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일은 노무현대통령서거 8주기 시민문화제가 광화문광장에서 열렸다.
'노무현재단'에서 주최한 이 시민문화제에는 ‘광화문미술행동’에서도 참여하는 행사라 가보지 않을 수 없었다.

더구나 정영신씨가 기록한 ‘촛불광장 기록전’에도 관심이 많았다.

이날은 이재명 성남시장과 안희정 충남지사의 토크쇼도 있고, 조관우를 비롯한 가수들의 공연과

명계남의 글씨전 등 다양한 행사가 열렸지만, ‘광화문미술행동’에서 펼치는 행사도 많았다.
‘시민과 함께하는 예술난장’으로 정영신의 ‘촛불광장 기록전’을 비롯하여 목판화찍기,

여태명, 정고암, 김성장씨의 서화 퍼포먼스, 호남좌도필봉농악의 흥겨운 풍물놀이 등으로

오후8시까지 시민들과 신명난 예술난장을 펼치기로 되어 있었다.





오후1시 무렵 도착하여 지하철 경복궁역에서 광화문광장으로 들어왔다.
새 정부가 탄생하고 처음 찾은 광장이라 감회가 새로웠다.

지난겨울 촛불시민과 함께했던 예술행동의 노력에 힘입어, 그 꿈이 현실로 성큼 다가오지 않았던가?.

그러나 광장 곳곳에 걸린 노무현대통령의 모습에 마음이 아팠다.

이 기쁨을 함께 나누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무대에는 공연준비로 바빴지만, 시간이 일러 시민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짙은 녹색 잔디 위로 오가는 여인네들의 파라솔 든 모습에 그리운 향수가 묻어났다.






지난겨울 ‘바람 찬 갤러리’로 활용되었던 세종대왕상 뒤편에는 대형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지난 3월4일 나를 비롯한 사진가 열 한명이 참여했던,

‘역사, 그리고 광장민주주의’전이 다시 걸려 있었는데, 당혹스러웠다.

사전에 이야기를 듣지 못해 해당 작가들에게 연락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진행동’ 실무를 맡았던 정영신씨에게 연락했으나, 그도 모르고 있었다.

아무리 현수막전이라도 다시 전시하려면 작가들의 허락을 받아야 했다.

모든 걸 협의하지 않고 독단적으로 처리하는 김준권씨가 원망스러웠다.

작가들에게 연락하여 양해라도 구하려 '촛불광장기록전'이 열리는 전시장으로 갔다.





그런데 그 전시장 한 쪽 벽에는 지난 3월 전시한 ‘촛불역사전’ 사진이 또 붙어 있었다.

당시 전시 끝날 때 참석한 사진가들은 자신의 작품들을 챙겨갔으나,

나머지는 모아 자료로 보관하라며 주었는데, 그 걸 다시 내 걸었던 것이다.

‘광화문미술행동’의 기록은 내 사진이 대부분이지만, 일부 작가들에게는 양해를 구해야 했다.

뒤늦게 알았지만, 이 달 초 ‘나무화랑’에서 열렸던 ‘100일간의 기록’ 출판기념전에도 내 걸었다.

마무리 전이라 모르는 채 넘어가려다, 후배사진가의 항의전화 둘러대느라 체면 구겨야 했다.






더 황당무계 한 것은 ‘촛불광장 기록전’에 출품한 사진가의 이름이 없었다. 

주인공인 정영신씨 이름은 눈을 씻고 찾아도 보이지 않았다.

사진가는 필요없고, 행사의 자료로 활용하겠다는 심보였다.

화가 머리 끝까지 치솟았다. 이 건 작가를 무시하는 것 보다 사진 자체를 우습게 보는 처사였다.

김준권씨를 만나 고함을 지르기도 했으나, 분을 못 삭여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실수로 누락되었다지만, 말이 되지 않았다.


현수막 만들면 제일 먼저 들어가는 것이 전시제목과 작가이름 아니던가?

제목만 생각나고, 작가 이름은 ‘광화문미술행동’인줄 알았던 모양이지.

“이런, 개 씨나락 까먹는 소리하고 자빠졌네”






그들 부탁대로 정영신씨는 전시작을 백점이나 정리하여 파트별로 편집해 주었으나, 30점만 걸어 놓았다.

그럴려면 사진을 만들어 줘야 하는데, 원본 파일을 보내달라는 자체가 의심스러웠다.

처음 이 전시를 추진할 때, 이인전을 원했지만, 다른 사진가가 없는 둘 만의 전시가 마땅찮아 난 빠졌다.

사실상 정영신씨는 촛불집회 기록에 전념했지만, 난 ‘광화문예술행동’에 초점을 맞추었으니 정영신씨가 하는 것이 맞았다.

전시장 바닥에 퍼져 앉아 장경호씨 막걸리를 축냈는데, 괜히 장경호씨에게 신경질 부리며 분을 삭이지 못했다.

‘노무현문화재단’의 추모행사를 방해할 수 없어 끝나는 시간까지 기다려야 했다.

현수막과 사진을 모두 끌어 모아 불태우는 화형 퍼포먼스로 마무리 하리라 마음먹었다.

화난 상태에서 급하게 마셔대니, 술이 금세 취했다.


그런데, 이재민씨 등 여러 명이 촛불역사전을 철거하기 시작했다.

난 사진을 가져가는 줄 알고, 못 가져간다며 사진을 찢기 시작했는데, 바람 때문에 다시 설치한다는 것이다.

미안한 마음으로 다시 앉았지만, 현수막을 보니 ‘광화문미술행동’이 ‘광장예술 네트워크’로 이름이 바뀌어 있었다.

엿쟁이 마음대로 하는 짓을 누가 말리겠는가?  

다 끝났는데 작업실로 돌아가지 않고, 지금 정치하겠다는 이야긴가? 에라이~






난, 혼자서 장난치는 꼴은 죽은 ‘민사협’의 김영수 하나만도 지겨웠다.

이사회나 규정은 형식적으로 두고 혼자서 갖고 놀다 결국 다 말아 쳐 먹고,

죽으면서도 자식들 앞세워, 마누라처럼 보살피던 제자 가슴에 대못 꽂지 않았던가?

김대중, 노무현 정권 때도, 사진계 혜택은 혼자 다 처 먹었지만, 결국 돈이 그를 망쳤다.

내가 죽은 사람을 욕 해대는 것은 친구인 개인을 떠나 ‘민사협’ 아니, 사진계를 말아 먹었기 때문이다.

말은 민주, 민주 하면서 하는 짓은 북한보다 더 했다. 결국 지금 그 짓 하자는 것 아닌가?


이것이 청산되어야 할 대표적인 적폐다. 바로 독제 말이다.

그리고 이런 공적인 일에는 사욕이 끼이면 절대 안된다. 지금 생각하니, 처음 깃발 들 때부터 계산된 것 같다.

이용 당하기만 한, 부대표 류연복씨가 끌어 갔다면 이런 일이 생기지도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필봉농악의 풍물소리가 울려 퍼졌다. 기분 전환 할 좋은 기회다 싶어 놀이마당으로 갔다.

신나게 춤도 추고 미친 듯 사진도 찍으며 현장에 몰입했다. 바닥에 누워 낮게 보니 꼬맹이도 예쁘게 보이고,

올려 보니 광대의 콧털 까지 보이더라. 한 삼 십분 동안 예쁜 놈만 무차별 사격하는 만행을 저질렀는데,

경찰이 잡아가지 않는 것 보니 세상이 참 좋아졌더라. 대통령이 바뀌어 그런가?

전시장으로 나오니 많은 분들을 만날 수 있었다. 강민 시인과 소설가 김승환선생, 김낙영시인,
화가 임옥상씨를 만났고, 참여 사진가인 박영환, 김문호, 하형우씨를 만나 하소연하기도 했다.


판화가 류연복씨를 따라 갔더니, 정고암, 이광군, 최석태씨 등 여러 명이 ‘종로빈대떡’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일을 마무리하려면 더 마실 수가 없었다. 빠져 나가 사우나탕에서 두 시간 가량 잤다.





그러나 술이 깨고 나니, 생각을 달리해야 했다.

'광화문광장'에서는 소각 할 수 없을뿐더러, 함께했던 많은 분들께 걱정 끼치기 싫었다.

집에는 보관 할 장소가 없으니, 차를 가져와 소각할 장소를 찾아야 했다.

오후 여덟시가 넘어서야 광화문에 다시 나왔는데, 그 때까지 끝나지 않고 있었다.
차안에서 기다렸는데, 뜻밖에도 ‘서울문화투데이’ 발행인 이은영씨가 차 문을 두드렸다.

눈도 밝지, 어두운데 어떻게 보았을까?

다음 달에 신문사 주최로 ‘87민주항쟁’ 사진전을 하고 싶다는 의견을 주었다.

‘눈빛출판사’에서 사진집을 만든다니, 한 번 협의해 보기로 했다.






좀 있으니 류연복씨가 짐을 챙겨와 차에 실어 주었다.

사진과 현수막은 챙겨 왔으나, 아직 처리해야 할 것들이 남았다.

‘87민주항쟁’ 현수막을 비롯하여 사진이 삽입된 현수막은 모두 폐기 처분하고,

컴퓨터에 보관 된 작가들의 사진 파일을 전부 파기해 주기 바란다.

만약 이후에 다른 인쇄물이나 어디에서라도 사진이 발각되면, 그냥 두지 않을 것이다.


난 이미 끝난 인생이지만, 더 이상 사진인들의 권익이 훼손되어서는 안된다.

잘 못 된 것은 바로 잡아야 하니, 다들 오해 없기 바란다.

사진, 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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