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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 김재홍의 “살-(생.사.육)”전시가 지난 21일 인사동 ‘나무화랑’에서 열렸다.
푸줏간을 연상시키는 전시이미지들은 여러 차례에 걸쳐 자신의 SNS를 통해 공개한터라 오래전부터 기다린 전시였다. ‘살 연작’(108점)과 ‘Undressed’(5점), ‘동행’(6점) 등을 선보이는 14년 만의 유화작업이라 화단의 관심도 컸다.

내가 작가를 알게 된 것은 동강의 ‘두메산골사람’을 기록할 때다. 동강이란 동일한 대상을 다룬다는 점에서 김재홍씨 그림에 자연스레 관심을 가졌는데, 그가 동강에서 그린 작품 중 “모자상"은 아직까지 기억에 남는 작품이다. 뼝대가 수면에 반영되어 대칭을 이룬 작품으로 그 속에 모자의 얼굴을 형상화하였다.




그동안 그림책이나 동화책의 일러스트에 몰두하느라 회화작업은 그의 손을 놓고 있었다고 한다. 더 놀라운 것은 그 많은 작품을 2년 만에 완성했다는 점이다. 그 것도 구상하고 준비하는 과정에서 1년이 걸렸다니, 실제 작업에 몰입한 시기는 1년 밖에 되지 않았다. 그의 치열한 작가정신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인데, 얼마나 치밀했으면 처음 구상한 내용이 작업 도중 한 번도 바뀌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그림을 잘 그린다. 잘 그린 그림이 반드시 좋은 그림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그림이 좋은 그림이 아니던가? 그의 그림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기에 좋은 그림으로 생각한다. 동강의 일련의 작품들이 그랬듯이, 이번에 선보인 “살-(생.사.육)”은 마음을 움직이기에 앞 서 하나의 충격이었다.


 



사실적인 김재홍씨의 그림들은 사진 적이기도 하다. 마치 붉은 조명이 켜 진 정육점 풍경 같기도 하고, 몸 파는 홍등가가 연상되기도 했다.

인간도 욕망의 고기로 팔린다는 점에 동질성을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

인간의 잔인성과 비도덕성을 각인시킨 이번 전시는 이광수교수 말처럼 ‘인간은 악이다’란 말이 먼저 떠올랐다.

가축의 털을 벗겨 드러난 살을 보는 순간, 온갖 위선의 거죽에 가려져 있는, 인간의 본질을 만날 수 있었다.

그동안 맛있게 먹어 온 닭고기에 토할 것 같은 역겨움이 일어났고, 더 이상 육식은 않겠다는 결심에 이르게 된 것이다.

별 생각 없이 먹어 온 육식에 대해 다시 한 번 반성 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는데,

아마 이보다 더 가치 있고 흡인력 있는 작업은 없을 것으로 생각된다.






"살-연작"108개로 이루어 진 가축의 도살 형상들은 때로는 인체가 연상되는 그림도 있었다. 여러 개의 인체를 가축과 뒤섞어 배치했는데, 가축을 지배하는 인간과 지배 당 하는 가축을 같이 본다는 의미다. 미술평론가 임정희씨는 전시서문에서 김재홍의 그림에서 이미지와 메시지의 단순 연결을 우려하기도 했으나, 이렇게도 말했다. “이미지 자체를 사회적 실천의 산물로 받아들였을 뿐만 아니라, 이데올로기적 의미를 담는 기호로 확장시키면서, 이 이미지를 통해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역사적으로 논쟁적인 사안들이 다루어지는 문화적 공론장의 중심을 세워가려는 참여적 실천행위였다”





자본주의의 탐욕과 인간의 폭력적 본능을 이처럼 실감한 적이 없었다. 전시장을 가득 메운 작품의 배치도 일조했을 것이다. 다닥다닥 붙은 이미지의 중첩성이 더 강한 메시지를 던진 것 같다. 개막식 날 전시장에 들어서니 발 디딜 틈 없었다. 여지 것 내가 본 ‘나무화랑’에 이처럼 많은 작가들이 몰린 적은 일찍 보지 못했다. 다들 그의 작업에 주목하고 있었다는 말일 것이다. 그래서 108점을 연결한 작품 “살”을 한 눈에 볼 수 없어, 사람들 사이로 한 작품 한 작품 뜯어봐야 했다.





가축의 생애는 비참했다. 온통 내장이 드러나고 털이 벗겨진 채 매달린 소름끼치는 장면이었다.

비좁은 공장식 사육장에서 사료로 키워지고 오로지 인간의 배를 채울 고기로만 살찌워져서 도살로 생을 마감한다.

인간은 더 많이 먹고 더 많은 이윤을 추구하기 위해 동물의 살육을 합리화한다.

인간의 탐욕이 폭력성으로 질주하는 비윤리성에 우리 모두 주목해야 한다.

이 전시는 3월13일까지 ‘나무화랑’(02-722-7760)에서 전시된다.



























































































서정춘시인의 시가 죽이듯이, 주벽 또한 죽인다.
그러나 한 동안 술을 끊어, 더 이상의 술 꼬장은 볼 수 없었다.
술자리에서 잘 만날 수도 없지만, 만나도 재미가 없다.

예전엔 술만 취하면 물귀신처럼 물고 늘어져 슬슬 피해 다녔는데,
한 번은 꼬장부리다 기국서씨의 헤딩 한 방에 나가떨어진 적도 있다.
서정춘씨가 말로 하는 꼬장이라면, 기국서씨는 행동으로 하는 꼬장이다.

그러나 막상 술을 끊고 보니, 인사동 낭만 한 자락 잃은 듯 섭섭했다.
가끔은 그의 주벽이 그리웠다.






그런데, 다시 인사동 주당으로 돌아 온 것이다.
지난 2일, 인사동 ‘시가연’의 채현국선생 만찬장에 나타났다.
난, 초장부터 열 받아 퍼 마셨지만, 서정춘씨도 많이 마신 것 같았다.
마이크 잡고 노래도 뽑았으나, 난 나와 버렸다.

참새들의 방앗간 ‘유목민’에 들렸더니, 공윤희씨가 있었다,
좀 있으니 장경호씨가 나타났고, 잇따라 하홍만씨가 서정춘시인을 부축해 왔다.
얼마나 시달렸던지, ‘유목민’에 데려다 놓고 가버렸다.






그 뒤는 너무 취해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밤 세시 무렵, 장경호씨와 택시를 같이 타고 온 기억이 전부다.
그런데, 이튿날 ‘유목민’ 전활철씨의 뒷 이야기에 귀가 솔깃했다.
전활철씨는 술을 마시지 않은 상태라 술주정을 고스란히 지켜봤단다.

후배 장경호씨에게 존댓말을 꼬박꼬박 써가며 비위를 슬슬 건드렸다고 한다.

술 취하면 장경호씨 꼬장도 보통은 아닌데, 한 판 떠보자는 거 아닌가?
결국은 실구한 ‘호로자슥’이란 한마디에 장경호씨 성질이 폭발했다고 한다.
그렇지만 어쩌랴! 죽일 수도 살릴 수도...
그래서 날 데리고 나가 버렸다는 것이다.






그 뒤부터 전활철씨가 붙들려, 새벽 여섯시까지 시달렸다고 한다.
나중엔 억지로 택시 태워 사당동까지 보냈다지만,
그 과정에서 넘어져 두 사람이 머리를 찧기도 했다는 것이다.
‘아우야! 머리 아프다’고 했다는데, 아무쪼록 별 탈 없기를 바란다.

인사동 주당으로 컴백한 서정춘 시인의 화려한 입성식이다.
반갑기도, 징그럽기도, 표정관리 안 된다.





서정춘 ‘봄, 파르티쟌’


“꽃 그려 새 올려 놓고
지리산 골짜기로 떠났다는
소식“



사진, 글 / 조문호















인사동 ‘나무화랑’에서 도예가 김용문씨의 도판화 전이 오는 13일까지 열리고 있다.

‘산과 나무의 단상‘이란 제목이 붙여진 도판화전은 오랜만에 만나는 그의 귀국 전시로,

새로운 수묵드로잉까지 보여 줘 신선한 바람을 일으키고 있다.






김용문 하면 막사발이 먼저 떠오르고, 막사발 하면 머리말아 올린 김용문의 상투가 연상된다.
가히 전설적인 장인이다. 젊은 시절부터 옹기에 매료되어 다양한 옹기 작품을 탄생시켰다.

그의 예술세계는 막사발을 만드는 도예에 한정되지 않았고 퍼포먼스에서 글과 그림까지 전방위 작가다.

그러한 다양한 작업들도 결국은 막사발을 위한 부대작업에 불과할 것이다.

오죽하면 ‘나는 막사발이다’라는 책까지 펴냈겠는가?






토우와 도자기로 삶의 애환을 담은 퍼포먼스도 여럿 있었다.

그를 처음 알게 된 것도 단양 충주댐에서 가진 ‘수장제’였다.

84년 단양 하방리를 지켜 온 좌청룡과 우백호, 전주작, 후현무의 네 풍수 동물을 토우로 빗거나 조각해

많은 이주민들이 울부짖는 통곡에 장단 맞춰 댐 속으로 잠기게 하는 퍼포먼스를 한 것이다.

최고의 퍼포먼스라 메스컴에서도 일제히 나발 불었다.





그리고 87년 대학로에서 가진 ‘옹관장전’도 파격적이었다.

지금은 세상을 떠난 화가 강용대씨가 상여에 실려 가는 모습,

큰 칼로 옹기 작품을 내려치는 무속인 무세중씨의 모습은 아직까지 기억에 생생하다.






인사동에서 가진 전시도 여럿 기억난다.

인사동 거리에 좌판 깔아놓고, 푼돈 받고 토우 파는 전시에서부터,

인사동에서 제일 넓은 ‘아라아트’ 전시장 바닥에 수천 개의 막사발을 펼쳐 전시를 하는 등 특이한 전시가 많았다.






그는 홍대미대 공예과와 대학원을 졸업한 후 토속적인 막사발에 승부를 걸고 활동 해 왔는데,

터키 국립 하제테페대학교 도예과 초빙교수로 떠난 지가 8년째라 최근에는 자주 볼 수 없는 작가다.

경기도 오산, 충청도 괴산, 전라도 삼례 등지로 막사발 박물관을 옮겨가며 ‘세계막사발축제’를 36년째 이끌어 왔다.

또한 세계막사발심포지엄 19회, 국내외에서 가진 개인전도 43회나 개최했다.






투박한 토속적 미감의 막사발로 자신의 작품세계를 구축한 도예가 김용문의 도판(陶板) 그림전은

산과 나무를 대상으로 한 추상화인데, 아무도 흉내 낼 수 없는 그만의 예술혼을 담아냈다.






우리 문화의 속내가 들어다 보이는 대개의 작품들은 지두문(指頭紋) 기법으로 이루어졌다.

지두문(指頭紋)이란 유약이 마르기 전 빠른 손가락 놀림으로 풀, 나무 등의 문양을 그려 넣는 기법인데,

손가락이 스쳐간 자국들은 우리 선조들의 멋이고 아름다움이다.
대개의 지두화(指頭畵)가 둥근 접시나 정사각형 도판 형태로 이루어지는데,

보통 지름 25cm정도의 작은 작품서부터 지름 70cm가 넘는 대형 작품 등 다양한 크기로 제작된다.






이번에 처음 선보인 수묵드로잉전은 김용문씨의 또 다른 미적영역 확장이었다.

다들 자기 영역 밖의 작업을 하다보면 다소 어설퍼 보일 때가 더러 있으나, 거침없이 그려낸 그의 솜씨는 달랐다.

이는 막사발에 길들여진 원숙한 솜씨와 오랜 세월 몸에 베인 지두문 화법이 그대로 화폭에 옮겨 진 것이니,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주로 먹과 안료, 붓과 지두문으로 표현한 드로잉은 때로는 힘이 솟는 박진감으로 넘치고

때로는 막사발 질감처럼 투박하거나 거칠게 자유롭게 넘실댄다. 여지 것 보아 온 수묵화와는 또 다른 느낌이다.

마치 화산이 폭발하는 것 같은 폭발력을 가진 작품이 있는가 하면,

전형적인 우리 민족의 미감을 드러낸 인물상에서는 마치 자애로운 불상을 닮은 듯 편안하다.

어떤 작품은 난을 치듯 나무나 잡초를 그리기도 했는데,

흥선대원군의 난이 여인네의 여림이라면, 김용문의 난은 남정네의 투박함으로 말할 수 있겠다.






지난 31일 가진 개막식에서 보여 준 강만홍교수의 퍼포먼스도 인상적이었다.

마치 도공들의 원혼을 불러 모우는 것 같은 동작으로 작품에 기를 불어넣었다.

작가 김용문씨를 비롯하여 김진하, 조명환, 김진홍, 안창홍, 조신호, 김억, 장경호, 손기환, 김구, 채현국, 이인섭,

조해인, 이명희. 공윤희, 전인경, 편근희, 이회종, 김수길, 유진오, 임경일씨등 많은 분들이 함께했다.




‘유목민’에서 가진 뒤풀이에서는 다들 얼마나 퍼 마셨는지, 술집에 술이 부족할 정도였다.

채현국선생께서 모자를 벗어주며 술값 걷어 라는 명령에 자존심하나로 버티는 장경호씨가 졸지에 모자 돌리는 일을 하게 된 것이다.

어렵사리 걷었으나 고작 20만원 남짓이라는데, 모자라는 50만원은 어쩌지?

여지 것 술값이 정산 되지 않고 있다는데...

사진, 글 / 조문호
























































































지난 27일 김명성씨로부터 수상 축하주를 사겠다는 전화가 걸려왔다.
허구한 날 마시는 술이지만, 또 다른 술 마실 핑계 하나 만든 것 같았다.
마침 통의동 ‘인디 프레스’에서 열리는 양승우씨의 사진전에 들려서 가기로 했다.





이 날 따라 빌린 카메라의 전지가 소모되어 사진조차 찍을 수 없었다.
다른 사진은 차지하고라도 전시리뷰에 사용할 사진이라도 한 장 찍어야 하는데,
난감하기 그지없었다. 하는 수 없어 카메라를 가진 이상엽씨에게 한 장 부탁했는데,
아직까지 감감소식이다. 개막식을 하는데, 빨리 오라는 독촉전화가 걸려왔다.
오랜만에 만난 양승우씨를 비롯하여 인디프레스 김정대관장,
이 전시를 기획한 황정수씨 등 반가운 분들이 많았으나, 살그머니 빠져 나와야 했다.





인사동 ‘유목민’에는 김명성씨를 비롯하여 도예가 김상기씨와 김각환씨가 자리를 만들어 놓았다.

전주 한봉림씨 작업실에서 벌인 포말 퍼포먼스 이후 처음 만났으니,

화제는 자연스럽게 그 때의 긴박한 상황으로 돌아갔다.

길길이 날 뛰던 김명성씨를 제압한 사람이 김각환씨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날 사고를 친 이상훈씨가 한봉림씨께 죄송하다는 전화조차 없었던데 분개하고 있는데,

슬며시 이상훈씨가 나타났다.






양순하게 생긴 그의 모습에서, 악마 같았던 그 날의 모습이 오브랩되었다.
술이 원수인지 모르지만, 어떻게 그 지경을 만들었는지 자신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도망쳐 나와 여지 것 전화 못했던 것도 너무 엄청난 일을 저질러 두려워서 못했다는 것이다.
어렵사리, 사과하며 찾아뵙겠다고 전화를 드렸다며, 그 날의 악몽을 되새겼다.






재미있게 놀 때, 전활철씨가 부른 ‘청춘’이란 노래도 한 몫 했을 것이다.
80년도 후반기 민주화 열망에 학교마다 전쟁터가 되었던 때가 되살아났다는 것이다.
포커판에서 여러 번 고배를 마시다 모처럼 결정적인 패를 잡았는데,
느닷없는 포말세례를 받았다는 것이다.
그 당시에는 아무 것도 생각나지 않았고,
학생시절 직격탄을 맞은 최류탄으로 착각되어, 적개감에 난리를 피웠다고 한다.





아무턴 ‘미지랄’이란 전무후무한 역작을 탄생시켰으니, 언젠가 서명하러 가야 한다며 한 바탕 웃고 넘겼다.

뒤늦게 정영철씨와 정영신씨가 나타났다.
카메라가 없어 사진 한 장 찍지 못한 터라 죽은 사람 살아온 듯 반가웠다.
카메라를 건네받아 사정없이 갈겼더니 속이 좀 후련했다.
군인이 무기가 없으면 맥 못 추듯, 찍사가 카메라 없으면 찍사도 아니다.
찍고 나면 그 사진 정리하느라 낑낑대지만, 이게 업인데 어쩌랴!

사진, 정영신,조문호 /글, 조문호















지난 20일, 막사발로 통하는 도예가 김용문씨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모처럼 인사동에 나왔으니, 얼굴 한 번 보자는 거다.
그 날은 짐 옮길 일이 있어 차를 끌고 나왔는데,
술 한 잔 하려면 차를 돌려주어야 했으나 시간이 없었다.
박도선생의 ‘미군정3년사’작가와의 만남‘ 뒤풀이로 시간이 지체된 것이다.
술은 미시지 못하더라도 얼굴만 볼 작정으로
종로경찰서 옆에 있는 관훈주차장에 밀어넣고 ‘유목민’에 들렸다.






‘유목민’에는 사기꾼들이 여럿 앉아 있었다.
막사발 장인 김용문씨를 비롯하여 분청하는 변승훈씨와 이형석씨도 있었다.
안쪽에는 화가 정영철씨와 성애씨도 자리를 잡았더라.


인사동에서 김용문씨를 처음 만난 지가 30년도 더 되었으나, 오랜만에 만난 것이다.
터키 하제테페대학교 도예과 초빙교수로 떠나며 보기 힘들어졌는데,
페북에서 근황을 지켜보았던 터라, 겉으로 변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마치 트레이드마크처럼 말아 올린 상투가 막사발 같은, 그런 친숙한 모습이었다.






더구나 변승훈씨까지 오랜만에 만났는데, 어찌 술 한 잔 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제일 잘 지켜지지 않는 약속이 차 때문에 술 먹지 않는 일이다. 
한 잔만 한 잔만 하다 발동이 걸려 '에라~ 모르겠다. 퍼 마신 것이다.
김용문씨에게 터키에서 전시한 수묵드로잉이 좋았다고 이야기했더니,
인사동에서도 그 전시를 한다는 것이다.
이달 31일부터 보름동안 ‘나무화랑’에서 한다는 데, 술 마실 건수 하나 생긴 것 같았다.






그리고 주변에서 들은바로, 삼례역의 막사발미술관을 비우라는
통보가 왔다는데, 사실이냐고 물었더니, 그렇다는 것이다. 
외국에 체류하는 날이 많아 자주 비워 그런지는 모르지만, 너무 아쉬웠다, 
그동안 세계막사발 축제로 쌓아놓은 탑을
어떻게 그리 쉽게 무너트릴 생각부터 하는지 이해되지 않았다.
최소한 작가와 협의하여 명맥을 이어갈 수 있는 방법부터 협의했어야 했다.






그런데, 변승훈씨가 자기 후배한테 찾아가 이빨하라며 성화다. 
그동안 대신 부담할테니 이빨 하라는 사람이 여럿 있었지만, 싫었다.
남에게 부담 주는 것도 싫지만, 그보다 오가는 게 번거로워 싫었다,
이번에도 변승훈씨가 해주겠다며 망가진 이빨을 핸드폰으로 찍어
후배에게 견적을 내보라며 부산을 떨어댔다.
나이 들면 하나 둘 망가지는 게 이치고,
그렇게 사라지는 게 인생인데, 더 이상 무슨 소용이랴!






강행복, 손기환씨를 비롯한 여러 명이 등장해 술집 분위기는 한층 무르익어갔다.
취하면 취할수록 차 걱정에 술 맛이 없었다.
어차피 대리운전을 불러야 했으나, 점차 올라가는 주차비가 걱정되어서다.
비상금으로 꼬불쳐 둔 신사임당 한 장 뿐이라,
대리운전을 부를 수밖에 없었는데, 나 또래의 늙은이가 왔다.






그런데, 주차장을 빠져 나가려니 차단기가 열리지 않았다.
아무리 찾아도 주차관리인은 물론 현금 넣는 기계도 없었다.
비켜달라는 뒷차의 경적에 빼고 박기를 반복하였으나, 나갈 방법이 없었다.
30여분을 씨름하다 뒤늦게 알았는데, 카드만 사용할 수 있는 주차장이란다.
신용카드가 없으면 차도 끌고 다닐 수 없는 요상한 세상에 잠깐 어리둥절했는데,
갑자기 인사동이 아니라 외국에 온 냥 낯설었다.






하는 수 없어 ‘유목민’의 전활철씨를 불러 해결했으나, 마음이 편치 않았다.
목적지인 녹번동으로 가자고 했더니, 수동에 익숙하지 않은지 시동 꺼트리기를 밥 먹듯 했다.
그런데, 어떻게 운전을 하는지 차가 탱크 달리는 소리를 냈다.
기사가 본래부터 소리가 심하냐고 물었지만, 아니었다.
속으로 마후라가 터졌나 걱정되기도 했으나, 뭔가 조작을 잘 못한 것 같았다.
차라리 내가 운전하는 게 더 편할 것 같았지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지경이었다.

간신히 도착해 차를 점검해 보았더니, 여지 것 사륜구동으로 달린 것이다.





“에라이! 이 아저씨야~”
그 실력으로 대리운전 하다니, 참 사는 게, 다 힘든 것 같았다.

족쇄 같은 차 때문에 시달리는 일도 이제 그만하고 싶다.
지공도사 형편에, 주제 파악 하라는 야유가 뒤통수를 치더라.

사진, 글 / 조문호






























인사동 터줏대감들께서 모처럼 나오신다기에, 신년 인사드리려 인사동에 나갔다.


인사동에 대한 애정이 식어가는 요즘, 유일하게 인사동을 챙기는 분이 강민선생이시다.
용인에서 버스와 지하철을 몇 번이나 갈아타야하는 불편함을 무릅쓰고 나오시는
선생의 인사동에 대한 애착에 그져 고개가 숙여 질뿐이다.
삭막하게 변해가는 인사동을 보면 속만 답답하실 텐데 말이다.






점차 친구들도 한 분 두 분 세상을 떠나고 있다.
재작년엔 소설가 이호철선생과 극작가 신봉승선생께서 세상을 떠나셨고,
작년에는 심우성선생마저 공주 요양병원으로 떠나지 않았던가.
살아 남은 분이라도 자주 만나고 싶어하시나
다들 몸도 마음도 예전 같지 않으시니, 잘 나오지 않는단다.






년초부터 감기에 걸려 이틀 동안 누워지내다 3일에서야 간신히 추수릴 수가 있었다.

정영신씨를 대동하여 약속장소인 ‘나주곰탕’으로 갔더니, 강민선생을 비롯하여 김승환, 장봉숙선생이 와 계셨다.
너무 반가운 만남이었다. 페북에서야 가끔 인사 드리지만, 뵌 지가 몇 달은 된 것 같았다.

선생께선 낮에만 나오시고, 난 올빼미처럼 밤에 출몰하니 잘 만날 수가 없었는데,
다들 건강하신 모습을 뵈니 한결 마음이 놓였다.


 




곰탕 건더기를 안주삼아 조촐한 신년하례식을 가졌는데,
강민선생은 방동규선생께 미처 연락하지 못했음을 아쉬워하셨다.
방동규선생이 계셔야 호탕한 한 해를 시작할 수 있을 텐데 말이다.


모처럼 식사 한 끼 대접하려 했으나 장봉숙선생께서 먼저 계산해 버렸다.

새해부터 어른들께 신세지는 일을 없애려 했으나, 첫날부터 뜻대로 되지 않았다





커피 마시러 ‘인사동 사람들’로 자리를 옮겼는데, 그 곳은 손님이 아무도 없었다.
그만큼 인사동을 사랑하는 옛 사람들의 발길이 줄었다는 말이다.


붙잡아도 머물어 주지 않는 세월을 원망해야 할지,
갈수록 야박해지는 세상을 원망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렇게 하나 둘 변하고 사라지는 게 인생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커피를 마시다 선생님들 앞에서 깜빡 잠이 들어버렸다.

감기 때문에 잠을 제대로 못 잔 탓인지, 술이 오르니 갑자기 잠이 몰려온 것이다.

눈을 떠보니 정영신씨 혼자 남아 있었는데, 선생께서 일어나시면 깨워야 하지 않는가?

죄 없는 정영신씨만 원망하고 있으니, 전활철씨로부터 연락이 왔다.



 


강민선생께서 지하철 타러 가는 길에 유목민잠시 들렸다고 했다.

그 곳에서 강민선생은 다시 만날 수 있었지만, 김승환, 장봉숙선생은 떠나시고 없었다.

그동안 말씀이 없어 잘 몰랐는데, 강민선생께서 오래전 넘어져 다친 팔목이 아직 불편하다고 했다.

늘 호주머니에 손을 넣고 계셔서 눈치채지 못했는데, 빨리 완쾌하셔야 할텐데 걱정스러웠다.





그런데,  뜻밖에도 민화 그리는 장춘씨가 '유목민'에 나타난 것이다. 

홍두깨처럼 나타났다 증발해 버리는 그의 행적이 늘 궁금했기에, 죽은 사람 만난 듯 반가웠다.

오죽하면 북한의 지령받고 움직이는 간첩이 아닌가 생각했을까?


그러나 더 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장춘씨와 정영신씨를 '유목민'에 남겨두고, 강민선생 따라 일어서야 했다.



 


서울역에서 노숙하는 이종민씨를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세밑에 잃어버린 카메라가 문제가 아니라, 그 속에 찍힌 사진파일이 더 필요했고,

그 사진파일보다는 그와의 인간적 신의를 되돌리는 것이 더 절실했기 때문이다.

아무튼, 새해에는 더 이상 절망하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

 

사진, / 조문호 

 


























지난 28일 오후3시 무렵, 이청운씨 작업실에 인사동 꼴통들이 쳐들어갔다.

그가 인사동을 떠나 병석에 누운 지도 벌써 3년이란 세월이 흘러 버렸다.


    

그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도 인사동을 사랑했고,

인사동은 그가 순수의 예술혼을 불태운 제2의 고향이나 마찬가지다.


 

인사동을 사랑하는 예술가모임의 간사장 역을 떠 맡은 조준영시인의 주선으로,

해 바뀌기 전에 이청운화백을 찾아보자는 연락을 받았다.


 

서울역에서 지하철을 두 번이나 갈아타서야 작업실이 있는 응암역에 내렸는데, 다들 먼저 와 있었다.

조준영시인을 비롯하여 무용평론가 이만주, 인사동 지킴이로 불리는 공윤희씨가 3번 출구에서 기다렸다.

지척에 있는 이마트로 옮기니, 유목민’의 전활철씨와 사진가 정영신씨도 있었다.

좁은 환자방에 여러 사람이 동시에 가는 것이 바람직한지 걱정스럽더라.


 

3층에 있는 이청운 작업실 문을 살그머니 밀쳐보니,

어두침침한 작업실 풍경 자체가 이청운의 오랜 자화상이었다

이젤 다리는 어두운 뒷골목에 버틴 전붓대 같기도 하고,

그 아래 삽살개가 다리를 치켜들고 오줌을 갈기는 정겨움도 연상되었다.



안 쪽에 희미한 불빛이 새어 나와 조심스레 들여다보니,

천진난만한 모습의 이청운씨와 부인 이상랑여사가 함께 있었다.

마치 이청운은 죽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이청운씨를 모른다면,  화가라면 간첩이고, 아니면 사는 게 바빠 예술을 등진 사람일 것이다.

그는 정확한 나이조차 모른다.

한국전쟁이 만들어 낸 희생양으로, 추측컨대 나보다 한두 살 적은 일흔 쯤 되었을 것이다.

어린 시절, 어느 신부님이 이청운의 그림에 대한 재질을 발견하여,

동아대학에서 미술을 공부 시킨 것이 그가 화가의 길로 들어서게 된 동기였다.


 

이청운씨가 본격적으로 화단에 등장한 것은 1971년 구상회 공모전에 금상을 받으며, 화려하게 데뷔했다.

그의 한 작품에는 집 한 모퉁이의 그림자가 다른 집 지붕에 드리워져 있고, 그 배후는 하늘조차 어둡다.

하늘이 이 정도로 어둡다면 전경을 이루는 집의 모퉁이나 집의 그림자는 존재할 수 없다.

30대 초기의 청년작가로서 이토록 확신에 찬  그림을 보여준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빛과 어둠을 대조시키는 작업은 그의 그림세계를 관통하는 기본적인 성격이다.


 

구상전에서 금상을 받은 10년 후에 또 다시 재 부상한다.

세 번째로 열린 중앙미전 공모에서 특선을 한 것이다. 이때부터 화단의 주목을 받으며 여러 공모전에서 상도 받게 된다.

그 당시 우리가 눈여겨 볼 점은 그의 작품이 감히 권위에 대한 도전이라는 것이다.


 

폭압적인 박정권 말기인 1970년대 말은 억눌림에 견디지 못하던 시기였다.

미술평론가와 작가들이 모여 현실과 발언이라는 미술조직을 만들 때, 같이 합세한 것이다.

잘 나가면 편하게 작업이나 하면 좋으련만, 그 몸속에 베인 정의감은 그냥 두지 않았다.




현실과 발언의 다른 맴버들은 명문 출신으로 백그라운드가 있었던 데 비해 이청운은 그런 배경도 없었다.

그를 만만하게 본 정보당국은 이청운을 납치하여 무려 50일이나 감금한 일이 있었다.

뒤늦게 풀어주며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겁준게 두려워 지금껏 숨길 정도였으니,

그의 공포심이 얼마나 심각했을 지 미루어 짐작 할 수 있다.


 

당시 그는 미술계에서 각광받는 분위기였지만, 낯설고 먼 길인 프랑스로 떠난 이유는 이런 까닭이었다.

그런데, 마지못해 선택한 외유에서 의외의 성과도 얻었다. 바로 살롱도톤느 전에서의 1등상 수상이었다.


 

이청운씨의 80년대 초반기의 그림들은 그가 유년과 청년 시절을 보낸 부산의 항구 풍경을 줄 창 보여준다.

항구하면 대개 감상적이고 애수적인 면모를 보여주는 게 일상적인 풍토였지만,

그로테스크하며 질퍽한 그의 그림들은 너무나 사실적이고 진취적이다.

어둡지만 강건한 힘이 느껴지는 항구가 이청운 만의 그림세계다.


 

그의 이력이 너무나 기구 화려해, 쓸을 풀다보니 너무 멀리 와 버렸다. 


 

그런데, 자리에 누운 이청운씨가 인사동 떨거지들이 반가워 바시시 빠개는 쌍다구가 정말 죽이더라.

마치 만화 양산박에 등장하는 무대의 모습이 연상되는 그런 표정이었다.

 사람 한 사람 손을 잡으며, 그동안 깨우친 삶의 진실을 암시하듯 눈을 빤짝이며 바라보았다.

옆에서 밤낮으로 병수발을 드는 아내 이상랑여사가 통역까지 해 주는데, 말년에 호강하는 것 같았다.

여지 것 아내와 하루 스물 네 시간을 부대끼며 정 나누어 본 적이 있었던가?


 

뒤 늦게 김명성시인과 뮤지션 김상현씨가 큼직한 아코디온을 들고 나타났다.

위문공연을 하려는 생각이었지만, 재기의 축하공연으로 돌리고 싶다.

아코디온으로 셀브루의 우산을 켜는데, 얼마나 애잔하고 슬픈지, 눈물 날라 하더라.

이청운씨의 눈시울을 바라보니, 지난 세월을 돌아보는 듯 슬퍼보였다.

그러면서도 감성을 자극하는 음률에서는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기도 했다.


 

뒤이어 김상현씨의 변주곡인 동백아가씨를 연주할 즈음에는 작업실을 살펴 보았다.

힘들었던 지난한 과정들이 한 눈에 읽혀졌다.

자리에 누운 3년 동안, 그의 손길을 기다리는 미완성 작품들이 즐비했다.

나란히 메달린, 물감에 짓 이겨진 팔레트 행렬이 정겹고,

마무리 못한 채 이젤에 기대선 그림도 정겹더라.

비록 모든 게 정지되어 있었지만바로 이청운의 색깔이고 분위기였다.



느닷없이 이청운씨가 아내더러 뭘 가져오라 재촉하니, 여러 점의 판화를 가져왔다.

아픈 몸으로 판화에 서명까지 한 액자를 미리 준비해 두고 있었다.

선물로 주겠다며 한 점씩 가져가라는 뜻밖의 배려에 잠깐 어리둥절했다.

아마 그의 그림이 비싸게 팔려나가 친구들에게 그림 한 점 선물하지 못한 것이 마음에 걸린 것 같았다.

누가 먼저 세상을 하직할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살아남은 자의 벽에 걸려 이청운을 오래도록 추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내년 봄에는 비록 휠체어에 몸을 의지할 지라도 인사동에서 그의 작품을 다시 만날 수 있으리라 믿는다.




아쉬운 작별을 하고 인사동 유목민으로 돌아와야 했다.

녹번동의 '서부감자탕'에서 소주 한 잔할 생각이었으나,

'유목민'의 전활철씨가 별도의 음식을 준비해두었다고 했다.

덕분에 푸짐한 안주로 호사하며, 또 다시 한해를 보내는 송년을 밤을 인사동에서 즐겼다.

곧 닥쳐 올 십 팔년에는 인사동과 가난한 예술가들에게도 따뜻한 봄바람 가득하기를 바란다


 

 

그리고 바램 하나가 있다면, 이청운씨의 작품을 한 곳에 관리하며 보살펴 줄 미술관이 생겼으면 좋겠다.

그가 어린 시절을 보낸, 그림의 고향이나 마찬가지인 부산시에서 이청운미술관을 건립할 것을 요청하고 싶다.

여지 것 부산에서 태어난 작가로서 이만한 역량과 개성을 보여준 작가가 있었던가?

언젠가는 이루어지겠지만, 빠른 추진을 부탁하고 싶다.

 

사진: 정영신, 조문호 / 글 : 조문호

    























































 

 





인사동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만나 술 한잔하는 셋째 수요일은 캘린더에 빨간 글로 적혀 있었다.
자세히 보니 ‘대통령선거일’이라고 적혔는데, 지난 일들에 만감이 교차했다.
교도소에서 떨고 있을 적폐무리 생각하니 통쾌하긴 했으나, 한 편으론 불쌍했다.
마약 같은 돈과 권력에 눈이 먼 것이지, 한 인간으로서는 가여울 수밖에 없다.






모임 있는 날은 폭설이 내려 걱정스러웠다.

전날 밤 정영신씨 생일 술에 곯아, 온 종일 방바닥을 기었지만 나가지 않을 수 없었다.
이번 모임은 송년회를 겸한 달이기도 하지만, 윤병갑씨를 만날 일도 있었다.






잔뜩 챙겨 입고 미끄러질까 조심스레 지하철로 갔는데, 삼십분이나 늦어버렸다.
눈 때문인지 사대문 방향에서 나오는 지하철은 만원인데, 들어가는 지하철은 텅텅 비었다.
많이 못나올 것으로 여겼지만, 인사동 ‘유목민’은 사람들로 꽉 차 있었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김신용시인도 나와 있었다. 



 


그는 사는 곳이 소래부근이라 한번 나오려면 차를 몇 번이나 갈아 타야하는데다,
옛날 노가다 시절에 골병든 다리에 문제가 생겨 인사동에 안 나온 지가 일 년이나 되었다.
또 하나 고마운 것은 화가 전강호씨다. 여지 것 모임에 한 번도 빠지지 않았지만,
송추에서 목발로 눈길 헤쳐 오려면 예사 일이 아닐텐데 말이다.





조준영시인을 비롯하여 강찬모, 이명희, 공윤희, 김완기, 김수길, 강성봉, 이재민,
김재홍, 강경석, 전활철, 박혜영, 김대웅씨 내외 등 많은 사람들로 술집은 시끌벅적했다.
하기야 술꾼들이 날씨 따지겠냐? 더구나 눈 오는 날이라 술 맛 나기 딱 좋은 날 아니던가.
그런데, 윤병갑씨는 보이지 않고 전활철씨가 ‘미술기행’ 일동이라 적힌 돈 봉투를 건내주었다.






망년회 모임에 안주라도 몇 개 시켜드시라고 보냈다는데, 엄청 미안했다.
윤병갑씨도 같이 어울릴 것으로 생각하고 늑장 부렸는데, 이일을 어쩌랴!
통장이 없는 처지라 봉투 전해주려 이른 시간부터 인사동에 나왔다는데,
‘유목민’ 문이 닫혀있었다고 했다. 이 추운 날 얼마나 고생하였을까?






그런데, 입장 곤란한 일이 생겨버렸다.
'미술기행' 회원들의 고마운 마음을 총대 맨 조준영씨에게 전했는데, 받지 않겠다는 것이다.
일흔 넘은 노인네는 회비를 받지 않는데, 탁발한 돈도 받을 수 없다는 것 같았다.
자기네들도 내일 모래면 일흔 일 텐데, 더럽게 기분 좋더라.






일흔 넘은 사람이레야 나와 김신용씨 뿐이니, 둘 다 개털이라 봐주는 것 같았다.
사실 나이가 들면 아무래도 인사동 출입이 줄어들 수밖에 없으니,
장려차원에서 안 받는 것인지도 모른다.






회비 안 받는 것은 차지하고, 안주 사라고 보낸 성의까지 거절했는데,
한마디로 거지 돈은 치사해서 받지 않겠다는 것 아닌가?


뻔뻔스럽지만 길도 미끄러운데 택시 타고 가자며 김신용씨와 한 장씩 나누어 가졌다.
‘미술기행’ 회원들의 따뜻한 마음에 훈훈한 년 말이었다.





뒤늦게 정영신, 김명성, 김상현, 최종선, 임태종, 김각한, 이회종, 김영선, 노광래씨가

차례대로 나타나 판이 무르익어갔다. 김상현씨와 전활철씨의 노래도 크게 일조했다.
마침 그 날이 김명성씨 생일이라 공윤희씨가 생일 케익도 사 왔다.
매년 정영신씨 생일과 하루 차이라 같이 생일잔치를 치루었는데, 이번엔 그러지 못했다.






이 날은 안주도 푸짐했지만, 김완기씨가 양주를 한 병 가져왔더라.
몇 잔 마시지도 않았으나, 술 취해 똥오줌 못 가린 엊저녁으로 돌아가 버렸다.
그동안 이가 빠져 삼가 했던, ‘봄날은 간다’를 부르며 지랄발광을 떨었으니,
정말 가관이었을 것이다.

망할 년 보내는 날, 어찌 돌지 않으랴!


사진: 정영신, 조문호 / 글: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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