둘 다 착해버리면, 험난한 세상을 어떻게 살아갈지도 걱정 되더라.






조햇님과 며느리가 될 남지현은 정의당 동지로서 만난 남다른 인연이다.
어떻게 착한 젊은이들이 정의당의 싸움꾼으로 나섰는지도 이해되지 않았다.
세상을 바꾸겠다는 생각이 가상해 나까지 싸움꾼이 되지 않았던가?
생각이나 지향점이 같아 서로 큰 힘은 되겠으나,
살아가는데 필요한 돈과는 무관한 일이라 마음에 걸리기도 했다.

그런데, 아들의 구의원 출마에 따른 상흔이 채 가라앉지도 않은 즈음에,
밀어붙이는 결혼이라 미심쩍기까지 했다. 물론 둘 다 나이가 만만찮으니,
마음이야 급하겠지만, 사돈 상견례에 이어 8월25일 오전11시로 날짜까지 잡은 것이다.
혹시 속도위반으로 손자를 가지지 않았나 하는 의구심도 들었다.






7월14일 ‘하림각’에서 상견례가 있다기에, 내 딴엔 때 빼고 광내어 나갔다.
나에게도 드디어 돈이 아니라, 사돈이 생긴 것이다. 사돈!
‘사돈의 팔촌’이라거나 ‘사돈 남 나무란다’는 등 사돈과 관련된
여러 속담도 있듯이 사돈이란 가깝고도 먼 사이란 말일 것이다,
그러나 맺기에 따라 좋은 친구가 될 수도 있지 않겠는가?

사돈을 만나보니 무척 낯이 익었는데, 오래전에 한 번 만난 적이 있는 분이었다.
바깥사돈은 남선우씨, 안사돈은 김진희씨 였는데,
듣고 보니, 16년 전 영월에서의 천포문학 모임의 자리를 주선한 집 주인이었다.
그 때 단체사진 찍으며 거시기를 꺼내는 기상천외한 퍼포먼스를 했는데,
그 걸 여지 것 기억하고 있었다. 이 일을 어쩔거나..






사람의 인연이란 이렇게 연결될지 어떻게 알았겠는가?
그 당시는 서울에서의 직장생활을 끝내고 영월로 이사했을 무렵이라는데,
그 이후부터 두 내외가 오손 도손 영월에서 살았다고 하셨다.

그런데, 또 한사람 반가운 이산가족을 만난 것이다.
바로 햇님이 엄마 고외수씨 였다. 이 또한 얼마만이던가?
그 곱던 모습은 다 어디가고 이제 할머니가 되어 있었다.
그녀의 지난한 세월을 이야기하려면, 책 한권은 족히 될 것이다.






싸우기도 많이 싸웠으나, 미운 정이 더 무섭다는 것을 알게 한 여인이었다.
오직 자식하나 보고 악착같이 살았는데, 지금의 마음은 또 어떻겠는가?
처음으로 따뜻하게 손 한번 잡아주고 싶었으나, 쑥스러운지 피했다.
나를 만난 것이 죄가 되어, 그 동안 참 고생 많이 했다.
눈물 마를 날 없었던 비운의 여인이었다.
세상사 다 ‘새옹지마’란 옛말을 떠올리게 했다.






그 날 자하문의 ‘하림각’에서 한 상견례 덕에 맛있는 음식도 많이 먹었다.
이름도 모르는 음식이 즐비했으나, 단지 반주가 없어 아쉬웠다.
상견례가 끝나고, 다음 달 치룰 하림각 컨벤션센터 결혼식장도 둘러보았다.
너무 호화로운 결혼식장이라 마음에 걸렸다. 사돈만 없었다면 어림없었다.
식사비만 하객 일인당 5만원이라지 않는가?
그 자리에서 손잡고 입장하는 예행연습에다, 기념사진까지 찍었다.
주례는 정치적 대모 심상정씨가 맡기로 했단다.






그나저나 자식이 장가간다지만 애비로서 아무것도 해 줄 수가 없었다.
내 사정을 훤히 알아 바라지도 않겠지만, 최소한의 도움은 주어야 할 것 아닌가?

죽으면 관 값 하려고 통장 바닥에 묻어 놓은 50만원이 전 재산이었다.
보다 못한 정영신씨도 비상금으로 꼬불쳐 둔 백만 원을 내놓았다.
살림은 커녕 요강단지도 못 살 돈이지만, 그 돈을 자식에게 내 밀었다.
안 받겠다고 밀쳤지만, 기어이 손에 쥐어주었다.
신혼여행가서 아름다운 추억 하나 사 오라고...

“부디 잘 살아라.”

사진, 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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