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서령의 이야기가 있는 집

김포 월곶 골동쟁이 장재순, 화가 문영태의 문수산방

 

 ‘저희 장자 지함이 이제 크신 은혜를 입어

귀댁의 사랑스런 맏딸 윤지를 배필로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선인의 예를 따라 삼가 납폐의식을 갖추오니

따뜻이 살펴주십시오.

갑오년 향기로운 봄날, 문수산 자락에서

문영태 장재순 두 손 모읍니다.’

 화가 문영태(왼쪽)씨와 아내 장재순씨가 사람 키만한

장독대와 벅수가 놓인 마당 한 편에서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다.

 

남편의 책상 위에는 사돈댁에 보낼 함 속에 넣을 편지 초안이 놓여 있었다. 옛 방식대로 한문으로 쓰고 곁에 한글로 간단한 해설을 붙여뒀다. 한지 위에 실제로 쓰기 전에 미리 연습해본 흔적이었다. 한 주일 뒤 혼인할 아들을 위한 아버지의 애정이 물씬 풍겨져 나는 책상 앞에 한동안 서 있었다. 여기는 김포시 월곶면 보구곶리. 보통 사람들은 들어올 일이 잘 없는, 북한의 경기도 개풍군을 눈앞에 둔 서해안 최북단 마을이다.

 문수산 아래의 이 집을 나는 그냥 문수산방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사랑 주인인 화가 문영태의 별호가 ‘문수산인’이라니 그 사람이 사는 집이라면 문수산방일 수밖에!

 

문수산방은 여러 면에서 여느 집과 썩 다르지만 가장 두드러진 차이점은 예술과 학문이 일상 안에 깊숙이 침투해 있다는 점이다. 모퉁이마다 매운 눈썰미로 엄선된, 허튼 구석 한군데도 안 보이는 빼어난 공예와 조각과 회화가 자리 잡았는데 그게 장식이 아니라 생활이라는 점이다. 50년생이니 예순 중반의 남편과 56년생이니 예순에 육박하는 아내 둘이서 단출하게 사는 집이니 좀 느슨해도 좋으련만. 집 전체에 용맹정진의 순결하고 맑은 기운이 감돈다. 그걸 아내는 남편 탓이라고, 남편은 아내 탓이라고 서로 책임전가하지만 둘은 엄밀히 말해 공범이다. 둘 다 얘기 중에 자연스럽게 ‘큰 스승’에 관해 말하는 걸 내게 들켜버렸다. 남편은 큰 스승이 20대에 사서삼경을 배운 함석헌 선생이라고 하고 아내는 평생 매만져온 ‘유물들’이라고 말한다. 뜰에 심어놓은 갖가지 야생화와 나무들을 이리저리 호명할 때 남편은 “늙도록 자라는 사람들이 있지요?”하면서 은근히 아내를 치켜세웠고 30년 가까이 인사동에서 ‘민예사랑’이라는 앤티크숍을 운영해온 아내는 “남편이야 원래 자기세계가 따로 있는 사람이니까 그걸 존중하지요. 큰 영향도 받고요”라며 남편의 남다른 정신성을 은연중 자랑했다. 서로가 서로의 거울이고 스승이 되는 관계, 30년을 살고 난 부부가 마침내 다다른 아름다운 모습을 나는 선망에 차서 바라본다.


 

 

 

 

 

 

 

 

 

 

 

 

1 조선시대 가구들로 꾸민 2층 방.
2 주방 왼쪽 벽엔 진달래 가지를, 식탁 위엔 봄맞이꽃과 냉이꽃을 꽂았다.

 

 “나는 원래 돌이고 저 사람은 나무지요. 나는 평생 돌을 그려온 돌 같은 사람이고 저 사람은 나무를 좋아하고 나무처럼 자라면서 내게 기쁨을 줍니다. 그래서 별명이 ‘잔잴순’이에요. 이름에다 엔돌핀의 받침을 합성한 거예요. 하하”

 원래 둘은 서울 화곡동에서 아이들을 낳아서 키웠다. 혼인할 때 시어머니가 사주신 집이었다. 거기서 35년간 한 번도 이사하지 않고 살았다. “시어머님이 저를 특별히 편애하셨어요. 남편은 어머님이 마흔여덟에 얻은 막내아들이거든요. 몸도 불편한 아들이니 정말 애지중지하셨는데 저를 얻으시고는 그 사랑을 다 저에게 옮기셨어요. 홀로 자수성가하셔서 문씨 집안 살림을 일으키신 훌륭한 분이셔요.” 아이들이 대학에 들어가자 화곡동 집을 아이들에게 맡기고 둘은 시골로 들어왔다.

 동네이름에 ‘곶’이 둘이나 붙은 이 강변마을과 인연이 닿은 것은 거의 30년 전. 남편이 민통선 따라가는 기행을 내일신문에 연재하면서였다. “백령도에서 동해까지 철책선을 따라가는 기행이었어요. 사진 찍는 이지누, 글 쓰는 김하기와 함께 다녔어요. 그때 우연히 이 동네를 봤는데 딱 마음에 들었어요. 문수산을 뒤로하고 앞에 ‘유도’란 섬을 바라보며 한강이 서해와 만나는 가장 마지막 지점, 복숭아 꽃이 만발해 있었지요. 잊고 있다가 몇 해 후 다시 왔더니 마을 회관이 비어있데요. 그걸 작업실로 빌렸지요.”

 

 


3 2층에 전시된 조각보와 자수가 놓인 베갯잇.
4 관솔대와 꽃핀 산복숭아 가지로 장식한 현관 입구
5 2층 테라스와 이어진 정원의 모습.

 

1998년에 평(3.3㎡)당 27만원을 주고 밭 500평을 샀다. 아내 장재순은 늘 시골살이가 소원이었다. 좋은 장대석이나 우물돌이 생기면 일단 밭에 가져다 뒀다. 그러면서 행복했다. 4년 뒤엔 밭에 잇댄 시골집을 사서 수리했다. 뜰이 훨씬 넓어지고 높낮이도 생겼다. “견본대로 지은 농가주택이었어요. 원래는 1층이 창고였는데 수리해서 거실과 부엌으로 만들었지요. 여기서 일 년에 한 번씩은 꼭 전시회를 해요. 벌써 12년째네요. 살림집을 오픈해 그림과 도자기와 앤티크를 전시하는 건 특별한 맛이 있지요. 구경 오는 분들도 의외로 많고.”

 그날 안주인은 우리를 맞기 위해 현관에 꽃핀 산복숭아 가지 하나를 통째로 꽂아뒀다. “식탁 위 꽃은 어제 우리 딸 지민이가 꽂아주고 갔어요. 마당에 핀 냉이꽃과 ‘봄맞이’라는 꽃이에요.” 뜰에 돋은 미나리와 당귀로 샐러드를 만들고 진달래 꽃잎으로 화전을 부치고 두릅과 취를 따서 나물을 무쳤다. 부엌 벽에 꽂아둔 푸른 잎 돋은 진달래 가지는 그대로 한편의 살아 있는 ‘시’다. 그는 눈 돌리는 곳마다 웃음을 벙글게 만드는 재주가 있다. 과연 엔돌핀을 솟게 하는 ‘잔잴순’이 맞다.

 문수산방 뜰엔 수형이 멋지거나 꽃이 좋거나 열매가 아름다운 토종나무를 엄선해서 심었다. 솔과 오동과 청매와 능수벚과 조팝과 미스김라일락과! 나무 아래는 돌이 있다. 돌은 그냥 돌이 아니다. 500년쯤 전 조상들이 일상에 사용했던 돌확과 우물돌과 관솔대와 떡판과 기명통과 수세관(물을 받아 손을 씻던 돌)과 장대석들이다. 비석 지붕으로 쓰이던 놀랄 만치 조형적인 ‘개석’과 벅수와 돌짐승과 동자석과 문관석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저기 귀엽게, 음전하게, 정답게, 우아하게, 새침하게 앉아 있다. “골동 중에서 가장 깊이가 있는 게 석물이에요. 사람과 세월이 합작으로 만들어내서 그런가 봐요. 돌이 좋다면 어디든 달려갔지요. 이 장대석은 광화문 인근에서 나왔어요. 이만 한 길이의 장대석을 쓰자면 궁전은 아니어도 고관대작의 집이었을 거예요. 저 떡판은 진주에서 가져왔고. 이 돌은 아마 약을 가는 용도로 썼을 거예요.” 경제적 관심이라곤 없는 사람을 남편으로 둔 덕분에 처음엔 먹고살려고 골동가게를 시작했다. “남편이 민미협에 관여했고 당시 ‘그림마당 민’ 앞에 빈 가게가 있어 공예 갤러리로 시작했어요. 공예가 오래 묵으면 골동이 되잖아요. 자연스럽게 골동을 함께 했지요. 공예품과 도자기와 석물과 목가구와…. 그런데 유물을 들여다보면서 절로 재미를 느끼고 미감과 안목이 생기고 속뜻도 읽게 되데요.”

 유물이 마침내 마음공부까지 하게 만들더라고 뜰의 주인은 말한다. 그렇다. 아름다움은 닫힌 마음을 열게 한다. 딱딱한 것을 부드럽게 만든다. 우리가 아름다움에 탐닉하는 이유는 그게 사람을 다른 차원으로 이동시켜 주기 때문이라고 나는 믿는다. 다른 차원이란 다른 공간이 아니다. 바로 이 순간 안에 머무르는 것, 현재의 드넓은 확장, ‘지금 여기’ 속으로 진입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문수산방은 실내도 실외도 그런 물건들로 가득 차 있다. 그래서 깊이 있고 힘차고 고요하고 순결하다.

 혼인하는 아들 내외를 위해 그는 얼마 전 화곡동 집을 새로 꾸몄다. 부모의 신혼집이 아들의 신혼집이 된다. 아들 지함은 자기가 태어난 집에서 제 아이를 낳는 기쁨을 누릴 것이다. 부박한 서울살림에선 어림없는 격조를 장재순 부부는 한 세대만에 이뤄내고 말았다.

 아이들 수백 명이 차가운 바닷물 속에 어이없이 수장되는 상황을 우리는 실시간으로 지켜보고 있지만, 그래서 나라 안에 온통 슬픔이 가득 덮였지만 그래도 삶은 여전히 신비하고 엄숙하다. 그걸 문수산방 뜰에 서서 나는 새삼 느낀다.

[중앙일보]

글=김서령 칼럼리스트
사진=안성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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