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일요일은 영주 사는 신동여 화백을 만나기로 했다.

80년대 중반 인사동을 주름잡던 실비대학 멤버가 아니던가.
그림, 시, 도예를 아우르는 인사동 풍류객이었다.






그 뒤 고향인 봉화로 내려가서도 틈틈이 올라왔고,
지방에서 열리는 ‘창예헌’ 모임에도 왔으니, 얼굴 잊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런데, 친하게 지내던 적음선사와 풍류객 이종문씨가 세상을 떠나며부터
두문불출하여 더 이상 만날 수가 없었던 것이다.
페북에 올라오는 얼굴사진이나 간간히 보았을 뿐, 그의 근황조차 알 수 없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정선에서 토끼와 대마초의 전쟁을 치룰 무렵, 인사동에 나타난 것이다.
전시 한다는 문자메시지를 보냈으나,
정선에서는 인터넷도 안 되고, 전화마저 지니지 않아 연락이 되지 않았다.
메시지를 확인한 지난 토요일에서야 그와 통화 할 수 있었는데,
내일 오후에 영주로 내려가야 한다는 거다.

그래서 일요일 아침, 해방촌에 있는 ‘고기 방앗간’에서 만난 김상현씨와

전활철씨에게 알려, 시인 조준영씨와 김명성씨까지 연락 된 것이다.






인사동에 나가보니,‘나날이 마켓’이란 프리마켓에 참여하고 있었다.


인사동에 사흘이 멀다 하고 들락거리지만,
이 큰 전시장을 모르고 있었다는 것이 귀가 막혔다.
남쪽보다 북쪽에서 놀다보니, 눈 뜬 장님이나 마찬가지였다.






‘인사1길 컬쳐스페이스’에서 열리는 ‘나날이 마켓’은 감성이 꿈틀거리는 프리마켓이었다.
천연염색, 붓, 명차, 한복, 막사발, 옻그릇, 가방과 모자에 이르기까지
수공예, 요리, 전통공예, 리빙, 패션, 소품 등 생산자가 직접 참여하는 아티스트 장터였다. 
서랍 속의 예술이 대중의 손에 쥐어지는 의미 있는 기획전이었다.






전시장 입구에서 만난 신동여씨의 모습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더라.
수염에 가렸을까? 선한 미소에 가렸을가? 세상 살아 온 나이테는 다 어디 갔을까?


그는 돈을 못 벌어 그렇지,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천하호인이다.






전활철, 김상현씨와 먼저 어울렸는데, 너무 반가워 대낮부터 술잔을 들었다.
전시장에서 시작된 술자리는 ‘탑골공원’ 전주집으로 이어졌다.
김명성씨와 조준영씨 까지 나타나 인사동 골통 한 패거리가 뭉친 것이다.






김명성시인은 신화백이 옛날에 했던 말은 재방송했다.
“난 손가락하나 까딱하지 않고 살고 싶다”
이게 생불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차로 들린 ‘유목민’에서는 문학평론가 구중서선생을 만나 뵙기도 했다.
그러나 숨이 가빠오기 시작해 더 이상 술을 마실 수가 없었다.


3차는 신사동 ‘뮤아트’로 간다지만, 난 쪽방으로 돌아와야 했다.
신동여화백은 결국 그 날 가지 못하고, ‘뮤아트’에 퍼졌다고 한다.






이제 조문호 인생도 끝났다.

예전의 그 객기는 다 어디 가고, 요 모양 요 꼴이 되었을까?
십팔 번도 ‘봄날은 간다’가 아니라 “봄날은 갔다”로 바꿔야겠다.


사진, 글 / 조문호






















































지난 5월 3일은 달세 방에서 쫓겨 난 노숙자 거처에서 낮술에 취한 날이다.
이덕영씨와 씨잘 데 없는 한담을 나누고 있는데, 공윤희씨로 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인사동 나오지 않냐?”는 말에 나가기는 했으나,
숨이 가쁘기 시작해 더 이상 술을 마시기는 힘들 것 같았다.






습관적으로 인사동 거리를 찍으며 지나가는데,
세계일보 편완식기자가 도화가 이흥복씨와 미녀 한 분을 데리고 걸어가고 있었다.
이흥복씨를 보니, 지난 4월 하순 ‘통인’에서 개최한 개인전에 가보지 못한 미안함이 앞섰다.
개막식 날 작정하지 않으면 미루다 놓칠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이흥복씨는 백자도판을 픽셀 삼아 평면에다 입체적인 작업을 하는 도판화가인데,
고향인 거창에 작업실이 있어 자주 볼 수 있는 사람도 아니다.
여럿이 가는 것으로 보아 무슨 약속이 있는 것 같아, 사진만 찍고 헤어졌다. 



 


공윤희와 약속한 ‘유목민’으로 갔더니, 민영기씨와 술을 마시고 있었다.
술은 그만 마시기로 작정했으나, 마시고 있는 ‘한라산’소주에 구미가 땡 겼다.
맛이나 본다며 시작한 술이 서너 잔은 족히 마셨는데, 그때서야 용건을 꺼냈다.
지난 번 말썽을 일으킨 “쓴 맛이 사는 맛”이란 전시 결산 내용을 정리해 줄 테니,
‘인사동 사람들’ 블로그에 올려 달라는 내용이었다.






한 차례 구설수에 몰렸던, 그 지긋지긋한 일을 왜 다시 거론하는지 모르겠다.
아직 미진한 것이 남았으면 투명하게 밝히는 것이 순리이지만, 
남은 일은 돈 받은 사람들 거명할 일인데. 잘 아는 분들 자존심 상하는 일이라 썩 내키지 않았다.
내용을 보고 결정할 생각으로, 자료나 정리해 보내 달라며 나왔다.






그 후 잊고 있었는데, 이틀 뒤 정영신씨로 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노광래씨가 녹번동에 들려 많은 이야기를 하고 갔다는 것이다.

햇님을 위한 조각가 박상희씨의 마음을 전해주러 왔다는데, 나한테 꼭 전하라는 말도 있단다.







첫째는 채현국선생과 자기에게 사과하는 글을 올려 달라 했고,,
둘째는 채현국 선생께서 날더러 “동냥 보따리를 찢었다”고 말씀하셨다는 것이다.
그 말에 인사동의 가난한 작가들이 엄청 자존심을 다쳤다는 이야기도 덧 붙였다.


의미심장한 말이었다.
만약 그런 일만 없었다면, 문제의 그 전시를 계속 할 작정이었다는 뜻일 수도 있다.



 


그 당시 ‘시가연’에서 채현국선생께 드린 말이 와전되어 전해지기도 했다.
“선생님께서는 평생 갑의 입장에서 사셨기에 을의 입장을 모르지 않느냐?”는
내 말이 ‘최현국선생께서 갑 질 했다“는 말로 둔갑되어 있었다.






그리고 나더러 무엇을 사과하라는지 모르겠다.
‘시가연’에서 채현국 선생께 인간적으로 심려를 끼친데 대해 큰 절 올리며 사과했고,
노광래 씨에게는 개인적으로 밥그릇 걷어찬데 대하여 사과하지 않았던가?






난, 머리가 나빠 판단이 잘 안 되니,
내가 올린 글에 대해 조목조목 지적해 주면 충실한 답을 공개할 것이고,
잘 못된 일이라고 판단되면, 정중히 사과하겠다고 전하라 했다.






이제 와서 누구를 원망하랴! 다 돈이 원수다.
제발 굶어 죽어도 쪽팔리게는 살지 말자.



사진, 글 / 조문호


























남북정상 회담하는 뉴스에 가슴이 벌렁 벌렁했다.
꿈도 꿀 수 없었던 통일이지만, 이젠 꿈이라도 꿀 수 있게 된 것 같다.
여지 것 살아오며 티브이 없는 것을 이처럼 안타까워 한 적도 없었다.
페북에 올라 온 뉴스로 보았으나, 큰 화면에서 보고 싶었다.


소원이라면, 죽기 전에 정영신씨와 북한 장터나 한 번 돌아보는거다.




이른 시간부터 축배 들자는 장경호씨의 호출이 있었지만,
하던 일만 마무리하고 가려는데, 도무지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서둘러 나가다 인사동 돌 턱에 앉아 노닥거리던 공윤희, 민영기씨를 만났다.
둘 다 술시를 기다리는 듯 했으나, 난 기다릴 겨를이 없었다.




몇 발자국 가다 이번에는 죽은 줄만 알았던 까딱이를 만난 것이다.
진짜, 죽은 사람 살아온 것처럼 반가웠다.
사라졌다 잊을 만하면 인사동에 나타났는데,
이번에는 근 이년 가까이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노숙자라 길거리에서 객사한 줄 알고, 인사동 골동 하나 사라진 것을 아쉬워 했다.




전에는 그를 만나면 도망치기 바빴고, 그는 쫒아오느라 정신없었지만, 이젠 달랐다.

둘 다, 너무 반가워 손을 덥석 잡고 멀건이 쳐다보았는데,
오히려 그가 나를 측은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꼬라지가 많이 상했네. 이빨은 어데 팔아 묵었노?”라기에
“자슥, 많이 칼 컬어 졌네, 어디 돈 많은 할마시라도 하나 걸렸나?” 서로 안부만 물었다.
그런데, 또 하나 바뀐 것은 평소처럼 돈 내라며 손을 벌리지 않았다.



같이 술이라도 한 잔 하고 싶었으나, 그는 술을 좋아하지 않는다.
녹차에 중독되어, 어렵게 탁발하여 녹차를 사 마시는 중놈 출신이기 때문이다. 

 
나중에 다시 보자며, 툇마루로 올라가니, 장경호씨와 박세라씨가 앉아 있었다.
옆 자리에는 테너 이동환씨가 젊은 친구들과 앉아 있었는데,
오늘 ‘통인오페라’를 마치고 후배들과 한 잔한다고 했다.
다들 축하주 마시느라 시간가는 줄 몰랐다.



기분이 좋아 오늘 통일 만찬주는 내가 쏜다며 페북에 날렸는데.
댓글 올라오는 것 보니, 의외로 통일에 겁먹은 사람이 많더라.


갑자기 죽은 김용태씨가 생각나, 이차로 ‘낭만’으로 옮겼는데,
그 곳에는 성기준씨 패거리가 큰 방을 차지하고 있었다.





김보영, 박영애씨 두 모녀를 세워두고, 죽은 용태한테 보낼 사진이라며 한 장 박았다.
그런데, 나올 때 박영애씨가 술값을 받지 않더라. 거지라 불상하게 여겼을까?
그나저나, 용태 주소를 몰라 어디로 부쳐야 할지 모르겠다.




마지막 3차는 ‘유목민’에 들려 임경일씨와, 임태종씨를 만났는데,
다들 기분 좋아 싱글벙글했다.
경상도 성주장 갔다 오는 정영신씨를 불러들여 마지막 축배로 끝냈다.




김정은이 덕분에 이렇게 기분 좋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멋진 놈 인줄, 진정 난 몰랐네.


이러다 내가 받들어 모시는 교주 바뀔지도 모르겠다.

사진, 글 / 조문호


























몇 일간의 외유가 끝나면 습관적으로 인사동을 들린다.
늘 그렇고 그런 거리풍경인데다, 약속하지 않으면 아무도 만날 수 없으나 나간다.
마치 출근부 도장 찍듯 사진 몇 장 찍고 인사동 거리를 지나 집으로 돌아왔다.






저녁에는 군에 입대하는 정영신씨 조카 김희중이 저녁 식사 모임에 갔다.
역촌역 인근에 있는 그 고기 집은 한 사람 당 11,900원을 내면

원하는 고기를 무제한으로 먹을 수 있어 고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잘 가는 곳이다.
난, 별로지만 따로 놀 수 없었다.






옛날에 비하면 요즘의 군대생활은 아무 것도 아니지만,
엄마 되는 정주영씨는 마음이 편치 않은 듯 했다.
‘군대 가기 전에 총각 딱지는 떼고 가야하지 않느냐’며 너스레를 떨고 있는데,
김명성씨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인사동 ‘유목민’으로 나올 수 없냐는 것이다.






술 마실 일도 아니고, 뭔가 의논할게 있다기에 안 나갈 수 없었다.
가능하면 정영신씨와 함께 왔으면 좋겠다는 부탁에 그만 일어나야했다.
인사동을 하루에 두 번 걸음 하기는 싫지만, 어쩔 수 없었다.






‘유목민’에 들렸더니, 김명성, 전활철, 이상훈씨를 비롯하여
요즘 잘 보이지 않았던 화가 전인경씨와 허미자씨도 있었다.
술집 안주를 제쳐두고 중국 음식을 배달시켜 먹고 있었는데,
무슨 요리인지 모르지만 맛있게 먹었다.






김명성씨의 이야기로는 도봉산 입구에 매장을 차리는데,
주말만 아르바이트를 할 수 없냐는 것이다.
이벤트의 성격을 띤 옛날 사진관을 재현하여
등산객들에게 옛날식으로 사진을 찍어 주라는 것이다.






재미있는 발상이지만, 한 곳에 메이는 것이 마음이 걸렸다.
그러나 생각을 달리하니, 갑자기 의욕이 솟구쳤다.
등산객을 대상으로 한 초상사진을 찍고 싶은 욕심이 생긴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또 다른 사람들을 찍을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이 나이에 돈벌이 한다는 자체가 신나는 일이지만,
또 한 가지의 프로젝트에 메일 수 있으니, 도랑치고 게 잡는 일이었다.






그러나 주말에 꼭 가야할 곳들이 생길 일이 난감했다.
그래서 동지 정영신씨를 끌어들여 공동 작업으로 해 볼 생각을 한 것이다.
정영신씨는 학비를 벌어야 하니, 일을 나누면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격이었다.
정선에 있는 옛날식 뷰카메라를 가져와 개조하기로 하고 일어났는데,
이상훈씨가 여비하라며 신사임당 두 장을 찔러 주었다.
몸이 피곤하던 차에 택시비까지 주어 편안하게 돌아왔다.





돈은 사람을 악마로 만드는 원흉이라 욕하지만, 사람을 편하게는 하였다.
그러니 돈의 중독성에 빠져 사람이기를 포기하는 일까지 종종 생기지 않는가?
과연 욕심을 버리고 적당히 번다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일일까?

사진: 정영신, 조문호 / 글 : 조문호















몇일 전, 조준영교수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으니, 인사동 좋아하는 사람들 얼굴 한번보자는 전화였다.
그러자는 답은 했으나, 몸이 피곤해 한 숨만 자고 갈 생각 이었다
한 시간만 자고 가려했으나, 그만 깊게 잠이 들어버린 것이다.
전화벨에 눈을 떠보니, 조준영씨 였는데, 오고 있냐는 거다.
시계를 보니, 지금 쯤 도착했어야 할 일곱 시였다.
엉겁결에 거짓말을 했다. 지금 지하철 타고 가고 있다고...






도착하니 조준영 시인을 비롯하여 뮤지션 김상현, 사진가 김수길, 연극배우 이명희,
화가 장경호, 유목민 주인장 전활철, 박혜영, 유진오, 공윤희씨 등 대략 열 명 쯤 모여 있었다.






전활철씨가 갖다 준 깔치조림에다, 허급지급 밥부터 먹었다. 살아남으려고..
한 잔 한 조준영시인의 목청 높은 소리가 밥숟가락 사이로 흘러왔다.






“박근혜는 뭘 모르는 바보지만, 이명박이는 진짜 나쁜 놈입니다.
그 놈은 돈 밖에 모릅니다. 억지로 잡은 대권도, 대권보다 이권이 먼저입니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난, 박근혜나 이명박보다 더 나쁜 것들은 언론이라 생각한다.
명색이 대통령으로 나온다면 그 사람에 대해 모든 것을 알아내어
국민들에게 알려야 하는데, 무슨 득 좀 보려고, 쉬쉬한 것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다수의 국민은 언론이 바람 잡는데로 찍은 것이다.
“얼마나 분하겠느냐? 내 손가락으로 찍은 대통령이 저런 바보였고,
저런 도둑놈이었다는 것이...

” 씨발! 찍은 내 손가락을 잘라버리고 싶다는 말을 많이 했다.






정치이야기 하면 열 받으니까, 가요반세기로 돌아갔다.
임희숙의 ‘진정 난 몰랐네“로부터 남인수의 ’비나리는 호남선‘에 이르기까지
김상현씨의 애절한 노래가 슬펐는데,
갑자기 아마추어 가수 전활철씨가 나타나 ’청춘‘을 부르기 시작한 것이다.
갑자기 오랜 울분이 치솟았다.






술자리에서는 아가리 닥치고, 남의 이야기나 듣다가,
술 취하면 조용히 사라질 것을 스스로 약속해 살며시 빠져 나오니,
화가 장경호씨의 술 취한 행복한 노래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뒷동산 아지랑이 할미꽃 피면 꽃댕기 매고 놀던 옛친구 생각난다

그시절 그리워 동산에 올라보면 놀던바위 외롭고 흰구름만 흘러간다

모두 다 어디갔나 모두 다 어디갔나~”





사진, 글 / 조문호





































































 

지난 21일은 인사동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만나는 셋째 수요일이다.

요즘 몸이 편치 않아 꼼짝도 싫지만, 안 나갈 수 없었다.

스스로의 약속이기도 하지만, 시인 강민선생과의 약속도 있기 때문이다.



지난 달 있었던 서울문화투데이문화대상 시상식 날,

강민선생을 비롯하여 이행자, 김승환, 방동규 선생등 원로 문인들께서 축하하러 오셨더라.

창피하여 아무에게도 연락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아셨는지,

그 노구를 끌고 시상식장까지 찾아 오신 것이다.


 

그러나 주관처가 마련한 수상자들의 자리가 따로 있어,

점심 한 그릇 대접하지 못한 게 영 마음에 걸렸다.

그래서 식사 대접 하는 날을 셋째 수요일로 잡은 것이다.


    

이제 인사동에도 자주 나오기가 힘들어, 나온김에 많은 분을 만나고 싶었으나 욕심이었다.

점심과 저녁 사이의 그 빈 시간을 혼자 보낼 일도 예사 일이 아닌지라,

정영신씨 노트북까지 빌려나왔다.


 

정오 무렵, 인사동 나주곰탕으로 갔더니,

강 민, 방동규, 김승환선생께서 먼저 와 계셨다.

옆자리에는 덕원스님과 최명철씨도 있었다.

반갑기 그지없는데다, 날씨마저 받쳐 주었다.

춘분인데도 인사동에 진눈깨비가 내린 것이다.



아직 오시지 않은 분이 계셨지만, 술 없이 앉을 여유가 없었다.

곰탕 건더기를 안주로 마시기 시작했는데, 그 첫잔의 술맛이 얼마나 달콤한지...

좀 있으니, 이행자, 장봉숙선생께서 온 몸에 눈을 잔뜩 뒤집어쓰고 들어오셨다.

그런데, 왜 내 눈에는 할머니로 보이지 않고 소녀로 보였을까?

행여 이 말도 미투에 걸리는 게 아닌지도 모르겠다.


 

백기완, 황석영 씨와 함께 조선의 3대 구라로 불리는 방동규 선생께서 첫 포문을 열었다.

따님 방그레양이 중국 대학교수로 들어갔다는 것이다.

그런 구라라면 확성기 들고 인사동거리에서 소리칠 기분좋은 뉴스였다.

첫딸인 방그레양은 그림을 잘 그리지만, 둘째 딸 방시레는 배추선생처럼 운동을 잘 했다.

방그레, 방시레란 예쁜 이름처럼, 둘 다 예쁘기도 하지만,

일찍부터 자식들 재능까지 알아보신 것 같았다.

그림 잘 그리는 그레, 운동 잘하는 시레로 지었으니 말이다.


 

이런 저런 배추선생의 재밋는 구라에 단번에 발동이 걸리기 시작했다.

선생님들 앞에서 헛소리도 지껄이며, 미친 망둥이처럼 부산을 떨어댔다.

인사동 눈 오는 풍경도 그냥은 찍기 싫었다.

옆자리에서 마시던 덕원스님과 최명철씨를 밖으로 끌어내어 사정없이 박아버렸다.


 

그런데, 장봉숙선생께서 다음 셋째 수요일은 자기가 밥을 사겠다는 말씀을 하셨다.

그동안 여러 차례 얻어 먹은적도 있으나, 다른 선생님보다 형편이 나으니 고맙게 받아들였다.

다음 달 역시 셋째 수요일로 잡는 것은, 셋째 수요일은 인사동 나가는 날로 못 박기 위해서다.

약속하여 만나는 것보다, 우연히 만나는 기쁨이 더 반갑다.


 

'나주곰탕'집에서 나와서는 장봉숙선생께서 커피를 쏘셨고,

강민선생께서는 정승재씨의 개인전이 열리는 토포하우스로 안내해 주셨다.

난 개인전이 열리는 것도 모르고 있었는데, 덕분에 좋은 전시를 볼 수 있었다.


 

정승재씨는 행정법률과 교수지만, 소설가로 더 잘 알려졌다.

그런데, 그림에도 남다른 면이 있어 작년에 이어 두 번째 개인전을 가진 것이다.

이번에 선보인 작품들은 평창올림픽 개최가 확정되며 그리기 시작한

질주하는 하나된 열정이란 주제의 동계올림픽과 관련된 스포츠 그림인데,

선수나 작가의 강인한 도전정신을 읽을 수 있었다.

오는 27일까지 열리니 인사동 가는 걸음에 꼭 한 번 보시기 바란다.


 

전시장에서 나왔으나, 난 갈 곳이 없었다.

그 때까지 유목민 문이 열리지 않아, 옆집 커피숍에서 노트북으로 페북 질이나 했는데,

얼마나 지루한지 인사동을 여러 차례 돌아다녔다.



 

이날은 급히 나오느라, 페북에 알리지도 못했지만,

눈이 내린 후 날씨가 추워진다는 일기예보 때문인지, 길거리에 사람이 없었다.

술도 못 마시는 화가 이종승씨만 서둘러 돌아가고 있었다.

기다린 시간이 아깝지만, ‘유목민에서 머뭇거리다 그냥 동자동으로 들어갔다.


 

아무리 개인주의로 빠지는 야박한 세상이지만,

인사동을 드나드는 정든 예술가마저 그러지들 맙시다.

평소에는 관광객에게 인사동을 뺏기지만,

그 날만이라도 곳곳에서 반가운 사람들 만나는 날 만듭시다.

셋째 수요일 따뜻한 봄 날, 인사동서 신명 한 번 푸입시더.“

    

 

사진, 정영신, 조문호 / 글, 조문호




































































 

 

 

 





지난 14일은 병원에서 퇴원하여 술 마시는 호기를 부리다 혼쭐 난 날이었다.

인사동에서 숨을 헐떡이며 돌아와서 24시간동안 정신없이 쓰러져 잤다.

당분간 술과 담배를 자제할 작정이나, 생각을 따라주지 않으니, 한 낱 구호에 불과하다.



 


병원에서의 허송세월로 밀렸던 봄의 일정을 서둘러야 했다.

강진과 정선에도 가야하지만, 중간 중간 서울에서 할 일도 많았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 일이 스스로를 위한 일인지,


남을 위한 일인지도 분간 되지 않고, 하지 않는다고 문제생길 일도 아니었다.

나도 모르게 길들어왔던 관습에 불과하지만,

어쩌면, 그 귀찮은 관습을 은근히 즐겼는지도 모른다.




 

16일은 한정식선생의 생신날이라 오찬모임에 가야 했다.

정영신씨를 비롯하여 최경자여사 전민조선생 등 네 분이 만나는

조촐한 자리를 예약해 두었으나, 갑자기 전민조선생께서 일이 생겨 차질이 생겨버린 것이다.

예약 인원수를 맞추느라 계획에도 없던 내가 끼이게 되었는데, 갑자기 마음이 바빠졌다.



 


최근 한정식선생 사모님께서 병원에 입원한 후로,

매년 치루어 왔던 생신 오찬회를 그만두겠다고 하셨으나,

정영신씨가 손사래를 쳐 자리를 만들었으니, 그냥 넘어 갈 수도 없었다.

더구나 나는 음식을 가려먹어야 하는데다.

불편한 몸으로 긴 시간 같이 할 수 있을지도 걱정스러웠다.




    


어떠하든, 정영신씨를 따라 나서게 되었는데,

한정식선생의 인사동 작업실을 찾아 그동안 못들은 말씀을 많이 들었다.

사모님 걱정에 심기가 편치 않은 모습이 역역했다.






지난 해 사별하여 홀로 계신 이명동선생님의 초라한 모습을 늘 안쓰러워 하셨는데,


사진가 이완교선생 까지 사별하시어, 더 힘든 것 같았다.

이완교 선생께서는 사별한 후, 그리도 구슬피 울었다는 말씀도 전해주셨다.

혼자 남는다는 외로움의 웅덩이에 빠져보지 않은 사람은 잘 모를 일이다.





오찬장인 이화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선생께서는 운동 삼아 늘 걸어 다니시는 구간이지만,

, 힘들어 택시를 타고 싶었으나 그럴 수 없었다.

식당으로 가다 테라로사에 계시던 강운구선생과 이갑철씨를 만나기도 했다.



 



그 다음 일정은 자하문로에 위치한 이안의 개관전시에 참석하는 일이다.

개관전으로 치루어지는 더레퍼런스 #1 : Asia Art Book Library였다.

한국, 일본, 싱가포르, 중국, 대만 등 아시아 5개국의 아트북 241권을

5명의 작가들이 국가별로 재해석하는 자리였는데, 나에게는 좀 생경스러웠다.





발행인 김정은씨를 비롯하여 한정식, 황규태, 박진영, 박지숙, 김다울씨 등

여러 명이 행사장에 있었으나, 전시된 다양한 출판물들만 살펴보았다.

일행들과 보조를 맞추기가 힘들어, 인사동에서 기다릴 작정으로 살며시 빠져나왔다.



 


돌아오는 길에 인디프레스 갤러리앞에서 발길을 멈추었다.

이호련씨의 'collaged image'전이 열리고 있었는데,

쇼케이스에 걸려있는 작품 한 점에 나도 모르게 문을 밀고 들어갔다



 



전시장에는 작가는 물론 안내하는 사람조차 없었으나,

혼자서 두 개 층에 걸린 작품들을 훔쳐보듯 조심스럽게 돌아보았다.



 

 

젊은 여인들의 자유스러운 동작들이 캔버스에 그려져 있었는데,

마치 사진 같은 리얼리티가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다.

사실적으로 재현한 그림인데다, 관능적이고 매혹적인 아름다움에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인위적으로 연출하여 사진을 찍은 후, 그 사진을 바탕으로 그림을 그렸는데,

그 관음증적 욕망을 끌어내는 이 은밀한 엿보기는

보는 이에게 긴장감과 함께 약간의 흥분까지 불러 일으켰다.



 

 

계단을 오르내리거나, 물장난을 치거나, 작업에 몰입하거나,

누워있는 다양한 상황이 연출된 모습을 일방적으로 지켜보게 만들었다,

철저하게 시선을 유도하려는 의도가 깔려 있었다.





실제이면서도 허구이자 사실적이면서도 어딘지 추상적인 분위기가 감돌았다.


나이 많은 사내가 젊은 여인을 훔쳐본다는 생각에 이르니,

요즘 부는 미투의 휘오리에 휘말릴 것 같은 두려움마저 생겼다.



 

 

미술평론가 박영택씨는 서평에 이렇게 썼다.

작가가 그린 신체는 단지 대상의 닮음 꼴에 그친 도상,

대상의 외관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대상의 감각이고 대상의 신체에 해당하는데,

그것은 작가가 나름 강렬하게 감각하고 욕망화한 것, 체험한 신체의 대상화이다.

그래서 보는 이들의 신경, 감각을 다분히 건드리는 그림이 되고 있다.





그러나 그 대상은 저기에 있다.

그림 안에서 유령처럼, 환각적인 존재인 냥 자리하고 있다.

구체적인 실체이면서도 물질적 존재감 없이 몽롱하게 아른거리는 아지랑이 같은 저 존재성은

욕망의 대상이 과연 어떤 것인가를 실질적으로 방증하는 회화적 제스처로 다가온다적고 있다.


우연히 보게 된 독특한 체험의 전시였는데, 오는 331일까지 이어지는 전시다.



 


지름길인 국립고궁박물관으로 들어섰는데, 정영신씨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돌아보니, 한정식 선생을 모시고 내가 가는 길을 따라 오고 있었다.

살다보면, 우연하게 통하는 일도 많다.

인사동에서 한정식선생을 배웅한 후, 유목민에 잠시 들렸다.

갈증도 풀 겸, 화장실에도 들려 잠시 쉬고 싶었다.



 


그 다음의 일정은 태국에서 귀국한 고영준씨를 만나는 일이었다.

그는 40년 지기의 사우였지만, 사업장을 태국으로 옮기고 부터

일 년에 한 번 만나기도 어려운 처지가 되었는데,

이틀 뒤 아들의 결혼식이 있어 귀국했다는 것이다.



 


사실은 주말에 강진으로 떠나야 했으나, 그 결혼식 때문에 연기한 셈이다.

그를 만난 김에 축의금만 전해주고, 결혼식은 빠질 심산이었던 것은

축의금이래야 두 사람 밥값도 미치지 못하니, 그게 나을 것 같았다.

약속장소인 멕도날드에 들렸더니, 고영준씨 뿐 아니라

오래된 사우인 유성준씨와 최성규, 김흥묵씨도 있었다.





40여년 전, 인사동에 있었던 꽃나라라는 흑백 암실에서 만나기 시작한 분들인데,

오랫동안 하는 일이 다르고, 사진에 대한 생각마저 달라,

같은 서울 하늘 아래 살지만, 좀처럼 만나지지 않는 분들이다.



 

 

그러나 우연히 만나니 반갑기 그지없었다.

그 당시 만난 많은 선배들이 돌아가셨다는 뜻밖의 소식도 접했다.





한 평생 누드를 찍어왔던 정운봉 선생을 비롯하여,

백로사진을 열심히 찍던 경찰서장 출신의 이봉하선생,

사진계 소식지를 만들어 사진인들에 돌렸던 정철용씨,

작년 까지만 해도 주말이면 인사동거리에서 망원렌즈로 사람을 찍던

이기윤씨 등 많은 분들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 그렇게 한 사람 한 사람 떠나는 구나

안타깝고 허무했으나, 나 또한 멀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니 쓴 웃음이 흘렀다.



 

 

고영준씨는 태국에 살지만, 폐친이라 나의 근황을 잘 알고 있었다.

내가 카메라를 잃어버렸다는 글에 마음이 아렸던지, 자신의 카메라를 싸 들고 왔다.

난 이미 카메라를 구했고, 다른 카메라는 잘 사용하지도 않지만,

사람 사는 인정에 콧 잔등이 찡했다.



   



다들 툇마루에 가서 된장비빔밥이나 한 그릇 하자고 했는데,

술 한 잔 하자는 인사법에서 밥 한 그릇 먹자는 인사로 바뀐 것도 변화라면 변화다.

여섯명이 소주 한 병으로 끝냈는데, 겨우 반잔 밖에 마시지 않았으니, 입만 버린 셈이다.

밥값은 정영신씨가 내고 생색은 내가 내는 이 웃기는 짜장면은 또 무얼꼬?

 


사진, 정영신, 조문호 / 글,  조문호

























화가 김재홍씨의 "살-(생,사,육) 그림전지난 21일 인사동 '나무화랑에서 개막되었다.

그동안 '정선고드름축제'로 정선에 체류하기에 어렵사리 김재홍씨 개막식만 참석하고 다시 돌아갔다,
평창올림픽이 열리는 20여일 동안 추운 날씨에 시달렸으니, 마치 전쟁터에 투입된 기분이었다.
결국 끝내고 돌아오자 마자 감기몸살로 드러눕게 되었는데, 사진도 찍은지 8일만에야 간신히 포스팅했다.

그날 개막식에는 많은 화가들과 지인들이 참석하여 성황을 이루었다.
김재홍씨 내외를 비롯하여 김진하, 신학철, 장경호, 박불똥, 박은태. 김언경, 이필두, 류연복, 곽대원, 최명철, 두시영, 김영중,

배인석, 이윤엽, 송용민, 마문호, 손기환, 이재민, 조신호, 김구, 한상진, 최석태, 변대섭, 이명희, 전활철, 노광래, 오세필,

성기준씨등 많은 분들이 참석했다.

이 날은 인사동사람들이 만나는 셋째 수요일이라 전시와 무관한 분들도 '유목민'으로 왔으나, 술상은 푸짐했다.

그런데 뒤풀이 비용이 만만 찮을텐데 모자도 돌리지 않고 김재홍씨 혼자 부담했다고 한다.

상업성의 그림전이 아니라 걱정스럽기는 했으나, 덕분에 잘 마시고 재미있게 놀았다.

뒤풀이에서 화가 박은태씨의 작품집 '사람들'도 선물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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