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일에는 장경호씨 호출로 인사동에 불려나갔다.
지방 다녀와 밀린 일 좀 하려니, 그냥 두지 않았다.






저녁 한 끼 때울 겸 인사동 ‘툇마루’로 나갔더니,
최명철씨가 딸내미 보라양을 데려왔더라.
처음인데도, 인사성도 밝고 성글성글한 게 붙임성이 좋았다.






된장비빔밥에 막걸리 한잔 마시고, ‘낭만으로 자리를 옮겼는데,
장씨나 최씨나, 다들 술에 골았는지 비실비실했다.
쇠 덩어리도 그리 퍼마시고 나부대면 견디지 못할 것이다.






최명철씨는 집에 가자는 보라 데리고, 먼저 퇴청한지라 그만 일어나야 했다.
안주로 시켜놓은 가자미찜이 그대로지만 보영이 더러 싸 달라고 했다.
귀찮아도 가져가면, 내일 아침식사는 폼 나게 할 수 있지 않은가.





그만 돌아갔으면 좋겠으나, 다시 ‘유목민’에 들어갔다.
옆 자리에는 화가 강행복씨가 앉아 있었다.






그런데, 장경호씨 몸이 말이 아니었다.
추운데서 웅크려 잤는지, 마치 풍 맞은 것처럼 허리를 펴지 못했다.
혼자 사는 사람은 몸 아픈 것보다 더 서러운 것이 없는데, 걱정이다.






뒤늦게 페북에 들여다보니 최명철씨도 이틀 동안 잠만 자다
결국 병원신세 진다는 글을 보았다.





오나가나 술뿐인 연말을 견디려면, 몸 관리 잘 해야 한다.
살아남아야 마시지...


사진, 글 / 조문호








원로시인 민영선생의 시집출판기념회가 인사동 ‘유목민’에서 열렸다.
지난 5월 ‘창비’에서 출판된 민영시전집을 뒤늦게 축하하는 자리같았다.
이 날은 일이 겹쳐 이 곳 저곳 세 탕이나 뛰다보니, 이미 파장이었다.






오랫만에 뵌 민영선생님도 반갑기 그지없었으나, 채현국선생을 비롯하여, 김정헌, 장경호, 임태종,

정고암, 조해인, 박구경, 박 철, 오치우, 최명철, 박수영, 이명희, 정원도, 김명지, 송일봉, 정영신씨등

많은 분들이 모여 있었다. 누가 출판기념회에 참석한 사람인지, 술집 손님인지 구분되지 않았다.

이 자리는 '열차시회' 시인들이 민영선생의 시전집출판을 축하하는 자리였다.





시집출판기념회라는 현수막은 안밖으로 두 군데나 걸렸지만, 시집은 구경 할 수 없었다.

몇 달 전에 나온 책이라 다들 보았는지 모르지만, 한 권이라도 가져와 보여 주었으면 좋았겠다.

출판기념회가 아니라 술판기념회였다.





제주에 사는 변순우씨도 올라 와 있었는데,

홀애비가 결혼했다며 낯선 여인을 소개시켜 주었다. 

반갑고 축하 할 일이나, 말도 없이 살았으니 도둑장가 간 셈이다.






저녁을 먹지 못해 배가 고팠으나, 밥은 커녕 술 한 잔 따라주는 사람 없었다.
다들 취해, 알아서 퇴주잔이라도 찾아 마셔야 했다.
제주에 사는 변순우씨가 방어회를 가져 왔다고 했으나,
눈치 보느라 남긴 한 두 점이 덩그러니 쟁반을 지킬 뿐이었다.





삼삼오오 나누어 앉은 술자리에 여기 저기 돌아다니며 남은 술을 거두어 마셨는데,
빈 속에 들어가니 술은 올랐으나, 왠지 즐겁지가 않았다.

'통인가게'에서 받은 심한 모욕감이 머리에서 지워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지것 가난하게 사는 것을 한 번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았는데,

가진자의 거지취급에 분노를 삭일 수가 없었다.






그만 일어나고 싶었으나, 정영신씨가 술자리에 남아있어 갈 수도 없었다.

뒤늦게 이인섭, 성기준, 김명성, 공윤희, 신현수, 윤승길씨 등 여러 명이 등장해

노닥거리다보니, 정영신씨마저 사라져 버렸다.





집에 간 줄 알았는데, 홍어집에 있다는 것이다.

평소 홍어를 좋아하는 것은 알지만, '한 밤중에 왠 홍어냐?'며 가보았는데, 

김명지, 정고암, 이도윤씨와 함께 있었다. 그 자리도 편치 않은 것은 마찬가지였다.







쓸쓸하게 돌아오는 발길은 무거웠다.

하소연 할 곳이라도 있었다면 덜 무거울텐데...


17일의 인사동 밤은 잔뜩 흐렸다.


사진, 글 / 조문호




































































 





'인사전통문화축제인 인사동 박람회'가 지난 달 28일부터 3일까지 인사동 전 지역에서 열렸다.

마지막 날인 3일에서야 구경 갈 수 있었는데, 좀 늦었던지 이미 거리 행진 퍼레이드가 끝나고 있었다.

비가 온다는 일기예보가 있었던지, 우산을 들고 있는 사람들은 많았으나 비는 오지 않았다.

하릴없이 거리를 떠도는데, 미술평론가 최석태씨가 나타나 정영신씨를 보더니 이산가족 만난 듯 반가워했다.






이번 축제는 전통문화업소들을 소개하는 인사동 박람회와 인사동 주민ㆍ문화예술인들이 함께하여

전통문화를 즐길 수 있는 인사전통문화축제로 나뉘어 진행되었다고 한다.

인사동 전 지역의 전통문화업종 업소 171개 모두가 박람회장이 되었는데,

고미술업체와 화랑에서는 특별전을 열었고, 표구ㆍ지필묵ㆍ공예업소들은 각 업소 특화 품목을 50% 할인하여 팔았고,

전통차음식업소(총 30개소)도 주 메뉴를 50% 할인하는 행사를 벌였다고 한다.

그러나 얼마나 사람들이 몰렸는지, 얼마나 팔았는지는 모르겠다.





박람회장인 대개의 업소들을 아는데다, 마땅히 구입할 물건도 없는 터라

전인경씨의 ‘비욘드 만다라’전시가 열리는 'ARTSPACE H'에서 이광수교수를 만나보고, 다시 동자동으로 돌아갔다.

동자동에서 일을 보고 저녁에는 강제훈씨의 “THE PLANET"전이 열리는 강남 ‘스페이스22’로 가야하기 때문이다.





강제훈씨 사진전에서 반가운 분들 만나 뒤풀이장소로 옮겨 한창 술판이 벌어졌는데, 김명성씨의 전화가 빗발쳤다.

빨리 인사동으로 넘어 오라는 것이다.

전주로 이사 가신다는 송상욱선생과 기다린다기에 마지막 이별주라도 마셔야 할 것 같아 또 다시 인사동으로 갔다.

 




유목민에는 반가운 사람들이 여럿 있었다. 윤승길씨와 박영수씨도 있었고, 안 쪽 자리에는 노형석기자도 있었다.

김명성씨와 송상욱선생은 이미 많이 취해 있었다.

인사동을 떠나는 송상욱 선생이나 떠나보내는 김명성씨의 마음이 편할 리가 없었다.

인사동 골방 얻어 사무실로 쓰며, 없는 돈에 ‘멧돌’이란 시지까지 펴내며 인사동 골목골목을 풍미한 세월이 어언 몇 십 년이던가?





인사동을 짝사랑하는 분이 어디 송상욱선생 한 분 뿐이겠냐 마는, 인사불성된 인사동을 차마 지켜볼 수 없었던 것 같았다.

변하는 세상, 변하는 인심을 누가 잡을 수 있으랴!

옛 시인은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 데 없네”고 한탄했지만, 산천도 인걸도 간 데 온 데 없는 곳이 되고 말았다.

어찌 취하지 않고 버틸 수 있겠나.

사진, 글 / 조문호





















 




지난 셋째 수요일은 빗방울이 한 방울 두 방울 떨어지는, 술 생각나는 꿀꿀한 날씨였다.
이 날은 인사동 사람으로 자처하는 반가운 사람들 만나는 날이지만, 너무 일찍 나와 버렸다.
한 시간 가까이 인사동거리를 돌아다녔으나, 아는 분을 한사람도 만나지 못했다.






추위를 재촉하는 흐린 날씨라 자글자글 소리 내며 튀기는 호떡에 눈길이 갔다.
거들 떠 보지 않는 사과 장수의 한 숨을 뒤로하고, 모두들 총총걸음으로 지나간다.
인사동 거리에 사람은 많아도 인사 나누는 사람도, 반가운 인사도 없었다.





술집이 몰려 있는 벽치기 골목은 오후6시가 지났지만 문 닫힌 집이 두 군데나 되고,
문이 열려도 손님조차 없었다. ‘유목민’에서 전활철씨와 이른 저녁 밥을 먹고
담배 피우려 문 앞에 쪼그려 앉았더니, 사진가 윤성광씨가 반가이 달려와 사진을 찍었다.






손님들이 몰려가는 갤러리들을 기웃거렸으나, 마음이 동하는 작품도 사람도 없었다.
그때 사, ‘무의도’ 촌장 정중근씨로 부터 연락이 왔다.
“어디 있느냐?”는 전화에 ‘유목민’으로 달려갔다.






오후 일곱 시가 되어서야 술친구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소리꾼 조수빈씨와 함께 나왔는데, 좀 있으니 정경호씨도 나타났다.
인사동 주객 이인섭선생이 등장하니, 이지연, 노광래, 공윤희씨가 차례대로 나타났다.






이 날은 술을 마셔도 흥이 나지 않고, 취해도 즐겁지 않았다.
정선 가서 몇 일간 쉬고 싶어, 보따리 쌀 작정을 했다.





지하철 타는 안국역6번 출구에는 늦은 시간에도 ‘빅이슈’를 팔고 있었다.
많은 홈리스들이 다시서기 위해 ‘빅이슈’ 판매원으로 나서지만,
내가 필요한 책이 아니라는 이유로 한 번도 사 주지 못했다.
이 날은 큰 맘 먹고 책 한권 사서 펼쳐보았다.






돋보기가 없어 잘 보이지는 않지만, ‘욕심은 만족을 모른다’는 글이 눈에 박혔다.
“그래! 인사동에 대한 그리움도 한 낱 욕심 이겠구나“



사진, 글 / 조문호






















































지난 명절연휴 끝자락에 인사동에서 독거들 밥상머리가 있었다.
장경호, 하태웅씨와 ‘툇마루’에서 만나기로 했으나, 시간이 맞지 않아 같이 먹진 못했다.
장경호씨는 너무 일찍 와 먼저 먹어버렸고, 하태웅씨는 너무 늦게 와 먹지도 못했다.
중요한 것은 술꾼들이 술보다 밥을 먼저 챙겨먹었다는 사실이다.
긴 연휴동안 얼마나 곯았기에...






그런데 오랜만에 ‘툇마루’ 비빔밥을 먹었더니, 너무 맛있었다.
밥 한 그릇을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먹어 치우고, 막걸리를 두 주전자나 비워 재꼈다.
장경호씨는 어렵사리 이사한 자기 사정보다, 손장섭선생 작업실을 걱정하고 있었다.
다행히 미대 다니는 아들이 자기가 이사한 연신내로 합친다는 반가운 소식도 주었다.
드뎌 독거는 면했지만, 행여 아들놈 시집살이 할지 모르겠다.





어쨌든 아들 때문이라도 끼니는 좀 챙길 것이고, 술도 좀 줄이겠지.
이야기 중에 치과의사 이세희씨가 죽었다는 놀라운 소식을 전해 주었다.
‘로마네꽁티’에서 와인을 엄청 얻어 마셨는데, 유난히 건강을 챙기던 양반이 아니던가?
매일 죽는다고 나발 부는 나는 멀쩡하고, 아직 짱짱한 양반이 먼저 죽다니, 세상사 참 새옹지마다.
난, 대장암 걸린 신경림 선생 소식을 전해 주었는데. 제발 무탈하시길 빌 뿐이다.






술 마시다 밖에서 담배피우고 있으니, 그 때야 하태웅씨가 헐레벌떡 달려왔다.
술자리 끝났다며, 밥도 한 그릇 먹이지 않고 ‘유목민’으로 자리를 옮겨 버렸다.
‘유목민’에는 공윤희, 이회종, 전월봉씨 등 반가운 사람이 여럿 있었다.
취기가 올랐으나 이번엔 소주 한 병을 시켰는데,
화가 전월봉씨가 즉석에서 내 몰골까지 스케치 해주었다.






그런데, 왜 그림에다 보증수표 만원이라 쓰 달라고 졸랐을까?
술 취하면 택시비로 사용하기 위해서일까? 팁 주기 위해서일까?
그 날 장경호씨가 한 말처럼, 정말 세상 잘 놀았다.

사진, 글 / 조문호































지난 20일은 인사동에서 반가운 사람들 만나 술마실 수 있었던 셋째 수요일이었다.
이른 술시부터 화가 전강호씨로 부터 연락 왔으나, 두 세 시간 지나야 나갈 수 있었는데,
뒤늦게 인사동 ‘사랑방’으로 갔더니, 장경호, 전강호, 두 사람이 나와 있었다. 빈 병으로 보아 장경호씨는 정량을 초과한 듯 싶었다.


‘유목민‘으로 자리를 옮겼더니, 김명성, 이상훈씨가 있었고, 뒤늦게는 공윤희, 신현수, 이인섭, 강찬모, 신성준씨가 차례대로 등장했다.


그러나 술을 마셔도 노는 게 하나도  재미가 없었다. 술자리는 조가 잘 맞아야 하니까...
장경호씨는 이미 취해 매사에 시비조였다. 전강호씨가 배려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니, 관용을 아느냐는 식이다.





그래서, 다시 자리를 옮겼다.

장경호가 비상금으로 꼬불쳐 둔 신사임당 한 장으로 술값을 내길래, 내가 강찬모한테 탁발한 심사임당 한 장을 주었는데,

'낭만'가는 길에서 최명철씨를 만나 , 그 구리알 같은 돈을 최명철씨 한데 줘버렸다.

이런 싸가지 좀 보게, 그것도 오빠 보는 앞에서...

최명철씨 역시 객지에서 떠 돈지가 오래되어, 주머니가 빈 걸 눈치챈것 같았다.


김용태씨 딸래미 보영이가 장사하는 '낭만'에 가보니, '민미협' 그림쟁이 투성이더라.

이재민, 조신호, 강성봉, 정세학씨 등등, 다 말하다 보면 날 새겠다.






그 날따라 갑자기 열반한 적음(寂音)이 그리웠다.
인사동하면 생각나는 사람으로  민병산, 박이엽, 천상병선생 등 유명세를 떨친 분이 한 둘 아니지만,
선생 분들은 체면 때문에 본색을 들어 낼 수 없었으니, 노는 것하고는 별개 문제다.

단지 나보다 한 살 아래인 적음이만 유일하게 술자리를 유쾌하게 만들었다.


‘월간 뻐꾸기’이야기가 신화로 둔갑한 '월 빠'이야기를 아는 사람은 대개 알것이다.
자기가 무슨 ‘월간 빠’ 주간이라며 창간과 복간을 거듭하는 ‘월빠’이야기로 좌중을 웃겨댔다.
자기 이야기에 자기가 웃는 것도 그렇지만, 온 몸을 흔들대며 낄낄대는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자신은 ‘적음선사’로 불러주길 원했지만, 법명을 뜻하는 “사운드 오브 사이렌스”나 땡초로 통했다.

보면 이 갈리고, 안 보면 보고 싶은 게, 적음이다.



적음선사



술이 취하면 '찔레꽃'을 엄청 청승맞게 불렀다.
“엄마 일 가는 길에 하얀 찔레꽃, 찔레꽃 하얀 잎은 맛도 좋지~“ 참 좋지!


한 번은 정선 만지산 ‘서낭당 축제’ 뒤풀이에서 “긴 머리 소녀”를 불렀는데,
털도 없는 중놈이 '긴 머리 소녀'를 청승맞게 불렀으니, 동네 사람들이 나 자빠진 것이다.
아직까지 만지산 사는 최종대씨는 그 이야기로 적음을 그리워한다,

탁발로 살아야할 중이 대중에게는 손 내밀지 못하고, 가까운 사람들 주머니만 털지만,
그마져 없으면 인사동 ‘실비집’에 퍼져 날 밤을 까며 퍼 마셔댔다.
아는 사람 나타나기만 기다렸으니, 무전취식으로 경찰서 끌려가지 않은 것만도 천만다행이다 싶다.


오죽했으면 장경호는 적음 이야기만 나오면 아직도 이를 간다.
미술선생을 할 때인데, 돈 떨어지면 학교 찾아와 수업중인 자기 기다리느라

교무실에서 회전의자 돌리고 있었다는데. 얼마나 징그러웠겠는가?

그래도 끝 까지 술값 보태 준 사람은 전활철, 김명성, 강찬모 등 몇몇사람 있었지만,

적음의 겉모습이 아니라 속 깊은 정신을 아니까...






그는 열다섯 살에 경북 기림사로 출가하였으나, 그 기행은 서라벌예대 문창과에 들어가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어디엔들 이 한 몸 머물 곳 없으랴’는 산문집이 잘 팔려나가자 허구한 날 술로 살았다. 있는 대로 퍼 마셨다.
주머니에 돈 한 푼 없어도 택시타고 인사동에서 봉화 ‘청량사’까지 간다.
절에 차 대놓고 주지 불러 택시비 주라니 얼마나 황당하겠는가? 그것도 한 두번이 아니었다.
단지 술 마시기 위해 돈이 필요할 뿐이지만, 한 마디로 돈을 좆같이 본다는 거다.






술을 너무 좋아하니, ‘청량사’ 있을 때도 벼랑 깊은 암자에서 혼자 살 수밖에 없었다.
어느 날, 암자에서 하루 머문 적이 있는데, 한 밤중에 부엌에서 그릇 '딸그락'거리는 소리가 반복되었다,
그 암자에 적음과 나, 두 사람 뿐인데, 누가 그릇을 만진단 말인가?
완전 쫄아 잠도 제대로 못 잤는데, 다음 날 아침에 물어보니, 가끔 나한상이 장난 질 친다며 별거 아니란다.


그런데 한참 후에 모령의 애인을 데리고 가서 황당한 일을 당하고 말았다.
산 깊은 암자에 오르느라 너무 피곤한데다, 술에 취해 잠이 들어버렸다.

자고 일어나 눈을 떠보니, 적음도 애인도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꼭두새벽에 찾아 나섰는데, 옆 골방에서 신음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창호지에 침 발라 구멍을 뚫어 들여다보니, 미쳐 팔짝 뛰겠더라.
보이는 것은 달싹거리는 이불 뿐이었지만, 그 아래서 들리는 신음은 분명 그녀의 신음이었다.

산은 하얀 눈으로 뒤덮였는데, 어떻게 해야 할 지 모르겠더라.
도저히, 그 자리를 지킬 수 없어 산으로 기어 올라 청량사를 내려보며 울부짖었다.
“적음아! 이 씨발 놈아~ 적음아! 이 씨발 놈아~” 목 놓아 외치니 산울림은 내 귀에 내려 꽂혔다.

내 얼굴에 침 밷는 격이었다.

내려 와보니, 그 여인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머리 감고 있었고, 적음은 자고 있었다.

그냥 “나무관세음보살~”이라고 지껄일 수 밖에..

아마 꿈 속에서 본 장면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일소암 '전경




나중엔 거기서도 밀려나 봉화 수식에 있는 헌 집 하나 얻어 ‘一笑庵’이란 문패 달고 혼자 살았다.
보나 마나 가까이 있는 도예가 신동여씨를 비롯하여 이미 고인이 된 영주의 뮤지션 이종문과

많은 글 패들게 민폐께나 끼쳤을 것이다.


나중엔 마을 사람까지 싫어해 외톨이가 되었는데, 어느 날 발가벗은 알몸으로 열반하고 말았다,
그의 법명처럼 조용하게 세상을 떠났지만, 시신이 방바닥에 썩어 안타까웠다.

그게 바로 적음이다.


열반한 적음선사의 시신이 섞은 자욱





지금 되돌아 보니, 내가 인사동에 연연하는 것도 미우나 고우나 사람 때문이었다.

이미 세상을 떠난 김종구, 강용대, 김영수는  물론이고, 죽지 못해 발버둥 치며 사는 이청운, 배평모, 신동여,

석 파, 김신용, 장경호, 최울가, 김명성, 김용문, 전강호, 박광호, 이수영, 노광래, 공윤희, 이목일, 전활철 등 등..

아마 사람이 그리워서, 아무 것도 아닌 인사동이란 자리에 목메고 살았던 것 같다.


적음이 남긴 '유적'의 시 한자락이  떠 오른다.

"청동의 푸른 뱀이 / 꿈틀거리고 있는 / 숲길을 지난다 / 무섭지도 않은 등 뒤에 / 스멀스멀 / 실안개 / 따라 붙는다."


사진,글/ 조문호



적음의 열반 소식을 듣고 몰려든 지인들


빈소를 여관방에 차려놓고, 신동여, 석파, 이수영씨가 영정사진을 쳐다보며 안타까워 하고있다.


적음 일주기를 맞아 가까운 이들이 모여 적음을 추모하며 한 잔 마셨다.


아래 사진은 지난 수요일 인사동에서 만난 사람들이다








































































지난 13일의 인사동은 초가을에 접어든 수요일이라 그런지 전시장마다 사람들로 넘쳤다.
난, 전시 열림식에 가야 할 곳도 한두 군데 아닌데다, ‘유목민’에서 사진인과의 모임도 있었다.

문제는 전시 오프닝이 대부분 비슷한 시간대라는 거다.

연락이 와 인사차 들리지만, 다들 사진 찍어 주기를 바라니 작품만 보고 나올 수도 없다.

바삐 인사동 거리를 가다보니 화가 김구씨도 바삐 지나간다. 나만 바쁜 것이 아닌 것 같다.





먼저 ‘갤러리 라메르’에서 열린 설숙영씨의 도예전과 네팔드림팀 그림전, 장흥래씨 인물전을 차례대로 들렸다.

눈도장과 함께, 사진 한 두 컷 찍고 빠지기를 반복했다.





그리고는 ‘인사아트프라자’에서 열리는 강찬모 초대전에 들렸다.

그곳은 대부분의 손님들이 빠져 나가고 아는 분으로는 작가 강찬모씨와 신성준선생, 노광래씨 뿐이었다,





작품을 보려고 작정했던 ‘나무화랑’의 최경선씨 전시에 서둘러 달려갔다.
이미 김진하관장과 장경호를 바롯한 화가들이 뒤풀이에 가려 내려오고 있었다.

다들 ‘낭만’으로 가자지만, ‘유목민’에서 기다리는 분들 때문에 갈 수 없었다.




‘유목민’에 들렸더니 사진가 김문호, 이정환, 최승희씨가 와 있어 반갑게 술잔을 나누었다.

이정환씨가 준비해 둔 11도짜리 다랭이 막걸리가 별로 독하지 않아

이런 저런 이야기 나누며 홀짝 홀짝 맛있게 마셨다.





마침 강찬모씨 뒤풀이도 ‘유목민’이라 고중록, 김명성, 조해인, 조준영,

이명희, 최유진, 강경석, 조명환, 임태종씨 등 많은 분들이 옆자리에 있었다.

반가운 분들 인사 나누느라 바빴는데, 뒤늦게 주인공 강찬모화백이 등장나자,

화가 이인섭, 전형근씨, 그리고 구로구청장인 이성씨도 나타났다.




그런데 술이 슬슬 취하기 시작했다. 마구초로 다독였으나 소용없었다.

정영신씨가 나타나자 찍던 카메라 내 맡기고 줄행랑쳤다.

도저히 지하철을 탈 수 없을 것 같아, 김명성씨에게 택시비까지 구걸해 집에 왔다.




집에 들어오자 말자 큰 대자로 뻗어버렸는데, 다시는 11도 막걸리 먹지 말아야겠다.
난, 역시 소주 체질이야!

사진, 글 / 조문호



























































요즘 인사동거리는 내국인보다 외국인이 더 많다.
인사동의 색깔은 보이지 않고, 상혼만 들끓는다.
다들 뭘 보고 뭘 느끼는지 모르겠으나, 걱정스럽다.






유리창을 통해 보이는 미술품에도 별 관심 없다.
인사동이 미술의 메카로 알려지지 않았으니,
그냥 인사동의 전통성이 뭔지, 기웃거릴 뿐이다.





지금도 인사동 주변에 호텔은 계속 생겨나지만,
인사동의 정체성을 살릴 일은 아무도 생각 치 않는다.
인사동 골목문화를 알릴 노력조차 없다.






관광객들이 사라진 내일의 인사동이 궁금하다.
호텔은 가난한 예술가들 작업실이 되고,
거리는 온통 예술품이 들 끊는, 그런 날이 올까?

괜한 헛꿈에, 기분이 좋아진다.






지난 30일은 이른 시간부터 인사동을 기웃거리다가,
오후5시 무렵에는 임옥상씨 전시 보러 평창동으로 갔다.





개막행사가 끝난 후, 다시 인사동으로 돌아왔더니,
전시장에서 만난 박진화, 송 창, 김태서, 박홍순씨가
‘유목민’에 먼저 와 있었다.





한 쪽에는 공윤희씨와 이지연씨가 자리 잡고 있었는데,
좀 있으니 장경호, 이승철, 임경일씨 등 반가운 분들이 줄줄이 나타났다.






이미 술에 젖어 온 장경호씨는 막걸리를 마시며, 다른 곳에서 한 잔 더 하잖다.
‘월하의 공동묘지’? 라고 물었더니, 고개를 꺼떡이며 일어났다.
난, 동자동으로 가야해 남은 술을 마시며 자리를 지켰다.






종로3가 지하철로 가는 길에 ‘국악’에 잠시 들렸더니, 아니나 다를까 장경호씨가 있었다.
빈털터리 주제에 왜 비싼 술집에서 여인네들 접대를 받아야하는지 모르겠다.
여자를 밝히지 않는 사람이건만, 외로워서 그럴까?
혼자 두고 오려니 마음에 걸렸으나, 더 취하기 전에 나와야 했다.






낙원상가 앞길에는 성기준씨 일행이 술판을 벌이고 있었다.
그래도, 밤이 되면 인사동 곳곳에 반가운 사람들이 박혀 있어 좋다.
새로운 인사동 풍류에 한 가닥 희망을 걸어본다.

사진,글/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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