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동 ‘민예사랑’은 고 문영태화백의 미망인 장재순여사가 인사동에서 운영하는 골동가게다.
우리 옛 여인들이 아끼고 사랑한 장신구와 규방용품, 선비들의 고아한 취향을 느낄 수 있는

서안과 문방용품 등 정감 있는 골동들을 전시 판매하고 있다.


가게에 들어 가보니 구경할게 너무 많았다. 마치 박물관에 온 것 같았다.

진열된 장신구와 규방, 문방용품들에서 선조들의 멋과 지혜를 맛보았다.
인사동12 골목길 초입에 있으니, 지나치는 길에 꼭 한번 들려보라.


(전화02-732-5255)


















 

 

지난 29일은 문영태화백이 세상을 떠난 지 49일째 되는 날이다.
고인의 극락왕생을 비는 49제가 김포 자택에서 열린다는 연락을 받았다.
아내 정영신과 함께 떠났으나, 걸리는 시간을 잘 못 추정해 30분이나 늦어버렸다.
이미 방안에는 고인의 가족을 비롯하여 박진화, 최경태, 박 건, 이재민, 이인철씨 등

화단의 후배 여럿이 모여 제를 올리고 있었다.

예를 올리고 나니, 새삼 그리워져 하염없이 집 주변을 맴돌았다.
가끔 가족들과 추모객들이 오갔으나, 문화백 없는 '민예사랑'은 빈집처럼 허허로웠다.
한쪽 구석에 지그시 눈을 감고 생각에 잠긴 석상을 만났다. 마치 그가 환생한 듯 다가왔다.
옆에서는 그의 절개라도 말하듯 대나무 잎이 바람결에 속삭였다.
귀 기울이니 "세상사 다 부질없으니 곁눈질하지 말라"는 소리 같았다.

"미리 예견하고 집을 꾸몄구나." 혼자 짐작하며 거실에 들어가니,
문화백의 '운석' 그림 세 점이 걸려 있었다. 그렇게 그림 보여 달래도 감추더니, 이제사 슬며시 고개를 내 민 것이다.

오랜 기억속의 옛날 그림이었으나, 마치 그의 얼굴을 보듯 선명했다.

"아! 그래서 보여주지 않았구나" 잔소리가 많으면 하나도 머리에 남는 게 없다는 말이었다.

그림이 너무 좋았다.
그 운석들은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 그건 바로 자신의 초상화였고, 인간 모두의 초상화이기도 했다.

"이보게! 한 수 가르쳐 주어 고맙네."
오늘 49제를 정성껏 올렸으니, 지옥이나 아귀, 축생의 삼악도는 피할 걸세.
부디 피 칠갑하는 이런 땅에 태어나지 말고, 사람답게 사는 좋은 땅에 태어나, 못 다한 것 다 누리시게....

사진,글 / 조문호

 

 

 

 

 

 

 

 

 

 

 

 

 

 

 

 

 

 

 

 

 

 

 

 

 

 

 

 

 

 

 

 

 

 

 

 

 

 



고 문영태화백

 

 

민중미술가 문영태씨가 지난 9일 아침, 말 한마디 남기지 않고 이 세상을 훌쩍 떠났단다.

이틀 전 박진화화백으로부터 뇌경색으로 쓰러져 어려울 것 같다며 영장사진 한 장 만들어 달라는 연락을 받아 

걱정은 하고 있었으나, 억장이 무너지는 전갈이었다.


문영태씨는 나이는 나보다 세 살 아래지만, 늘 존경하는 친구였다.

1980년대 중반 '통일전', '여성과 현실전', '탄압사례전', '반고문전', '정치와 '미술전' 등의 미술운동으로 문화의 힘을 결집시켜 사회운동으로 확장시키는데 주도적 역할을 한 사람이다. 그 이후 90년도에 들어와서는 이지누, 박불똥, 류연복, 박 건, 조경숙씨 등 열일곱 명이 모여 ‘경의선모임’이라는 작업공동체를 만들어 '분단풍경'(눈빛출판사)이라는 사진집을 펴내는 등 사진작업에도 지대한 관심을 두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기억에 남는 것은 그의 글이다.

한 때 진보잡지에 연재했던 한국 문화에 대한 독보적 비평들이 큰 울림을 주었기 때문이다.

 

그를 처음 만난 것은 80년도 중반 인사동 '그림마당 민'에서 관장으로 일할 무렵이었다.

인사동 길거리나 술집에서 자주 부딪혀 술자리를 같이 할 수 있었는데,

작업에 대한 심도 있는 이야기를 나눈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렇게 마음의 후원자로 술 친구로 한 30년 지낸 것이다.

 

지난 5월27일 느닷없이 전화가 걸려왔다. 김포 자택에서 열리는 전시가 내일까지니 와 달라는 것이다.

자기가 하는 줄 알고 예정된 약속까지 취소하며 달려갔으나 서양화가 최선호씨와 도예가 변승훈씨의 전시였다.

너무 실망스러워 “문형의 작품은 언제 보여 줄 거냐?‘고 투덜댔더니 ’한 번 해 볼까‘라는 긍정적인 말을 뱉어 내심 기대하기도 했다.

 

그런데 갑자기 이 무슨 청천벽력이란 말인가?

아무리 가는데 순서가 없다지만, 이렇게 허무하게 떠날 수는 없는 것이다.

그 날 찍었던 기념사진이 영정사진이 되고 그의 마지막 모습이라니 가슴이 미어진다.

 

다른 작가들은 인터넷까지 올려가며 작품을 못 보여줘 안달인데, 어찌 그토록 자신을 알리는데 인색할 수 있단 말인가?

아마 세상 돌아가는 꼴 더러워 몽땅 싸가지고 갔는지도 모르겠다.

아무쪼록 저승에서나마 당신의 전람회도 열고, 당신의 생각을 담은 글도 발표하구려.

그리고 미워도 이 세상 끝까지 그 아름다운 향기를 좀 전해주시오.


여보시게 친구! 부디 잘 가시게.

먼저 가신 인사동 터줏대감들께 안부도 전해주고, 저승에서 만나거들랑 푸대접이나 하지 마시게...

 


사진: 정영신,조문호 /글: 조문호

 

 

2015,년 5월 28일, 그의 서재에서

 

 

2015년 5월 28일,자택 뜰에서

2015년5월 28, 서양화가 최선호씨가 글도 쓰고 그림도 그리라며 간곡히 당부하고 있다.

2015년 5월 28, 사진가 정영신씨에게 저 물 건너가 북한의 개풍군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2015년 5월, 28일, 자택 거실에서 부인 장재순씨와 함께 즐거워하는 모습

 2015년 5월, 28일, 필자와 함께

 

김포 월곶면의 살림집에 들어앉은 별난 전시장 '민예사랑'에서 특별한 전시가 열렸다.

지난 5월20일부터 28일까지 열린 초대전은 도예가 변승훈씨와 서양화가 최선호씨의 '빙빙유람'전 이었다.

 

'민예사랑'은 꽃 피는 오월을 맞아 일 년에 한 차례만 전시를 연다는데, 올 해로 벌써 열세 번째 전시라고 한다.

 

동양화가 출신의 서양화가 최선호씨와 섬유미술가 출신의 도예가 변승훈씨는 전공을 바꾸어

또 다른 세계를 개척한 이력이 서로 엇비슷하다.

 

 

추상화 중 추상화인 미니멀리즘으로 무장한 화가 최선호씨는 한국의 색을 탐구하는 작가로 알려졌는데,

단색으로 이루어진 시적 느낌의 추상화가 매우 인상깊었다.

 

 

변승훈씨는 분청사기기법을 현대화한 부조작업으로 도자벽화 등 여러 가지 설치작품들을 만든 실험적인

성향의 작가인데, 덤벙기법으로 제작된 그의 분청그릇들은 자유분방한 멋을 한 껏 풍기고 있었다.

 

 

실내에는 품격있는 조선의 고가구 사이사이로 단색의 그림과 분청 그릇의 정겨운 질감이 오밀 조밀 전시되어 있었고,

정원에는 돌확과 장대석, 동자석등 몇 백 년은 됨직한 갖가지 골동들이 토종 나무들과 어울려 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서양화가 문영태씨의 아내 장재순씨는 인사동에서 30여 년 동안 '민예사랑'이란 앤티크숍을 운영해 온 골동전문가지만

이렇게 훌륭한 생활공간을 갖추고 오순도순 사는지는 미처 몰랐다.

 

중요한 것은 이 모든 것이 보여주기 위한 장식품이 아니라 두 부부의 생활이라는 점이다.

작품이나 생활 용품 모두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적절하게 배치해 주변과 조화를 이루었다.

 

문영태씨는 내가 동강생태환경 기록하려 정선 만지산에 가서 눌러 앉듯이

민통선 따라가는 기행문을 연재하다 이곳에 정착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의 책상 앞 창문을 통해 북한 산하가 바로 눈에 들어오니, 늘 남북을 오가는 셈이다.

 

그런데 전시회를 개최하며 방명록 첫 장에다 '봄맞이, 이천 몇 년 꿈속에서'란 글을 쓰며

자신의 이름 영태를 적는다는 것이 우연찮게 용태로 적었다는 것이다.

하필이면 글 쓴 날이 김용태씨가 세상을 떠난 지 일주기가 되는 날이었단다.

 

"전시회 준비하느라 일주기에 참석하지 못해 '용태형'이 직접 찾아 왔다"며 그가 웃었다.

 

사진,글 / 조문호

 

 

 

 

 

 

 

 

 

 

 

 

 

 

 

 

 

 

 

 

 

 

 

 

 

 

 

 

 

 

 

 

 

 

 

 

 

 

 

 

 

 

지난 27일 아침, 서양화가 문영태씨로 부터 전시회에 와 달라는 전화를 받았다.
갑작스러운 연락이기도 하지만, 내일 전시가 끝난다고 해서 더 당황스러웠다.

예정된 일정을 바꾸어, 네비의 안내를 받아가며 김포시 월곶면 보구곶리를 찾아 나선 것이다.

꼬불꼬불 좁은 길을 따라가다 북한을 눈앞에 둔 서해안 최북단마을에 멈춰 섰다.

문영태, 장재순씨 부부가 사는 ‘민예사랑’은 정말 기막힌 자리에 위치하고 있었다.
저쪽 물 건너  있는 산들이 북한의 개풍군이라는 말에
"오늘 술 한 잔 먹고 넘어 가야겠다"며 흰소리까지 해댔다.

그런데 위치도 위치지만 고관대작의 저택인지 미술관인지 살림집인지 도저히 분간이 안 되었다.

전시장을 둘러보며 '걸린 그림들이 문형 작품이냐?'고 물었더니,
서양화가 최선호씨의 작품이라는 것이다. 내가 잘 못 알고 온게다.

문영태씨는 1990년도 경의선모임이란 공동작업체를 만들어 사진을 찍은 적도 있었다.
그가 주축이 되어 사진가 이지누, 화가 박불똥, 유연복, 최민화, 김기호, 김태희, 남궁산, 백창흠,

박 건, 송진헌, 유은종, 이정희, 조경숙, 공예가 김원갑, 이송열, 미술평론가 라원식씨 등 열일곱명이 참여했다. 

그 결과물로 ‘분단풍경’(눈빛출판사)이란 사진집을 펴 내, 통일운동에 불을 지피기도 했다.

그러나 정작 화가인 그의 그림을 볼 수 없었기에 이번이 기회다 싶었는데, 허탕 친 것이다.
집안 구석구석을 살피고 다녔으나, 어디 숨겼는지 작업실은커녕 그의 작품 한 점 만날 수 없었다.

대신 서양화가 최선호씨와 도예가 변승훈씨의 작품들을 감상할 기회가 주어졌다.
그리고 특별 초대된 안톤 바라노프의 클래식 기타연주와 성악가 김재연씨의 청량한 소리에

매료되어, 황홀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내년 오월에 열릴 전시에는 문영태씨의 숨겨 논 작품들이 걸리길 다시 한 번 기대해 본다.


사진,글 / 조문호

 

 

 

 

 

 

 

 

 

 

 

 

 

 

 

 

 

 

 

 

 

 

 

 

 

 

 

 

 

 

 

 

 

 

 

 

 

 




김서령의 이야기가 있는 집

김포 월곶 골동쟁이 장재순, 화가 문영태의 문수산방

 

 ‘저희 장자 지함이 이제 크신 은혜를 입어

귀댁의 사랑스런 맏딸 윤지를 배필로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선인의 예를 따라 삼가 납폐의식을 갖추오니

따뜻이 살펴주십시오.

갑오년 향기로운 봄날, 문수산 자락에서

문영태 장재순 두 손 모읍니다.’

 화가 문영태(왼쪽)씨와 아내 장재순씨가 사람 키만한

장독대와 벅수가 놓인 마당 한 편에서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다.

 

남편의 책상 위에는 사돈댁에 보낼 함 속에 넣을 편지 초안이 놓여 있었다. 옛 방식대로 한문으로 쓰고 곁에 한글로 간단한 해설을 붙여뒀다. 한지 위에 실제로 쓰기 전에 미리 연습해본 흔적이었다. 한 주일 뒤 혼인할 아들을 위한 아버지의 애정이 물씬 풍겨져 나는 책상 앞에 한동안 서 있었다. 여기는 김포시 월곶면 보구곶리. 보통 사람들은 들어올 일이 잘 없는, 북한의 경기도 개풍군을 눈앞에 둔 서해안 최북단 마을이다.

 문수산 아래의 이 집을 나는 그냥 문수산방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사랑 주인인 화가 문영태의 별호가 ‘문수산인’이라니 그 사람이 사는 집이라면 문수산방일 수밖에!

 

문수산방은 여러 면에서 여느 집과 썩 다르지만 가장 두드러진 차이점은 예술과 학문이 일상 안에 깊숙이 침투해 있다는 점이다. 모퉁이마다 매운 눈썰미로 엄선된, 허튼 구석 한군데도 안 보이는 빼어난 공예와 조각과 회화가 자리 잡았는데 그게 장식이 아니라 생활이라는 점이다. 50년생이니 예순 중반의 남편과 56년생이니 예순에 육박하는 아내 둘이서 단출하게 사는 집이니 좀 느슨해도 좋으련만. 집 전체에 용맹정진의 순결하고 맑은 기운이 감돈다. 그걸 아내는 남편 탓이라고, 남편은 아내 탓이라고 서로 책임전가하지만 둘은 엄밀히 말해 공범이다. 둘 다 얘기 중에 자연스럽게 ‘큰 스승’에 관해 말하는 걸 내게 들켜버렸다. 남편은 큰 스승이 20대에 사서삼경을 배운 함석헌 선생이라고 하고 아내는 평생 매만져온 ‘유물들’이라고 말한다. 뜰에 심어놓은 갖가지 야생화와 나무들을 이리저리 호명할 때 남편은 “늙도록 자라는 사람들이 있지요?”하면서 은근히 아내를 치켜세웠고 30년 가까이 인사동에서 ‘민예사랑’이라는 앤티크숍을 운영해온 아내는 “남편이야 원래 자기세계가 따로 있는 사람이니까 그걸 존중하지요. 큰 영향도 받고요”라며 남편의 남다른 정신성을 은연중 자랑했다. 서로가 서로의 거울이고 스승이 되는 관계, 30년을 살고 난 부부가 마침내 다다른 아름다운 모습을 나는 선망에 차서 바라본다.


 

 

 

 

 

 

 

 

 

 

 

 

1 조선시대 가구들로 꾸민 2층 방.
2 주방 왼쪽 벽엔 진달래 가지를, 식탁 위엔 봄맞이꽃과 냉이꽃을 꽂았다.

 

 “나는 원래 돌이고 저 사람은 나무지요. 나는 평생 돌을 그려온 돌 같은 사람이고 저 사람은 나무를 좋아하고 나무처럼 자라면서 내게 기쁨을 줍니다. 그래서 별명이 ‘잔잴순’이에요. 이름에다 엔돌핀의 받침을 합성한 거예요. 하하”

 원래 둘은 서울 화곡동에서 아이들을 낳아서 키웠다. 혼인할 때 시어머니가 사주신 집이었다. 거기서 35년간 한 번도 이사하지 않고 살았다. “시어머님이 저를 특별히 편애하셨어요. 남편은 어머님이 마흔여덟에 얻은 막내아들이거든요. 몸도 불편한 아들이니 정말 애지중지하셨는데 저를 얻으시고는 그 사랑을 다 저에게 옮기셨어요. 홀로 자수성가하셔서 문씨 집안 살림을 일으키신 훌륭한 분이셔요.” 아이들이 대학에 들어가자 화곡동 집을 아이들에게 맡기고 둘은 시골로 들어왔다.

 동네이름에 ‘곶’이 둘이나 붙은 이 강변마을과 인연이 닿은 것은 거의 30년 전. 남편이 민통선 따라가는 기행을 내일신문에 연재하면서였다. “백령도에서 동해까지 철책선을 따라가는 기행이었어요. 사진 찍는 이지누, 글 쓰는 김하기와 함께 다녔어요. 그때 우연히 이 동네를 봤는데 딱 마음에 들었어요. 문수산을 뒤로하고 앞에 ‘유도’란 섬을 바라보며 한강이 서해와 만나는 가장 마지막 지점, 복숭아 꽃이 만발해 있었지요. 잊고 있다가 몇 해 후 다시 왔더니 마을 회관이 비어있데요. 그걸 작업실로 빌렸지요.”

 

 


3 2층에 전시된 조각보와 자수가 놓인 베갯잇.
4 관솔대와 꽃핀 산복숭아 가지로 장식한 현관 입구
5 2층 테라스와 이어진 정원의 모습.

 

1998년에 평(3.3㎡)당 27만원을 주고 밭 500평을 샀다. 아내 장재순은 늘 시골살이가 소원이었다. 좋은 장대석이나 우물돌이 생기면 일단 밭에 가져다 뒀다. 그러면서 행복했다. 4년 뒤엔 밭에 잇댄 시골집을 사서 수리했다. 뜰이 훨씬 넓어지고 높낮이도 생겼다. “견본대로 지은 농가주택이었어요. 원래는 1층이 창고였는데 수리해서 거실과 부엌으로 만들었지요. 여기서 일 년에 한 번씩은 꼭 전시회를 해요. 벌써 12년째네요. 살림집을 오픈해 그림과 도자기와 앤티크를 전시하는 건 특별한 맛이 있지요. 구경 오는 분들도 의외로 많고.”

 그날 안주인은 우리를 맞기 위해 현관에 꽃핀 산복숭아 가지 하나를 통째로 꽂아뒀다. “식탁 위 꽃은 어제 우리 딸 지민이가 꽂아주고 갔어요. 마당에 핀 냉이꽃과 ‘봄맞이’라는 꽃이에요.” 뜰에 돋은 미나리와 당귀로 샐러드를 만들고 진달래 꽃잎으로 화전을 부치고 두릅과 취를 따서 나물을 무쳤다. 부엌 벽에 꽂아둔 푸른 잎 돋은 진달래 가지는 그대로 한편의 살아 있는 ‘시’다. 그는 눈 돌리는 곳마다 웃음을 벙글게 만드는 재주가 있다. 과연 엔돌핀을 솟게 하는 ‘잔잴순’이 맞다.

 문수산방 뜰엔 수형이 멋지거나 꽃이 좋거나 열매가 아름다운 토종나무를 엄선해서 심었다. 솔과 오동과 청매와 능수벚과 조팝과 미스김라일락과! 나무 아래는 돌이 있다. 돌은 그냥 돌이 아니다. 500년쯤 전 조상들이 일상에 사용했던 돌확과 우물돌과 관솔대와 떡판과 기명통과 수세관(물을 받아 손을 씻던 돌)과 장대석들이다. 비석 지붕으로 쓰이던 놀랄 만치 조형적인 ‘개석’과 벅수와 돌짐승과 동자석과 문관석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저기 귀엽게, 음전하게, 정답게, 우아하게, 새침하게 앉아 있다. “골동 중에서 가장 깊이가 있는 게 석물이에요. 사람과 세월이 합작으로 만들어내서 그런가 봐요. 돌이 좋다면 어디든 달려갔지요. 이 장대석은 광화문 인근에서 나왔어요. 이만 한 길이의 장대석을 쓰자면 궁전은 아니어도 고관대작의 집이었을 거예요. 저 떡판은 진주에서 가져왔고. 이 돌은 아마 약을 가는 용도로 썼을 거예요.” 경제적 관심이라곤 없는 사람을 남편으로 둔 덕분에 처음엔 먹고살려고 골동가게를 시작했다. “남편이 민미협에 관여했고 당시 ‘그림마당 민’ 앞에 빈 가게가 있어 공예 갤러리로 시작했어요. 공예가 오래 묵으면 골동이 되잖아요. 자연스럽게 골동을 함께 했지요. 공예품과 도자기와 석물과 목가구와…. 그런데 유물을 들여다보면서 절로 재미를 느끼고 미감과 안목이 생기고 속뜻도 읽게 되데요.”

 유물이 마침내 마음공부까지 하게 만들더라고 뜰의 주인은 말한다. 그렇다. 아름다움은 닫힌 마음을 열게 한다. 딱딱한 것을 부드럽게 만든다. 우리가 아름다움에 탐닉하는 이유는 그게 사람을 다른 차원으로 이동시켜 주기 때문이라고 나는 믿는다. 다른 차원이란 다른 공간이 아니다. 바로 이 순간 안에 머무르는 것, 현재의 드넓은 확장, ‘지금 여기’ 속으로 진입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문수산방은 실내도 실외도 그런 물건들로 가득 차 있다. 그래서 깊이 있고 힘차고 고요하고 순결하다.

 혼인하는 아들 내외를 위해 그는 얼마 전 화곡동 집을 새로 꾸몄다. 부모의 신혼집이 아들의 신혼집이 된다. 아들 지함은 자기가 태어난 집에서 제 아이를 낳는 기쁨을 누릴 것이다. 부박한 서울살림에선 어림없는 격조를 장재순 부부는 한 세대만에 이뤄내고 말았다.

 아이들 수백 명이 차가운 바닷물 속에 어이없이 수장되는 상황을 우리는 실시간으로 지켜보고 있지만, 그래서 나라 안에 온통 슬픔이 가득 덮였지만 그래도 삶은 여전히 신비하고 엄숙하다. 그걸 문수산방 뜰에 서서 나는 새삼 느낀다.

[중앙일보]

글=김서령 칼럼리스트
사진=안성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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