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시장' 부정적 인식 씻고 예술과 사회 잇는 다리 놓을 것


인사동 한복판 살며 화랑일 시작
41년 전통의 '동산방' 대물림
화랑협회 첫 父子 회장 타이틀

지원책 확대 요구하기 전에
선배화랑이 후배화랑 돕는 '멘토·멘티제' 도입 상생 먼저
보육시설·병원 등에 기증·대여
미술 소외자에 감상 기회 제공

구입비 5,000만원까지 손비처리
기부 기업에도 세제혜택 부여
침체된 미술시장 활성화 해야

 

[서울경제 / 조상인기자]



나면서부터 그의 머리맡에는 그림이 걸려 있었다. 한국전쟁 후 서울로 돌아온 네 살 무렵에는 종로구 인사동, 지금의 '미술 거리'에서 살기도 했다. 화랑주의 아들로 태어나 부친께 물려받은 동산방화랑을 2대째 경영해온 박우홍(63·사진) 동산방화랑 대표가 지난달 한국화랑협회 제17대 회장에 취임했다. 단독출마해 경선 없이 박수갈채 속에 회장에 추대됐기에 174개 회원 화랑의 통합을 이끌어낼 적임자라 는 기대의 목소리가 높다. 게다가 아버지 박주환씨가 화랑협회 창립 멤버로 2대·6대 회장을 지냈기에 그는 대물림 화랑주에 이어 국내 처음 화랑협회 '부자(父子) 회장'의 타이틀을 얻었다.

"미술작품이 주는 감동과 감정의 순화는 말로 표현할 수도, 정량화해 측정할 수도 없습니다. 하지만 여러 번 접하다 보면 자신만의 감성이 생겨납니다. 일반인보다는 예술작품을 다루고 경험할 기회가 많아 '식견 있다'고 평가 받는 화랑들이 예술과 사회를 연결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박 회장은 미술 속에서 자랐고 그의 인생이 미술과 더불어 영글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전쟁 후 서울로 돌아온 네 살 무렵, 그는 인사동 한복판에서 살았다. 한국화 전문의 표구화방으로 시작한 '동산방'이 '화랑'으로 거듭난 것은 지난 1974년. 올해로 41년 된 그 화랑이 박 회장 인생의 전부였다. 그가 본격적으로 화랑일에 뛰어든 때는 단국대 경영학과 3학년이던 1976년 무렵이다.

"딱 그해에 아버지를 비롯한 화랑업계 어르신 몇 분이 처음으로 '화랑협회'를 만들고자 의기투합하셨죠. 사무실을 따로 차릴 여력이 없어 동산방화랑 안에 협회 사무실을 두고 있었습니다. 그 덕에 저는 감히 찾아가 뵙지도 못할 미술계 선배들을 자주 뵙고 많이 배울 수 있었습니다."

스스로 '선배님의 은혜'를 입었다는 박 회장은 취임 후 '멘토·멘티제'를 제안했다. 잘나가는 선배 화랑들이 멘토가 되어 멘티인 신규 화랑을 도우며 상생할 때 미술시장이 발전할 수 있다는 게 경험으로 터득한 그의 생각이다.

또한 박 회장은 미술시장을 위한 지원책 확대를 주장하기에 앞서 미술계가 먼저 변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미술계를 이야기하면 '서미갤러리' 등을 거론하며 비자금 연루, 검은 시장을 떠올리는 부정적 인식을 바꾸는 게 급선무입니다. 인식을 바꿔달라고 목소리를 높이기 전에 미술유통의 중심축인 화랑들이 미술문화에 어떻게 기여할 수 있는지를 보여줄 생각입니다. 작게는 미술경험 소외지역에서 우리가 보완할 수 있는 것으로 사회적 역할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보육시설·학교·병원 등에 작품을 기증·대여하는 형식으로 더 많은 사람들이 미술과 접할 수 있는 기회를 늘려주는 게 필요하거든요."

이는 1차적으로 불평에 앞서 인식전환의 계기를 마련하겠다는 대의에 기반한다. 나아가 2차적으로는 미술감상과 경험, 미술교육의 확대가 미술시장의 장기적 발전의 밑거름이 될 수 있다. 얘기를 꺼내며 박 회장은 집무실 책상 옆에 걸린 그림 한 점을 가리켰다. 야트막한 산 위의 정자를 그린 산수화. '세검설초'라 적힌 소정 변관식의 작품이다.

"30대 때 일 때문에 드나들던 한 소장가의 집 침실에서 이 그림을 처음 봤습니다. 고등학교 때 살던 우리 집 창문 너머로 보이던 세검정 정자 장면이 고스란히 담긴 작품 앞에서 한동안 멍하니 서 있었습니다. 작아도 참 잘 그린 그림이었지만 내 추억이 버무려져서인지 한없이 좋은 거예요. 저기 정자 옆 너럭바위에서 한지 말리던 기억도 나고요. 결례를 무릅쓰고 '제 아버지가 파셨던 작품이지만 제가 되사면 안 되겠습니까' 했고 단칼에 거절당했습니다. 하지만 며칠 뒤 그 그림을 바라보는 저를 기억한 소장가에게서 팔 것 없이 그냥 주겠다고 연락이 온 겁니다. 나중에 운보 김기창의 그림을 드리고 맞바꾸긴 했죠. 이처럼 좋은 그림은 명화를 넘어 추억을 씹게 하는 그림입니다. 추억과 연결돼 가슴에 와 닿는 그림이 미술과의 접점인 만큼 미술교육과 경험이 중요합니다."

처음 가슴이 쿵 떨어지는 기분을 느끼게 한 수화 김환기의 1950년대작 '산월', 관아재 조영석이 절벽 아래에서 배 타고 노는 두 친구를 그린 '선유도 그림' 등 박 회장이 꼽은 '내 마음을 흔든 명작'은 한결같이 추억과 연결돼 있었다. 이런 경험을 일반 대중도 느끼게 하고 싶은 게 그의 바람이다. 결국 미술시장이 반짝 호황 이후 위축된 원인이 미술품에 대한 투기심리와 함께 미술 저변을 키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림을 즐기지 못한 채 투자 대상으로만 생각"하는 수요자도 문제고, "작품세계를 잘 숙성시킨 거장과 달리 빠른 성공을 좇는 국내 젊은 작가" 같은 공급자의 문제도 있다. 더불어 박 회장은 이 같은 분위기를 극복하지 못한 좁은 국내시장의 문제는 유통주체들의 책임이라고 자책하며 해법을 모색하고 있다.

우선 화랑업계가 지속적으로 요구해온 미술품 구입 관련 손비처리 등의 세제혜택이다. 하지만 미술품 수요자를 소수의 부유층으로 한정시켜 미술 관련 세제혜택을 부자감세와 결부시킬 경우 해법이 어려워지므로 보다 신중한 접근방식이 필요하다는 게 박 회장의 생각이다.

"현행 500만원 범위 내 미술품은 '장식품 대금'으로 비용처리를 해주는데 그 이상이면 비업무용 부동산으로 취급합니다. 이 경우 금융권에 부채가 있다면 이 미술품이 비업무용 부동산으로 분류돼 세금이 부과됩니다. 이른바 '필요 없는 것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로 소장·소유만 해도 세금을 내는 불합리한 면이 있습니다. 이 부분을 해결하기 위해 최소한 5,000만원까지는 작품구매비용을 손비처리해주면 미술시장의 악조건을 극복할 수 있으리라 봅니다. 경제상황 등을 고려해 개인의 활발한 그림 구입이 여의치 않다면 기업이 구입해 다각도로 사용할 수 있으니까요."

한편 미국은 기업이 미술품을 기부할 경우 그림값의 20~50% 범위에서 소득세를 전액 경감해주기에 길게는 수년에 걸쳐 세금감면 혜택을 보기도 하는 반면 우리는 미술품 기부에 따른 세제혜택이 전혀 없다. 박 회장은 이 점도 안타깝다.

"박물관·미술관 예술품 기부에 따른 세제경감 혜택을 단 5%만이라도 주는 방식으로 기부진작책을 쓰면 국가 차원에서도 기부의 길이 활짝 열릴 겁니다. 예를 들어 부모에게서 근대미술품을 물려받은 젊은 사람들에게서 작품 기부를 유도한다면 우리도 번듯한 근대미술관을 확보할 수 있을 겁니다. 공공적 재화로 미술품을 활용할 경우 연 30억원 안팎(국립현대미술관 경우)의 구입예산 몇 배의 효과를 가질 수 있습니다."

박 회장은 자신이 평생을 두고 미술시장의 희로애락을 봐왔기에 섣부른 단기 해법보다는 장기적 혜안이 살길임을 거듭 강조한다.

"한국의 미술문화가 성장을 못하는 이유 중 하나가 자꾸만 트레이드마크화하는 식으로 폭을 좁히기 때문입니다. 가령 도상봉은 1960~1970년대 라일락 정물이 최고다, 식으로 고착시키면 그외 다른 시기 작품은 값이 뚝 떨어지죠. 우리는 그게 잘 안되니 원로작가들이 시장에서 퇴출되는 분위기고요. 그런 뿌리가 약하고 흔들리니 화랑도 2대·3대에 걸쳐 오래가지 못하는 겁니다. 덜 비싸도 나름 갖는 시대적 의미가 있는 작품들이거든요. 화랑업은 돈을 넘겨 주는 게 아니라 작품을 전수하는 것이거든요. 우리나라도 저를 비롯해 국제·가나·현대 등 주요 화랑의 2세 경영이 시작된 만큼 사회적 기여의 자세를 갖추는 화랑이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합니다."

그의 반짝이는 눈에 미술계가 기대를 모으는 이유다.

He is…
△1952년 서울 △1977년 동산방화랑 기획·총괄 담당 △1978년 단국대 경영학과 졸업 △2000년 동산방화랑 대표 △문화관광부 미술은행 운영위원 △한국미술품감정협회 이사 △2009~2012년 한국화랑협회 부회장 △2015년~ 제17대 화랑협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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