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신이 지쳤나보다.

이틀 동안 쪽방에 들어 누워 몸을 가누기가 힘들었다.

그러나 토요일 햇불 집회 생각으로, 더 이상 누워 있을 여유가 없었다.

광화문에 가야하지만, 한 두시간 더 쉬고 싶었으나,

서울역에서 왕왕거리는 확성기 소리에 그만 일어나야 했다.



 




빈속이라 뭘 좀 먹어야 했으나, 밥 때를 놓쳐버려 그냥 나갔다.

서울역으로 갔더니, ‘박대통령을 모함하는 검찰을 구속하라

현수막을 펼쳐잡은 노인들이 태극기를 흔들고 있었다.

요즘 토요일만 되면 광화문 집회에 맛 불 놓느라, 노인들이 종종 난리를 피운다.

이전에는 정상적인 사람이 아니라고 치부하며, 엄청 멸시했.


  

 




그런데, 그 날은 잘 아는 이웃이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이다.

돈이 탐나 일당 받으러 나왔을까? 아니면 진짜 그렇게 생각할까?


제대로 교육받지 못한 탓일 뿐이지, 개짓하는 지식인보다 낫다는 생각도 들었다.

알고도 나쁜 짓 하는 인간들보다, 잘 몰라 그러니 용서라도 받을 수 있겠다 싶었다.

여지 것 권력가진 인간들에게 이용당한 사람들이 바로 돈 없고 못 배운 서민들이었다.







우리민족은 유달리 긴 세월동안 권력자들에게 짓밟혀 온 서러운 민족이다.

그러나 이젠 그 틀을 깨야한다. 아니, 얼마나 앞 당기냐의 문제지, 깨어 질 수밖에 없다.

예전처럼 무지한 국민보다 깨어 있는 국민들이 더 많으니, 더 이상 속지 않는다.

더구나 SNS의 위력은 나쁜 짓하는 놈들은 살아남을 수 없는 세상구조다.


그날도 서울역에서 카메라 들고 설치던 MBC같은 사이비 언론도 곧 무너질 수밖에 없다.

소수의 목소리도 중요하다는 명분이야 그럴싸하지만, 그 속내는 뻔하다.







더 이상 이웃과 얼굴 부딪히기 싫어, 얼른 지하도로 내려갔다.

종각역에서 내려 광화문 방향으로 갔는데, 오후 3시쯤인데도 사람들이 몰려와 도로가 혼잡했다.

예술인 캠핑촌에서 아는 분들을 만나려 했으나, 사람에 막혀 들어갈 수조차 없었다.

어쩌다, 판화가 류연복씨와 김사빈씨를 간신히 만났을 뿐이다.






 


세월호 유가족이 앞 장선 행렬에는 백기완선생과 이재명, 장경호, 하태웅씨의 모습도 보였으나, 사람에 막혀 더 이상 움직일 수가 없었다.

    


 




길 가 양쪽을 경찰차로 방벽치고 인도는 경찰이 점거하고 있었으니, 4차선 도로가 북새통을 이룰 수밖에 없었다.

한 시간 넘게 시달리고 나니 갑자기 현기증이 일어났다.

몸이 정상이 아닌데다, 하루 종일 아무 것도 먹은 것이 없으니, 그런 것 같았다.



 


간신히 경복궁 지하역으로 빠져 내려 집으로 돌아와야 했다.

중국집에서 짜장면 한 그릇으로 허기를 메우고 방으로 올라오니, 4층에 사는 정씨가 말을 건다.

오늘은 데모하는 날인데, 왜 벌써 와요?”

차마 아프다는 말은 못하고, 사람이 너무 많아 늙은이는 빠졌다고 둘러댔다.

그랬더니 보수성향의 정씨가 반색을 한다. “그래요. 앞으론 그런데 가지마세요

 

말할 기력도 없었으나, 한 마디 했다.

가고 싶어 가나요. 세상 좀 바꾸어야지요.

우리야 어차피 그렇게 살았지만, 자식들은 잘 살게 해야 지요

 

사진 / : 조문호


























 

 

 

 

 

 

 

 

 

 

 

 

 





지난 1일 오후3시부터 경찰 물대포 맞아 돌아가신 백남기선생의 추모대회가 대학로에서 열렸다.

삼만여 명의 추모인파가 “우리가 백남기다”, "국가폭력-살인정권 끝내자",“책임자처벌‘을 외쳐댔다.

단상에서도 많은 외침이 있었으나, 가장 마음을 아프게 한 것은 작은 딸 백민주화의 울음섞인 호소였다.

‘물대포로 인한 사망이 분명하다면 왜 부검에 동의하지 않느냐’고 묻는 사람들이 있다. 이렇게 사인의 증거가 넘쳐나는데

어느 자식이 아버지의 시신을 또다시 수술대에 올려 정치적인 손에 훼손시키고 싶겠습니까”라고 말했다.

백씨는 “저희 아버지를 두번 세번 죽이지 못하게 할 것”이라며 눈물을 흘렸다.

오후 5시부터 시민들은 대학로에서 종각 앞까지 3.5㎞를 박근혜 정부퇴진을 요구하는 팻말과 백남기 농민 영정을 들고 행진했다.

보신각 사거리부터 서대문구 경찰청 앞까지 행진하겠다고 투쟁위에서 신고했지만,

경찰은 추모대회 당일  ‘행진 구간은 주요 도로’라는 이유로 행진을 금지시켰다.

대학로를 출발한 시위대가 종각 사거리까지 왔지만, 경찰력에 가로막혀 더 이상 행진하지 못한 것이다.

백남기 농민이 물대포를 맞고 쓰러진 자리에서, 헌화하기로 한 계획이 무산된 것이다.

시민들은 종각 앞에 임시분향소를 차리고 백씨의 영정사진 앞에 헌화하며 고인을 기렸다.

이 날 시위는 큰 충돌 없이 마무리되었으나, 많은 시민들이 분노를 삭이지 못했다.
백기완선생을 비롯하여 장경호, 김진하씨 등 많은 분들이 울분을 토해 냈으나,

장순향교수는 여자의 몸으로 경찰저지선을 뚫기 위해 온 몸으로 밀어 댔다.

나 역시 죽음을 불사하고 나왔으나 방법이 없었다. 그날따라 사진 찍을 의욕조차 잃었다.

오죽하면, 기자들이 다 기록하는데 사진은 찍어 뭐하겠냐는 생각까지 든 것이다.
현장에는 ‘한겨레’ 강봉규기자, ‘오마이뉴스’ 유성호기자 등 반가운 모습도 보였다.

사진, 글 / 조문호










































지난 10여 년 동안 문화행정 일에 빠져 살던 김정헌씨가 다시 붓을 빼들고 전시를 열었다.
지난 17일부터 4월17일까지 구기동 ‘아트스페이스 풀“에다 그림 보따리를 풀어놓은 것이다.

"김정헌의 이야기그림, 그림이야기"란 화집도 펴 냈다.

전시 제목이 길었다. “생각의 그림, 그림의 생각” “불편한, 불온한, 불후의, 불륜의, ...그냥 명작전”이다.
작가가 인사말에서 했던 “나이 들어 몸이 받쳐 주지 않으니 생각이 많아지더라”라는 말처럼,

작품들을 보니 많은 생각이 떠오르더라. 세월호 등의 시사적인 현장과 일상적인 풍경들을

거칠거나 흐릿하게 드러내며 작가의 생각들을 소근 거리는 의성어 적듯 새겨놓았었다. 

70~90년대 민중미술의 이름으로 다양하게 시도했던 구작들이 특유의 잡 글과 어우러진 것이다.

모더니즘 맥락에서 현실참여로 옮겨가던 초창기 작업에서는 젊은 시절의 숨결도 느낄 수 있었다.

‘아몰랑 구름이 떠있는 수상한 옥상’이란 작품은 불길한 사회 현실을 암시하고 있었으며,

세월호 사건에 대한 생각을 나타낸 ‘희망도 슬프다’는 보는 이로 하여금 분노를 넘어 절망에 치닫게 했다.

대체적으로 작품에 분노와 한탄의 정서가 깔려있었는데,

참여미술의 정체성이나 여러 가지 후회스러움에 대한 회한의 정서도 엿보였다.

그는 '현실과 발언' 창립멤버였지만, 2004년 '백 년의 기억'전을 마지막으로 예술행정에 발을 디뎠다.

‘문화연대’ 대표와 한국문화예술위원장에도 발탁되었으나 정권이 바뀌면서 자진사퇴 압력을 받고 경질됐다.

법정공방으로 세상을 시끌벅적하게 만든 당시 사건으로 더 유명해졌다.

난 지금도 그의 경로이동을 잘 못 선택했다고 생각한다. 하나의 욕심이었다.

차라리 잘못된 예술행정을 바꾸려면 정치판에 뛰어드는 것이 훨씬 나을 것이라 생각한다.

아무 것도 바꾸지 못한 채, 10여 년 동안 자신의 작품세계만 빈자리를 남긴 것이다.

아무튼 개막식에는 엄청 많은 분들이 모여 들었다. 민중예술의 명사뿐 아니라 정계, 관료 등 다양했다.
백기완선생을 비롯하여 이부영, 이수호, 이 철, 최 열, 손장섭, 주재환, 방동규, 신경림, 임재경, 박현수, 

성완경, 민정기, 정희성, 김태서, 이승철, 김여옥, 조경연, 장경호, 조 섭, 강홍구, 김영중, 김정대, 최석태,

박 건, 임정희, 심광현, 김홍희, 최백호, 김영호, 이태호, 김정환, 배인석씨 등 많은 분들로

변두리 조그만 전시장을 북적이게 했는데, 모르는 분들이 더 많았다.

요즘 주재환선생과 박불똥씨 등 민중미술가들의 연이은 전시로 자주 만났으나,

그 분들 사진 찍느라 바빴고, 와인 마시느라 신났다.
그러나 오후7시에 있는 인사동 약속 때문에 뒤풀이 술자리를 놓쳐버렸다.

구기동에서 집까지는 가까워 코가 비틀어지게 취할 수 있었는데...

사진, 글 / 조문호


































































































노동개악을 저지하고, 백남기씨 쾌유를 비는 3차 민중총궐기대회가 전국에서 동시 다발로 열렸다.

지난 19일 오후 3시,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열린 소요문화제에는 약 팔천 명 정도의 시민들이 참가했다.

 

소요가 무엇인가? 사전에는 많은 사람들이 떠들썩하게 들고 일어나 술렁거림이라고 적고 있다.

경찰이 물대포로 백남기씨를 사경에 빠트린 그 사건에, 소요죄를 적용한다는 데 따른 저항으로 '소요문화제'라 했다.

 

시민들은 지내들 입맛대로 갖다 붙이는 엉터리 법에 전혀 개의치 않았다.

모두들 탬버린, 부부젤라, 막대풍선, 호르라기 등을 가져와 소란을 떨어 제켰다.

심지어는 양은그릇과 숱 가락을 가져 나와 두들기기도 했다.

잘 못된 법을 조롱한 것이다.

 

그리고 복면시위법을 비웃으며 가면을 쓰고 나온 분들도 많았다.

평화롭게 진행된 소요문화제를 사법처리하겠다는 등, 정권은 선량한 국민을 범법자로 내 모는데 혈안이 되어있다.

다시 유신독제로 돌아가는 것 같은 살벌한 시국이다.

 

박석운 민중의 힘대표가 단상에 올라 부마사태 소요죄를 적용한 박정희는 심복에 살해됐고,

광주시민들에게 소요죄를 적용한 전두환은 사형선고를 받기도 했다며 분노를 터트렸다.

 

이 날의 행사에도 백기환선생과 신학철, 장경호, 하태웅씨 등 여러 명의 지인들이 끝 까지 자리를 지켰다.

비록 그 분들만이 아니지만, 왜 이 추운 날씨에 시멘트 바닥에 앉아 생고생을 해야 하는지 마음이 아팠다.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현실이 더 암담했다.

 

행사를 마치고, 청계로를 거쳐 백남기씨가 입원해 있는 서울대병원으로 거리행진이 시작되었다.

청계로를 막 지날 무렵, “노동악법 중단하라는 구호에 맞서 시위를 중단하라는 조그만 소리가 들려왔다.

청계천을 산책하던 70대 노인이 비아냥거리듯 한 말에, 옆에 있던 할멈이 옆구리를 찌르니 말꼬리를 감추었다.

시국을 잘 못 인식한 저런 분 때문에, 박근혜가 더 기고만장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까지 국민을 이렇게 양분시켜 놓고, 놀 것인가?

 

도저히 맨 정신으로는 집에 갈 수가 없어, 인사동 유목민에 들렸다.

시위현장에서 만났던 장경호, 하태웅씨와 술 한 잔 했다.

뒤늦게 배인석, 이승철씨가 합류했고, 채현국선생과 정선의 전상현씨를 만나기도 했다.

술 자리에서, 소모적인 시위에서 벗어나 마지막 승부를 걸어야 한다고 말했다.

    

말이 통하지 않으면 말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냥 "묵시(默示)"로 가자 

백 명이고 천명이고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은 모두 모여, 식음을 전폐하자.

병원으로 실려 가던, 화장터로 실려 가던, 끝 장을 내자.



사진,/ 조문호














































 

 

 

 

 



왜냐하면, 살기 힘들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게 정치를 개 좆 같이 하니 그런 것 아니가.

왜 열심히 일했는데, 지들처럼 떵떵거리고 살지는 못하더라도,
일한 만큼 대우받고, 최소한 사람답게는 살아야 할 것 아니가?
평생을 권력자들께 당하고, 기득권자들에 밀려 손해만 봤다.
그래서 가진 자들과 권력 쌘 놈들이 대를 이어 나쁜 짓하는 이런 나라가 싫은 것이다.
돈 없으니 나가 살 수도 없고, 죽으려니 가족이 밟혀, 악만 남았다.



나라를 끌고 가는 년은 얼굴에 철판을 깔았는지 부끄러운 줄도 모른다.
그래도 역사가 중요한 건 알았던지, 교과서를 국정화해야 된다네.
지 애비 나쁜 짓 한 거는 다 알아...




어제 민중봉기 날에는 끝장 낼 작정하고 나갔다.
페트병에 휘발유 두 병 넣어 가, 분신할 생각까지 했다.
영웅이 되고 싶냐는 마누라의 비아냥거림에 쪽팔려 포기했지만...


경찰들에 시비 붙어 실큰 두들겨 맞아 죽을 작정도 했으나,
헬맷 눌러 쓴 전경들의 눈을 보니 욕도 한 마디 못하겠더라.
다 자식 같은 놈들인데, 지가 무슨 죄가 있다고...




아무리 생각해도 내 할 일은 그 날 벌어진 일들을 샅샅이 찍는 일 뿐이더라.
그러나 연장이 신통찮아 걱정스러웠다.
지난번 인사동 시위 때 맞은 물대포로 카메라를 망쳤으나,
돈이 없어 아직까지 카메나도 없는 신세다.
마누라에게 똑딱이 하나 빌려 쓰고 있는데, 이게 내 밤일처럼 작동이 느려
순간 포착이 어렵고, 특히 어두운 밤중에는 맥을 못 춘다.



그렇지만 어쩌랴!  일찍부터 대학로에 나갔다.
여러 집회장이 있지만 역사쿠데타를 저지하는 ‘민주민생수호 범시민대회’부터 갔다.
민중들의 슬픈 마음을 알았는지, 그 날은 날씨까지 우중충했다.
그런데 분위기가 좀 달랐다. 젊은이들이 주축인 이전에 비해 연세 지긋한 분도 많았다.
이건 교과서국정화문제로 여지 것 눈감아주었던 보수층들이 돌아 서고 있다는 정황이다.
함세웅 신부를 비롯하여 김정헌, 장순향씨 등 반가운 분들도 더러 보였다.



조선, 동아일보는 수험생들을 힘들 게 하는 민중궐기라며 비난을 퍼부었으나 광화문으로

이동시간을 학생들의 입실이 끝나는 오후4시까지 기다리는 등, 질서정연하게 진행되었다.
마치 축제 행렬 같은 분위기였는데, 종로로 행진하는 길에서 판화가 김준권씨도 만났다.



종각 쯤 당도하니, 더 이상 행진을 못하도록 도심을 경찰버스로 성곽처럼 쌓아 놓았더라.
행렬을 벗어나 광화문으로 가는 통로를 찾았으나 쥐새끼 한 마리 못 들어가게 만들어 놓았다.

정말 대단한 경찰이더라. 북한에서 무장공비가 내려 와도 이렇게는 못 할 것이다.
한 업소를 통해 간신히 빠져 나가기는 했으나, 그 다음이 문제였다.
북한의 광장같이 텅 빈 광화문은 경찰버스만 줄지어 있을 뿐, 황량하기 그지없었기 때문이다.



다시 합류하기 위해 얼마나 돌고 돌았던지, 벌써 어둠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조선일보사 앞에서 반가운 분들을 만났다.
백기완 선생과 이수호, 신학철, 장경호, 하태웅씨 등 여러 명이 식당으로 가던 중이라,
따라붙어 짜장면 한 그릇으로 허기를 메울 수 있었다. 


 


대치하고 있는 길거리는 캡사이신 물대포를 얼마나 쏘아댔는지 희뿌연 물이 흐르고 있었고,
저지 망을 치우기 위해 버스를 묶어 당기는 시위대 위로 연신 물대포를 쏘아댔다.

어느 놈이 지시하고 조준하는지 모르지만 무자비했다. 사람이 물대포를 맞고 쓰러져도 그 위에 퍼부어 댔다.
급기야는 사람이 다쳐 군중 틈을 뚫고 구급차가 들어왔으나, 더 이상 진입하지 못했다.
길 터라는 군중들의 외침에 누군가 실려 나갔지만, 정황을 파악할 겨를도 없었다.
미처 우의를 준비 못했던 터라 온 몸은 물대포를 맞아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되었다.




긴 시간동안 버스를 치우기 위해 밧줄에 엮어 당겨댔으나 허사였다.
경찰들이 미리 전신주나 단단한 지주에 묶어 둔데다, 건너편의 경찰들은 막대에 톱을 달아
묵인 밧줄을 잘라 버리기 때문이다. 온 힘을 쏟아 당기던 군중들이 나 자빠져 다치기도 했다.

화난 군중들은 경찰버스를 때려 부수기도 했으나 그들에게 빌미를 주는 일일 뿐이었다.
오후11시가 되니 연행한다는 선전포고가 시작되고 경찰들의 포위망이 좁혀지기 시작했다.
사진 찍으려 경찰버스 위를 오르다 곤두박질해 욕도 바가지로 얻어먹었다.
체력의 한계를 느껴, 끝까지 지켜보지도 못한 채, 마지막 지하철을 타야 했다.



옷을 벗어 세탁기에 집어넣으며, 걱정되어 기다리던 마누라께 말했다.
“아들 같은 경찰 놈이 나더러 더럽게 늙은 놈이라 카던데.”
슬프다!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하는 내 신세가... 

더러운 세상이지만 끝까지 싸워, 다 잘사는 평등의 시대는 보고 죽어야 할 것 아니가?

사진,글 / 조문호














서양화가 신학철씨의 작품

























































 

 

소설가 황석영씨는 백기완, 방동규씨와 함께 조선의 3대 구라로 불린다.
그의 저력을 잘 대변하는 구라가 “누구나 오늘을 사는 거야!”다.

지난 24일 ‘낭만’에서 있었던 ‘용태형과 문화운동시대’ 책거리서도
유홍준씨 표현처럼, 황석영씨의 구비문학이 술자리를 점령했다.

일사천리로 구라를 풀어가는데, 시끄럽게 초 치는 자가 나타났다.
목소리 큰 조성우씨였는데, 실수로 황선생의 염장을 지른 것이다. 

“이 새끼”란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벌떡 일어나 술잔을 날린 것이다.
좀 과격하긴 했지만, 그 퍼포먼스로 조성우씨의 입을 막을 수 있었다.

인사동 술자리선 흔한 일이기도 하지만, 가끔 긴장감도 있어야 술이 덜 취한다.
상대를 제압하고 다시 시작한 황구라, 역시 조선 최고의 구라였다.

사진,글 / 조문호



 

1987년 민중 대통령 후보와 후보 비서실장으로 인연을 맺은 백기완(맨오른쪽) 소장과 김용태(오른쪽 둘째) 선생이

2013년 4월 고 김영수 작가 추모 사진전에서 함께 한 모습. 사진작가 장영신 제공


백선본 비서실장 맡았던 용태형에
백선생, 유일하게 “이놈아~” 부르고
‘존칭생략’ 용태형은 깍듯이 “선생님”


“용태 형아~ 이놈아!” “네~ 선생님.” 누구한테나 두번째 만나면 직함이나 존칭을 생략한 채 맞먹거나 ‘형 노릇’을 하기로 이골이 난 김용태 선생을 유일하게 이렇게 부르는 이가 있었다. 그러면 용태 형 역시 이처럼 깍듯하게 모시는 ‘어르신’이 있었다. 바로 백기완 선생이다.


“용태 형과 언제부터 아는 사이냐고? 워낙은 김윤수 교수하고 그림쟁이 주재환이랑 먼저 알았지 아마. 그러다 그때 내 비서실장을 했잖아? 그림쟁이랑 맞아떨어지는 일은 아니었잖아? 근데 매사 적극적이고 수틀리면 들이받을 줄도 알고 저돌적이고 ‘앗쌀’한 게 나랑 아주 배짱이 잘 맞았어.”


두 사람의 본격적인 인연은 1987년 13대 대선 당시 민중 대통령 후보 백기완 선거대책본부(백선본) 때 시작된 셈이다. 당시 김대중·김영삼 ‘양김’의 동시 출마 선언 이후 야권의 패배를 우려한 재야와 노동운동 등 진보진영의 젊은층을 중심으로 범국민 대통령 단일후보 추대운동이 일어났다. ‘민중의 지도자 백기완 선생을 대통령으로!’ 86년 ‘5·3인천투쟁’ 직후 노동해방 노선을 표방하며 서울노동운동연합(서노련)의 일부가 갈라져 나와 형성된 이른바 제헌의회(CA)그룹이 가장 적극적이었다.


“처음엔 그런 젊은이들이 민중후보가 되어 달라고 찾아왔드랬어. 그담엔 서울고 운동장에서 열리는 야권후보 단일화 요구 대회에 와달래서 갔더니 ‘노동자 시인’ 박노해의 지지 편지를 발표하기도 했었지. 그때마다 내 대답은 이랬어. ‘누구한테 차비 한 푼 빌릴 재주도 없는데 무슨 출마냐’고.”


계속 거부하던 백 선생은 결국 ‘민중 대통령 후보 전국추대위’(위원장 이애주)의 요구를 수락해 그해 11월23일 마감 직전 후보 등록을 했다. 백 선생은 그 직후 꾸려진 선거대책본부 때부터 용태 형이 적극적으로 뛰어든 것으로 기억했다.


안타깝게도 김용태 선생이 생전에 ‘백선본’ 참여 동기나 의도에 대해 직접 밝힌 기록은 없다. 헌정 문집 <산포도 사랑, 용태 형>에 실린 구술대담에도 이 대목은 빠져 있다. 대담을 정리한 큐레이터 전승보는 “미처 물어보지 않은 까닭에 선생의 뜻은 알 수 없지만, 확실한 것은 선거와 정치운동의 경험과 그때 이뤄진 광범위한 인맥이 곧바로 88년 민예총 창립의 동력이 됐다는 점”이라고 설명했다.

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
[스크랩/한겨레신문]

지난 5월7일 “용태형” 추모식에 정치인을 비롯한 전국의 민중예술가들이 다 모였다. 
                                                                                                                                                                                      

중국에서 이강군씨, 제주에서 강요배씨, 마산에서 고승하씨, 풍기에서 배평모씨 등 전국 각지에서 많은 분들이 모여들어 장례식장이 분주했다.  장례위원장 김정헌, 이애주선생을 비롯하여  백기완, 유홍준씨 등 많은 분들이 고인을 추억하는 사연들과 아픈 마음들을 전해 주었고, 마지막에 나온  장사익씨의 노래 '귀천'과 '봄날은 간다'가 더욱 마음 아프게   했다.                                                                              
                                                                                                                                                                                     

오랜만에 만난 반가운 분들이 많았으나, 잘 모르는 분은 물론 성함을 기억하지 못하는 분들도 더러 있었다.  그리고 실수로 빠뜨린 분들도 많을 것으로 생각된다. 기억력이 그의 치매 수준이니 너그러이 양해해 주시기바란다.

  먼저 정치인부터 거명하자면  백기완, 이부영, 이재오, 문재인, 손학규, 이재정, 권영길, 노희찬, 최 열. 김철기씨 등을 꼽을 수 있고, 그 나머지는 대부분 여러분야에서 활동하는 예술가 들이다. 김정헌, 이애주, 황석영, 김윤수, 임진택, 최종원, 이강군, 민정기, 박진화, 성완경, 최 민, 임옥상, 신학철, 박재동, 박불똥, 고승하, 강요배, 배평모, 윤승길, 김태서, 이종률, 심정수, , 장경호, 이미례, 신상철, 김수남, 이승철, 제이슨 J시노, 김상철, 김윤기, 남요원, 문국주, 박인배, 전승보, 조성우, 홍선웅, 조영신, 정정식, 김치중, 최백호, 김영복, 장사익, 정태춘, 이인철, 홍석화, 김준권, 류연복, 이도연, 최석태, 이행자, 공윤희, 김명성, 유홍준, 최혁배, 고 헌, 심우성, 정복수, 박인식, 정인숙, 이명선, 이두엽, 박흥순씨외 200여명 (무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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