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13대 대선을 앞두고 ‘양김 동시 출마’로 야권이 분열되자 민중문화운동 진영은 후보 단일화를 압박하는 방안의 하나로 ‘민중 대통령 후보 백기완’을 추대하는 운동에 앞장섰고 고 김용태 선생은 백 후보의 비서실장으로 정치권과 인연을 맺었다. 사진은 87년 12월12일 서울 대학로에서 열린 민중 대통령 후보 사퇴 발표를 앞둔 연단에 설치된 백기완·장준하·김구 선생의 대형 걸개그림. 사진 류연복씨 제공


[길을 찾아서] 용태 형과 문화운동시대 ⑧

1987년은 폭압적인 군사정권의 집권 연장책인 대통령 간선제와 유신잔재 헌법에 맞서 ‘호헌철폐 독재타도’의 전국민적 저항이 활화산처럼 분출된, 이른바 ‘6월항쟁’을 일구어낸 해였다. 위기를 느낀 전두환은 군사반란 동업자 노태우로 하여금 대통령 직선제를 수용하는 선언을 발표하게 함으로써 끓어오르던 국민의 독재타도 열망을 일단 무마하였으니 ‘6·29선언’이 그것이다. 승리에 도취한 일단의 사람들이 이를 두고 아예 ‘6·29 항복선언’이라 규정하기도 했는데, 바로 여기에 함정이 숨어 있었다. 생각해보라. 그들이 누구인가? 광주의 학생과 시민을 폭도로 몰아 학살하고 권력을 찬탈한 자들 아닌가? 그들 독재자들이 행한 통치방식은 ‘정치’라기보다는 줄곧 국민을 상대로 한 ‘군사작전’이거나 ‘정보공작’ 아니었던가? 대통령 직선제 전격 수용이 위기탈출용이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결코 항복이 아니라 항복을 가장한 기만적인 깜짝쇼였음을, 그만 간과하고 만 것이다.


그해 7·8·9월, 이른바 노동자대투쟁이 전개되면서 한국 사회 진보논쟁이 용광로처럼 들끓었으나, 12월로 예정된 대통령 선거가 다가오면서 정국은 ‘대선 블랙홀’로 빠져들었다. 무엇보다 그동안 반독재 민주화 전선에서 대담한 투쟁과 협력을 함께 해온 야권 지도자 김대중·김영삼, ‘양김’이 각기 독자 출마를 선언함으로써 대선 정국은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혼돈에 빠져들었다. 그 와중에서 더욱 치명적인 것은 그동안 그토록 헌신적으로 합심하여 싸워왔던 재야 운동권이 ‘양김 동시 출마’라는 뜻밖의 사태 앞에서 균열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한쪽은 ‘디제이’가 경륜이 높고 좀더 진보적이므로 그를 ‘비판적으로 지지’(비지)하여 힘을 몰아주어야 한다는 주장이었고, 다른 한쪽은 ‘와이에스’가 당선 가능성이 더 높으며 정권교체의 반작용이 덜할 수 있으므로 그가 후보가 되는 것이 낫다는 주장이었다. 디제이를 지지하는 쪽은 이른바 ‘4자필승론’(노태우·김종필·김대중·김영삼 4자가 출마하면 호남과 민주진영의 합세로 디제이가 필승한다는 선거공학적 분석)에 근거하여 적극적으로 독자출마 주장을 편 것에 비해, 와이에스를 선호하는 쪽은 독자출마를 내세우기보다는 두 분이 어떻게든 합의해 단일후보를 내는 것이 좋다는 ‘단일화’ 명분에 합류하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비지’ 그룹의 시각에서 보면 단일화론은 디제이보다는 와이에스를 선호하는 것으로 오해되기 십상이었다. 나는 호남 출신이었고 만약 두 분 중 누구 하나를 택하라고 하면 진보적 시각에서 당연히 선택지점이 있었지만, 당시 상황에서 양김이 따로 출마하면 반드시 패할 것으로 예측했기에, 누가 되든 반드시 단일화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신문에서 당시 재야 민주운동권의 총결집체라 할 수 있던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이 김대중 후보에 대한 ‘비판적 지지’를 공식 결의했다는 기사를 읽었다. 그 기사에는 내가 속해 있는 민중문화운동협의회(민문협)도 민통련의 일원으로 ‘비판적 지지’에 찬성했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나는 의아했다. 왜냐하면 민문협 실행위원회에서는 대선 방침에 관한 논의를 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부랴부랴 ‘용태 형’에게 연락해서 사실 확인을 했더니, 형 역시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국본)에서 그런 논의를 한 적이 없었다며 의아해하는 것이었다. ‘국본’은 그해 5월 재야운동권의 민통련과 당시 ‘양김’이 속해 있던 통일민주당이 직선제 개헌을 추진하기 위해 결합한 범국민운동기구로서, 용태 형이 자신의 역량과 인맥을 만들어가게 된 장이기도 했다.


나는 평소 ‘형’이라 부르던 민문협 김종철 상임대표에게 정중하게 연락을 해 언론에 보도된 연유를 여쭙고 ‘절차상의 하자’를 이유로 민문협 실행위원회 긴급소집을 요구했다. 당시 민통련 대변인도 겸하고 있던 종철 형은, 민통련의 ‘비판적 지지’ 결의에 민문협이 찬성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믿고 있었다. 나는 실행위원회의 표결 결과가 내 생각과 다르게 나온다면 어쩔 수 없이 따르기로 마음먹고 있었다. 그런데 실행위원회에서 ‘비판적 지지’ 결의안은 부결되었다. 예기치 않은 파문이 일어난 것이다. 우리는 일처리를 신중히 해야만 했다. 민문협의 의결 결과를 민통련 본부로 보내어 ‘비판적 지지’ 방침에 대한 철회를 전달하되, 이것이 재야 운동권 내부의 분열로 비치지 않도록 조심할 것! 종철 형은 자신의 곤란한 입지에도 불구하고 이 일을 정말 조심스럽게 다 감당하고 어김없이 처리해 주었다.


‘양김’의 독자 출마 선언에
정국은 대선 블랙홀로 빠졌고
민문협서 ‘비판적 지지’안이 부결되자
용태형은 ‘특급지령’을 내렸다


문익환·백기완…독자후보 준비하라
한겨레신문 창간 발기인대회서
백 선생은 후보 수락 연설을 했다
박용일·이애주·김용태·최열…
선대본 핵심에 정치인은 없었다

대학로 유세는 선거축제의 절정
수만명의 열망이 출렁거렸다
6월항쟁 ‘민중승리’로 완결짓고자 한
한국정치사 첫 정치문화운동이었다


■ 용태형의 특급지령과 민중후보 공작
용태 형과 나는 민문협의 문건이 민통련의 기존 결정에 어떤 영향을 주기를 은근히 바랐지만, 그러한 반응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런데 정작 용태 형은 이 과정을 지켜보면서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정치행동을 준비하고 있었다.


대선을 두어달 앞둔 그해 가을 어느 날, 용태 형은 나를 불러 ‘특급지령’(?)을 내렸다. “양김이 단일화할 기미를 전혀 보이지 않으니 특단의 대책을 세워야겠다.” “재야 운동권에서 독자 후보를 내세워 단일화를 압박하는 방법밖에 없으니 준비를 해라.” 독자 후보라고? 파천황(破天荒)적인 발상이었다. 독자 후보로는 “문익환 목사와 백기완 선생을 생각하고 있는데, 문 목사님은 ‘비판적 지지’에 앞장선 분이라 교섭이 쉽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나는 일단 알았다고는 했으나, 우리 힘으로 대통령 후보를 독자 추대한다는 게 가능할지 사실 좀 막연했다.


그러던 10월31일, 서울 명동 와이더블유시에이(YWCA) 강당에서 열린 ‘한겨레신문 창간 발기인대회’ 장내에 뜻밖의 정치선동 전단이 뿌려졌다. 읽어보니 “난관에 부딪친 대선 국면을 보수 후보들에게만 맡기지 말고 백기완 선생을 민중의 독자 후보로 추대하여 돌파하자”는 내용이었다. 재야 인사가 거의 다 모여 있는 자리에서 돌연 행사와 무관한 민중후보 추대 전단이 뿌려졌으니 아연 술렁거렸다. 마침 백 선생이 새 신문 창간을 독려하는 축사를 할 차례였는데, 연단에 오른 백 선생은 천하의 굿쟁이(광대)답게 판을 대번에 휘어잡았다. “여러분, 지금 여기 살포된 전단은 분명 누군가의 공작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정보기관의 간교한 공작이 아니라 궁지에 내몰린 민중이 스스로 일어나 요구하는 민중의 공작입니다.” 백 선생은 결과적으로 그 자리에서 민중 대통령 후보를 수락하는 연설을 한 셈이었다. 나중에야 그 전단을 뿌린 이는 민청학련 사건 관련 후배 송운학이었고, 인천지역민주노동자연합(인민노련)인가 하는 단체가 연관되어 있다고 들었다.

 
그로부터 얼마 뒤 ‘민중 대통령 후보 백기완 선거대책본부’(백본)가 전격 발족했다. 선대본부장에 변호사 박용일, 명예선대본부장에 춤꾼 이애주, 비서실장에 화가 김용태, 사무총장에 환경운동가 최열, 특별보좌관에 판소리꾼 임진택, 대변인에 문학평론가 김도연…. 선대본 핵심 간부에 정치인은 한 명도 끼지 않았고, 거의 다 민주인사와 문화예술인들로 꾸며졌다. 나는 영광스럽게 특별보좌관으로 임명되었는데, 요즘 대선판처럼 도나캐나 수백명씩 명함 찍어 돌리는 흔한 특보가 아니라 백 후보의 단 한명뿐인 특보였다. 게다가 나는 후보 전용 승용차 운전기사도 겸했다. 백본 진영에서 유일하게 차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얼마 지나 김정헌 형이 딱한 사정을 알고 자신의 중고차를 내주어 겨우 두 대가 되었지만, 후보를 직접 수행하는 임무는 여전히 내 몫이었다.


■ 한판 문화축제였던 민중후보 선거운동


나는 1987년의 민중 대통령 후보 선거운동은 정치행위라기보다 일종의 문화운동이었다고 생각한다. 우선은 핵심들의 면모가 춤꾼·소리꾼·글쟁이·그림쟁이는 물론이요 변호사·환경운동가 등 넓은 의미의 문화예술인들로 구성된 것 자체가 그 성격을 보여주고 있다. 사실 대통령 후보 자신부터 비나리꾼(시인)이면서 민족문화에 달통한 우리 시대의 이야기꾼 아닌가. 이들 가운데 직업정치인으로 변신한 이는 다행히 아직까지 한 명도 없다.


특히 대학로 유세는 민중(시민)에 의한 선거축제의 절정이었다. 커다란 걸개그림에는 백범 김구와 장준하 선생, 그리고 백기완 후보의 얼굴 모습이 ‘시간적 원근법’에 바탕해 형상화되었다. 분열을 극복해서 기필코 대선을 승리로 이끌어 독재타도를 완결짓고자 하는 염원 하나로 수만명 청중이 운집하여 출렁거렸다. 재정에서 기획까지, 무대 설비에서 집객까지 모든 준비는 비서실장 용태 형과 사무총장 최열의 몫이었고, 현장 진행사회는 특별보좌관인 내 몫이었다. “여러분, 민중 대통령 후보가 돌연 등장하니까 유신잔재 군사독재세력이 잔뜩 겁을 먹고 ‘좌경’으로 몰아붙이고 있습니다. 여러분, 난폭한 버스기사가 갑자기 핸들을 우측으로 확 틀면 승객들이 어떻게 됩니까? 승객들은 모두 좌경하게 되지요. 여러분, 우리는 똑바로 서 있고 싶습니다. 우측으로 고개가 돌아간 저 난폭한 운전사를 이제 반드시 갈아치워야 합니다.” 수만 청중들이 함성과 환호로 응답하더니 이어 모두 함께 구호를 외쳤다. “가자, 백기완과 함께, 민중의 시대로!”


물론 백본의 누구도 민중후보의 당선을 믿고 뛰어든 이는 없었다. 다만 민중의 피와 땀으로 쟁취한 6월항쟁의 승리가 정치인들에 의해 독점되고 결국 대선 실패로 귀결되는 것을 어떻게든 막아보려는 몸부림이었다. 후보 단일화를 구걸하는 것이 아니라, 민중이 주체가 되어 힘으로 민주진영 대선 후보를 단일화해서 6월항쟁의 승리를 국민의 승리, 민중의 승리로 완결짓고자 한 정치문화운동이었다.


백 후보는 ‘양김’의 단일화가 끝내 불가능해지자 대선 이틀 전 눈물을 머금고 사퇴를 했다. 그럼에도 대선은 참담한 패배로 끝났다. 이 ‘합법적’ 결과로 인해 군사독재정권의 수명 연장뿐 아니라 수구세력이 끈질기게 존속할 수 있는 토양이 보장되고 말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양김 분열로 인한 영호남의 지역 갈등은 돌이킬 수 없을 정도의 깊은 상처를 입었다.


87년의 민중 대통령 후보 운동! 이 어려운 일을 결단하고 추진해 낸 주역을 꼽는다면, 용태 형과 최열이라고 생각한다. 두 사람의 능력이 얼마나 대단했는가는 훗날 그들이 해낸 일을 보면 안다. 용태 형은 대선의 좌절을 딛고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민예총)을 결성해냈고, 최열은 환경운동연합과 환경재단을 꾸려 새로운 시민운동을 주도했다.


무엇보다 2000년 총선 때 부패하고 고질적인 선거판에 큰 충격을 준 낙천·낙선운동은 바로 참여연대의 박원순과 환경연합의 최열, 민예총의 김용태, 문화연대의 김정헌이 함께 기획하고 추진한 정치문화 혁신운동, 다시 말해 정치판의 문화운동이었다. 그에 앞서 87년 문화예술인들이 주도했던 민중후보 운동은 우리 정치사에서 최초의 정치문화 혁신운동, 정치판의 문화운동이었다.


임진택 마당극 연출가·판소리 명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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