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4일 오후6시부터 인사동 ‘풍류사랑’에서 고 문영태 화백을 추모하는 화집 및 자료집 발간을 위한 편집회의가 열렸다.

문영태화백의 미망인 장재순여사를 비롯하여 김진하, 김정환, 박 건, 박불똥, 변승훈, 이인철,

장경호, 최석태씨 등 열 명이 모여 회의를 진행하며, 즐거운 만찬의 시간도 가졌다.
이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김진하씨가 대충의 기획안을 짜 왔으나,

평소 가까웠던 분들의 글을 받자는 제안이 나와 다들 공감했다.

이윤수선생의 머리말에 더해 백기완, 주재환, 유흥준, 류연복, 박재동씨 등 생전 일화를 담은

글을 추가로 받기로 하고, 글이 어려운 분은 미술평론가 최석태씨의 인터뷰로 정리하기로 했다.

문영태 작품세계만이 아니라 민중미술 운동가이며 기획자로서 기여한 부분과 함께,

사진 공동 작업이었던, 분단풍경 ‘경의선’ 사진도 수록해야 했으나,

사진가 이지누씨가 당시의 필름을 분실하였다는 전갈에 당혹스러웠다.

당시 ‘눈빛출판사’에서 발간된 사진집이 남아 그나마 다행이었다.

5월까지 자료와 원고를 마감하여 10월 초순경 발행하기로 했는데, 큰 어려움은 없을 것으로 보였다.

평소 가까운 분들과의 일화를 나누는 중에 문화백의 술버릇에 대한 이야기가 나와 모두 한바탕 웃었다.

문화백이 살아생전 술이 취하면 무의식적으로 옆 사람 머리를 쥐어박는 습관이 있었다.

상대로서는 기분 나쁘지만, 악의 없는 장난기로 넘겼으나, 한 번은 임자를 만난 것이다.

성질 고약한 콧수염 사진가 김영수가 마침 옆 자리에 앉게 된 것이다.

처음 한 번 쳤으나 성질을 내며 하지 말라는데도, 또 웃으며 머리를 친 것이다.

갑자기 벌떡 일으난 김영수가 앉아있는 문영태의 머리를 사정없이 발로 쳐박아 심한 상처를 입히고 말았다.


김영수에게 당한 사람은 한 두 사람이 아니었다.

한 번은 인사동거리에서 화가 강용대가 김영수 앞에서 깐죽거린 적이 있는데,

그 조그만 덩치를 얼마나 힘껏 찼는지 몇 미터 밖으로 뚝 나가떨어진 적도 있었다.

그렇게 심한 폭력을 저지르고도 잡혀가지 않은 것이 용했다.

다들 착한 예술가들이라 넘어갔지, 다른 사람 같았으면 그런 폭력을 저지르지도 않았을 것이다.

군사정권의 폭력에 진저리를 쳤던 때라, 미제군복에 군화를 신고 다니던 그의 외모부터 같은 무리로 보였다. 

다 세월이 지나니, 웃을 수 있는 아련한 추억이 되었지만...



사진, 글 / 조문호






























설날이 기다려진 기억은 아득한 어린 시절뿐이다.
어른이 되고부터는 항상 걱정거리였다.
늘 마이너스 살림이라 나갈 돈이 더 많았기 때문이다.
그동안 신통하게 잘 버텨 왔는데,
인생 말년이 되니, 걱정거리가 바뀌었다.

돈보다는 소외감이다.
다들 가족과 지내니, 사람도 만날 수 없고 밥도 사 먹을 수 없다.
밥이야 동자동 나눔의 집에서 지낼 합동 제사에서 얻어먹겠지만,
조상님 뵐 면목이 없는 것이다. 아마 자식 잘 못 둔 죄를 통탄 하실 것 같다.
이런 저런 허망함에 빠졌는데, 화가 이인철씨로부터 전화가 왔다.
명절 전에 촬영한 수고비를 준다며, 인사동 ‘민예사랑“에서 만나자는 것이다.





‘민예사랑’에는 장재순씨와 이인철, 류충렬씨도 와 계셨다. 뜻밖의 반가운 만남이었다.
문영태화백의 미망인 장재순씨로 부터 편지까지 쓰 넣은 예쁜 돈 봉투를 받으니,
쑥스러운 생각이 들었다. 예전 같았으면 사양했겠지만, 그럴 형편이 아니었다.

떡 본김에 제사지내듯이, 정영신씨를 불러냈다.
만나 삼계탕 사 주러 가는데, 뒤에서 누가 불렀다.
돌아보니 화가 장흥래씨였다.
어떻게 우리 마음을 알았는지, 바쁘지 않으면 삼계탕 먹으러 가자신다.






그 분을 처음 만난 것은 몇 개월 전 열렸던 무의도 축제에서 다.
‘한국녹색미술회’ 소속으로 그림 설치전에 참가한 분인데, 사진도 잘 찍었다.
핸드폰으로 내 모습을 몇 장 찍었는데, 보는 눈이 칼 같더라.
방송국PD로 정년퇴임한 후 뒤늦게 화가의 길로 들어섰다고 했다.

이제 여든을 넘겨셨으니, 그림 그린지도 오래되었다.
대충 즐기는 것이 아니라, 6년간 외국에 나가 미술공부까지 한 열성파였다.
주로 사실적인 인물화를 그렸는데, 하나같이 살아있는 모습 같았다.
나를 한 번 만나려 했던 것은, 그 때 찍은 내 모습을 그리고 싶다는 것이다.

방구석에서 의욕 없이 티비나 껴안고 사실 연세에 퍽 재미있게 사는 분이었다.
매사에 적극적이며 낙천적이고 긍정적이었다. 그러니 늘 바쁜 것이다.
소주 두병을 단숨에 해치우고는 이차로 맥주 집에 가자신다.
그러나 정영신씨와 내 방에 갈 일이 있어 헤어져야 했다.
동자동에 같이 갈 수 밖에 없었던 것은 프린트기 사용법을 몰라서다.






몇 일전 이주용교수께서 복합 프린트기 ‘EPSON L220’을 선물했는데,

도저히 컴퓨터와 연결이 되지 않았다. 데려 간 그 역시 한 시간 넘게 씨름했으나, 마찬가지였다.
회사에 문의하여 방법을 알아내겠다지만, 언제 될지 기약 없다.

동내에서 만나는 분마다 사진은 언제 주느냐고 묻는데, 또 같은 말을 되풀이 할 수밖에...
찍는 즉시 프린트해 주면 별 일 아닌데, 이제 찍은 사진이 너무 많아 뽑는 일도 만만찮다.
따뜻한 봄이 오면 공원에 펼쳐놓고, 나누어 드릴 작정이다.

한 해 잘 놀았으니, 다시 봄을 기다려보자.

“다들 새해에는 더 재미있게 사세요. 건강 잘 챙기시고...”

사진, 글 / 조문호
















지난 22일부터 이박 삼일 동안 서해안 최북단에 위치한 고 문영태화백 자택에서 놀았다. 

2018년에 열릴 그의 추모전을 대비한 유작을 촬영하기 위한 나들이였는데, 지난 늦가을에 이어 두 번째 걸음이었다.

지난번에는 문화백의 자료들만 찍었고, 이번에는 그의 모든 작품을 찍으러 갔다.

추모전 준비위원장을 맡은 이인철씨와 장경호씨가 동행한 자리에서 김진하, 홍선웅씨도 만났다.

장재순여사가 맡긴 카드로 다들 점심을 먹으러 갔는데, 간 크게도 옆에 있는 장어 집에 들어 간 것이다.

인근에는 식당이 그 뿐이기도 하지만, 은근히 몸 보신한다는 생각들도 있었을 것이다.

솔직히 돈 생각해서 그런지, 맛은 없더라. 반가운 분들과 소주 한 잔하는 맛이 더 죽였다.

오후부터 시작된 촬영 작업은 순조로웠으나, 이튿날은 달랐다.
대부분 유리 없는 액자들인데, 작품에 먼지투성이였다.
붓으로 먼지 털어 낸 장경호씨와 이인철씨는 가루 좀 마셨을 것이다.
그러나 종이에 핀 곰팡이 자국은 지울 수가 없었다.




유리 속에 든 작품들은 더 심했다.
상장이나 일기장까지 다 챙겨두는 꼼꼼한 그가
작품들은 왜 이렇게 허술하게 보관했는지 이해되지 않았다.
자연 속에 풍화되어가는 그대로를 보여주고 싶었을까?

촬영 덕분에 이틀 밤을 술로 지냈다.
첫 날밤은 인천의 ‘광장, 환대의 문지방’전 개막식에 가서 시동을 걸었고,
둘째 밤은 강화읍내까지 원정 가 퍼 마셨다. 화가 최경태씨 까지 불러내어...
대리운전에 끌려 들어오다, 동네 어귀에서 기다리던 박 건씨와 함께 들어왔는데,
그 뒤는 술이 취해 그런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마지막 날인 토요일은 광화문광장에 가야하는 날이라 마음이 바빴다.
날씨가 추워 그런지, 일의 진척이 안 나갔다. 찍긴 찍었으나 뒷맛이 개운치 않더라.
안 돼면, 다시 한 번 쳐들어가야지 뭐..


사진, 글 / 조문호

























































지난 11일, 북한을 눈앞에 둔 서해안 최북단에 자리한 김포 월곶면 보구곶리의 고 문영태화백의 자택을 찾았다.

짱짱한 나이에 세상을 떠나 주위의 안타까움을 샀던, 그의 추모전을 위한 자료와 작품들을 촬영하기 위해서다.

지난 달 미망인 장재순여사의 제안으로 평소 가까운 지인 아홉 명이 문영태화백 추모전을 위한 준비위원회를 만들었는데,

추진위원장을 맡은 민미협 회장 이인철씨로 부터 연락 받은 것이다.

약속대로 금능역에서 이인철씨를 만나 함께 떠났는데, 꼬불꼬불 낮 익은 길 따라가니,

미망인 장재순여사는 정원을 가꾸고 계셨고, 류충렬화백이 먼저 와 계셨다.
붉은 단풍잎들이 곳곳에 흩어 진 고인의 저택은 처연했다.

문형의 손길이 느껴지는 곳곳에서 삶의 무상함을 본 것이다. 도대체 사는 게 무엇인지...

점심 식사 후, 시작한 촬영 작업은 이웃 사는 판화가 홍선웅씨도 도와주었다.

장재순여사가 꺼내주는 자료 상자를 이인철, 류충렬씨가 분류하여 나에게 넘겨주었는데,

얼마나 자료를 꼼꼼히 챙겨두었는지 초등학교 때 받은 상장까지 다 모아두었더라.

스케치 북에서부터 일기와 작업노트, 판화와 메모지 등 자료의 분량이 너무 많아 한나절이 후딱 가버렸다.

자료들에서 평소 문형의 치밀함을 엿 볼 수 있었는데, 몇 자 적어 놓은 낙서조각에도 삶의 지혜가 담겨 있었다.

작품들은 꺼내 보지도 못하고 만찬장으로 갔는데, 회에다 고급와인이 대기하고 있었다.

이 얼마 만에 만나는 호화 만찬이던가?

술 한 잔의 가격을 안다면 도저히 목에 넘길 수가 없는 와인을 쭉쭉 들이키는 호사를 떨었는데, 기분 좋게 취했다.

고인의 영정사진이 옆에서 지켜보고 있었으니, 마치 문형과 마시는 듯, 옛 생각이 새록새록 했다. 

뒤늦게 나타난 화가 박건씨의 코믹한 제스처에 한 바탕 웃기도 했다.

술도 취했지만 자정이 넘어, 살아생전 문형이 사용하던 방에서 하룻 밤 지냈다.
평소 술이 깨야 자는 습관 때문에 잠을 못 이뤄, 이 생각 저 생각 빠져든 것이다. 

문형과 무언의 대화를 나누었는데. 내일 서울에서 벌어질 촛불시위를 물어보았다,


“내일 쯤, 그 년이 하야 할까?”

“택도 없는 소리, 그 뻔뻔스러운 상판대기 한 번 보소! 쉽게 물러 날 년인가...”
“그렇다면 강제로 끌어내려야지, 촛불을 햇불로 바꿔 청와대까지 쳐 들어가야지”

사진, 글 / 조문호





































아깝게도 세상을 먼저 떠난 화가 문영태선생을 사랑하는 예술가들이 지난 6일 오후1시 무렵, 인사동 ‘두레’에 모였다.

문영태선생 미망인 장재순여사가 만든 자리로, 고 문영태화백의 추모전을 논의하기 위해서다.

추모위원에는 김진하, 박 건, 박불똥, 박진화, 이인철, 장경호, 조문호, 최석태, 홍선웅씨 등

아홉명으로 결정했으나, 미술평론가 최석태씨만 사정이 있어 참석 못했다.

세상을 등진지 삼 주년이 되는 2018년에 맞추어 문영태선생의 숨겨진 유작을 전부 선보일 수 있는 기획전을 개최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작품도록은 물론, 생전에 가까웠던 분들의 이야기와 문영태선생의 80년대 시대정신과 관련된 모든 사료를 집대성한 문집도 발간할 계획이다.

문영태추모위 위원장으로는 민미협 이사장으로 있는 이인철씨가 맡아 주도하며, 서로 연락하는 마당쇠 역할을 맡기로 합의했다.

평소 가까웠던 분들의 관심과 도움 또한 절실하다.
아무튼, 문영태선생의 예술가로서의 삶과, 그 작품세계를 재조명하게 될 추모전을 기대하기 바랍니다.


사진,글 / 조문호


'두레' 사모님은 장재순여사의 절친입니다.



박 건 촬영

홍선웅 촬영





지난 27일의 인사동은 겨울을 재촉하는 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미국서 온 최정자 시인이 ‘귀천’에 계신다는 전갈로 나왔으나, 인사동 나올 형편은 아니었다.

요즘 신경을 너무 곤두세워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하는데다, 체력이 급격히 떨어졌기 때문이다.

지하철에서 내려 인사동 길을 걸었으나, 마치 술 취한 듯 비틀거렸다.

카메라를 꺼내, 비오는 거리도 찍었으나, 대부분 흔들려 있었다.

‘귀천’에 계신 최정자씨는 고향친구들과 계셨고, 그 옆에는 정영신씨가 책을 보고 있었다.

내가 나타나자 최선생 친구 분들께서 서둘러 일어나셨는데, 핸드폰의 요금충전도 해야 하고,

미국에 보낼 화물 박스를 구하는 등, 할 일이 많단다.

일보러 나간 사이 혼자 꾸벅꾸벅 졸다 정신 차리려 잠시 나갔는데, 지나가던 ‘민예사랑’ 장재순씨를 만났다.

화가 문영태씨와 사별해 힘들지만, 항상 밝은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최정자 시인은 경주에서 열린 국제펜클럽대회 초청으로 잠시 귀국하셨는데, 몇 일전 ‘유목민’에서 만났다,

그 자리엔 공윤희, 정영신, 김수길씨가 함께 했으나, 뒤늦게 사진가 박진호씨도 합류했다.

술이 취한 뒤에는 장경호씨가 등장한 것 같으나, 박진호씨와 이야기 나누는 사이 사라지고 없었다.

그날따라 카메라가 작동되지 않아, 아무 것도 남기지 못한 것이 죄가 되어, 힘들어도 다시 나온 것이다.

뒤늦게, 국수 좋아하는 최정자씨를 모시고 ‘안동국시’에 들려 마지막일지도 모를 만찬의 시간을 가졌다.

미국 이민가기 전인 8-90년대 자주 다녔던 인사동의 ‘누님칼국수’를 그리워하며,

밥값보다 더 비싼 9천 원짜리 안동국시를 먹었는데, 다들 맛있다니 다행이다 싶다.

최정자씨는 모래 미국으로 돌아가신다는데, 다들 몸이 편치 못하니 다시 뵐 날이 있을지 모르겠다.

아무튼, 외로움을 시로 달래며 사시니, 살아 계시는 동안 건강하고 보람된 여생을 보내길 빌 뿐이다.

그 날은 인사동에 나와 술 한 잔 마시지 못한 채, 돌아와야 했다.
이별에 대한 아쉬움인지, 삶에 대한 피로감인지, 떨어지는 빗물이 눈물 같았다.

사진, 글 / 조문호



















최선호씨의 그림과 도예전이 지난 10일부터 18일까지 인사동 ‘민예사랑’에서 열린다.
‘민예사랑’은 고 문영태 화백의 미망인 장재순여사가 운영하는 골동가게인데,
그 작고 복잡한 가게에서 그림과 도예전을 연다기에 처음엔 좀 의아했다.
가게에 있던 상품들은 다 어쩌고, 두 가지 전시를 하는지...

입구들 들어서니 200호 남짓한, 꽃그림이 마음을 움켜잡더니,
주변의 조그만 소품들과 어울려 다양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아기자기함이 좋더라.
이 건, 돈 만 생각한다면 절대 할 수 없는 일이다.
문화예술에 대한 폭 넓은 애착이 만들어 낸 좋은 전시였다.

골동가게에서 갤러리로 왔다 갔다 하는 ‘민예사랑’의 변신술에 박수를 보낸다.


사진, 글 / 조문호



















오늘은 인사동에서 할 일이 많아 바쁘다.
그 많은 사람들을 제켜 놓고, 오랜 인사동 흔적 찾아보는 일이 제일 먼저고,

그 다음에는 ‘유카리화랑’의 서정춘시화전과 ‘민예사랑’의 최선호전시에 들려야하기 때문이다.



맨 먼저 내가 붙들고 있는 인사동의 오랜 흔적을 찾으러 돌아 다녔다.
매번 보던 풍경이라 기대하지 않았는데, 꼼꼼히 살펴보니 살아남은 아스라한 이야기도 있더라.  

시멘트가 벗겨져 배가 터져 나온 담장의 흙과 돌에서 오랜 인사동의 흔적을 찾을 수 있었고,

어렵게 버티고 있는 오래된 전신주는 물론 여러군데서 예전의 모습을 찾을 수 있었다.





두 번째는, 고 문영태 화백 미망인 장재순여사의 골동가게 ‘민예사랑’에서 최선호씨의 그림과

도예전을 연다기에 좀 의아했다. 그 좁은 공간에 있던 골동들은 다 어쩌고, 두 가지 전시를 하는지?

입구들 들어서니 200호 남짓한 꽃그림이 마음을 움켜잡더니, 주변의 소품들이 다양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었다.

골동가게에서 갤러리로 왔다 갔다 하는 ‘민예사랑’의 변신술도 기막히더라.




세 번째는 인사동 마당발 노광래씨가 ‘유카리’에서 서정춘시인의 시화전을 열고 있었다.
서정춘시인이 누구인가? 노벨문학상에 목맨 주책시인보다 더 훌륭한 시인이다.

그 분의 시를 다시 한 번 새길 수 있어 좋았는데, 억지춘향 격의 작품도 있어 시를 모독한다는 생각도 들었다.

30여명의 화가와 사진가들이 참여했는데, 화가가 시에 빠져 그림으로 승화시킨 작품도 있더라.

 





네 번째는 '유카리화랑'에서 김진열씨를 만나 ‘시가연’에 갔더니, 신나는 판이 벌어지고 있었다.

‘시가연’은 시인은 물론 음악인과 예술가들이 어울리는 장소로, 인사동의 풍류를 만들어 가는 곳이다.

임방울선생의 판소리 '추억'을 우지용씨가 들려주었고, 그림 그리는 김진열씨의 창도, 명창 빰 치더라.

시와 소리와 춤이 함께 하는 곳, 그것이 인사동의 풍류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아직은 괜찮은 인사동이더라.

갑자기 할 일이 생기니, 힘이 절로 솟는 하루였다.


사진,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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