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동에서 한 달에 한번이라도 반가운 사람을 만나자는 뜻으로 시작된

첫 ‘주삼수(酒三水)날은 많은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했으나, 너무 과음했다.
‘학고제’에서 화가 송창씨의 개막식이 있었지만, 삼청로라 갈 수도 없었다.
많은 주당들이 그 전시뒤풀이에 퍼지겠지만, 약속은 약속이었다.






인사동 길거리에서 반가운 분들을 만났다.
제주로 내려 간 김호근씨를 만났는데, 오랫만의 서울 나들이라 했다.

종각 부근에서 약속이 있어 그 곳에서 마시자고 했으나 양해를 구했다.

인사동에서 이차를 약속하고 ‘낭만’으로 갔지만 거긴 아무도 없었다.

이 날은 핸드폰까지 고장 나 아무와도 연락되지 않았다.

돌아오는 길에 사진하는 곽명우씨를 만났다. 언제나 웃는 표정이 정겨운 친구다.





벽치기 샛길의 주막으로 접어드니, 찻집 앞에는 김명성씨가 앉았고,

불화가 이인섭씨는 제자와 함께 반대편에서 걸어오고 있었다.

이 날의 첫 술잔은 이인섭씨와 골목에서 시작되었다.

성기준씨와 송용민씨도 다녀 갔지만, 이차는 화가 김 구, 장경호씨와 마셨다.

장경호씨는 이미 술에 취해 왔는데, 다른 곳에 가서 한 잔 더하자며 바람 잡았다.





칠뫼 김구씨와 함께 따라간 곳은 ‘국악 라이브’였다.

장경호씨는 요즘 술만 취하면 ‘월하의 공동묘지’같은 이집으로 자주 데려왔다.

여자들이 필요해서가 아니라 노래 부를 수 있는 곳이 없어 찾는 것 같은데, 만만찮은 그 술값은 어쩔거냐? 

난 너무 취해 소파에 잠시 골아 떨어졌는데, 눈을 떠보니 임경일씨도 와 있었다.






장경호씨는 자기의 십팔번인 뒷동산 아지랑로 시작되는 노래를 부르고 싶었지만,

제목을 몰라 못 찾고 있었다. 그토록 노래를 자주 부르면서 제목도 기억하지 못하다니...
그나저나 자정이 가까워 오고 있었는데. 일산 사는 장경호씨는 또 백상사우나에서 신세 질 팔자였다.

나도 지하철 끊기기 전에 줄행랑쳤지만, 뒤가 편치 않았다.


에고~ 사는 것도 힘들지만, 노는 것도 힘들다.



사진, / 조문호






































장욱진작




오늘이 셋째 주 수요일이면 인사동에서 반가운 사람들 만나는 날이 아니던가.

그 징그러운 더위가 물러나고, 날씨까지 받쳐주네.

산들 산들 부는 늦바람에 마음까지 날릴까보다.

‘인사아트센터’에서 열리는 장욱진화백의 회고전 ‘동심과 불심’도 보고,

‘나무화랑’에서 열리는 강행복씨의 아티스트북 설치전도 보자.

시간 남으면 ‘갤러리그림손’에서 열리는 ‘초월시공’전에도 한 번 가보라.

국대호, 유봉상, 이재삼, 이태량, 채성필씨가 냈단다.

친구는 오래된 친구라 했으나, 더러운 꼴 덜 본 새 친구도 좋더라.

벽치기 샛길에 있는 ‘유목민’에서 만나, ‘부산식당’도 좋고 ‘낭만’도 좋다.

소주 맥주 주종 불문이고, 남자 여자 인종 불문이다.

돈 없으면 거지처럼 놀면되고, 돈있으면 부자처럼 놀면된다.

만나면 만나는 대로 좋고 못 만나면 못 만나는 대로 한 잔 빨자.

빠세 빠세 살아 빠세 죽고 나면 못 빠나니...





지난 20일 저녁 무렵, 내연의 여인이 인사동으로 떴다는 정보가 접수되었다.
찜통 같은 쪽방에 처 박혀 있으려니 속에 천불이 나, ‘유목민’으로 나갔다.
그 때 그 사람은 보이지 않았지만, 전활철씨와 시원한 콩국수에다 소주 한 잔 했다.
좀 있으니, 아니나 다를까 정영신씨와 김정희씨가 등장했다.
약속이나 한 듯 장경호, 김효성, 공윤희씨도 차례로 나타났다.






장경호씨는 마석에서 박불똥씨와 한 잔 하고 온 처지라 혀가 약간 꼬였다.
걱정은 되었지만, 일단 그가 싫어하는 사람이 없어 안심했다.
장경호씨는 처음 보는 김정희씨 더러 막걸리 한 병 사달라는 구걸을 하더니,
오히려 두 군데 술값을 선불로 내 버리는 호기를 부렸다.






술벗에다 그윽한 여인네들 까지 어울리니, 술맛 좋고 분위기 좋았다.
김효성씨는 힘들어 하는 자기 형 이야기에 눈물까지 흘리더니,
핸드폰에 저장된 손자의 재롱에는 낄낄대는 순정파였다.
그런데, 술판이 무르익으니 판을 바꾸고 싶었던지, 2차를 가잔다.
다 같이 따라 나섰는데, ‘노래하는 ’아리랑‘으로 가고 있었다.






내가 생각하는 ‘아리랑’이란 술집은 ‘월하의 공동묘지’로 기억된다.
오래전 밤늦게 술 취해 들어갔는데, 국악 하는 한복 입은 여인들이
푸른 조명을 받고 앉아 있는 모습이 마치 귀신같았기 때문이다.
그 ‘아리랑’이 ‘국악 라이브’로 이름이 바뀌었는데, 주인은 그대로였다.
노래방을 운영하며 틈틈이 국악공연을 보여주는데, 춤보다는 소리가 좋다.






난 목소리가 쉰데다 이빨까지 빠져, 이제 노래인생은 끝나버렸다.
다른 사람이 부르는 십팔 번 따라 마셨으니, 술이 술술 넘어갔다.
옆 자리에 앉은 성악가가 부른 ‘칠갑산’에는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자정이 가까워 오니 한 사람 한 사람 사라지기 시작했는데,
결국 장경호씨가 김정희씨를 울리고 말았다.

무슨 내용인지 모르지만, 말 한 마디에 자존심이 엄청 상한 모양이다.
에고~

사진 : 김정희, 정영신, 조문호 / 글 : 조문호










































지난 17일은 인사동지킴이로 불리는 공윤희씨로 부터 연락이 왔다.
예전 같으면 핸드폰을 꺼두어 대부분의 전화를 받지 않았으나,
요즘은 너무 덥고 힘들어, 도망갈 핑계부터 찾는다.
인간이 어찌 이리 간사한지 모르겠다.






인사동 큰 길로 들어가다 뜻밖의 반가운 사람을 만났다.
화가 장경호씨와 민예총 사무총장 배인석씨를 만났는데,
장경호씨는 마치 죽은 여편네 돌아 온 듯 반겼다.
20여일 전 ‘유목민’에서 얼핏 보았지만, 
오월 ‘노모현 추모제’ 때 보고 못 만났으니, 두 달 가까이 되었다.






‘유목민’에서 보자며 헤어졌는데, 공윤희씨가 먼저 와 있었다.
공윤희씨는 맥주, 난 소주를 시켰는데, 하소연 할게 많은 것 같았다.
아우처럼 도왔던 후배의 배신감에 속이 상한 모양인데, "형이 참아야지 어쩌겠냐"고 했다.
나 역시 동자동에서 받은 배신감과 무례에 마음을 다쳤으나,
한 살이라도 더 먹은 사람이 참고 다독여야 한다는 생각이다.
불만을 잘 털어놓지 않는 그의 성격으로 보아 화가 많이 난 것 같았다.






하소연 들으며 홀짝 홀짝 마신 술이 정량을 두 배나 초과해 버렸다.
단 둘이 앉아 대작하는 경우도 드물지만, 이렇게 많이 마신 적은 좀처럼 없었다.
그동안 술이 너무 취하면 사고를 쳐, 철저하게 조절해 왔기 때문이다.
그 무렵 임경일씨와 방인철, 김대웅, 강선화씨가 나타났는데,
오랜만에 만난 강선화씨 모습에 그만 마음이 동했다.






환갑이 다된 할머니더러 강양이라 부르며 주접을 떨어댔다.
내 딴엔 젊은 여인으로 보인다는 알랑방구였으나,

듣는 입장에서는 다방 종업원 부르는 것처럼 들렸으니, 기분 좋을 리가 없다.

매사가 이런 식이니 맞아죽지 않고 살아 남은 게 용하다. 
대개 앞에서는 웃어넘기지만, 돌아서서는 개망나니 쯤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십 오년 전, 사랑하는 여인이 생기고부터 술도 절제하고, 오버하지 않으려 무던히 노력했다.

그러나 잡놈으로 여겨 온, 오래된 인식은 쉽게 바뀌지 않았다.

그렇다고 병적인 밝힘증이 고쳐진 것은 아니지만,

마음껏 마시거나 노골적인 처신은 집에서만 하니, 문제될 것은 없었다. 

어떤이는 사람이 바뀌었다며, 서운해 하는 사람도 있었다.

문제는 술이 많이 취하면 끓어오르는 욕정을 주체할 수가 없다는 점이다.






내가 입버릇처럼 말하는 것도, 인간의 가장 원초적이며 최고의 희열인 성을 왜 터부시하냐는 것이다.

성에 대한 이야기만 나오면 다들 추하게 생각하고, 욕으로만 여기니, 이런 아이러니가 어디 있냐?

물론 불륜을 저지러자는 것은 아니지만, 아름다운 인간의 성을 숨길 일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세상에 바꾸어야 할 법이나 관습이 한 둘이 아니지만, 남들이 외면하는 아래 세가지는 꼭 바꾸고 싶다. 

첫째 마약으로 잘 못 인식시켜 온  ‘대마초합법화’문제다. 인간은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있다.

둘째는 식물인간처럼 의식 없이 사는 이들의 ‘안락사’문제다. 가족들의 고통이나 엄청난 사회적 비용이

병원업자들 손바닥에서 놀고 있다. 오죽하면 살리지는 못해도 죽이지는 않을 수 있다는 말까지 나오는가? 

셋째가 인간의 아름다운 성생활을 음지에서 양지로 끌어 올리자는 것이다.

전자의 두 가지는 공감하는 분들이 많지만, 성에 대해서는 여전히 손톱도 들어가지 않았다.

그 원죄가 도대체 무엇인가?






술이 너무 취해, 담배 피우러 밖에 나왔다.
보슬비가 한 방울 두 방울 떨어지고 있었는데,  장경호씨도 따라 나와 3미터 간격으로 쪼그려 앉았다.

쪽방이 더워 고생한다는 것을 눈치 챈 장경호씨가 “쪽방에서 그만 나와요”라며 말을 꺼냈다.

“야! 쪽팔리잖냐.”는 한 마디로 끝냈으나,

이미 돌아 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넜으니, 더 이상 언급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사진, 글 / 조문호












 




무의도 촌장 정중근씨로 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동자동에서 술 한 잔 할 수 있냐고 물었지만, 인사동 ‘유목민’에서 만나자고 했다.
요즘같이 푹푹 찌는 쪽방에서 손님 맞으려면 힘들어서다. 다들 벗고 사는데...

퇴근시간대의 지하철은 만원이었으나, 객실은 시원하여 견딜만했다.
종로3가에서 내려 인사동 길로 들어서니, 거리에 유난히 한복 입은 젊은이들이 많았다.
전통의 멋을 내는 것이 대견스럽기는 하나, 이 더위에 어떻게 견딜까 걱정되었다.
젊으면 덥지도 않을까?





‘유목민’에 들어서니 약속한 정중근씨를 비롯하여 소리꾼 조수빈씨도 와 있었다.
술시가 일러 그런지 술집을 전세 내어 맥주에 사이다를 타 마시고 있었다.
갈증을 풀려면 그보다 더 좋을 수 없겠으나, 통풍환자라 맥주를 못 마시니 어쩌랴.
시원한 실내라 더위를 말끔히 씻었는데, 술벗에다 명창의 소리까지 따라주니
천국이 따로 없었다. 뒤늦게는 언론인 정경호씨도 합류했다.


애절한 ‘진주난봉가’에 이어, 나를 위해 ‘정선아리랑’까지 불러주었는데,
무대에서 앵무새 소리처럼 들어 온 '정선아리랑'과는 감이 달랐다.
역시 우리 소리는 많은 관객을 두고 부르는 틀에 박힌 노래보다,
오붓한 술자리가 훨씬 좋았다.






박자에 끌려다니지 않는, 진득한 삶의 감정이 묻어나니 감동이 백배 천배다.
옛 선비들이 정자에 술상 차려놓고 듣는 그 풍류를 알 것 같았다.
짜증을 내어서 무엇하나로 시작되는 다소 짜증스러운 태평가도 완전히 다르게 불렀다.
다들 소리에 빠져 눈을 지그시 감고, 술 마시는 것조차 잊어버렸다.






안주로 나온 전복 데침이나 가지찜도 ‘유목민’에서 개발한 별미였는데,
모든 게 독창적인 것이 대세다.
오랜만에 맛보는 신선놀음에 시간가는 줄 몰랐다.

“짜증을 내어서 무엇 하나 성화를 받치어 무엇 하나
속상한 일이 하도 많으니 놀기도 하면서 살아가세
니나노~ 닐리리야 늴리리야 니나노~”

사진, 글 / 조문호












































지난 19일 병원에서 퇴원하여, 정선 떠날 채비로 인사동에 나갔다.

꼭 봐야 할 전시도 있었지만, 전시 DP에 필요한 자재를 알아보기 위해서다.
일을 마치고, ‘유목민’ 골목으로 들어서니 반가운 분이 손을 흔든다.
낭만주먹 방동규 선생님을 비롯하여 김명성, 김연갑씨가 있었다.





무슨 이야기 끝에 나왔는지 모르나, 방선생께서 가까이 있는 사람을 항상 조심하라는 말씀을 하셨다.

자신의 이해득실에 따라 적으로 돌변하여 뒤통수치는 것을 심심찮게 보아왔던 터라,

김명성씨에게는 꼭 필요한 충고였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불신할 일만은 아니라, 말처럼 쉽지는 않다.






담배연기 자욱한 골목으로 화가 장경호씨와 서길헌씨가 차례대로 나타났다.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하나둘 모여들었다.
김명성씨와 장경호씨는 살이 끼었는지 술 취한 막판에는 꼭 언쟁이 붙어 좀 불안하기도 했다.

다행스럽게 장경호씨가 조용히 드릴 말이 있다며, 방선생님을 모셔갔다.






좀 있으니, ‘평화만들기’에 있다는 전화가 와 다들 그 쪽으로 자리를 옮겼는데,
장경호씨가 슬그머니 술값을 계산하고 일어나 버렸다.
방선생님도 사모님의 호출을 받아, 다시 ‘유목민’으로 돌아와야 했다.






우리가 마시던 술자리에는 비전향 장기수 장의균씨가 와 있었다.
전두환 정권 당시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보안사령부에 끌려가 강제로 옥살이를 한,

그의 근황을 들어보았는데. 다들 힘들게 살고 있었다.





다시 핸드폰이 울려 펼쳐보니, 장경호씨 전화였다,
그런데, 시끄러운 음악소리만 들리고, 아무런 말이 없다.
무슨 할 말이 있는지? 나만 오라는 뜻인지 모르겠으나, 마치 숨바꼭질하는 것 같았다.
그 놈의 자존심이 도대체 무엇인지, 어지간히도 피곤하게 한다.

사진, 글 / 조문호





















지난 11일 오후 4시경, 모처럼 인사동에 나갔다.
나무화랑에서 열리는 광화문미술행동, 100일간의 기록을 보기 위해서다.
이 전시는 이달 초하루에 막을 올렸으나, 내일 내일 미루다 여지 것 보지 못했다.
전시되는 사진이나 설치물은 함께 한 일이라 알고 있으나, 눈도장은 찍어야 했다.

얼마 전, 동자동 일에 너무 소홀해 일체의 오프닝에 참석하지 않겠다고
나발 분 것이 족쇄가 되어, 꼭 가야할 전시회마저 갈 수 없었던 것이다.
어디에는 가고 어디에는 안 간다면 욕먹기 십상이라, 얼굴에 철판 깔고 버틴 것이다.

사실 열림식 있는 날에는 사람 만나기는 좋아도 작품 보는 데는 별로다,
꼭 보아야 할 전시는 평소 시간 날 때 들리기로 했는데,

이날은 판화가 류연복씨가 전시장 지킴이라기에 찾아 나섰다.

 

전시장에는 류연복씨 외에도 김준권, 변정대섭, 김이하, 육인순씨 등 반가운 분들이 여럿 있었다.

좀 있으니 죽은 용태형 딸래미 김보영과 그의 친구 김진영씨도 나타났다.

숨겨 둔 막걸리를 얻어 마시며, 오랜만의 회포를 풀었던 것이다.





이 전시는 출판기념회를 겸해 열렸으나, 사실 광장이나 야외에서 전시되어야 했다.

그 많은 설치물과 국민들의 염원이 담긴 현수막들을 어떻게 조그만 전시장에 다 펼칠 수 있겠는가.

광화문광장에 모두 펼쳐놓고, 그 날의 감회를 맛 볼 날이 올 것으로 기대한다.

전시된 사진과 현수막들을 돌아보니, 지난겨울의 하루하루가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끓어오르는 분노의 열정으로 추운 줄도 몰랐고, 역사의 순간순간들을 기록하느라 배고픈 줄도 몰랐다.

그 타오르는 촛불의 물결을 바라보며, 사실상 짜릿한 희열도 맛보았던 것이다.

올바른 세상을 향한 국민들의 외침으로 철옹성 같은 벽이 무너지기 시작했고, 드디어 새로운 정권이 들어섰다.

이제 적폐들이 하나하나 청산되고, 갑과 을이 없는 평등한 세상을 조용히 기다릴 것이다.






시간이 되어 전시장 문을 걸어 잠그고, 다들 풍류사랑으로 몰려갔다.
그런데 어디를 가나 류연복씨는 인기 짱이다.

그토록 여성 팬이 많은 그가 홀 애비로 사는 게 이해되지 않았다.

좋아하는 것과 사는 것은 다른 것일까? 아니면 무슨 비밀이라도 있는지...
이 날도 풍류사랑에 가자마자 보영이 엄마로부터 뽀뽀세레를 받았다.
"주여! 왜 이리 세상이 불공평하나이까?"

돌아오는 길에 습관적으로 유목민에 들렸다.
뜻밖에도 정영신씨가 유목민술자리에 있었다.

나도 반가워  뽀뽀세례를 받고 싶었으나, 최혁배, 장경호, 공윤희, 배성일, 임경일씨 등

사내들 속에 끼어 있어 들어 갈 수가 없었다.


좀 있으니 옛날 유행가 가사가 생각나더라.
헤어지면 그리웁고 만나보면 시들하던, 모를 건 이내심사~






이 전시는 16일까지 이어지고,

오는 20()은 오후1시부터 8시까지는 광화문광장에서 노무현대통령 8주기 추모문화재 사전행사도 열린다.

노무현재단에서 주최하고 광화문미술행동에서 주관하는 시민과 함께하는 추모예술난장에 많은 분들의 참석을 바란다.

사진, 글 / 조문호


















































인사동에서 밤늦게 술 마시고 집에 가다보면 즐거운 일도 종종 만난다.
돈 냄새에 인사동이 싫어도, 옛 친구들 만 날 수도 있고, 아직은 인사동 낭만이 남아있다.

인사동 밤안개 여운이도, 민족 머슴 용태도, 양아치 영수도 다 가버렸지만,
그래도 술집 풍류는 남아 있더라. 여운이가 자주 간 섬에는 ‘유목민’이 남았고,
용태 남은 자리는 ‘풍류사랑’이 있는데, 영수 자리만 오간데 없네...

다 부질없는 세상, 혼자 취해 밤 늦은 인사동 거리를 허우적거리며 나오니,
외국인 넷이 연주를 하는데, 무슨 곡인지도 모르면서 신바람 나 엉덩이를 내 둘렀다.
왠 외국여자도 덩달아 엉덩이를 흔들며 파랑새 한 장을 돈통에 집어넣었다.

이제 인사동을 즐기는 주인공이 바뀌었으니, 그 들이 인사동사람들이다.
밤늦게 가끔 인사동에서 연주하는 것으로 보아 여행객은 아닌 것 같았다.
직업으로 하는지, 노는 게 좋아 하는 지는 모르지만, 열심히 연주하였다.

인사동의 밤은 그들이 연주하는 음악과 함께 저물어 가고 있었다.



사진, 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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