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교(동경) 부근의 집단학살현장



일제는 조선의 국모를 시해하는 것에서부터 식민지화 하는 과정에서 조선인을 무참하게 학살했다.

31독립운동을 비롯하여 간도대학살 등 그들이 저지른 잔혹한 만행은 인간의 탈을 쓰고 할 수 없는 짓이었다.


난, 여지 것 일본인을 사람으로 보지 않았다.

가까운 나라지만 한 번도 일본에 발을 딛지 않은 것도, 박정희를 비롯한 친일파를 혐오하며 용납할 수 없는 것도 다 그 때문이다.

아마 죽을 때까지 일본에 대한 저주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중국이 일본을 싫어하는 큰 이유 중 하나도 난징대학살 사건이다.

1937년 중,일 전쟁 당시 중국의 수도 난징을 점령한 일본군이 저지른 대량 학살 사건은

6주 동안 20~30만명의 중국인이 잔인하게 학살당했다. 강간 피해를 입은 여성의 수도 2~8만명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조선인의 학살은 그 이전부터 이루어졌다.

192391일 일본 관동(간토) 지역에서 대지진이 발생하여 도시는 초토화되어 10만 여명이 목숨을 잃었고,

수십만 채의 가옥이 무너져 190여만 명의 이재민이 발생 했다.

건물과 다리는 무너지고 불길이 번지면서 도시는 총체적 혼란에 빠져들었다.

관동대지진(동경대지진)으로 민심이 동요될 것을 우려한 일본 정부와 군부가 조선인을 살해할 계략을 꾸민 것이다.

지진 발생 다음날 발족한 야마모토 곤노효에 내각이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서 계엄령을 선포해야 했고,

계엄령을 위해 위기의식을 조성하기 위해 일본에 거주하는 한국인을 이용한 것이다.



神奔川 방면의 철길에 버려진 한국인 학살 사체들,

일본 관헌과 눈이 뒤집힌 일본인들이 죽창과 몽둥이를 들고 한국인 사냥을 하고 있는 모습이다.



조선인이 관동대지진의 혼란을 틈타 폭탄 테러, 폭동, 방화, 강도, 강간, 식수에 독을 타는 등의

흉악범죄를 저지르고 있다는 소문을 조직적으로 퍼트린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유언비어의 전파에만 그치지 않고 그것을 확신시키기 위하여

유언반(流言班), 지휘반, 실행반 등의 공작대를 조직하여 그들로 하여금 방화, 독물투입, 투탄(投彈) 등의 테러 행위를 시켜

그것이 마치 조선인들이 자행한 것처럼 조작하였다. 일본 언론도 일본 정부와 군부가 조작한 거짓말을 보도했다.

 

흉흉해진 민심을 잡기 위해 일제가 날조한 유언비어는 삽시간에 일본 전역에 퍼져나갔고,

일본인에게 조선인은 반드시 죽여야 할 대상으로 한국인 폭동설을 그대로 믿었다.

이때부터 일본 군대와 경찰뿐 아니라 각지에서 만들어진 자경단이라는 자위 집단이 조직되어

조선인은 닥치는대로 죽창이나 총검으로 학살하기 시작한 것이다.

 

조선인들이 폭동을 일으켰다

조선인들이 우물에 독약을 넣었다

조선인을 찾아내 죽여라!”는 함성이 거리마다 울려 퍼졌다.



일본 관헌에 협력한 민간인 수사대 자경단, 이렇다 할 까닭도 없이 덮어놓고 한국인의 색출과 학살에 앞장선 민간인 수사대 자경단

    

 

경남 창녕 출신 한용선(23)쇠갈퀴로 개잡듯이’, 경남 함안 출신 차학기(40)죽창으로 복부를 찔려서’,

울산 출신 박남필(39), 최상근(68)곡갱이로참혹하게 학살됐다.

조선인처럼 보이기만 하면 가리지 않고 아무데서나 살해하고 시체를 강에다 던졌다.’

-한국인 학살에 동원된 일본 군인의 일기에서-

 

일본도로 목을 베고 죽창으로 찌르거나 해서 죽였다. 너무 잔인했다.

임신해서 배가 부른 여자도 찔러 죽였다.

아직 죽지 않은 사람은 선로 위에 늘어놓고 석유를 부어 태웠다.”

-한 일본 시민단체가 발간한 자료집에서-

 

나라 없는 민족의 설욕을 어떻게 다 말하나요.

옆에서 개죽음을 당해도 어디 가서 호소할 데가 없었어요.

당시에 조선인은 아무리 죽여도 괜찮은 사람이었어요.”

-지진 당시 도쿄 유학 중이던 나상윤 할머니의 말-

 

사람들은 죽음의 재앙 앞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기만 할 뿐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순간순간 다가오는 죽음의 그림자를 보면서 그저 공포와 불안에 떨었을 것이다.



 그토록 많은 사람을 학살하고도 시체 썩는 냄새는 싫었던지 모두 코를 막고 있다.



자경단의 살상 행위는 단순한 살인과는 거리가 있다.

오인해 살해된 자도 있지만, 고의로 놀이삼아 즐기면서 죽인 자가 부지기수다.

같은 살해도 살해의 수단, 방법에 의해 그 의미하는 내용에 엄청난 차이가 있다.

 

가장 보편적으로 목격된 것이 집단 처형 광경이다.

이 경우에는 누군가 갈고리를 휘두르는 등 시동을 걸면 일제히 가세하는 군중심리가 작용했다.

충동적인 부화뇌동 행태라고 해야 할 것이다.

죽창, 일본도, 갈고리 등 살상 가능한 모든 무기가 피해자의 머리에 내리 꽂히고,

귀를 찢었으며, 눈을 후벼내는 등 공동 분담식의 살해가 자행된 것이다.

살해를 분담함으로써 그 잔혹함조차 느끼지 못한 것이다.

사체에 대한 형용할 수 없는 능욕은 물론, 특히 여성에 대한 모욕 행동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란다.

 

이러한 학살 사건은 대부분이 불문에 부쳐졌고, 아직까지 진상이 명확히 드러나지 않은 사실로 존재하고 있다.

좀 더 윤택한 생활을 위해 일본으로 건너갔던 초기 이주자들과 조선인 유학생들이 그 재난의 희생자였는데,

당시 학살 당한 한국인 수는 일제의 공식집계만 66백여명, 비공식집계로는 2만여 명 이상이 학살당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국인 학살에 동원된 자경단의 무기들로 사건 뒤 東京神樂扳署에 압수된 것들이다.

 


 학살 당한 사람의 대부분은 시체조차 찾지 못했다. 일본 내각에서 조선인의 시체를 군대가 소각하도록 명령했기 때문이다.

또한 일본 정부는 군대와 경찰 등 관헌의 학살은 철저하게 은폐했다.

관동대진재에 관한 구체적인 사건 경위는 내무성 경보국에 의한 이른바 금지명령과 검열 때문에 해방될 때까지

일인들도 거의 모르고 있었던 극비사항이었다.

그러나 태평양전쟁에서의 패전을 계기로 일본 정부의 극비문서가 공개됨에 따라

관동대진재 때의 너무나도 끔찍한 우리교포 대학살사건 전모가 백일하에 드러나게 된 것이다.

 그러자 책임을 자경단에 돌리면서 일부 자경단원을 형식상 재판에 회부했지만, 증거 불충분이라는 이유로 모두 석방했다.

 

일본은 난징대학살처럼, 관동대학살 또한 아무도 처벌하지 않은 채 넘어갔다.

그로부터 95년이 지난 오늘까지 일본이 진심으로 관동대학살을 사과한 적 있었던가?

일본군 '위안부' 문제도 마찬가지지만 하시마섬 강제징용 등 저지른 패악이 한 둘이 아니다.

일본은 하루빨리 잘못된 것을 인정하고, 사과는 물론 응분의 배상을 해야 한다.

 

/ 조문호

[사진자료는 1978년 동아일보사에서 발행한 사진으로 보는 한국백년에서 스크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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