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7일 저녁 늦게, 모처럼 김명성씨의 전화를 받았다.
작년 연말 열었던, 내 전시에서 만나고 처음이라 반가웠다.
별 일 없으면 인사동 ‘유목민’으로 나오라 했다.
마침 동자동 상가의 술자리가 끝난 뒤라 서둘러 나갔다.

유진오씨와 함께 있었고, 다른 좌석에도 반가운 사람이 많았다.
어떻게 일은 잘 풀려 가는지 걱정되었지만, 물어 볼 수가 없었다.
눈빛으로 짐작하며, 케케묵은 이야기 안주삼아 술 한 잔했다.

그런데, 꼬깃꼬깃 접은 신사임당 지폐 두 장을 내 손에 집어주었다.
그의 어려운 사정을 짐작하지만, 성의를 무시할 수 없었다.
마침 옆에 가난한 지인이 술 마시고 있어, 한 장씩 나누어 가졌다.

그 친구는 기분이 상했는지, 돈을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나갔다.
자존심이 상한 모양이지만, 주는 사람 자존심은 생각치도 않냐?
결국 찢어 버린 돈 주워 모아, 자기 먹은 술값 계산하게 하면서...

뒤늦게 서길헌씨와 송미향씨도 왔지만, 술 마실 기분이 아니었다.
주인장 전활철씨가 챙겨 준 반찬도 잊은 채, 그냥 나와 버렸다.
도대체 돈이 뭐 길래, 사람 기분을 이렇게 나쁘게 만드는가?
옛 유행가에 나오는 가사처럼 “돈 돈, 돈이 원수다”

사진, 글 / 조문호















인사동의 정취가 사라지며, 인사동을 고향처럼 여겼던 많은 사람들이 뿔뿔이 헤어졌다.
가끔 전시 오프닝에서 만나는 사람도 있지만 한꺼번에 만나기란 쉽지가 않다.

한 때는 여러 모임에서 자주 만날 기회가 있었으나,
구심점이 사라지며 모임들이 점차 사라진 것이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조준영 시인이 나서 가끔 자리를 만들긴 하지만,
나오는 이가 예전처럼 그리 많지 않다.

지난 4일 저녁 무렵, 인사동 ‘유목민’에서 술자리가 만들어졌다.
조준영씨를 비롯하여 강찬모, 이명희, 유진오, 김기영, 강용석,
윤강욱, 공윤희씨 등 모인 사람이 겨우 열 명에 불과했다.
이마저 머지않아 사라질지도 모르지만...

반기는 사람 없는 삭막한 인사동 골목을 기웃거릴 날도 멀지않았다.
살아 있는 동안은 오랜 인사동의 추억을 되 세기며
그 때 그 사람들을 그리워할 것이다.


사진, 글 / 조문호

















아래사진은 열흘 전에 유목민에서 만난 분들이다.

모처럼 바우 손병주씨가 인사동에 등장하여

화가 장경호씨와 유목민주인장 전활철씨와 어울려 한 잔했다.

    













많은 시민들의 호응 속에 열리는 ‘촛불역사’전이 이제 막바지에 이르고 있다.
아쉽지만 오늘 정오에 막을 내리게 된다.
그동안 전시장을 지키며 마지막까지 최선을 대해 준 사진가들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곽명우씨의 헌신적이었던 노력은 물론,

몸이 아파 진통제까지 먹어가며 전시장을 지켜준 이정환씨께는 미안한 마음 감출 수 없다.

일요일인 19일에는 박영환씨가 아침 일찍 나와 전 과정을 중계방송 하듯 알려 주며,

도시락까지 싸와서는 온 종일 지켜주는 열성을 보였다.

전시가 끝난 후 박영환, 곽명우씨와 ‘황금도야지’에서 저녁식사를 함께하며 미안한 마음 달랬다.

그 이틀 날은 너무 늦게나가 이정환씨 대신 하형우씨와 함께 저녁식사를 했다.

그동안 틈틈이 나와 교대해 준 하형우씨도 고생 많이 하셨다.


이 날은 ‘광화문 광장’ 지킴이 화가 이윤엽씨도 만났고, ‘민미협‘회장 이인철씨도 전시장을 찾아 주었다.
’광화문미술행동’ 김준권대장과 함께 인사동 '툇마루‘에서 식사하고, ’비밀정원‘에서 차 마시고, ’유목민‘에서 대포도 한 잔 했다.
뒤늦게 합류한 장경호씨와 함께, 서둘러 제작하게 될 자료집 제작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오늘 정오에 철수하며 함께한 분들과 자리를 같이 할 예정이니, 시간 있는 분들은 참석해 주길 바란다.

그동안 고생 많이 하셨다.


사진,글 / 조문호

































탄핵을 하루 앞둔 지난9일 저녁의 안국역 주변은 소란스러웠다.

촛불시민들은 중요한 날, 소란 피우지 말자며 일찍 흩어졌으나,

낙원상가에서 헌재 가는 길에 몰려있던 태극기부대는 분위기가 험악했다.

신들린 사람처럼 탄핵반대를 외치다가도, 카메라만 들이대면 욕설을 퍼부었다.

 

언론보도에 불만을 가져, 사진찍는 자들을 철천지 원수처럼 생각하는 것 같았다.

주최 측 사람나 태극기부대만 사진을 자유롭게 찍을 수 있었다.

나 같은 늙은이야 태극기부대로 보아 넘길 만도 하지만, 봐 주지 않았다.

태극기 하나 들고 위장이라도 하면 되겠지만, 그렇게 사기 쳐 뭐하겠나 싶어 돌아섰다.



 


일찍 부터 유목민에서 죽치고 있는 화가 장경호씨와 합류했다.

종로경찰서 옆이라 유목민’엔 손님이 많을 것으로 생각했으나, 그리 많지 않았다.

그 부근에 모인 촛불시민들은 일찍 흩어졌지만,

한 사람이 간신히 드나 들수 있는 샛길도 모르거니와 골목 안 구석에 박힌 유목민을 알 리 없었다.

 

유목민에는 주인장 전활철씨를 비롯하여, 장경호. 유진오씨가 마주앉아 막걸리를 마시고 있었다.

좀 있으니, 이승철 시인도 나타났다. 옆 자리엔 황 혁, 김기준, 이기묘, 성영만,

김응규, 박성원, 조봉훈씨 등 여러 명이 날아들어, 사진도 찍고 인사도 땡겼다.

밤 늦은 시간, 어디서 꺾었는지 꽃망울 맺힌 벚꽃 가지를 든 신현수씨도 나타났다,



.


요즘은 술이 취해도 좀처럼 신바람이 나지 않는다. 그 병신 년 때문인지?

개구신들이 다 꼬리내려, 술자리 조가 잘 맞지 않았던지? 

예전 같았으면 돼지 목 따는 소리로 봄날은 간다도 한 곡 뽑았을 것이나,

이런 저런 생각만 많아진다이제 철든 것일까?

 

그러나, 철들기를 절대 거부한다. 봄이 오면 미친 듯이 한 번 놀 것이다.

조지피면 같이 웃고, 조지 지면 같이 우는, 알뜰한 그 맹세를 불러대며...

 

사진, / 조문호















 

 

 

 





인사동에 사람은 많은데, 사람이 없다.
긴 세월 정 나눴던 그 친구들 다 어디 갔는지?

더러는 북망산천 떠났고, 더러는 방구석에 쳐 박혀 산다.
돈과 육신이 고달프니, 세상 가는대로 끌려 산다.

그래도, 그건 아니잖아.
인사동이 변했다고, 사람마저 변할 수 없지.

봄바람 불거든 인사동에서 꽃놀이 한번 하자.
촌에 쳐 박혀 사는 친구들도 올라오너라,

마지막으로 십팔번 한 자락씩 돌려 부르자.





해 바뀌어 얼굴 한 번 보자는 조준영시인의 전갈을 받았다.
인사동에서 만난 정든 벗들 만나 술 한 잔 하잖다.

그 전에는 내가 나섰으나, 바람나 동자동에 살림차려 나갔으니 이제 못한다.
물주 김명성도 낙동강 오리 알 되어 조준영이 나선 것이다.





지난17일 인사동 ‘유목민’에 갔더니, 고작 열 명 남짓 나왔더라.
그림 그리는 이청운은 중병이라 안 되고, 시 쓰는 김신용은 관절이 안 좋단다.
나오기로 한 서정춘시인 마저 부도 내어, 내가 제일 늙었더라.
술값을 거두었으나, 칠십 된 노인네는 경노우대라나...





조준영시인을 비롯하여 전활철, 장경호, 이명희, 김상현, 강찬모,
최병두, 이종태, 강용석, 김곤선, 신현수, 공윤희가 왔었다.
끝판에는 김명성, 이상훈도 왔으나 무엇이 바쁜지 술 한 잔 마시지 않더라.
아파서 허리에 복대차고 나온 연극배우 이명희가 이뿌더라.

김상현은 나를 위해 ‘봄날은 간다’를 흐드러지게 불렀으나, 신이 나지 않았다.
진짜, 봄날은 갔나보다. 이제 마지막 봄이라도 꼭 붙들어 잡자.

사진, 글 / 조문호
















































지난 8일 밤, 반가운 전화가 걸려왔다.
40여년 전, 부산 남포동에서부터 인연이 깊은 유목민 화가 최울가였다.
어디냐고 묻기에 동자동 이랬더니,
“형! 택시타고 퍼떡 나오소.”라며 반겼다.

모처럼의 인사동 걸음이라 단숨에 달려갔다.
파주 헤이리에 작업실은 있지만, 세계를 떠 돌아다녀 잘 만날 수 없는 그다.
‘유목민’에는 정길채, 고미진, 김정대씨 등 여러 명이 있었다.
초대전으로 미국 떠나기 전에 한 번 나왔다는 것이다.

모처럼, 쌍 팔년도 이야기로 반가운 해후의 시간을 가졌다.
이야기 중에 가슴 뭉클한 사연도 들었다.
어렵게 작품 활동을 하던 70년대의 이야기였다.


작고하신 부산 오영재화백의 직계 제자인 그는 당시 물감 살 돈도 없었다.
다들 어려운 처지라, 자신이 그린 그림을 여러 차례 내 주며, 지우고 그리라고 했다는 것이다.
스승의 그림을 지우는 제자의 마음은 어땠을까?


그러니, 어찌 섣불리 그림을 그릴 수 있었겠는가?
그런 훌륭한 스승아래 그림을 배웠으니, 오늘의 최울가가 있지 않나 싶다.
갑질로 사제지간의 도리가 무너진 오늘, 다시 한 번 새겨봐야 할 미담이다.


사진, 글 / 조문호



















지난 27일 오후7시부터 ‘천상병시인기념사업회’ 이사회가 인사동 '이모집'에서 열렸다.

2012년 에 이사회가 열리고 처음이니 근 5년 만에 열리는 이사회였다.

사단법인의 이사회를 5년 만에 연다는 것 자체가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이 문제를 신문에 기고하기 위해 여기 저기 정보를 묻고 다닌 터라, 그 낌새를 알아차린 것 같았다.

여지 것, 천상병선생을 한 번도 뵌 적이 없다는 자가 사무국장에서 부이사장 직함까지 맡아 혼자 갖고 논 것이다.

그동안 매년 봄마다 의정부에서 천상병예술제를 개최하고 천상병문학상도 여러 군데서 시상했으나,

어떻게 진행되었으며, 감사는 제대로 받았는지, 임원들이 아무 것도 모르고 있었다.

회의장에 들어서니, 김명성, 김병호, 구자홍, 목영태, 길상호, 공윤희이사 등 나까지 일곱 명 밖에 나오지 않았다.

모두들 자기가 이사라는 것조차 잊어버렸는지, 아니면 관심이 떠났는지 흐지부지됐다.

김병호 부이사장에게 물었다.“5년 만에 여는 이사회인데, 그동안 어떻게 처리했냐?”고 했으나 묵묵부답이었다.

감사가 두 분이나 있으나 한 분도 나오지 않았다. 이처럼 관심 없는 사람을 앉혀 두었으니, 제대로 감사 했을 리가 없다.

“회계나 업무처리에 관해 조사를 의뢰해도 하등의 문제가 없죠?”라고 물었다.

하기야, 혼자 독주하도록 방치한 김명성이사장의 책임 또한 크다.

그러나 개인의 잘못보다 '천상병시인기념사업회’를 활성화시켜 인사동 발전에 기여하게 하는 게 급선무라

앞으로 어떻게 할 계획인지 회의진행을 지켜보았다.

회의록에는 천상병문학관건립을 위한 천상병선생의 저작권과 유품관리 권한을 의정부시에 넘겨주자는 안건과,

내년 4월22일부터 열릴 ‘제14회천상병예술제’ 준비를 비롯해 임원개선 및 사업회 활성화 방안이란 명목만 적혀 있었다.

천상병예술제 계획안도 십 여 년 넘게 해온 방식에서 하나도 바뀐 것이 없었다.

참석 이사들의 볼멘소리가 이어졌다. 천상병 선생 조카인 목영태이사는 아직 저작권이나 유품을 넘길 상황이 아니라고 말했고,

김명성이사장은 의정부 행사도 좋지만, 인사동에서 여러 가지 사업을 펼칠 것을 주장했다.

그동안 벼랑에 선 ‘아라아트’를 살리기 위해 신경 쓸 겨를이 없었으나,

이제부터 인사동과 ‘천상병시인기념사업회’를 함께 발전시킬 방법을 찾기 위해 나름으로 신경 쓰고 있었다.

먼저 기념사업회 사무실부터 인사동에 옮기려고 좋은 장소를 물색해 두었다는 것이다.


사실 천상병선생은 의정부보다 인사동과 더 연이 깊은 분으로, 인사동의 상징적 인물이었다.

인사동에 있는 ‘귀천’이 천상병시인의 창작무대였고 생활터전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종로구청’이나 ‘인사전통문화보존회’에서는 특색 없는 관광지로 변해버린,

인사동의 정체성을 살리는 문제는 아예 관심이 없어 보였다.

천상병시인께서 돌아가신 20주기를 맞은 3년 전, 인사동‘아라아트’에서 대규모 추모행사를 가지며,

인사동에 천상병선생 동상건립을 위한 구체적 제안이 있었으나 해당 관청에서는 마이동풍 격이었다.

이제 ‘천상병시인기념사업회’를 모태로, 인사동을 사랑해 온 ‘인사동사람들’이 힘을 모을 때가 된 것 같다.

인사동 다운 문화와 풍류가 흔적 없이 사라지기 전에 서둘러야 한다.

풍류 깃던 문화1번지를 다시 살리기 위해 새바람 한 번 일으키자.

사진, 글 / 조문호








천상병선생의 어릴 때 모습으로, '귀천'에 걸린 사진이다. (위측 가운데)










지난 8일 늦은 시간, 소설가 배평모씨로 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쪽방촌 사람들과 어울려 일찍부터 술이 취해, 아내에 대한 변명 아닌 변명을 또닥거리고 있는데,

인사동 ‘유목민’으로 나오라는 전화가 빗발쳤다.

택시비를 줄 테니 빨리 오라 성화지만, 난 일을 마무리하지 않으면 뒤가 걸려 안 된다.


결국 페북에 올리고 나갔는데, 취기에 걸러지지 않은 이야기로 난리가 났다.

정영신에 의해 급히 내려지긴 했으나, 부산에서 이광수교수로부터 전화가 걸려오기까지 했다.

작업이 끝나면 꼬리 내리고 집에 들어갈 것을 자기 교수직을 걸고 장담한다는 것이다.

‘유목민’에 도착하니 배평모씨는 김수길씨와 술을 마시고 있었다. 반갑기는 하지만, 참 징그러운 친구다.

30여년 전 인사동 ‘레떼’에서 처음 만나 이틀 동안 자리를 옮기지 않고 술을 마셨던 그런 친구다.

그도 나처럼 아내와 헤어져 풍기에서 소설만 쓰는데다, 기초생활수급자인지라 더욱 더 동료의식을 느낀 모양이다.

지금은 해방된 45년부터 지금까지의 한국근대사를 쓰고 있는데, 장장 열권이 넘는 대하소설인지라 잘 팔릴까 걱정스럽다.

김수길씨는 나에게 술 한 병을 선물했는데, 그 자리에서 까 버렸다.

뒤늦게 김명성씨와 서길헌, 최건모씨가 합석했으나 술이 취해 무슨 이야기가 오갔는지 기억조차 없다.

단지 김명성에게 좋은 일이 생겼다는 희소식만 머리에서 윙윙거릴 뿐이다.


사진,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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