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더운 쪽방을 탈출하여 찾아 간 정선 만지산은 휴가지가 아니라 전쟁터였다.
몇일 내내 술에 절어 살아야 했고, 제 마음대로 자란 풀과 나무 벌목하느라 땀을 뻘뻘 흘리는 곤욕을 치러야했다.

그런데다 원주민과 이주민 사이에 벌어진 물 전쟁이 2년이 가깝도록 해결의 조짐조차 없으니,

해도 해도 너무 한, 편치 않은 여름휴가가 되었다.

지난 3일 이른 아침 도착한 만지산 집은 잡초에 뒤 덥혀 있었다.
온 종일 벌인 잡초와의 전쟁으로, 온 몸에서는 땀이 빗물처럼 흘러 내렸다.
그러나 갈증으로 들이키는 시원한 물맛이 유일한 보상이었다.
난, 오나가나 전쟁을 치룬다. 사람 사는 곳이 어쩌면 전쟁터가 아닌지 모르겠다.






이튿날은 반가운 손님들이 찾아왔다.
인사동에서 ‘유목민’을 운영하는 전활철씨와 홍천에 사는 화가 양서욱씨가 만지산으로 찾아 온 것이다.

덕분에 일에서 잠시 해방될 수 있었지만, 그 날은 술과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기를 구워 이른 시간부터 술판이 벌어졌는데, 옆집에 사는 윤인숙씨까지 합류하여 술판은 무르익었다.

역시 술자리에는 여성이 있어야 생기가 돈다.

옆집에 사는 윤인숙씨는 이사 온지가 2년 가까이 되었지만, 술자리에 함께 하기는 처음이었다.

가끔 마주치면 눈인사 정도 나누었지만, 함께 하기를 꺼려했다. 혼자 사는 여자라 신경 쓰이기도 했지만,

집이 붙어있어 수시로 들락거리다 보면 서로 불편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동내 소문도 일조했다.

남자 녹이는 킬러라는 소문이 파다했는데, 주변에서 “마음 약한 작가님은 특히 가지 말라”며

만날 때마다 신신당부했는데, 은근히 당하고 싶은 충동마저 일었다.






마침 윤인숙씨가 술자리에 인사하러 왔기에 자리에 앉기를 권했는데, 무척 친절한 분이었다.

사내들이 굽는 고기가 신통찮았던지, 대뜸 자기 집으로 자리를 옮기자고 했다.

우리 집이 구멍가게라면 그녀 집은 슈퍼마켙이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 테라스까지 만들어 놓은 주변 환경에 주눅 들었다.

밤 늦도록 전활철씨의 기타소리와 윤인숙씨의 북소리가 만지산을 쩌렁쩌렁 울렸다.

활철씨의 노래솜씨야 익히 알고 있었지만, 윤인숙씨의 소리도 보통은 아니었다.

급기야 전활철씨 와는 친구로, 양서욱씨와는 남매로 둔갑하는 친한 사이가 되어버렸다. 그의 친화력에 고개가 꺼덕여졌다.

사람 사는데 친화력보다 더 좋은 게 없으나, 시골 사람들에게는 사람을 잘 꼬시는 것으로 인식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친화력의 양면성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이 깊은 산골에서 여자 혼자 살려면 그러한 성격이 아니면 살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동네 물 분쟁에 시달리며 남자를 잘 꼬들기는 요녀로 둔갑한 것이다.
윤인숙씨가 기존 집을 사서 들어 올 때에 이미 동내 지하수가 연결되어 있었으나,

동네에서는 물 사용 기금으로 200만원을 내놓으라고 했다. 그런 법이 어디 있냐고 반발하자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라야 한다“며 동네에서 물을 끊어 버린 것이다.

난, 서울에 살아 한 달에 한번 밖에 들리지 못해 지하수에 대한 권한 일체를 동네 결정에 위임한 처지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형편이지만, 딱하기 그지없었다.

그 지루한 싸움이 오래 지속되어 정선 읍내에서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좋지 않은 소문이 파다했다.

신판 봉이김선달이라는 바아냥까지 받아야 했는데, 이제 제발 물싸움을 종식시키고 싶었다.






그 날 밤은 술에 취하고 분위기에 취해 완전히 맛이 갔다.
방으로 돌아와 정신없이 골아 떨어졌는데, 아침에 일어나니 옆집에서 밥 먹으러 오란다며 양서욱씨가 전했다.

가보니 친절하게도 가마솥에다 닭죽을 끓여 아침상을 준비해 둔 것이다.

자기는 정선에 손님 맞으러 가야 한다며 “서욱아! 잘 챙겨먹고 전화번호 두고 가”라는 말을 남기며 사라져버렸다.

싹싹하기도 하지만, 부지런한 여자였다.

전활철씨와 양서욱씨가 떠나 간 후 어머니 산소에 벌초하러 갔다.

내일이 어머니 기일이라 서울에서 가족들이 몰려오기 때문이다.

제초기와 기계톱만 있다면 간단한 일이지만, 낫과 톱으로 일하자니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무덤 앞을 가린 잡목들 베느라 얼마나 힘들었는지, 숨이 막힐 듯 헉헉거렸다.






이틀 날은 서울에서 영희 누님과 일산에 사는 동생 창호, 그리고 부산에 사는 여동생 진옥과 매제 김종성씨가 찾아왔다. 

교회에 다니는 동생들은 다들 묵념만 올렸지만, ‘엄마 덕에 반가운 가족들을 만나게 되었다“며 다들 좋아했다.
산소에서 내려 와 수박으로 더위를 식히는 자리에서 동생 창호가 말을 꺼냈다.

망가질 대로 망가진 내 꼴이 안 서럽던지, ‘형님 몸보신 좀 시켜야 되겠다’며 횡성한우 먹으러 가잖다.

정선에서 횡성까지 만만찮은 거리인지라, 밥 한 끼 먹으러 먼 거리를 간다는 자체가 이해되지 않는 일이지만,

모처럼의 제안이라 서울 가는 길 마중가는 셈치고 따라 나섰다.






제사 준비로 서둘러 돌아 와야 했는데, 이웃 최종대씨로 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오늘 저녁, 정대식씨 집에서 집들이가 있으니 참석하라는 내용이었다.

동네사람들이 모인자리에서 물 문제를 해결해야 겠다는 생각에서 만지산꼭대기로 올라갔다.

길이 너무 가파러 중간에서 시동이 꺼지는 일도 생겼지만, 주변 경관 하나는 끝내 주었다.

새로 지은 집은 조립주택 비슷했지만, 하늘 높이 뻗은 소나무 몇 그루가 산세의 위용을 대변하고 있었다.






다들 모여 술잔을 나누고 있었다.

동네 물 분쟁으로 얼굴들고 살 수 없다며 이제 타협점을 찾아 마무리 짓자고 했지만, 손톱도 들어가지 않았다.

물 기금으로 적립해 두기 위해 돈을 받는다지만, 모터가 고장나면 수리비까지 읍사무소에서 대 주는데, 기금은 어디다 쓸려는지 모르겠다.

새로 입주한 분의 입장을 지지하는 사람은 아랫만지 최영규씨 뿐이었다.

이 친구는 울 엄마 무덤까지 공짜로 빌려 준 인심 좋은 친구다. 그러나 동네 어른으로 사리대로 말했다가 주민들에게 따돌림을 당했다.

누가 해코지했는지 그 쪽으로 가는 물 라인에 구멍을 뚫었다는 이야기도 했다. 왜 이렇게 무서운 동네로 변하는지 모르겠다.






최영규씨 내외와 해결 방안을 찾기 위해 우리 집으로 내려왔다.

마침 물 논쟁 당사자인 윤인숙씨 댁에 술판이 벌어져 그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 곳도 손님이 찾아와 흥청댔다.

마당 한 쪽에 술상을 차려 집주인과 찾아 간 세 사람이 앉았지만, 실마리는 보이지 않았다.

그동안 200만원을 내 놓기도 했으나, 추가 공사비로 50만원을 더 요구해 무산되기도 했고,

결국은 200만원이나 들여 모터를 설치해 냇물을 끌어 올려 쓰지만, 가물면 그 물도 끊길 수밖에 없었다.

윤인숙씨도 여러 차례 자기주장을 굽히려 했지만, 아랫만지 장영서씨가 거듭 만류하고 나섰다고 한다.

어쩌면 갑질의 전형을 뜯어고치려 한 장영서씨가 일을  더 꼬이게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자기의 얄팍한 지식을 내세워 지역민들을 너무 무시했기 때문이다.

주민들 자존심을 건드려 수습의 실마리를 잃은 것인데, 결국은 장영서씨 댁 물도 끊기고 말았다.


물 기금을 확보하기 위해 가구당 30만원씩을 추가로 걷기로 했는데, 장영서씨가 못 내겠다며 버텼는데,

차라리 물을 먹지않겠다고 말한 것이 화근이었다. 정말 물을 잘랐는데, 이 더위에 물을 끊는다는 것은 살인행위나 마찬가지다.

이제 다시 물을 먹으려면 200만원을 내야하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지경이다.

집을 팔고 이 지역을 떠나겠다지만, 집 값조차 만만찮으니 쉽게 살 사람이 나서지도 않는다.






그 자리에서 최영규씨에게 말했다.
산골마을이 유난히 많은 정선군에서 지하수를 직접 관리하도록 건의하자고 했다.

군에서 지하수를 파주었으면, 지역민에게 맡길 것이 아니라 직접 관리하라는 것이다.

집집마다 계량기를 설치해 일반 수도요금처럼 군에서 징수해야 된다는 말이다.

그동안 지하수에 대한 분쟁은 귤암리 만지골 뿐 아니라 숱하게 많았는데, 언제까지 뒷짐 지고 남의집 불구경 하듯 보고만 있을 것인가?

수도요금을 징수하는 대신 수질검사도 틈틈히 하여 식수인지 허드렛 물인지도 주민들에게 알려 주어야한다.

지금은 물사용료 조로 모터 돌린 전기요금을 균등하게 나누어 내지만, 일반가정과 농가의 물 사용량이 같을 수도 없다.

어쨌든 얼굴 들기 부끄러운 물 분쟁을 이제 끝낼 수 있도록 정선군에서 적극 나서주기 바란다.

지역민들로 부터 따돌릴 것을 걱정했는지, 최영규씨는 나더러 나서지 말라는 충고도 했다.

그렇다면 이일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겠는가? 언제까지 옆집과 물도 나누어 먹지 못하는 이 야박한 삶을 살아야 하는가?
지금도 마을 어귀에는 “인심 좋은 마을 귤암리”라는 오래된 글이 돌에 새겨져 있다.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인심 좋은 귤암리가 되도록, 다 같이 한 발씩 양보하자.






자정이 가까워서야, 제사지내러 우리집에 돌아올 수 있었다.
술이 취했으나 정신을 차릴 수밖에 없었는데, 변압기가 터져 형광등이 나가버렸다.
부득이 제사상을 마루에 차렸는데, 어두워 유리컵이 방바닥에 떨어져 박살난 것이다.

어두운 방에서 한 조각 한 조각 유리를 찾아가며 파편을 쓸어 모으는 일은 숱한 인내를 요구했다.

제사상 차리는 정성을 엉뚱한 곳에 쏟는다는 생각도 들었으나. 술 깨도록 귀신이 보낸 일거리라 생각하니 마음 편했다.
큰 절을 올리며, 제발 살기 좋은 동네로 되돌려달라고 빌었다.


사진, 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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