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처럼 시간 내어 정선 만지산으로 떠났다.
농사일 마무리하고 천천히 돌아올 작정이었으니, 마치 휴가 떠나는 기분이었다.
귤암리로 접어더니, 잔잔한 동강의 물결이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혔으나,
텃밭의 붉은 복사꽃이 그만 들뜨게 만들었다.





장모님이 좋아하는 살구나무를 몇 년 전 심었는데, 살구가 아니고 복숭아였다.
묘목장사가 속였는지, 얼치기였는지는 모르겠으나, 복숭도 먹지 못하는 탱자 같은 게 열렸다.

그러나 꽃의 미색 하나는 천하의 양귀비가 따르지 못할 정도로 귀가 막혔다.
얼마나 강렬한 정염을 토하는지, 온 몸이 부르르 떨린다.
만약 그 꽃이 여인네였다면, 사내들 상사병 여럿 났을 것이다.
비록 열매는 맛보지 못하지만, 봄마다 나를 들뜨게 하는 꽃 중에 꽃이다.






올해는 너무 늦어 만나지 못할 줄 알았는데, 나를 기다린 듯 시들지 않았다.
또 하나 기다리다 시들어가는 꽃은 조팝꽃이었다.
심을 때는 어떤 꽃인지도 모르고 이름이 좋아 심었는데, 이 꽃도 한 미색하는 꽃이다.
해 마다 윗만지골 최종대씨가 씨를 받아 갔으나 번번히 실패하여 마음 태운 꽃이기도 하다. 


지난달 몽우리 졌던 목련은 할머니 살결 같은 꽃잎만 흩뿌려 놓았고,
벚꽃도 진달래도 다 쓸쓸하게 작별을 고하고 있었다.






그나저나 꽃 타령에 날 셀 일이 아니다.
옥수수 심을 밭떼기 파 뒤집을 일 생각하니 아득했다.
옛날엔 소가 쟁기 끌어 뒤집었고, 요즘엔 대개가 포크레인으로 뒤집는데,
늙은이가 곡갱이로 파 뒤집어야 했으니, 그 꼴이야 보나 마다다.
한 고랑도 못 파고 헉헉거리며 퍼져 않아야 했다.


농사지어 돈 벌기는 커녕, 옥수수 나누어 먹는 게 고작이지만,
땅을 놀려서는 안 된다는 농부의 마음으로 생고생을 하는 것이다.
이건 휴가가 아니라 중노동이었지만,
모처럼 쪽방에서 벗어나 자연과 어울리기에 휴가로 치부한 것이다.






날씨조차 가물어 애를 태워야 했다.
한 달 전에 뿌려놓은 씨앗은 이제 겨우 움을 튀우고, 부추와 잔파는 성장을 멈추고 있었다.
물 퍼 나르느라 똥줄 타게 오르내려야 했는데, 지하수라도 있으니 가능했다.

몇 해 전만해도 슬피 우는 소쩍새 소리에 넋 놓고 쉬기도 했으나,
언제부터인가 소쩍새도 종적을 감추어 버렸다.
사람들이 뿌리는 농약 냄새가 싫어 떠났는지, 내가 싫어 떠났는지는 모르지만,
가끔은 그 울음이 그리워진다.

땅 파고 물주며 파종하는 일만이 아니라,
고사리도 꺾어야 하고 산에 돌아다니며 두릅도 따야 했다.
쌉쓰름한 두릅 안주로 소주 한 잔하는 맛도 일품이지만,
두릅 좋아하는 정영신씨가 신신당부한터라 각별히 신경 쓰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혼자 쓸쓸히 지내시는 이명동선생께 문안인사도 드려야 하고,
동자동 사랑방 식구들도 맛보이려면 많이 따야 했다,


높은 가지 꼭대기에 핀 순이라 따기도 만만치 않지만,
자칫하면 가시에 사정없이 찔리기도 한다.
결국은 량이 모자라 최종대씨가 따 놓은 두릅까지 얻어 와야 했다.






그러나 만지산에 어둠이 몰려오면 한결 여유로워진다.
낮에는 땀을 흘렸으나, 밤이 되면 추워 군불을 지펴야 한다.
타닥타닥 타 들어가는 불길을 지켜보며, 이런 저런 생각에 빠져드는 맛도 괜찮다.
고상한 명상에 빠져드는 것보다, 천박한 공상이 더 재밋다.
아무도 없는 산중에 처녀귀신이 느닷없이 나타나 수작 부리는 따위의...

일을 마치고 방에 들어가 늦은 저녁을 먹었지만,
아무리 시장이 반찬이라지만, 목구멍에 도통 넘어가질 않았다.
올 때 사온 일회용 곰탕을 끓였는데, 김치가 없으니 니 맛도 내 맛도 아니었다.

 
동자동처럼 빵으로 해결할 생각도 했으나, 힘쓰려면 밥을 먹어야 한다는 생각에
밑반찬도 없이 카레나 짜장 등 인스턴트 식품을 골고루 사왔는데,
끼니 때마다 곤욕을 치룰 수밖에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어머니 산소 갈 때 가져가는,
한 잔 밖에 나오지 않는 샘플용 소주 두병을 꺼내와 곰탕을 안주로 먹어야 했다.






서울생활이 디지털 삶이라면, 만지산은 아날로그 삶이다.
인터넷도 연결 되지 않지만, 핸드폰까지 꺼 버렸으니 세상과는 완전히 단절된 시간이다.


돌아오며 두릅 얻으러 찿아 간 최종대씨 내외를 만난 것 외에는
몇 일 동안 사람 한사람 보지 못했다,
사람을 만날 수 없으니 사진 찍을 일도 없지만,
습관적으로 일기장에 보탤 동강풍경과 사물사진만 몇 장 찍었다.


마치 무인도에 귀양 온 듯, 인적 없는 산중이지만,
어쩌면 저승이나 천국이 이러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모든 근심 걱정을 접어버리고, 스스로를 돌아보는 소중한 시간을 만들었다.
지난 가을에 동자동으로 왔지만, 한 가지 버리지 못한 것이 바로 사진이었다.
진솔한 사진을 담고 싶은 성취욕이 마음 한 구석에  똬리 틀고 있어,
그 욕심까지 과감하게 버리기로 작정했다.


동자동 사람들과 어울려 마지막 황혼을 즐기다, 조용히 돌아가고 싶다.


사진, 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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