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화장품 상점 우후죽순… ‘명동化’ 가속
외국인 관광객이 10일 오후 서울 종로구 인사동 문화지구에서 한 매장에 진열된 기념품을 살펴보고 있다.
서울시 종로구 인사동은 도자기, 고미술, 표구점, 화랑과 이음동의어(異音同義語)로 여겨지는 공간이다. 1970년 최초의 근대적 화랑이 들어섰고, 전국 각지의 수공예 장인이 몰려와 자신만의 예술을 창조했던 전통 문화의 거리이기도 하다.
관광객이 하루 5만명 넘게 찾는 이런 인사동에서 ‘전통’이 사라지고 있다. 대기업과 프랜차이즈 업체 매장이 하루가 다르게 ‘영토’를 확장해 가는 중이다. 대신 수공예 장인이나 기존 상인들은 치솟는 임대료를 감당하지 못해 하나둘 인사동을 떠난다. 권리금 분쟁도 속출하고 있다. ‘문화지구’라는 이름만 빈껍데기처럼 남아 있다.
밀려나는 전통과 문화
“저기 좀 보세요. 우리 고유의 전통이 느껴지십니까?” 지난 10일 인사동에서 만난 윤용철 인사전통문화보존회장은 인사동길에 죽 늘어선 각종 프랜차이즈 카페와 식당을 가리켰다. 길 건너편에는 브랜드 화장품 가게가 즐비했다. 종로와 맞닿은 남인사마당 쪽은 문화지구라기보단 중심상업지구라는 표현이 어울렸다.
대기업과 프랜차이즈 매장은 인사동에서 왕래가 가장 많은 중심거리에 자리 잡고 있다. 화장품 가게 8곳과 카페·식당 등 모두 17개가 성업 중이다. 특히 인사동의 ‘얼굴’ 격인 종로 쪽 진입로에 빽빽이 들어서 있다. 윤 회장은 “수치로는 많지 않아 보이지만 관광객 대부분이 프랜차이즈 매장 등을 찾으면서 전통찻집이나 수공예상점 등 기존 매장들은 고전하고 있다”며 “인사동이 명동처럼 바뀌고 있다”고 했다.
대기업과 프랜차이즈 업체들은 공격적으로 인사동에 뛰어들고 있다. 최근 KT&G는 부동산펀드를 통해 인사동 ‘쌈지길’에 간접 투자하는 것을 검토하고 있다. 2004년 완공된 쌈지길은 공예점과 찻집 등 90여개 점포가 들어선 인사동 거리의 명물이다. 토종패션업체 쌈지가 소유했던 이곳은 주인이 바뀐 뒤 2011년 캡스톤자산운용에 팔렸다. 전통과는 거리가 먼 면세점도 인사동 중심 골목에서 걸어서 5분 거리에 들어설 계획이다.
치솟는 임대료, 권리금 분쟁
기존 상인들의 불안은 갈수록 커지고 있다. 유명 브랜드나 프랜차이즈 업체의 매장이 앞 다퉈 들어오면서 임대료 상승을 부추기고 있어서다. 종로구청에 따르면 인사동 중심 골목 도로변에 위치한 33㎡ 점포 임대료는 한 달에 800만∼900만원이나 된다. 6년간 전통차를 팔아온 A씨는 “쌈지길에 입점한 상점은 수수료 형식으로 임대료를 내는데 계속해서 오르고 있다. 한 달에 300만∼500만원을 훌쩍 넘는다”며 “대기업으로 넘어가면 수익을 늘리는 쪽으로 정책을 바꿀 텐데 벌써부터 임대료가 걱정”이라고 했다.
이러다 보니 수공예장인이나 기존 상인 등 ‘터줏대감’들은 배겨 내기 어렵다. 화랑과 표구점은 저가 액세서리 등을 파는 식으로 업종을 바꾸지만 임대료 부담을 해소하기 버겁다. 4년간 공예 전문점을 운영해온 B씨는 1층에 있던 가게를 지난 13일 같은 건물 4층으로 옮겼다. 수공예품을 팔아서는 임대료 내기가 빠듯해 직접 공예품을 만드는 문화센터로 바꾸고, 월세가 싼 위층으로 올라간 것이다.
건물 임대료가 들썩이면서 권리금을 받지 못하고 내쫓기는 사례도 속출하고 있다. 19년간 인사동에서 수제 전통찻집을 운영해온 오모(62·여)씨는 곧 쫓겨날 처지다. 98세인 어머니로부터 민간요법 등을 배운 오씨의 가게는 일본에서도 찾아올 정도로 유명하다.
지난해 5월 건물주는 오씨에게 가게를 빼라고 통보했다. 이 자리에 빵집을 낸다고 한다. 오씨는 권리금 7000만원을 날리게 됐다. 그는 “권리금을 못 받고 나가는 억울함을 넘어 전통 문화가 근간인 인사동에서 우리 가게가 사라지는 건 모두에게 손해”라고 말했다.
당국은 속수무책
서울시와 종로구청은 딱히 손쓸 방법이 없다. 1988년 전통문화거리로 지정된 인사동은 2002년 우리나라 최초의 문화지구가 됐다. 서울시는 관련 조례를 개정해 문화지구 내 비디오물감상실업, 게임제공업, 관광숙박업 등 전통 문화를 훼손할 가능성이 높은 업종의 영업을 제한했다. 2013년엔 화장품과 제과업 등도 여기에 포함시켰다.
그러나 중심 골목을 제외한 곳에는 이 조례가 적용되지 않는다. 이 때문에 대기업이나 프랜차이즈 업체는 중심 골목을 피해 매장을 내고 있다. 윤 회장은 “독특한 문화와 전통이 있으면 관광객은 알아서 찾아온다”며 “점차 사라지고 있는 인사동의 전통을 보존하기 위해 정부 차원의 강력한 규제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프랜차이즈 업체들은 ‘전통’이라는 인사동 이미지를 해치지 않을까 조심스러워하고 있다. 한 프랜차이즈 업체 관계자는 “상호를 한글로 달고 인사동 자체 문화행사가 있을 때 재정적으로 동참하는 등 분위기를 해치지 않도록 노력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국민일보 / 글·사진=박세환 기자 foryou@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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