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 춘천고속도로의 교통사고로 죽음의 문턱을 넘어 온 조준영 시인이 넉 달 만에 인사동에 모습을 드러냈다.

대형 트럭에 받혀 샌드위치 된 승용차에서 아내와 모두 살아났다는 것은 기적이었다. 분명 신의 가호가 있었을 것으로 본다.

자동차는 폐차 처분했으나, 신체 모든 부분이 아슬아슬하게 위기를 모면했다는 것이다.

척추나 폐 등 내 외과 여러 곳에 상처를 입었으나, 결정적인 곳에서 모두 멈추었다고 한다.

얼굴에 약간의 흉터가 남았으나, 청춘사업에 지장이 있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런데, 이 친구! 참 괜찮은 사람이다.
시만 썼다면 그도 개털이었을 것이나, 다행스럽게 강남대학교 교수자리를 껴 찰 수 있어 먹고 사는 데 지장이 없긴 하지만,

여지 것 가난한 예술가를 돕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그리고 인사동을 떠도는 예술가들의 그 많은 경조사에 빠지지 않으면서,

정작 자신이 큰일을 당해서는 아무에게도 연락하지 않은 것이다. 그 것도 누군가 우연히 전화하다 알아 낸 것이다.

입원 중인데도 퇴원해 집에서 가료 중이니, 좀 있다 연락하고 나가겠다고 말한 것이다.

남에게 폐 끼치지 않으려는 이런 착한 심성을 가졌으니, 어찌 저승사자인들 데려갈 수 있었겠는가?

지난 28일 오후6시경에 인사동 ‘유목민’에서 만나자는 전갈을 몇 일전 받았다.
교통사고를 알고 있는 지인들만 연락한 모양인데, 장경호, 김상현, 이명희, 전강호, 최석태, 정영신,

공윤희, 서길헌씨 등 열 여명이 모여앉아, 사고 내막 듣느라 귀를 곤두세웠다.

그리고, 요즘 인사동 16길은 화가나 문인 뿐 아니라, 영화감독이나 가수들도 많이 더나 든다.
이 날도 한 때 ‘가랑잎’으로 인기를 누렸던 ‘에보니스’의 이호상씨 등 여러 명이 등장해 음악을 들려주었는데,

‘뮤아트’의 김상현씨가 되받아 ‘목포의 눈물’로 답했다.

덕분에 반가운 사람들을 만나는 즐거운 자리였으나 광고사진의 대부 김한용 선생께서 돌아가셨다는 부음에

오래 지체할 수 없었다. 늦게까지 남았던 아내 이야기로는, 그 날 술값도 조준영씨가 냈다는 것이다.

그동안 병원에 누워있어 돈 쓸 기회가 없었다나...
다들 병문안도 못 갔기에 술값을 조금씩 준비했는데 말이다.

그 날 들었던 이야기 중 가장 마음에 걸린 것은, 그런 엄청난 사고를 내고도 가해자가 병문안은커녕,

위로 전화 한 번 하지 않았다고 한다. 더 기가 막히는 것은 보험회사에서 찾아가지 말라고 당부한다는 것이다.

최소한의 양심이나 도리마저 저버린 비정한 세상이 걱정스럽다.


사진, 글 / 조문호















































지난 27일 열린 이목일의 전시 핑계로 창원의 김의권씨가 일찍부터 올라왔다.
그 것도 하루 전에 모습을 드러내었는데, 그 행색이 가관이었다.
노인네처럼, 지팡이를 짚었는데, 관절에 이상이 생겨 그렇단다.
하기야 환갑을 훨씬 넘겼으니, 이젠 노인 측에 낄 만도 하다.
그런데, 난 그걸 인정 못하는 착각 속에 사니 문제다.
무슨 청춘인줄 여기지만, 가끔 뒤 돌아보며 절감하기도 한다.

어저께 고향친구들이 올라 온 적이 있었다.
약속장소부터, 노인들의 놀이터인 낙원동의 “먹고갈래 지고갈래”였다.
그 술집은 낮 시간부터 흥청거렸다. 그 다음엔 노래방 가잖다.
평소 노래방을 싫어하지만, 그 것도 낮 시간에 가자니 얼떨떨했다.
그 만큼 일선에서 밀려 난 노인들의 설 자리가 없다는 뜻 일게다.
집에서는 마눌님과 TV에 나오는 드라마나 건강 프로 보며 지낼 게다.

인사동 ‘갤러리M’에서 열린 이목일 전시에서 반가운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지난 번, 전시 첫날에 봄나들이 겸한 경노잔치 한 번 열자는 사발통문을 보냈는데, 
두문불출하는 친구들이야 어쩔 수 없으나, 오랜만의 회포였다.
일찍부터 지팡이 노인 모시고, ‘시가연’에서 양촌리 커피도 마셨고,
전시장에 부려놓은 안동소주도 마셨다.

뒤풀이 집인 ‘아리랑’으로 자리를 옮겼으나, 자리를 잘 못 앉았다.
옆 좌석에 모르는 분들이 앉아 술 마실 분위기가 아니었다,
끼니만 해결하고, 김의권, 김상현씨와 ‘유목민’으로 자리를 옮겨야했다.
인사동 거리에서 조심스럽게 걷는 심우성선생을 만나기도 했다.
밥집이나 찻집을 전전하며, 혼자 재미있게 사신다.

'유목민'에 자리 잡았더니 한사람 두 사람 나타나기 시작했다.
뒤풀이집에 있었던, 이명희, 노광래씨를 비롯하여
공윤희, 김운성, 유근오, 노승기, 타이거 박, 허미자,
뒤늦게는 김명성, 박상희, 이상훈, 신현수씨도 나타났다.
늘 상 그렇지만, 그렇게 어울려 한 판 노는 것이다.

오랜만에 ‘뮤아트’ 김상현씨의 노래도 들었다.
다른 노래도 좋았지만, ‘봄날은 간다’와 ‘목포의 눈물’이 더 좋았다.
얼마나 절절하게 부르는지, 슬퍼지더라.
그렇게 노래 불러놓고는 술값까지 계산하고 가버렸다.

이목일씨 뒤풀이에서도 신사임당을 내 놓더니, 아무래도 무리하는 것 같았다.

김의권씨는 ‘백상사우나’ 신세진다기에, 노광래씨 차에 실려 왔다.
아무튼 벗들 덕분에 늦은 시간까지 잘 놀았다.

사진, 글 / 조문호




































































인사동의 밤은 홍대나 강남처럼 북적대진 않는다.

늦은 밤거리를 걷다보면, 유랑악사들의 음악소리가 발길을 잡기도 하지만.
폐지 줍는 노인들의 구부정한 모습이나, 술 한 잔 걸치고 종종걸음 치는
젊은이들의 모습이 눈에 뛸 뿐이다.

그러나 주청들이 모여 있는 골목길로 들어서면 사정이 달라진다.
술 익는 냄새가 술술 난다. 술꾼들이 서서 뿜는 담배연기가 굴뚝처럼 피어오른다.
술 취한 연인들의 헤어지기 아쉬워하는 모습도 사랑스럽더라.

‘유목민’으로 들어서니, 채현국선생의 깔깔거리는 웃음소리가 가득했다.
공윤희씨 옆엔 조현정, 오세현씨가 있었는데, 채선생님 인터뷰 뒷자린 듯했다.

안쪽에는 강기숙, 전인경, 전인미, 황인호씨가 앉았는데, 전인경씨는 이미 맛이 갔더라.
할아버지 같은 채선생께 안겨 응석도 부리고, 자유스런 몸짓으로 웃으며 소리 질러도,
통하는 곳이 인사동 술집 아니가? 시름도 슬픔도 기쁨도 모두 껴안아 줄 수 있는 사람들..

이제, 서러운 예술가들의 시름을  인사동 대폿집 막걸리 잔에 부려놓자.
이 지랄 같은 세상, 욕이라도 실큰 퍼 부으면, 반분은 풀리거든...

사진, 글 / 조문호









































지난 25일 풍기에서 소설 쓰는 배평모씨가 상경했다는 연락이 왔다.

서소문에서 열린 이상엽씨 전시 뒤풀이에서, 마침 옆 자리의 박신흥씨가 안다기에 바꾸어 주었더니,

인사동 유목민으로 함께 넘어 오라는 것이었다.

 

지난해 박신흥씨가 예스터 데이사진집을 펴낼 때, 배평모씨가 서문을 써 준 인연이란다.

인사동 유목민에 갔더니, 삼천포에서 시 쓰고 도자기도 굽는 박영현씨도 와 있었다.

두 시골 노인네들이 무슨 작당으로 상경했는지 모르지만, 윤병권씨 등 여러 명이 어울려 왁자지껄했다.

 

배평모씨는 인사동에서 만난 지가 30년이 넘었지만, 좀 징그러운 친구다.

인사동 레떼에서 그를 처음 만났을 때, 뭐가 좋았던지 이틀 동안 밥시켜 먹으며 한자리에서 퍼 마셨다.

사실 배평모 보다 술집 마담 점숙씨의 펑퍼짐한 엉덩이와 갈까 보다라는 절창에 끌렸는지 모른다.

 

이 친구, 만나자 마자 신바람 난 듯 구라를 풀기 시작했다.

모르는 여인네들 앞에서, 대학로 알몸 헤프닝에서 부터 고속도로 급정거 사건에 이르기까지

침을 튀기며 나발 불기 시작한 것이다. 사실 술 맛 떨어지는 정치이야기보단 낫지만,

초면의 사람들만 있으면 그 따위 이야기로 소개해, 입장 곤란하게 만드는 것이다.

 

요즘 마누라 말 잘 들어며 착실하게 사는 놈, 왜 염장을 지르는지 모르겠다.

배평모는 본래 소설가라 그런지 사실대로 이야기하지 않고, 그럴싸하게 포장하는 버릇이 있어,

듣기 싫지만 바로 잡아주기도 했다.

 

이번엔 박영현시인까지 나서서 내 이야기로 쓴 시를 읽기 시작한 것이다.

한 때 고물 갤로퍼에 공병을 잔뜩 싣고 다녔는데, 짤랑거리며 왜 싣고 다니냐고 묻기에

"이거 팔아 연애한 번 할끼다" 했더니, 달랑 그 걸 시로 옮겨 쓴 것이다.

배평모는 고속도로 사건을 '쌍용' 사보지에 꽁트로 팔아먹더니, 모두들 전국적으로 망신시키지 못해 안달이다.

모두들 낄낄거리며 술을 마셨지만, 이름도 성도 모르는 여인네들에게 수작 걸기는 이미 틀린 것 같다.

어느 미친년이 정신병자 같은 잡놈에게 관심 두겠는가?

 

두 시골노인네들도 여인네들에게 침 흘리며, 열심히 나를 엿 먹였지만, 별 수 없었다.

때 되어 여인네 떠나고 나니, 마치 여우 놓친 늑대처럼 슬피 우는데, 인왕산이 울리더라.

여관비 아끼려 백상사우나에 간다기에 잘 씻고 손장난이나 한 번 하라 위로했다.

 

사진,/ 조문호





















지난 24일 화가 장경호씨로부터 전화가 왔다.

장안동서 신학철선생과 한 잔하고 무다헌에 넘어 왔으니 빨리 나오소~”

이미 술에 취해 목소리는 흐느적거리고 있었다.

어제 마신 술로 주독도 풀리지 않은 상태에서, 내일도 마실일도 걱정인데, 가만 두질 않았다.

소 도살장에 끌려가듯 인사동에 나갔더니, 일찍부터 술집이 부산했다.

 

신학철선생은 반가워하셨으나, 장경호씨는 김정대씨와 입씨름하느라 아는 척도 안 했다.

금방 한 판 할 것 같은 기세였으나, 술 취하면 부르는 그의 행복한 노래쯤으로 생각하고 앉았다.

그다음엔 나한데 시비를 건다. “어찌 알고 왔어요?” 자기가 전화해놓고도 매사 이런 식이다.

술 취하면 부르는 그의 시비성 노래는 익히 알지만, 모르는 사람들이 보면 좌불안석이다.

나중엔 나죽으면 형이 가마니때기라도 한 장 덮어주소라기에 가마니는 구하기 힘들고

카시미롱 이불은 덮어 줄게라고 말했다.

 

신학철선생께서 처음보는 류제홍박사를 소개했다.

모내기그림이야기를 하는 걸 보니 꽤 오랜 교분 같은데, 너무 젊어 보였다.

내가 여자라면, 한 번 꼬셔보고 싶을 정도로 핸섬했다.

명함을 주고 받았는데, 너무 다양하게 바쁜 사람이더라.

사회경제를 통솔한다는 뜻도 가진 ‘planner’라는 글자아래 공공공간연구소 공간력소장이란 직함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바닥에 깨알같이 적힌 글을 보니 정신이 없었다.

문화학박사, 정책컨설턴트, 전통시장전략가, 도시마을계획가, 청년도시메이커, 세계대회기획사라 적혔는데,

사짜는 아닌 것 같았다. 점잖았고, 이야기도 진솔했다.

오죽하면 술 취한 장경호씨의 거친 말투가 류박사와 연결되면 곧 바로 공손해 지겠는가?

    















옆 자리에는 요즘 몸이 불편해 잘 나오지 않는 주임마담 강고운시인도 보였다.

언제 왔는지, ‘관객모독을 연출한 기국서씨도 있었다. 그도 한 가닥 하는 주당이다.

말은 별 없지만, 거슬리면 여지없다. 한 때 서정춘시인이 그의 헤딩 한 방에 날아가는 것도 보았고,

도예가 한봉림씨를 향해 늑대처럼 튀어 올라 얼굴을 활키는 것도 봤다.


작은 거인 기국서씨가 반가웠지만, 일행이 있어 인사만 나누었다.

뒤늦게는 미술평론하는 김준기씨가 등장해, 술자리 대화가 갈리기도 했다.

장경호씨의 십팔번 뒷동산 아지랑이~”를 뒤로하며 먼저 도망쳤다.
















돌아오다 습관적으로 유목민에 들렸다. 안국역 옆에 있으니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주인장 전활철씨와 박혜영씨는 손님받느라 정신없고,

인사동에서 풍요로움이란 회사를 운영하는 조원희씨가 같은 일가라며 엄청 반가워했다.

김기영씨와 함께 앉았지만, 술을 더 마실 수 없었다.

퓨전피아니스트 윤강욱씨와 노래하는 신현수씨도 있었고, 나오는 길에 노광래씨를 만나기도 했으나

이로서 모두 살아있음을 확인하는 인사동 술 방랑은 끝났다.

 

씰데없는 술주정 듣느라 고생했슴니더.”

 

사진,/ 조문호










































 


 



‘다리밑 집’은 인사동에서 제일 작은 대폿집입니다.
본래는 콧구멍만 구멍가게였는데, 2년 전부터 술집으로 바뀌었지요.
이름도 없이 그냥 ‘다리밑 집’이라 부릅니다.
왜냐하면 낙원상가 악기점으로 올라가는 계단아래 터를 잡았거든요.
테이블이야 2개뿐이지만, 비집고 앉으면 열 명이나 앉을 수 있을까요.
감자부침이나 닭똥집 맛이 귀가 막혀, ‘통인’ 김완규씨가 단골이랍니다.

지난 15일 오후 길가다 들렸더니, 김완규씨와 건축가 김동주씨가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반갑기도 하지만, 김동주씨와는 오랜만이라 자리에 눌러 앉았습니다. 

술자리에서 관우 김완규씨의 부친 인제 김정환선생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사업을 아들에게 넘겨주고 나니, 친구 분께서 큰 일 난다며 우려 했답니다.
사실 친구와 술을 좋아하는 관우는 밤새도록 어울려 놀기를 좋아했는데.
부친께서 “난 아들을 믿는다”는 말에 정신을 차렸답니다.

지금은 김완규씨가 아들에게 사업의 일부를 넘겨주었는데,
아들 역시 부전자전이라 술을 좋아하는 모양입니다.
부친에게 배웠던 “난 아들을 믿는다‘는 말을 하긴 했으나, 걱정이랍니다.

다른 약속 때문에 술을 급하게 마셨더니, 대번 취해버렸습니다.
먼저 일어났으나 몸이 비틀거렸습니다. 흔들려도 기분은 좋지요.
화가 장경호씨가 기다리는 ‘유목민’으로 가며, 인사동거리를 찍습니다.
지나치다 ‘사동집’ 주인장 송점순씨를 만나 윙크도 보냈고요.

‘유목민’에는 장경호씨와 강행복, 이승철씨가 술을 마시고 있더군요.
이번에 나온 이승철시집 “그 남자는 무엇으로 사는가”도 받았습니다.

"사랑도 먹어야겠지만, 밥도 먹어야 살지요!"


반갑기는 했으나 이미 취해 더 마실 수가 없는데다,
사진에 거부감을 보이는 어느 여인네 히스테리에 도망쳐야 했습니다.
문제는 지하철에서 잠들어 한없이 끌려갔다는 것입니다.

“아이구! 내 팔자야~”


사진, 글 / 조문호





















정월 초하루, 제사상 물리기가 무섭게 호출이 왔다.
독거노인 대표주자 장경호화백이 연출한 번개팅이란다.
감기 걸려 빌빌하지만, 독거 서러움 다독이려 찾아 나섰다.

설 날, 이른 시간이라 ‘유목민’ 문이 열릴까 싶었는데,
전활철씨 안사람이 친정가, 그 역시 독거라 가능하단다.

닫힌 대문을 살짝 밀어보니, 불 꺼진 술집에 노광래, 장경호, 전활철씨만 있었다.
이미 빈 술병들이 더러 보였고, 난 몸이 정상이 아니라 대번 기별이 왔다.
느닷없이 백발의 여인이 나타났다 사라지더니, 공윤희씨와 채현국선생께서 나타났다,

그리고 임재경선생이 오셨다 가시더니, 뒤늦게는 신학철선생까지 등장하셨다.
무슨 연극무대 배우 들락거리듯, 출연진들이 속속 뒤 따랐다.


술이 취하기 시작하니 목소리도 커지기 시작했다.
정치나 비평 같은 씨잘데 없는 소리는 나오지 않지만,
괜한 딴지가 딴지를 걸고, 울분이 분노를 토해낸다.
이미 고개 숙인 전사자도 속출하기 시작했다.
그 때쯤이면 어김없이 전활철씨의 기타반주와 노래가 시작된다.

“언젠가 가겠지 푸르른 이 청춘
지고 또 피는 꽃잎처럼..
달 밝은 밤이면 창가에 흐르는
내 젊은 연가가 구슬퍼“


"가고 없는 날들을 잡으려 잡으려
빈 손짓에 슬퍼지면
차라리 보내야지 돌아서야지
그렇게 세월은 가는거야"


‘살울림’의 ‘청춘’에 왠지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이미 세상을 떠나간 적음, 강용대, 김종구 이야기 끝자락이라,
그리움인지, 회한의 추억인지,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다.

인사동 ‘실비집’에서 시작된, 우리들의 낭만은 아린 사연이 많다.
30여년의 세월을 방황하다, 이제 끝자락에 머문 것이다.
모두들 인사동의 마지막 해방구라 아쉬워 하지만,

진 꽃잎 따라 지듯, 또 다시 누군가는 피우겠지...

사진, 글 / 조문호

 

 

 

 

 


 


 

 

 

 

 

 

 


 

 

 

 

 

 

 

 

 





술 생각이 간절하던차에, 화가 장경호씨로 부터 전화가 왔다.
제대하고 돌아 온 아들 만나러 나왔으니, 술 한 잔 하자는 이야기였다.
‘유목민’은 문이 잠겼다기에 ‘포도나무집’으로 달려갔다.
과메기안주로 술 한 잔했는데, 소주가 입에 짝짝 달라붙었다.

요즘 장경호씨는 전시가 닥쳐 그림도 그려야 하지만,
방 구하러 서울 곳곳을 살피는데, 집구하기가 만만치 않단다.
100호 정도의 그림을 그릴 수 있는 넓은 공간이 필요하지만, 돈이 적기 때문이다.
의외로 경기도 지역보다 불광동이나 구파발 지역이 저렴하다고 했다.
그런데, 막상 집을 구하고 보니, 전세가 빠지지 않는 다는 것이다.

빼도 박도 못할 형편이지만, 사돈 남 걱정하고 있었다.
없는 놈이 없는 놈 처지 안다더니, 느닷없이 돈 봉투를 내민 것이다.
이미 작심한듯해 거절치는 못했지만, 나중에 돌려 줄 생각이다.
얼마나 가슴이 먹먹하고 편치 않은지, 계속 술만 마셨다.
뒤늦게, 식사하러 오신 ‘심우성선생도 만났다.

담배 피우러 골목에 나갔더니, 새로운 밥집 하나가 생겼더라.
상호가 “꽃, 밥에 피다”였다. 이름은 예쁘지만, 식당 이름으론 좀 그렇더라.
맛보다 멋을 더 좋아하는 젊은이를 겨냥한 듯싶었다.
‘무다헌’으로 자리를 옮겨 마시다, 인사동 밤거리를 쏘다니기도 했다.
추운 날씨 탓인지, 불 빛 탓인지, 인사동이 낯설어 보였다.

마치 이국의 밤거리를 걷는 듯, 허전하고 외로웠다.
에디뜨 피아프의 ‘사랑의 찬가’가 더 애절하게 들리더라.

사진, 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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